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조 시포

 


'''엔조 시포의 수상 이력 '''
'''둘러보기 틀 모음'''
'''팀 수상'''




'''개인 수상'''
'''FIFA 월드컵 신인상 1986'''



'''베스트팀'''





''' 벨기에의 축구감독 '''
''' 이름 '''
'''엔초 시포'''
'''Enzo Scifo'''
''' 본명 '''
빈첸초 다니엘레 시포
Vincenzo Daniele Scifo
''' 출생 '''
1966년 2월 19일 (58세) /
벨기에 라루비에르[1]
''' 국적 '''
벨기에 [image]
''' 신체 '''
178cm | 체중 70kg
''' 직업 '''
축구선수(미드필더[2]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RSC 안데를레흐트(1983~1987)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87~1988)
FC 지롱댕 드 보르도(1988~1989)
AJ 오세르(1989~1991)
토리노 FC(1991~1993)
AS 모나코 FC(1993~1997)
RSC 안데를레흐트(1997~2000)
R. 샤를루아 S.C(2000~2001)
''' 감독 '''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U-21(2015~2016)
''' 국가대표 '''
84경기 18골(벨기에 / 1984~1998)
1. 소개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스타일
5. 기타


1. 소개


'''"엔조 시포는 20세기 최후의 플레이메이커다."'''

미셸 플라티니

엔조 시포는 벨기에 국적의 전 축구 선수로 1990년대 벨기에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플레이메이커다.
본명은 빈센조 시포지만 애칭인 엔조 시포로 불리며, 이탈리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국적과 출생지는 벨기에다.

2. 클럽 경력


그는 고향 클럽인 라 르비에르의 유소년 팀에 1973년 7세의 나이로 입단했으며 축구 선수로 차근차근 성장해나갔고, 이후 1982년 벨기에 최고의 명문 클럽인 RSC 안데를레흐트로 팀을 옮겼다. 이후 뛰어난 재능을 선보이며 17세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하게 된 그는 이듬해인 18세에는 벨기에 올해의 선수로 선발될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 겨우 10대의 나이로 국내 최고의 명문 클럽에서 주전 자리를, 그것도 10번이란 에이스 등번호를 달고서 리그 최우수 활약을 펼치는 그에게 천재란 수식어와 함께 리틀 펠레라는 별명까지 따라붙었다.
이후 벨기에 무대에서 3번의 우승을 경험하고,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당대 최고의 리그인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명문 클럽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한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 세리에 A는 마르코 반 바스텐, 프랑크 레이카르트, 루드 굴리트의 오렌지 삼총사가 뛰던 AC 밀란디에고 마라도나, 치로 페라라, 카레카가 뛰고 있는 SSC 나폴리 등 다수의 클럽이 전성기를 맞이한 즈음이었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는 이미 당대 최고의 감독인 지오반니 트라파토니가 있었지만, 전성기에서 내려온 알렉산드로 알토벨리[3]가 팀 내 최다 득점인 9골을 기록할 정도로 부진했고, 엔조 시포 또한 28경기에서 4골을 기록하면서 리그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는 결국 5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고, 이듬해에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브레메 등을 영입하게 되는데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역할을 마테우스에게 빼앗기고 엔조 시포는 한 시즌만에 팀을 떠나게 된다.[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서의 실패로 그는 프랑스 무대로 향하게 된다. 그는 이적한 FC 지롱댕 드 보르도에서 24경기에 출장해 7골을 기록했지만, 주전으로 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롱댕 보르도는 리그 13위에 머문다.
그러나 그런 그를 주목하고 있던 같은 프랑스 리그에서 5위를 차지한 AJ 옥세르가 그의 영입을 시도해 성공한다. AJ 옥세르에서 주전으로 뛰게 되면서 그는 33경기에서 11골을 기록하는 등 훌륭하게 재기에 성공한다.[5] 다음 시즌에도 그는 옥셰르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프랑스 리그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는데, 34경기에 출장해서 13골을 기록하면서 로랑 블랑과 함께 리그 득점 공동 3위에 올랐으며 AJ 옥세르는 리그 3위에 오른다.[6] 그는 1990년 프랑스 리그 최고의 외국인 선수 상을 받게 된다. 또한 발롱도르에도 이 년도에 6위에 오르는 등, 그의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해였다.
프랑스 무대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보인 엔조 시포는 토리노 FC로 이적해 다시 한 번 이탈리아 무대에 도전하게 되는데, 인테르에서의 실패로 인한 우려어린 시선을 깨고 리그에서 30경기 9골을, 시즌 46경기 11골을 기록한다. 이 시즌, 토리노 FC는 리그에서 3위를 기록했으며 UEFA 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한다. 다음 시즌에는 32경기에서 7골을 기록하며 토리노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돕는다.
이탈리아 무대에서의 재기에 성공한 엔조 시포는 이번에는 AS 모나코로 이적해 다시 프랑스 무대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1995-96 시즌에는 34경기에 출전해 7골을 기록하면서 드디어 프랑스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된다.[7]
이후 그는 다시 친정팀인 RSC 안데를레흐트로 돌아와서 3시즌을 보내고 2000년에 리그 우승에 성공한다. 그리고 현역 마지막 시즌을 샤를루아라는 팀에서 보낸 뒤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한다.

3. 국가대표 경력


'''벨기에의 첫 월드컵 4강을 이끌었던 천재'''
작은 체격임에도 훌륭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이탈리아벨기에로부터 국가대표팀으로 뛰어달란 제의를 받았고, 특히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미 세계적인 강팀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을 선택했고 UEFA 유로 1984를 앞두고 18세의 나이로 선발되었다. 비록 대회에서 같은 조인 A조에 '''미카엘 라우드럽'''이 뛰던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과 개최국이자 '''미셸 플라티니'''가 버티고 있던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밀려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지만, 그에게선 가능성이 보인다는 희망적인 시선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 출전하게 되는데 개최국인 멕시코와 같은 조인 B조에 속한 벨기에는 이미 예선 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기대 이하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패하고, 그 다음 경기는 최약체로 평가받는 이라크인 만큼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경기였고 이 경기에서 시포의 선제골로 유리한 고지에 오른 끝에 2:1의 스코어로 승리한다. 비록 다음 경기인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2:2의 난타전 끝에 비기면서 1승 1무 1패의 3위로 조 3위끼리의 경합에 나선다. 조 3위의 여섯 팀들 중 네 팀이 결선에 진출하는 방식에서 벨기에는 1위로 결선에 진출했고, 이후 16강에서 소련 연방과 만나게 된다.
당시 소련에는 당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인 리나트 다사예프와 걸출한 공격수인 이고리 벨라노프가 있었는데, 전반 27분 베라노프에게 선제골을 실점한 상황에서 후반 56분 엔조 시포는 귀중한 동점골로 경기의 균형을 맞췄다. 이후 계속되는 난타전 속에서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하게 되고 벨라노프는 해트트릭을 완성시키지만, 연장전에서 2골을 기록한 벨기에는 4:3의 스코어로 8강에 진출한다.
8강 전의 상대는 2년 전 벨기에 대표팀을 무너트린 덴마크를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의 4골을 앞세워 무려 5:1로 완파한 무적함대 스페인이었다. 누가 봐도 체급차가 완연한 맞대결은 예상 외로 벨기에의 선제골로 승리가 유력한 상황에서 간신히 후반 85분 호세 안토니오 세뇨르의 동점골로 1:1로 끝난다. 그리고 승부차기에 돌입하게 된 경기는 스페인의 2번 키커인 엘로이 올라야의 실축, 반면에 2번 키커로 나선 시포가 득점에 성공하며 5:4로 벨기에가 4강에 오른다.[8]
사상 첫 4강에서 벨기에 대표팀과 맞닥트린 것은 바로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었다. 디에고 마라도나, 호르헤 발다노, 호르헤 부루차가를 앞세운 아르헨티나는 대회 최고의 화력을 자랑하는 팀이었으며,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마라도나의 '''신의 손'''과 '''5명을 제치고 넣은 골'''로 4강에 진출했었으며 이 날 경기에서도 마라도나의 멀티골로 완승한다.
3,4강 결정전에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과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번에도 완패하게 된다. 그러나 엔조 시포에겐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에서 최고의 대회였으며 그는 대회 최고의 신인상을 수상받았다.
이후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는 이제 신인이 아니라 팀을 이끄는 에이스로 10번을 달고 참가한다.
조별리그 E조에서 저번 대회에서 만났던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그리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같은 조가 된다.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은 첫 경기 상대인 대한민국을 2:0으로 이기는데, 이 경기에서 시포는 데그리세가 넣은 첫번째 골을 어시스트 한다. 하프라인에서 대한민국이 볼을 돌리는 것을 가로채고 보지도 않고 뒤로 패스를 했었다. 특히 이 경기는 대한민국의 숱한 월드컵 경기 중 최악의 경기 중 하나로 손꼽을 만한데, 스코어는 2:0이었지만 경기력만 놓고 보면 프로팀과 고등학생팀 간의 경기를 보는 것처럼 완전히 농락당한 경기였다. 당시 시포는 절정의 기량으로 한국을 초토화 시키는데 가장 기여했다. 이 경기 이후 국내에 시포 팬이 급증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벨기에는 펠레가 꼽은 우승후보인 우루과이를 3:1로 완파하는데, 시포는 여기서 팀의 두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결승골을 넣었다. 스페인과의 맞대결에서 패하면서 벨기에는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하는데, 이 경기에서 시포는 패널티킥을 실축하며 패배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벨기에는 16강에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만나 연장전까지 가게 되고, 연장전 119분 당시 떠오르던 신인 데이비드 플랫이 180도 회전해서 넣은멋진 발리 골로 탈락한다. 시포는 당시 폼이 절정에 올라있었으며 대회에서도 넓은 시야와 패스로 경기를 지배했지만, 안타깝게도 16강에서 멈춰야만 했다. 또한 시포의 멋진 중거리 슛이 골대를 맞고 나오는 불운이 있기도 하였으며, 이 경기에서 벨기에는 경기를 지배하고도 골대를 두번이나 맞추는 불운 끝에 월드컵에서 탈락하게 된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은 벨기에 대표팀이나 시포에게 있어서도 여러모로 아쉬운 대회였다. 왜냐하면 당시 벨기에는 신구 선수들 간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상태였고 공격력 또한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강 전력은 아니었을지라도 8강에는 충분히 들 수 있는 전력이었다.
1994 FIFA 월드컵 미국 당시 벨기에는 신구교체가 진행되지 않은, 특히 특출난 공격수가 없어 크로아티아 출신의 공격수를 귀화시키는 등 역대 최악의 전력으로 월드컵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조별리그 F조 첫 경기였던 네덜란드 전에선 시포와 데그리세의 활약 덕택에 의외로 1:0으로 승리하는데, 당시 시포는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이어진 모로코를 상대로 승리한 벨기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전에 임했으나 사우디아라비아의 마라도나로 불리던 사에드 알 오와이란이 마라도나에 비교되는 (수비수 4명과 골키퍼를 드리블로 멋지게 제치고) 골을 넣으면서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이후 16강에 진출하지만, 독일과의 경기에서 루디 푈러의 2골과 위르겐 클린스만의 골로 3:2의 스코어로 탈락한다. 시포가 이끄는 미드필더진은 수준급이었지만 공격진의 무게감이 과거의 대회들과 달리 떨어졌고 이는 독일과의 경기에서 참패로 이어졌다. 특히 시포는 독일의 수비형 미드필더인 짐머에게 철저하게 마크를 당하며 이렇다할 활약을 하지 못한다. 당시 독일 대표팀은 벨기에의 키플레이어인 시포만 일대일 전담마크를 시켰는데 이 전략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 경기였다. 여담으로 당시 경기는 벨기에로서는 꽤 억울한 경기였다. 푈러의 2골 중 한골인 헤딩골은 완벽한 반칙이었으며(벨기에 수비수의 어깨를 손으로 강하게 누르고 헤딩을 했다), 경기 후반 완벽한 패널트킥 상황을 심판이 인정하지 않기도 하였다. 당시 벨기에 선수들이 얼마나 억울했으면 경기가 진행 중인데도 공을 안 따라가고 심판을 따라가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벨기에는 지금까지 한번씩 만났던 팀들인 멕시코, 대한민국, 네덜란드와 같은 조를 이룬다. E조에서 벨기에는 전부 무승부를 기록하게 되는데, 특히나 반드시 이겨야 했던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유상철의 동점골로 1:1 무승부을 거두면서 벨기에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한다.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호를 참조.
시포는 벤치에서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국가대표 경력의 끝을 지켜보게 된다.

4. 플레이스타일


"우아하다"로 요약할 수 있는 당대 정상급 플레이메이커.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콜롬비아의 발데라마, 루마니아의 하지와 함께 마라도나, 마테우스로 이어지는 10번 미드필더의 계보를 이을 선수로 꼽히기도 했던, 당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이었다. 특히 지금과는 다른, 유럽의 약팀이었던 벨기에를 홀로 먹여살린 소년가장이었으며, 만약 그가 소위 말한 팀빨만 조금 더 좋은 선수였다면 아마 마테우스나 마라도나에 버금가는 미드필더로 축구 역사에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벨기에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란 별명에 걸맞게 볼을 상당히 잘 다루는 선수였으며, 공격에 창의성을 불어넣는 패스와 드리블은 당대에서 빗댈 선수가 몇 없었다. 또한 빠른 스피드와 민첩한 움직임, 현란한 기술까지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기에 매우 알맞은 선수였다. 특히 경기를 읽는 시야는 다른 미드필더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는데,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 전에서 보여준 시포의 경기 조율 능력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 경기에서 시포는 중원사령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물론 체격이 큰 선수가 아닌 만큼 몸싸움이나 제공권 다툼에서는 취약점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종종 헤딩골을 성공시킬만큼 헤딩에도 재능을 보였다.

5. 기타


유소년 시절 4시즌 동안 무려 432골이나 넣었다고 한다.
동시대에 같은 이름의 남미 선수인 엔조 프란체스콜리가 있었고, 비슷한 역할, 비슷한 플레이스타일로 비교되곤 한다.
2015년 8월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21세 이하 대표팀 감독으로 2017년까지 계약이 되어있었지만, 벨기에 대표팀을 이끌던 마르크 빌모츠 감독이 유로 2016 8강 탈락 이후 해임되자 시포 역시 2016년 7월에 사임한다. 시포는 "U-21 대표팀 지휘봉을 잡으며 빌모츠와 함께 계획을 만들었었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는 데 골몰했었다. 빌모츠가 대표팀에 없다면 나도 더 이상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원칙주의자다. 앞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빌모츠에 대한 의리를 나타냈다.
[1] 벨기에 왈롱 에노 주에 속한 도시[2] 공격형 미드필더.[3] 당대 이탈리아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인테르에서 317경기 128골을 기록한 바가 있다. 필리포 인자기가 존경하는 공격수라고 말했으며, 현재는 해설가로 활약 중.[4] 이 시즌 인테르는 세리에A 제패에 성공한다. 그것도 18팀 체제 역대 최고 승점으로.[5] 이 시즌 같은 이름의 엔조 프란체스콜리올림피크 마르세유 소속으로 11골을 기록한다. 이 시즌 리그 11골을 기록한 것은 이 둘뿐.[6] 참고로 득점 1위는 23골을 기록한 장 피에르 파팽, 그리고 2위는 15골을 기록한 엔조 시포의 팀 동료인 헝가리 출신 공격수 칼만 코박스다.[7] 당시 득점왕은 AS 모나코 소속의 소니 안데르손으로 브라질 국적의 이 스트라이커는 프랑스 리그 득점왕만 3차례 들어올린 프랑스 역대 최고의 외국인 공격수 중 하나다.[8] 다만 당시 스페인은 경기 하루 전날 집단 식중독으로 온전한 컨디션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스페인은 기권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하지만 몸을 추스려 그래도 경기라도 뛰어봐야 하겠다는 의지로 이를 악물고 버티며 경기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