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수
鄭命壽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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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수(鄭命壽, ?~1653?)는 조선 중기의 인물이다. 병자호란 시절 활동한 대표적인 매국노.
그 이름은 명수(命守)라고도 하는데, 본래 평안도 은산 출신의 사람이다. 본래 천례(賤隷)로서 한미한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식 이름은 굴마훈[1] . 사서에서는 고아마혼, 고이마혼, 곡이마홍 등이라고도 씌였다.
1619년, 광해군의 명을 따라 강홍립이 명나라의 후금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을 당시에 병졸이 되어 요동으로 종군하게 되었다.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후금의 군대에게 의하여 참패를 당하자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여진어에 능숙하다는 장기를 살려 포로 해방 이후에도 후금에 남았고, 또한 조선 내부의 사정을 후금에 알려 후금 조정으로부터 높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1636년, 인조 때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용골대[2] 를 비롯한 청나라 장수들의 역관 노릇을 하며 금의환향했다.
호란 이후에는 잠시 조선에 남아있으면서 청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조정에 압박을 가하여 그 벼슬이 영중추부사[3] 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에서 온갖 횡포를 저질렀는데, 자신이 총애하던 기생을 꾸짖었다는 이유로 병조좌랑 변호길(邊虎吉)을 몽둥이로 폭행하였고, 조정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재산을 불렸으며, 또한 자신의 친척들에게 벼슬을 내려줄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다가 청나라로 돌아갔는데 그 곳에도 조선 조정을 계속해서 압박하며 괴롭혔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탄핵을 받아 위기에 처한 김자점이 정명수에게 조선이 북벌을 계획한다는 것과 장릉(인조릉)의 지문에 청나라의 연호를 새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밀고하자, 청나라에서 10차례나 조사단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도 모자라서 조선에서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를 노략질하기도 하는 등의 만행을 그치지 않았다.
그가 이렇듯 조선에 특별한 반감을 가지고 온갖 행패를 부린 이유는 은산현에서 노비로 있을 때 은산현감이었던 홍집이 정명수에게 곤장을 쳐서 벌을 준 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갈고 있던 정명수는 인조 11년인 1633년에 그는 청의 사신으로 왔을 때, 평산현감으로 있던 홍집을 욕보이고 평산현[4] 을 약탈하는 것으로 사적인 보복을 하기도 한다.관련기사
어쨌건 이러한 그의 만행으로 많은 조선인들은 정명수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고, 실제로 여러 조선인들이 정명수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꾀하였다.
심양에 있던 시강원서리 강효원과 시강원필선 정뇌경 등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따라 심양에 와있던 재상 박노, 신득연, 보덕 박계영, 필선 신유, 사서 김종일, 정지화 등 여러 명의 조선 관리와 모의하고는, 정명수가 부패한 행위를 저지르고 조선에서 보내온 세폐까지 횡령했던 만행 등을 청나라 형부에 고발하여 정명수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명수가 이를 알고는 고발 문서를 빼돌려 불태워버리고는 박노를 협박하여 거짓 진술을 하도록 하였다. 결국 이로 인하여 강효원과 정뇌경 등은 무고죄로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으나, 조선 조정에서 형조 좌랑이었던 이응징을 급히 파견하여 조선의 법으로 처형(사대부이기 때문에 참수가 아닌 교형)하겠다는 외교문서를 보냈고,[5] 청에서는 처형 직전까지 참수하려다가 이응징이 강하게 어필하여 교형에 그치게 하였다. 이 부분은 속지주의에 따라 청의 법령이 아니라, 속인주의에 따라 조선법으로 처벌했다는 의의가 있으므로, 조선 입장에서는 외교적 성과인 셈이다.
한편 이들 정뇌경과 강효원이 죽을때,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은 많은 양의 금을 뇌물로 바쳐 살리려 했으나 실패했다.[6]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어째선지 이사용이란 자가 정명수를 주살한 걸로 나오는데, 출전을 알 수 없다. 참조 5 심지어 2021년 1월 현재 중국어 위키백과에도 이사용에 의해,[7] 네이버에서 기재하는 문화원형백과에서는 강효원, 이사용, 정뇌경에 의해 모살당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8] 이 백과의 항목들에는 오류가 있어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명수와 이사용은 관련이 없다. 우선 현종개수실록 19권, 현종 9년 10월 11일 병자 3번째기사를 읽으면 이 강효원과 이사용의 처자에게 휼전을 내린 이 기사에서 강효원과 같이 언급되는데, 이사용은 성주의 포수이며 정명수 주살 시도 사건과는 무관하고, '''1641년''' 금주위 전투에 임경업 휘하로 참전하여 명군과 전투를 벌일때 명나라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포탄을 제거하여 공포를 쐈던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9] 청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강효원과의 공통점 때문에 시대가 많이 지난 현종 때 이 두사람의 처자식에게 동시에 휼전을 내려 위로했는데, 강효원이 '''`정명수를 모살하려 했다(謀殺鄭命壽也)`'''는 내용이 나오고, 그 다음의 강효원과는 관계없는 이사용의 일화에서 '''`이사용이 같이 했다.(士用與焉)`'''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대한 오독(誤讀)인 듯하다. 이사용이 같이한 대상은 심양에서 징병되어 갔을 때 같이 갔다는 의미이지, 앞의 강효원과 같이 모살하려 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안정복의 순암문집의 정뇌경의 행장에는 이 정명수를 모살'''하려던''' 주모자 정뇌경의 시선에서 1639년[10] 에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나온다. 여담으로 영조는 이 사건의 주동자였던 정뇌경을 좌찬성 벼슬에 추증했고, 정조는 충정공으로 봉하였다.
효종 4년 6월 3일(1653년) 기록에는 정명수가 죄를 받아 버려졌다고 나온다. [11] 외교문서 모음인 동문휘고에 의하면, '조선의 뜻과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패를 부렸다는 것은 교수형에 처해 마땅하나, 여러번 조선에 다녀온 공로를 생각해서 죽음을 면케 하였다.'고 한 청나라 측의 자문(외교문서)이 남아있다.[12]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자문을 본 효종이 '청의 형법이 많이 어지러워졌구나'라는 은근히 디스를 하면서도 '정명수는 특히 간사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죽지 않는다면 꺼진 재가 다시 불붙게 될 걱정이 있을까봐 염려스럽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정명수는 이때 죄를 받아 폐서인되었으나, 이 시점에 죽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명수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실록에 나오지 않는다. 열하일기에 의하면 시기는 특정하게 나오지 않고 정뇌경의 살해시도 사건 이후에(後) 정명수가 조선에 죄가 많음을 깨닫고 참(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조선에 남아있던 그의 친족들 혹은 정명수의 청탁으로 면천하고 벼슬을 지낸 자들은 대개 유형에 처해지거나 심하게는 극형을 당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팔기만주씨족통보'의 기록에 따르면 청에 있던 그의 아들 버진쿠이(Beojinkui, 白晉魁)와 그의 손자 망둥기(Mangdunggi, 莽董儀)와 피잔(pijan, 皮占)은 호군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는 것으로 보아 청나라에서는 연좌죄가 적용되지는 않은 듯하다.
채널A에서 방영한 천일야사에서는 1639년의 정뇌경 등이 정명수를 모살하려 할때 정명수의 횡령 사실이 원인이 되어 1653년에 숙청당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실제로 정뇌경의 행장에서 '청 황제가 죽이려 하고 있으니 이 시기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하는 당대 시각이나 '조선의 뜻과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패를 부렸다.'는 외교문서로 볼때 1639년의 사건은 정명수가 청 황실에서 어느 정도 괘씸죄를 얻었고, 조선어 통역사라는 특수한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당장은 죽이지 않았지만 이 사실이 정명수의 실각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보인다. 앞서 설명한 정뇌경의 행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1639년의 정뇌경 등의 정명수 모살 시도 사건에 대한 정뇌경 등을 처형하던 시기에 '청황제가 노하여 그(정명수)를 죽이려고 하였다.'는 내용이나, '보고 있던 오랑캐들조차도 혀를 끌끌 차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으로 볼 때, 정명수에 대한 청 황실이나 귀족들의 신임은 사실상 끝난듯하다. 다만 14년이라는 연도차가 있고, 이 14년 동안에도 정명수가 조선왕조실록에 조선에 꾸준히 사신으로 오며, 그 사이에 청나라 황실도 두번(청태종→도르곤(섭정)→순치제)이나 정권이 교체가 된다. 게다가 순치제가 즉위하고 도르곤이 섭정을 시작하는 1643년에는 정명수가 아예 칙사로 승진까지 하는 것을 볼 때,[13] 청 황실이 과연 1639년의 횡령 참소 건만으로 정명수를 벌한 것일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정명수의 실각을 둘러싼 원인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함에 따라, 사실상 중원의 패자가 된 청나라 입장에서 조선과 명의 협공 위협이 사라져서 굳이 협박성 외교를 해야 할 필요성이 적어지고, 대국의 위엄을 모여줘야하는 상황으로 변하자, 트러블 메이커나 다름없는 정명수가 눈의 가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순치제 시절인 1650년과 1651년 사이에 벌어진 도르곤의 사후에 발생한 도르곤 세력의 몰락 및 지르갈랑의 복귀과 순치제의 친정을 위한 친위쿠데타로 인한 청나라 정권 지형의 변화도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이 친위쿠데타 직후에 청에 사신으로 다녀온 당시 형조판서 이시방이 '''‘최근 연경에 갔을 때 정명수의 기색을 보니 그 전과는 전혀 달리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라고 효종에 보고한 사실이다.[14] 게다가 정명수는 팔기군 중 정홍기[15] 소속이었고 그가 소속되어 있는 정홍기의 경우 청태종의 이복형인 다이샨의 편에 서 있었으며, 다이샨은 순치제 친정세력의 강한 버팀목이었던 지르갈랑의 양람기의 견제 세력이었기 때문에, 1848년 정홍기 수장인 다이샨의 사망, 그리고 1650년 도르곤의 사망 후 정적 지르갈랑의 복귀와 순치제의 친정을 위한 친위쿠데타로 양람기 세력이 강해진 것이 정홍기였던 그의 정치권력 기반을 잃게 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와 조선에서의 행패나 횡령, 약탈 등으로 인해 조선과 외교마찰을 야기하는 등의 행위가 괘씸죄로 작용하여 이러한 명분들이 차곡차곡 적립되어 정명수가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당시에 정명수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천하만고의 역적, 간신배''' 정도였다. 실록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하면 어김없이 그가 저지른 각종 만행도 함께 언급되곤 하며, 모두가 그를 한마음으로 두려워했다. 이는 특히 효종실록 4년의 기록에서 이와 같은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정명수가 청나라에서 죄를 받고 폐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효종은 이에 대하여 "명수는 특히 간사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죽지 않는다면 꺼진 재가 다시 불붙게 될 걱정이 있을까 염려스럽다."고 했을 정도였다. 정명수가 처벌을 받게 된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가 혹시라도 목숨을 부지하여 조선에 위해를 가하려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말이다.
특히 효종은 마치 정여립처럼 정적(鄭賊)이라는 멸칭으로, 그의 사후에도 정조는 김돌과 함께 정명수를 부노(俘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정명수와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살면서,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이 바로 충무공 정충신이다. 정충신 또한 천민의 계급에서 시작하여 사망한 후에는 충무공 시호를 받을 정도로 출세한 인물이었지만, 이와 같은 영예는 모두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의 숱한 국가적 위기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큰 일을 이뤄낸 끝에 성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명수는 나름대로 총명한 머리를 조국을 핍박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쓰다가 결국 자신을 거두어준 청나라에 의해 버림을 받았고, 그 일족도 큰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이름은 조선사에서 만고의 역적으로 남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역사 속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작물에서는 자신이 천한 신분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조선을 괴롭힌 것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다만 역사적 사서에서는 자신의 출신에 대해 콤플렉스 같은 건 딱히 안 보이긴 한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 작중에는 굉장히 냉철하면서도 총명한 느낌의 인물로 비중있게 묘사된다. 다만 정명수가 강홍립을 따라 종군하기 이전에 그 가족이 비참하게 몰살되었다는 묘사는 소설 내의 픽션에 불과하다.
영화 남한산성 - 조우진이 정명수를 연기한다.[16] 역관이라는 캐릭터상 본인의 대사보다 용골대와 홍타이지의 대사 통역이 더 많지만, 그 통역의 내용이 주는 압박감과 배우의 무게감 있는 연기로 적지 않은 존재감을 보여줬다. 용골대가 "조선 사람들은 어찌 저리 아둔한가?"라고 묻자 '''"자신은 이미 대청국 사람"'''이라고 하거나, 김류가[17] 조선 사람이니 좀 봐달라는 부탁에 '''"나는 부모가 노비라 태어났을 때부터 노비였다. 조선에서 노비는 사람이 아니다. 나를 다시는 조선 사람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단칼에 거절하는 모습 등에서 조선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듯하다.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 조덕현. 드라마의 첫 장면부터 등장한다. 인조가 항복하기 위해 어가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나오자 청나라 장수가 가마에서 내릴 것을 명했고 이를 통역한다. 이후에도 계속 출연하는데, 역사 기록대로 조선을 깔보거나 조정을 압박하며, 왕실의 막장 가족사를 은근히 즐기는듯 하다. 청나라 황제의 명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끗발이 엄청나서 인조도 함부로 하지 못하며, 청나라에서는 조선 소식통으로 대접 받는다. 정치적 감각은 있는지 인조나 조선 조정에 숙이는 모습이나, 이용가치가 있으면 어울리는 모습도 나온다.
MBC 사극 시리즈 조선왕조 오백년 남한산성편에서도 등장하며, 역시 비열한 매국노로 묘사되고 있다.
웹툰 칼부림에서도 시대배경이 사르후 전투와 정묘호란 사이의 이괄의 난이 배경이라 정명수가 등장한다. 작품 초반부터 간접적으로 등장하다가. 3부 13화에서 정명수가 처음으로 직접 등장해 김경서와 대면한다. 작중 인물들의 회상에 의하면 주인공인 함이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이상, 머지않아 큰 비중으로 등장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가능성 있는 전개로는, 함이가 호란을 전후하여 조선에 돌아온 정명수를 발견하고 암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하는 경우, 그리고 이괄의 난으로부터 30년 뒤의 일인 정명수의 사망이 역사와 다르게 각색되고 거기에 함이가 개입되는 경우.
2018년 중반기 연재분에서 결국 붙잡혀 명군 진영으로 끌려온 함이와 드디어 대면했다. 함이를 보고 상당히 긴장을 한 나머지 시선을 피할 정도. 이후 같이 붙잡힌 덕만과는 사르후 전투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전우라서 살갑게 대하며[18] 어떻게던 덕만을 살릴려고 여진족인 척 연기하면서 자길 따라오라며 도와주지만 역시나 함이와는 감옥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살기를 드러내면서 대치한다. 그러면서 심양에 있는 김경서에게 말할 게 많아졌다고 하며 물러난다.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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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명수(鄭命壽, ?~1653?)는 조선 중기의 인물이다. 병자호란 시절 활동한 대표적인 매국노.
2. 생애
그 이름은 명수(命守)라고도 하는데, 본래 평안도 은산 출신의 사람이다. 본래 천례(賤隷)로서 한미한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식 이름은 굴마훈[1] . 사서에서는 고아마혼, 고이마혼, 곡이마홍 등이라고도 씌였다.
1619년, 광해군의 명을 따라 강홍립이 명나라의 후금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을 당시에 병졸이 되어 요동으로 종군하게 되었다.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후금의 군대에게 의하여 참패를 당하자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여진어에 능숙하다는 장기를 살려 포로 해방 이후에도 후금에 남았고, 또한 조선 내부의 사정을 후금에 알려 후금 조정으로부터 높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1636년, 인조 때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용골대[2] 를 비롯한 청나라 장수들의 역관 노릇을 하며 금의환향했다.
호란 이후에는 잠시 조선에 남아있으면서 청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조정에 압박을 가하여 그 벼슬이 영중추부사[3] 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에서 온갖 횡포를 저질렀는데, 자신이 총애하던 기생을 꾸짖었다는 이유로 병조좌랑 변호길(邊虎吉)을 몽둥이로 폭행하였고, 조정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재산을 불렸으며, 또한 자신의 친척들에게 벼슬을 내려줄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다가 청나라로 돌아갔는데 그 곳에도 조선 조정을 계속해서 압박하며 괴롭혔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탄핵을 받아 위기에 처한 김자점이 정명수에게 조선이 북벌을 계획한다는 것과 장릉(인조릉)의 지문에 청나라의 연호를 새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밀고하자, 청나라에서 10차례나 조사단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도 모자라서 조선에서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를 노략질하기도 하는 등의 만행을 그치지 않았다.
그가 이렇듯 조선에 특별한 반감을 가지고 온갖 행패를 부린 이유는 은산현에서 노비로 있을 때 은산현감이었던 홍집이 정명수에게 곤장을 쳐서 벌을 준 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갈고 있던 정명수는 인조 11년인 1633년에 그는 청의 사신으로 왔을 때, 평산현감으로 있던 홍집을 욕보이고 평산현[4] 을 약탈하는 것으로 사적인 보복을 하기도 한다.관련기사
어쨌건 이러한 그의 만행으로 많은 조선인들은 정명수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고, 실제로 여러 조선인들이 정명수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꾀하였다.
심양에 있던 시강원서리 강효원과 시강원필선 정뇌경 등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따라 심양에 와있던 재상 박노, 신득연, 보덕 박계영, 필선 신유, 사서 김종일, 정지화 등 여러 명의 조선 관리와 모의하고는, 정명수가 부패한 행위를 저지르고 조선에서 보내온 세폐까지 횡령했던 만행 등을 청나라 형부에 고발하여 정명수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명수가 이를 알고는 고발 문서를 빼돌려 불태워버리고는 박노를 협박하여 거짓 진술을 하도록 하였다. 결국 이로 인하여 강효원과 정뇌경 등은 무고죄로 참수형을 당하게 되었으나, 조선 조정에서 형조 좌랑이었던 이응징을 급히 파견하여 조선의 법으로 처형(사대부이기 때문에 참수가 아닌 교형)하겠다는 외교문서를 보냈고,[5] 청에서는 처형 직전까지 참수하려다가 이응징이 강하게 어필하여 교형에 그치게 하였다. 이 부분은 속지주의에 따라 청의 법령이 아니라, 속인주의에 따라 조선법으로 처벌했다는 의의가 있으므로, 조선 입장에서는 외교적 성과인 셈이다.
한편 이들 정뇌경과 강효원이 죽을때, 당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은 많은 양의 금을 뇌물로 바쳐 살리려 했으나 실패했다.[6]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어째선지 이사용이란 자가 정명수를 주살한 걸로 나오는데, 출전을 알 수 없다. 참조 5 심지어 2021년 1월 현재 중국어 위키백과에도 이사용에 의해,[7] 네이버에서 기재하는 문화원형백과에서는 강효원, 이사용, 정뇌경에 의해 모살당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8] 이 백과의 항목들에는 오류가 있어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명수와 이사용은 관련이 없다. 우선 현종개수실록 19권, 현종 9년 10월 11일 병자 3번째기사를 읽으면 이 강효원과 이사용의 처자에게 휼전을 내린 이 기사에서 강효원과 같이 언급되는데, 이사용은 성주의 포수이며 정명수 주살 시도 사건과는 무관하고, '''1641년''' 금주위 전투에 임경업 휘하로 참전하여 명군과 전투를 벌일때 명나라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포탄을 제거하여 공포를 쐈던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9] 청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강효원과의 공통점 때문에 시대가 많이 지난 현종 때 이 두사람의 처자식에게 동시에 휼전을 내려 위로했는데, 강효원이 '''`정명수를 모살하려 했다(謀殺鄭命壽也)`'''는 내용이 나오고, 그 다음의 강효원과는 관계없는 이사용의 일화에서 '''`이사용이 같이 했다.(士用與焉)`'''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대한 오독(誤讀)인 듯하다. 이사용이 같이한 대상은 심양에서 징병되어 갔을 때 같이 갔다는 의미이지, 앞의 강효원과 같이 모살하려 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안정복의 순암문집의 정뇌경의 행장에는 이 정명수를 모살'''하려던''' 주모자 정뇌경의 시선에서 1639년[10] 에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나온다. 여담으로 영조는 이 사건의 주동자였던 정뇌경을 좌찬성 벼슬에 추증했고, 정조는 충정공으로 봉하였다.
효종 4년 6월 3일(1653년) 기록에는 정명수가 죄를 받아 버려졌다고 나온다. [11] 외교문서 모음인 동문휘고에 의하면, '조선의 뜻과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패를 부렸다는 것은 교수형에 처해 마땅하나, 여러번 조선에 다녀온 공로를 생각해서 죽음을 면케 하였다.'고 한 청나라 측의 자문(외교문서)이 남아있다.[12]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자문을 본 효종이 '청의 형법이 많이 어지러워졌구나'라는 은근히 디스를 하면서도 '정명수는 특히 간사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죽지 않는다면 꺼진 재가 다시 불붙게 될 걱정이 있을까봐 염려스럽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정명수는 이때 죄를 받아 폐서인되었으나, 이 시점에 죽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명수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실록에 나오지 않는다. 열하일기에 의하면 시기는 특정하게 나오지 않고 정뇌경의 살해시도 사건 이후에(後) 정명수가 조선에 죄가 많음을 깨닫고 참(斬)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조선에 남아있던 그의 친족들 혹은 정명수의 청탁으로 면천하고 벼슬을 지낸 자들은 대개 유형에 처해지거나 심하게는 극형을 당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팔기만주씨족통보'의 기록에 따르면 청에 있던 그의 아들 버진쿠이(Beojinkui, 白晉魁)와 그의 손자 망둥기(Mangdunggi, 莽董儀)와 피잔(pijan, 皮占)은 호군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는 것으로 보아 청나라에서는 연좌죄가 적용되지는 않은 듯하다.
채널A에서 방영한 천일야사에서는 1639년의 정뇌경 등이 정명수를 모살하려 할때 정명수의 횡령 사실이 원인이 되어 1653년에 숙청당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실제로 정뇌경의 행장에서 '청 황제가 죽이려 하고 있으니 이 시기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하는 당대 시각이나 '조선의 뜻과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패를 부렸다.'는 외교문서로 볼때 1639년의 사건은 정명수가 청 황실에서 어느 정도 괘씸죄를 얻었고, 조선어 통역사라는 특수한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당장은 죽이지 않았지만 이 사실이 정명수의 실각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보인다. 앞서 설명한 정뇌경의 행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1639년의 정뇌경 등의 정명수 모살 시도 사건에 대한 정뇌경 등을 처형하던 시기에 '청황제가 노하여 그(정명수)를 죽이려고 하였다.'는 내용이나, '보고 있던 오랑캐들조차도 혀를 끌끌 차며 눈물을 흘렸다.'는 것으로 볼 때, 정명수에 대한 청 황실이나 귀족들의 신임은 사실상 끝난듯하다. 다만 14년이라는 연도차가 있고, 이 14년 동안에도 정명수가 조선왕조실록에 조선에 꾸준히 사신으로 오며, 그 사이에 청나라 황실도 두번(청태종→도르곤(섭정)→순치제)이나 정권이 교체가 된다. 게다가 순치제가 즉위하고 도르곤이 섭정을 시작하는 1643년에는 정명수가 아예 칙사로 승진까지 하는 것을 볼 때,[13] 청 황실이 과연 1639년의 횡령 참소 건만으로 정명수를 벌한 것일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정명수의 실각을 둘러싼 원인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함에 따라, 사실상 중원의 패자가 된 청나라 입장에서 조선과 명의 협공 위협이 사라져서 굳이 협박성 외교를 해야 할 필요성이 적어지고, 대국의 위엄을 모여줘야하는 상황으로 변하자, 트러블 메이커나 다름없는 정명수가 눈의 가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순치제 시절인 1650년과 1651년 사이에 벌어진 도르곤의 사후에 발생한 도르곤 세력의 몰락 및 지르갈랑의 복귀과 순치제의 친정을 위한 친위쿠데타로 인한 청나라 정권 지형의 변화도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이 친위쿠데타 직후에 청에 사신으로 다녀온 당시 형조판서 이시방이 '''‘최근 연경에 갔을 때 정명수의 기색을 보니 그 전과는 전혀 달리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라고 효종에 보고한 사실이다.[14] 게다가 정명수는 팔기군 중 정홍기[15] 소속이었고 그가 소속되어 있는 정홍기의 경우 청태종의 이복형인 다이샨의 편에 서 있었으며, 다이샨은 순치제 친정세력의 강한 버팀목이었던 지르갈랑의 양람기의 견제 세력이었기 때문에, 1848년 정홍기 수장인 다이샨의 사망, 그리고 1650년 도르곤의 사망 후 정적 지르갈랑의 복귀와 순치제의 친정을 위한 친위쿠데타로 양람기 세력이 강해진 것이 정홍기였던 그의 정치권력 기반을 잃게 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와 조선에서의 행패나 횡령, 약탈 등으로 인해 조선과 외교마찰을 야기하는 등의 행위가 괘씸죄로 작용하여 이러한 명분들이 차곡차곡 적립되어 정명수가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
3. 역사적 평가
조선시대 당시에 정명수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천하만고의 역적, 간신배''' 정도였다. 실록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하면 어김없이 그가 저지른 각종 만행도 함께 언급되곤 하며, 모두가 그를 한마음으로 두려워했다. 이는 특히 효종실록 4년의 기록에서 이와 같은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정명수가 청나라에서 죄를 받고 폐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효종은 이에 대하여 "명수는 특히 간사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죽지 않는다면 꺼진 재가 다시 불붙게 될 걱정이 있을까 염려스럽다."고 했을 정도였다. 정명수가 처벌을 받게 된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가 혹시라도 목숨을 부지하여 조선에 위해를 가하려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말이다.
특히 효종은 마치 정여립처럼 정적(鄭賊)이라는 멸칭으로, 그의 사후에도 정조는 김돌과 함께 정명수를 부노(俘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정명수와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살면서,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이 바로 충무공 정충신이다. 정충신 또한 천민의 계급에서 시작하여 사망한 후에는 충무공 시호를 받을 정도로 출세한 인물이었지만, 이와 같은 영예는 모두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의 숱한 국가적 위기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큰 일을 이뤄낸 끝에 성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명수는 나름대로 총명한 머리를 조국을 핍박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쓰다가 결국 자신을 거두어준 청나라에 의해 버림을 받았고, 그 일족도 큰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이름은 조선사에서 만고의 역적으로 남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역사 속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작물에서는 자신이 천한 신분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조선을 괴롭힌 것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다만 역사적 사서에서는 자신의 출신에 대해 콤플렉스 같은 건 딱히 안 보이긴 한다.
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 작중에는 굉장히 냉철하면서도 총명한 느낌의 인물로 비중있게 묘사된다. 다만 정명수가 강홍립을 따라 종군하기 이전에 그 가족이 비참하게 몰살되었다는 묘사는 소설 내의 픽션에 불과하다.
영화 남한산성 - 조우진이 정명수를 연기한다.[16] 역관이라는 캐릭터상 본인의 대사보다 용골대와 홍타이지의 대사 통역이 더 많지만, 그 통역의 내용이 주는 압박감과 배우의 무게감 있는 연기로 적지 않은 존재감을 보여줬다. 용골대가 "조선 사람들은 어찌 저리 아둔한가?"라고 묻자 '''"자신은 이미 대청국 사람"'''이라고 하거나, 김류가[17] 조선 사람이니 좀 봐달라는 부탁에 '''"나는 부모가 노비라 태어났을 때부터 노비였다. 조선에서 노비는 사람이 아니다. 나를 다시는 조선 사람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단칼에 거절하는 모습 등에서 조선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듯하다.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 조덕현. 드라마의 첫 장면부터 등장한다. 인조가 항복하기 위해 어가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나오자 청나라 장수가 가마에서 내릴 것을 명했고 이를 통역한다. 이후에도 계속 출연하는데, 역사 기록대로 조선을 깔보거나 조정을 압박하며, 왕실의 막장 가족사를 은근히 즐기는듯 하다. 청나라 황제의 명을 전한다는 명분으로 끗발이 엄청나서 인조도 함부로 하지 못하며, 청나라에서는 조선 소식통으로 대접 받는다. 정치적 감각은 있는지 인조나 조선 조정에 숙이는 모습이나, 이용가치가 있으면 어울리는 모습도 나온다.
MBC 사극 시리즈 조선왕조 오백년 남한산성편에서도 등장하며, 역시 비열한 매국노로 묘사되고 있다.
웹툰 칼부림에서도 시대배경이 사르후 전투와 정묘호란 사이의 이괄의 난이 배경이라 정명수가 등장한다. 작품 초반부터 간접적으로 등장하다가. 3부 13화에서 정명수가 처음으로 직접 등장해 김경서와 대면한다. 작중 인물들의 회상에 의하면 주인공인 함이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이상, 머지않아 큰 비중으로 등장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가능성 있는 전개로는, 함이가 호란을 전후하여 조선에 돌아온 정명수를 발견하고 암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하는 경우, 그리고 이괄의 난으로부터 30년 뒤의 일인 정명수의 사망이 역사와 다르게 각색되고 거기에 함이가 개입되는 경우.
2018년 중반기 연재분에서 결국 붙잡혀 명군 진영으로 끌려온 함이와 드디어 대면했다. 함이를 보고 상당히 긴장을 한 나머지 시선을 피할 정도. 이후 같이 붙잡힌 덕만과는 사르후 전투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전우라서 살갑게 대하며[18] 어떻게던 덕만을 살릴려고 여진족인 척 연기하면서 자길 따라오라며 도와주지만 역시나 함이와는 감옥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살기를 드러내면서 대치한다. 그러면서 심양에 있는 김경서에게 말할 게 많아졌다고 하며 물러난다.
5. 같이보기
[1] 토끼라는 뜻이다.[2] 용골대는 조선에 횡포 부리는 정명수와 정 반대로 자기 할 일을 꿋꿋히 하고, 조선에 횡포도 부리지 않았고, 인조와 대신들에게 거만하게 굴지 않았으며 뇌물 요구까지 하지 않았고 예의바르게 대했다.[3] 정1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동품계.[4] 현 황해도 평산군[5] 근거[6] 출처[7] '1653年,他在瀋陽被星州砲手李士用謀殺。' 중국어 위키백과 2020년 9월 '鄭命壽' 최종 수정 기록.[8]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원형백과 정명수 기록[9] 조선왕조실록 이사용 사망관련 기사(출처:인조실록 42권, 인조 19년 5월 4일 무인 1번째기사)[10] 근거[11] 단지 廢했다고만 나와서 말 그대로 폐서인된 것으로만 보인다.[12] 동문휘고 기록[13] 관련 기사[14] 근거:1651년의 조선왕조실록 기사[15] 팔기만주씨족통보에서의 기록.[16] 참고로 조우진은 6년 전 최종병기 활에서 단역으로 청나라 측 인물을 한번 맡았던 바이 있다.[17] 김류는 당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이었다. 그런 그가 정대인이라며 치켜세웠는데도 이 정도 대답이었다.[18] 덕만은 창성에 있던 시절을 회상하는데, 이때의 정명수의 보직은 장창수. 애꾸눈을 묻자 처음엔 대답을 피하다가 '오다 자빠졌다'며 어물쩍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