엔소 프란세스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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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우루과이의 前 축구 선수로 지네딘 지단의 우상[1] 이다. 비록 세계적인 빅 클럽에서 뛰었던 경력은 없지만, 분명 당대 가장 뛰어난 10번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하나였으며, 화려한 테크닉과 패스를 무기로 했던 플레이메이커였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61년 우루과이 수도인 몬데비데오에서 태어난 그는 1974년, 우루과이를 대표하는 클럽인 페냐롤의 팬이었지만 입단을 거절당하고 몬테비데오 원더러스라는 작은 클럽의 유소년 팀에 입단하면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6년 후, 1980년 18세의 나이로 프로 데뷔한 그는 74경기에서 20골을 기록하는 등 유망한 기량을 선보였으며 이윽고 우루과이를 떠나 더 큰 무대로 향하게 된다.
그는 1983년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클럽인 CA 리버 플레이트에 21세의 나이로 입단했다. 같은 해에 열렸던 코파 아메리카에서의 맹활약과 리버 플레이트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여줬고, 1년 만에 1984년 남미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 해에는 CA 리버 플레이트를 아르헨티나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만들었다.
리버 플레이트에서 디에고 마라도나 못지 않은 활약을 펼치던 그는 곧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고, 85/86 시즌에는 37경기에 출전해서 28골을 기록하며 팀에게 우승 컵을 안겼을 뿐 아니라 득점왕까지 차지했고 그 해에 있었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그는 CA 리버 플레이트에게 113경기 68골이란 대단한 기록을 남기고 1986년 남미 무대를 떠나 유럽으로 향했다.
의외로 그가 택한 것은 유수의 명문 클럽들이 아니라 프랑스 리그 1의 라싱 파리였다. 그러나 당대 라싱 파리는 그의 영입 이후 다비드 지놀라, 피에르 리트바르스키와 같은 뛰어난 선수를 영입했고 이들과 함께 그는 프랑스 무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3시즌 간 89경기에서 32골을 넣었지만 라싱 파리의 극심한 재정 난을 겪게 되고 구단은 그를 방출할 위기에 처하고야 만다.
그의 활약을 눈여겨보던 세리에의 강자, 유벤투스 FC는 미셸 플라티니의 대체자로 이적을 제의받았으나 그는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하게 된다.
1990년,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는 단 한 시즌 밖에 뛰지 않았지만, 그는 이곳에서 28경기에 11골을 기록하면서 프랑스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다.[2]
당시 마르세유에는 이 시즌 리그 30골을 기록한 장 피에르 파팽, 크리스 와들, 디디에 데샹, 장 티가나등 우수한 선수들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보여준 이때의 활약은 당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의 어린 팬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는데, 이 어린 팬은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하나인 지네딘 지단이었다. 뛰어난 선수들이 있었던 이 시즌의 마르세유는 유러피언 컵에도 4강까지 진출했지만 벤피카와의 경기에서 2:2 원정다득점 원칙에 의해서 탈락하고 만다.
이후 참가하게 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그는 마르세유를 떠나고 이탈리아 무대로 눈을 돌린다.
이후 그는 칼리아리, 토리노 등을 거치며 유럽에서의 축구 생활을 끝내고, 다시 남미 무대로 돌아가 친정팀인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가 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다시 돌아온 리버 플레이트에서 아페르투라 94, 아페르투라 96, 아페르투라 97, 클라수우라 97 등 4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며, 1996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컵까지 들어올렸다. 또한 같은 해, 득점왕까지 쟁취했다.
지네딘 지단의 우상이라는 점 때문에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시절이 그의 전성기로 착각할 수 있지만, 그의 전성기는 엄연히 남미 시절 CA 리버 플레이트에서였다.[3]
그는 리버 플레이트에서 득점왕 4차례나 기록했고, 리그 MVP도 2차례 획득했으며, 1995년에도 남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 현역에서 은퇴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으로는 1982년 2월 20일, 한국 전에서 데뷔하게 된다.
이후 1983년에 열린 코파 아메리카가 그의 첫 메이저대회였는데,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넣었다. 이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엔조 프란세스콜리의 활약에 힘입어 코파 아메리카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당연하게도 이 트로피는 엔조 프란세스콜리의 첫 메이저 대회 우승 트로피가 되었다.
이후 안토니오 알자멘디와 함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한 그는 서독-덴마크-스코틀랜드와 같은 조에 편성되어 2무 1패로 간신히 16강에 올랐으나, 당시 세계 최고의 선수인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는, 대회 최강팀으로 꼽히던 아르헨티나를 만나게 되고 1:0으로 패배하며 대회에서 탈락한다. 프란세스콜리는 덴마크 전에서 페널티 킥으로 한 골을 기록했었다.
당시 우루과이의 선수 면면이 부족한 팀은 아니었으나, 프란세스콜리와 알자멘디의 역할이 너무나 컸을 뿐 아니라 디에고 마라도나의 벽은 높았다.
그리고 1987년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해서 개최국인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다시 한 번 코파 아메리카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는 주장으로 참가했는데 저번 대회에서는 참가하지 않았던 루벤 소사가 참가하면서 우루과이 대표팀은 많은 기대를 받았는데, 다시 한 번 16강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만나 탈락하게 된다.
이후 1995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그걸 마지막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4]
이후, 그의 역할은 알바로 레코바가 이어받게 된다.
3. 플레이 스타일
그는 당대 최고 수준의 미드필더로 테크닉, 패싱력, 드리블, 프리킥, 연계 플레이까지, 10번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필요한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남미 선수다운 화려하면서도 간결한 드리블과 패싱력, 경기조율까지 당대에 유행하던 전방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잘 수행하던 선수였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에이스의 상징이자 공격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는 선수들이 선호하던 10번의 대명사 중 하나로 회상되고 있다.
더군다나 이런 화려한 플레이메이커들에게 종종 가해지던 거친 파울에도 쉽게 흥분하지 않았고, 이런 훌륭한 성품과 외모 덕에 인기가 많았었다.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 골 TV와 텐필드의 부사장을 역임하고 있다고 한다.
5. 기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뛰던 시절, 지네딘 지단의 우상으로 유명하며 그의 장남인 엔조 페르난데스 지단의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펠레가 선정한 FIFA 100에도 선정되었다. 이는 우루과이 선수 중 유일하다.
인테르의 트레블 주역인 공격수 디에고 밀리토와 매우 닮은 것으로 유명하다.
6. 우승
- CA 리버 플레이트 (1983 ~ 1986 / 1994 ~ 1997)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 1985-86 , 1994 A , 1996 A , 1997 C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 1996
-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 : 1996
- 우루과이 국가대표 (1983 ~ 1995)
- 1983 코파 아메리카 : 우승
- 1987 코파 아메리카 : 우승
- 1995 코파 아메리카 : 우승
[1] 지네딘 지단이 밝힌, 그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라고 하며 그의 장남인 엔조 지단의 이름도 이 선수로부터 따왔다고 한다.[2] 재미있는건 같은 이름의 벨기에 선수인 엔조 시포도 옥셰르 소속으로 프랑스 리그에서 11골을 기록했는데, 해당 시즌 리그 11골은 이 두 엔조 밖에 없었다.[3] 다만 마르세유에서의 프랑스 리그 우승 트로피가 그의 유럽에서 뛰던 시절 유일한 우승 트로피였다.[4] 루이스 수아레스와 디에고 포를란 등이 활약한 2011년 코파 아메리카 전까지 우루과이는 이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