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대학살
1. 개요
기원전 207년 음력 11월[1] 현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阳市) 신안(新安)현에서 항우(項羽)가 자행한 '''대규모 포로 학살'''. '신안의 갱'이라고도 한다. 문헌상 '''무려 20만이나 되는''' 비무장 포로들이 야밤에 저항도 못 해보고 습격으로 파묻혔다.
'''신안대학살을 기점으로 초한전쟁의 결말이 정해졌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실책으로, 장평대전 당시 진나라(秦)의 백기가 자행한 학살과 함께 고대 중국에서 전쟁포로에게 저지른 전대미문의 학살 사례로 손꼽힌다. 게다가 뒤에 언급되겠지만 사실 학살은 신안의 진나라군에 대해서만 자행된 것도 아니었다.
2. 전개
2.1. 진나라의 몰락과 장한의 항복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며 끝없는 시간 동안 분열을 거듭하던 중국은 마침내 진나라 시황제의 손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진나라는 너무나 엄격한 법치주의와 거대한 토목공사로 삽시간에 무너져내리기 시작했고, 진승·오광의 난은 위태로운 제국의 나약한 기반을 날려버리는 일대 대사건이 되었다. 비록 이 반란은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章邯)의 활약으로 진압할 수 있었지만, 이미 천하는 진나라에 반기를 든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후였다.
그러한 여러 인물 중에 가장 유력한 인물은 단연 항량(項梁)이었다. 진나라에게 멸망한 초(楚) 최후의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이었던 항량은 이러한 혼란을 틈타 기반을 쌓아 초나라를 다시 부활시켰으며,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하여 망국의 한을 갚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한과의 싸움에서 결국 전사하고 말았으며, 그 빈자리를 채운 사람은 항량의 조카로 엄청난 용력을 가진 젊은이, 항우가 되었다.
송의(宋義)를 살해하고 군권을 모조리 손아귀에 쥔 항우는 이후 북상을 감행, 조나라(趙) 구원전에 참여하였다. 당시 장한은 수하의 장수 왕리(王離)를 파견하여 조나라를 압박하던 참이었는데, 항우는 이 거록대전(巨鹿大戰)에서 실로 초인과도 같은 용력을 떨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 인해 장초(張楚) 멸망 후 여러 제후들에게 가해졌던 장한의 엄청난 압력은 삽시간에 걷히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난감한 지경에 처해진 건 장한이었다. 장한은 극원(棘原)[2] 에 진을 치고 항우와 대치 상태를 이루었으나, 형세가 그리 좋지 않아 퇴각하거나 하다못해 추가 보급이라도 원했지만 당시 황제였던 무능한 군주 호해(胡亥)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장한을 여러 번 꾸짖기만 하였다. 조고의 사탕발림으로 인해 장한이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줄 알고 있었던 호해에게 퇴각이나 추가 보급 같은 이야기는 매우 뜬금없었던 것. 답답한 장한은 현재의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부하인 사마흔(司馬欣)을 보내 일의 자초지종을 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은 사악한 간신 조고(趙高)가 장악한 지 오래였는데, 조고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난리가 호해의 귀에 들어가는 일을 막고, 그저 호해가 먹고 놀며 즐기는 일에만 정신이 팔리게 하였다. 그래야 부재 중인 황제를 대신해서 자신이 전권을 부릴 수 있기 때문.[3] 만약 장한이 승리할 경우 이세 황제가 자신을 쫒아내고 장한을 그 자리에 앉힐까봐 두려웠던 데다, 이때 이미 유방이 무관의 지척까지 다가온 상황이라 조고는 진나라에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있어서 장한이 항복한 바로 다음 달에 자기 손으로 호해를 죽이고 진나라를 유방에게 팔아치운 뒤 조나라로 떠나고자 할 정도였으니[4] 장한에겐 더 이상 용무가 없었던 것이다. 사마흔은 함양에 도착하여 3일간 기다렸으나 답변이 없자 불안감을 느끼고 곧바로 도망쳤는데, 일부러 길을 다른 곳으로 돌아서 도망쳤다. 실제로 조고는 사마흔을 잡으려고 했으나, 결국은 잡지 못했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사마흔은 장한에게 충고했다.
한편, 조나라의 진여(陳餘) 역시 장한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조고가 조정 안에서 정사를 독단하고 있어, 그 밑에 있는 신하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반군과 싸워 이긴다면 조고는 우리의 공을 시기할 것이고, 이기지 못한다면 그 책임으로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장한은 처음에는 이러한 제안들을 의심스럽게 여겨, 시성(始成)이라는 인물을 사자로 보내 항우와 협상을 했지만 이루어지진 않았다. 이에 몇차례 교전이 벌어졌고, 항우는 진나라 군을 격파했다. 그러자 장한은 다시 항복 의사를 밝혔고, 마침 군량이 떨어져가던 항우는 이를 승낙하였다.진나라의 명장 백기(白起)는 남정하여 언(鄢)과 영(郢)을 함락시켜 초나라를 동쪽으로 내쫓았으며, 북정하여 장평에서 조나라 대장 조괄(趙括)를 죽이고 그 군사 40여만을 구덩이에 묻었소.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고, 땅을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했으나 결국은 진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사되었소. 몽염(蒙恬)은 장군이 되어 북쪽의 융인(戎人)들을 몰아내고 유중(楡中)의 수천 리 땅을 넓혀 불세출의 큰공을 세웠으나 그 역시 양주(陽周)에서 참수되었소. 그 이유는 진나라에는 공을 세운 사람이 너무 많아 그들에게 모두 봉지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법을 이용하여 주살했기 때문이오.
장군이 진나라의 대장이 된 지 3년 동안, 수하의 군사 수십 만을 잃었으나 제후들은 서로 규합하여 그 군사들은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소. 오랫동안 이세의 눈과 귀를 막으며 아첨을 일삼았으나, 나라의 정세가 위급하게 되어 이세황제로부터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조고는 장군이 오랫동안 안전만을 고려하여 수비로 일관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주살하고 다른 사람을 보내 장군을 대신하여 이세로부터의 화를 면하려 하고 있소.
지금 장군이 밖에 나와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는 동안 조정내부와 틈이 벌어져 비록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하기 어렵고 또한 공을 세우지 못해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오. 장차 하늘이 진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있는 사람이나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소.
오늘 장군이 안으로는 직간을 할 수 없고, 밖으로는 나라에서 버림받은 장수가 되어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목숨을 구하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니겠소? 장군은 어찌하여 병사들의 방향을 바꿔 제후들을 따라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나누어 왕이 되어 남면하면서 고(孤)를 칭하지 않으려고 하시오?
장군 자신은 형구(刑具)에 엎드려 요참형을 당하고 가족들은 주륙을 당하는 것과 어찌 견줄 수 있단 말이오? ─ '''사기 항우 본기 중'''
이에 장한과 항우는 은허(殷墟)[6] 에서 직접 만나 항복에 관한 의식을 치렀다. 이 자리에서 장한은 서러움이 치밀어 올라 왈칵 눈물까지 흘리면서 조고의 일을 이야기 하였고, 항우는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임명해서 진나라를 향해 진격하게 하였다. 이렇게 항우와 장한 두 명의 걸물, 그리고 초나라의 군사와 진나라의 대군의 대결은 좋게 좋게 끝나는 듯 싶었다.
2.2. 징조
그런데 이상한 낌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엄격한 법률로 여러 사람들을 대단히 못살게 굴었고, 당시 진나라에 대항하던 제후군의 병사들은 이러한 압제에 오랫동안 억눌려서 지내고 있었다. '''또한 항우가 이끌던 초나라 병사들 중에는 여산에서 벌어지는 공사에 끌려가서 개고생을 했거나, 멀고 먼 국경까지 끌려가 춥고 서러움을 견디며 수비병으로 지내거나 만리장성 공사에서 혹독한 대우를 받다가 가족이 굶어 죽었다는 걸 알고 눈이 뒤집혀 탈주하여 부흥군에 합류한 이가 많았다.''' 그런 병사들이 비록 투항병이라지만 진나라 병사들에게 좋은 심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항복한 총사령관인 장한은 왕에 임명되고 사마흔 역시 상장군이 되어 군대를 지휘하던 상황으로 보면 당시 진나라 항복군은 일반적인 포로와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후군의 병사들은 이러한 진나라 병사들을 마치 포로나 노예처럼 대하면서 수많은 모욕을 주었다. 진나라 병사들은 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는데,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수치와 부끄러움보다도 '이러다가 정말 우리 죽는 것 아니야?' 라는 불안감이었다. 그 때문에 진나라 병사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렇게 수군거렸다.
사실 이 시점에서 이미 관중은 유방에게 점거당하고 진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상태였지만 일부러 그랬는지, 아니면 깜빡했는지 유방이 항우 쪽에 별다른 연통을 보내질 않았기 때문에 제후군 측은 여전히 진나라의 수비군과 싸워서 무찔러야 관중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 초조한 분위기는 결국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이런 불온한 움직임은 곧 여러 장수들에게 포착되었고 소식은 결국 위로 올라가서 항우에게 전해졌는데, 항우는 경포(黥布)와 포장군(蒲將軍)을 불러 대응 방법을 논의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장한, 장사, 동예를 제외한 '''모든 포로를 죽이는 것이었다.'''장한 장군 등이 우리를 속여서 제후군에게 항복을 했다. 오늘 우리가 진군을 파하고 관중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제후들은 우리들을 그들의 노예로 삼아 동쪽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부모, 처자는 진나라로부터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여전히 수가 많은 진나라 항졸들이 아직도 마음속으로 우리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관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우리들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일이 매우 위험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그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죽이고''' 장한, 장사(長史) 사마흔, 도위(都尉) 동예(董翳) 등 세 사람만을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야 되겠다.
2.3. 대학살과 초나라군의 함양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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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초군은 야밤에 진나라의 (항복한) 병졸들을 습격하여 20여 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신안성(新安城) 남쪽에 묻어 버렸다.[7]
─ '''사기 항우 본기'''
'''20만 진나라 포로들은 모조리 깊은 밤에 경포에게 습격당해 신안성 남쪽에 묻혔다.'''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다가 신안(新安)에 당도하자 경포를 시켜 깊은 밤을 이용하여 (장한이 데리고 항복한) 진나라 군졸 20여만 명을 습격하고 묻어 버렸다. ─ '''사기 경포 열전'''
전한시대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이 일을 간략하게 '그런 일이 있었지.'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가는지라 자세한 정황은 나오지 않는데, 경포 열전에서의 기록을 보면 항우의 명령을 받고 일을 직접 시행한 사람은 경포로 보인다. 항우 본기, 경포 열전에서는 야밤을 틈타 기습적으로 일을 저지른 것으로 묘사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장평대전의 학살을 비롯해 대학살을 두루뭉실하게 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너무 참혹해서 쓰는 걸 기피한 것 같다.
당시 학살의 이유에 대해 항우 본인의 언급은 '복종하지 않는다.'였지만 이미 그 이전 대치 상황부터 군량이 부족하다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군량 문제가 큰 것 같다. 이미 거록대전 때 송의가 진나라와의 싸움을 한 달이나 지체했고 항우가 거록대전 당시 배수진을 치는 과정에서 군량을 대부분 없애버렸다.
항우는 송의를 죽이고 상장군 자리를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초나라에서도 제대로 지원해줄 리 없었다.[8] 거기다 초의제가 '관중을 가장 먼저 함락시킨 자를 관중왕으로 삼겠다'는 약속 때문에 유방이 앞서나간 상황에서 시간이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주위의 성을 쳐서 식량을 빼앗거나 오창을 차지해 그곳의 곡식을 먹으면서 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렇다고 좋은 선택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게 유방은 적진인 함양에 들어가면서 약법삼장을 약속한 것만으로 관중에서 지지를 얻었으며, 포로가 된 진 병사들은 본래 아방궁에서 채찍 맞아가며 공사한 인부들에다 구육국 출신도 많았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병사들의 불만을 설득해서 함양 공격에 앞장세울 수도 있고, 감당이 안된다면 그냥 포로들을 풀어줘서 고향에 돌려보낸다는 방법도 있기 때문.
다만 군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포로를 대량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모순이므로 처음부터 계획된 배신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장한은 더더욱 비참해진다.[9]
대학살 이후 항우는 서쪽으로 전진했고 잠시 유방의 부대와 대치한 후에 홍문연(鴻門宴)이라는 해프닝을 겪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함양에 입성했고 '''여기서 다시 백성들을 마구 도륙하였다.''' 이미 항복을 했던 진왕 자영(子嬰)을 살해했으며, 아방궁에도 불을 질렀는데 불은 3개월이 지나서야 꺼졌다. 항우는 아방궁에 있던 온갖 보물과 여자들을 거두어 들이고 다시 동쪽으로 물러났는데, 이 행동에 대해 항우의 신하인 한생(韓生)[10] 이 충고했다.
그러나 이미 진나라의 궁전은 항우가 다 태워먹은 후라 함양은 허허벌판이었고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항우는 이렇게 대답했다.관중은 험산과 큰 강에 의지할 수 있고, 땅은 비옥하여 패왕의 도성으로 삼을 만합니다.
그러자 한생은 어이가 없어 이렇게 비웃고 말았다.부귀하게 되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을 입고 밤중에 걷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한생을 가마솥에 삶아서 죽이고 기어코 동쪽으로 물러나고 말았다.[11]'''사람들이 초나라 사람들에 대해 말하기를 '관을 쓴 원숭이와 같다(沐猴而冠耳)'고 하던데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구나!'''
팽성은 삼국지의 서주에 해당하는 곳으로, 삼국지에서도 허구한 날 공격받고 털리기 일쑤였던 것에도 알 수 있듯 평화로운 시대라면 모를까 전란의 시대에서 군벌의 본거지로 삼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사방팔방이 탁 트인 평야라서 도시가 성장하기는 좋지만 전쟁에서 방어하기가 어렵기 때문. 규모가 큰 평야성일수록 방어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초한쟁패 당시 허구한 날 한나라 쪽에서 항우의 본거지에다 공격이 날아온 건 우연이 아니다. 이후 유방도 비슷하게 공격받기 쉬운 낙양에 자리잡으려다 유경의 말을 듣고 좀 더 안정적인 장안에 자리를 잡았다.
3. 영향
진나라의 항복한 군사 20만 명을 속여 신안에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그 장수들을 왕으로 봉했으니 그 죄가 여섯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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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고조 본기'''. 광무 대치 당시 유방이 항우의 열가지 만행을 비난할 때 했던 발언.
보통 항우의 학살을 이야기하면 진나라군 20만을 학살한 이야기를 주로 언급한다. 가장 많은 사람이 학살됐고 명분도 가장 없었던 것이 바로 이 학살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죽하면 한신이 나중에 이걸 거론하면서 항우와의 대결에서의 승리를 확신했겠는가. 심지어 이러한 학살은 항우에게 처음이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항우의 학살이 고대의 전쟁사에서 유독 악질적인 행위로 평가받는 이유는 항우는 적군이나 포로를 상대할 때보다도 '''무력화된 민간인에게 이유없이 더 악랄했기 때문이었다.'''더욱이 그 남은 군사들을 속여 제후군들에게 항복시킨 다음 진나라에 들어오다가 신안(新安)에 이르자 항왕이 20여만에 달하는 그들을 속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놓고도 유독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 등만이 목숨을 건짐으로 해서 진나라의 부형[12]
들은 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은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오늘 항우가 그의 위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삼진(三秦)의 왕에 임명했으나 진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사기 회음후 열전'''. 한신이 유방에게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항우를 이길 수 있는 여건들을 설명할 때 했던 발언.
항우는 이미 학살 전력이 여러 번 있었다. 항량이 살아있던 시절 항우는 별동대를 이끌고 양성(襄城)이라는 곳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쉬울 것 같았던 싸움은 성안 사람들이 힘을 모아 싸움으로서 의외로 어렵게 전개되었는데, 기어코 성을 함락시킨 항우는 '''성 내의 모든 사람들을 구덩이에 파묻고 죽여 버렸다.''' 그리고 이후 항보 전투에서 장한을 격파한 후 추격하는 과정에서 성양을 다시 몰살시켜버렸다. 이러다보니 초회왕 측은 '항우가 지나가는 곳마다 남아나는 사람이 없다'고 치를 떨었고, 진나라 내지에까지 소문이 쫙 퍼져서 유방이 진나라 정벌 도중 만난 완성 지역의 태수는 '초나라 놈들은 항복해도 다 파묻어 죽인다고 들었다.'라면서 유방이 안전을 약속하기 전까지는 결사항전하려다 차라리 자살하려고 했다. 단순히 끝까지 적대한 자는 몰살시키고 일찍 항복한 자는 살려준다는 몽골식 방법[13] 이었다면 납득할 수 있겠지만 항복하든 저항하든 모조리 죽이고 본다면 당연히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
항우는 이 전대미문의 포로학살을 벌인 후에 함양에 입성한 후에도 학살을 자행했고 이후에도 초한쟁패를 치르면서 여러차례 학살을 저질렀다. 특히 함양의 경우엔 얼마나 집요하게 뒤집었는지 바로 다음해에 대기근이 터져서 쌀 한가마니에 1만전이 넘어갔고, 먹을 게 없어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뜯어먹는''' 아비규환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후 신안에서의 학살이 있던 후에 제나라를 공격할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나라의 전영(田嬰)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에서 항우는 '''항복한 전영의 병사들을 모조리 파묻어 생매장하고 점령지의 제나라인들을 눈에 띄는 족족 몰살시켰다.''' 이러한 면으로 볼 때 신안에서의 대학살은 급작스러운 행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항우가 밥먹듯이 자행하던 만행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다못해 포로만 학살했다면 무장 병력에 대한 처리 문제와 식량 부족이라는 핑계라도 생각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점령지의 민간인을 이렇게 집요하게 죽인 것에는 도저히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시간과 수고를 더 들여서 얻는 거라곤 납세자와 세금이 줄어드는 손해뿐이다.
장한이 부대를 일으켰을 때의 주력 병사들은 여산에서 일하던 죄수들이었다. 여기서 징병된 노동자들은 세금을 제대로 못 냈다던가, 만리장성 노역에 제 때 못 왔다던가같은 이유로 온 경범죄자 내지는 무고한 자들이 태반이었다. 사실 근대 시기인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범죄가 중한 자들은 무조건 사형이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경범죄자 내지는 누명 쓴 사람들이라는 것은 뻔했다. 당대 그나마 관대했다는 조선도 역적이 아니면 참형과 교형만 했기 때문일 정도였다.
거기에 학살된 인원 중에는 '''진나라 출신이 아닌 구 초나라 출신을 포함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장한은 진승과 오광의 난을 진압하고자 여산의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을 도와서 전공을 올리면 노역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말하며 징병했다.
당시 항우 밑에 있던 영포도 여산에서 노역을 하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을 모아 무리를 지어 세력을 만든 자고 유방도 여산으로 노역자들을 호송하다 중간에 튀어서 세력을 만든 자다. 따라서 이를 잘만 이용하였다면, 항우는 이 반감을 이용해서 초나라에 대한 민심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었다.
이는 진나라 본토의 민심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죄수 출신 진병들이 다른 열국 출신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진나라 조정의 군대였으며 진나라 본토 출신의 병사도 적지 않았다. 이런 조정의 군대가 초나라에게 항복하고 제대로 초나라 군대로 대접받고 당당한 '해방군'으로 싸운다고 정해보자. 당연히 진나라 본토 사람들은 진나라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상당히 상실하고 항우와 초나라에게 지지를 표했을 것이다. 아래에 언급하듯이 당장 유방이 이렇게 해서 민심을 확보했다.
그런데 항우는 여기서 학살이라는 최악의 방법을 저질러버렸다.
이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봐도 지극히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윤리적으로도 용납받지 못할 짓이었다. 아무리 고대의 윤리관과 인권 개념이 현대와 다르다고는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륙내는 짓은 당대의 윤리관에도 도를 한참 넘었다. 장평대전에서 백기가 벌인 학살이 두고두고 비난받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상술했듯 유방은 광무 대치 당시 항우의 학살을 죄악으로 규정하며 규탄했다.
이러한 학살로 항우가 얻은 이득은 당장의 수고로움을 던 정도밖에 없었고, 장기적으로는 항우에게 큰 악영향을 끼친다.
우선 진나라는 망국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과거 열국을 호령하던 생산력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전국칠웅이 쟁패할 당시 진나라의 생산력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압도했고 수도가 갈려나갔어도 진나라 전역을 놓고 보면 전성기 시절의 힘은 남아있었다.
만일 항우가 진나라 사람들을 잘 대했다면 진의 영성 조씨가 쫓겨난 자리를 대신 차지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신안에서 저질러진 도살 행위가 널리 알려지면서 진나라 사람들은 항우에게 모조리 등을 돌려버렸다. 항우는 함양에서 만행을 부린 뒤 진왕 자영과 영성 조씨들을 학살했다. 진나라 백성들이 항우에게 품었을 분노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유방이라는 대안까지 있기에 더더욱 그랬다. 항우는 관중을 포기하고 팽성으로 돌아갔으며 구 진나라를 삼진으로 나누어 사마흔, 동예, 장한에게 분봉시켜 관중이 항우에게 복종할 이유도 없어졌다.
항우가 한나라 출신 한생의 말대로 관중을 나라의 본거지로 잡고 직접 통치했다면 압제를 하든 관용을 베풀든 가능했다. 관중에 머물지 않기로 한 이상 진을 그대로 뒀다가는 바로 들고일어날 게 뻔하니 힘을 약화시키고자 삼진으로 나눈 것은 이해가 가능하지만 애초부터 학살로 대진관계를 파탄내지 않았다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진나라 백성들은 이세황제와 환관 조고에 대한 원한은 컸을지언정 오백 년 동안 진 땅을 통치한 영성 조씨 일족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했다. 그런데 삼진을 통치하는 자는 영성 조씨가 아니라 진 장수였다 항우에게 항복해서 겨우 목숨을 건진 사마흔, 동예, 장한이었다. 거기다 포로학살 때문에 이들의 부하들도 모두 잃은 상황이었다. 관중 사람들은 삼진의 제후들을 매국노로 인식했다.
피지배민들의 분노가 정점인 상황에서 지배자가 이를 억누를 힘도 대처도 없다면 결과는 보나마나다. 홍문연 사건에서 8개월, 한고조 세력이 파촉에 간 지 4개월 만에 한고조는 삼진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이를 막을 삼진의 군대는 모두 신안에 묻혔으니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제나라에서의 학살도 마찬가지였다. 항우는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포로들을 생매장하고 힘없는 부녀자와 노약자들을 모조리 묶어 포로로 만들어 버리고, 많은 고을에서 학살을 자행했는데 제나라 사람들은 항우에게 겁먹은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 초에 반기를 들면서 결사항전하고 전횡(田橫)이 수만 군세를 일으켰다. 결국 항우가 제나라에서 시간을 잡아먹는 사이 한고조가 팽성을 털어버렸고, 팽성대전에서 한을 대파시키는 것으로 되찾았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고 있었다.
항우가 저지르는 학살들은 게릴라를 뿌리뽑기는커녕 저항만 키웠다. 초한쟁패 후기 항우는 외황(外黃)을 공격하는데 쉽게 항복되지 않자 15살 이상은 모두 죽이려고 했는데 13살의 아이가 항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항우는 외황의 주민들을 학살하지 않고 용서해주었는데, 이후 항우가 동쪽으로 진군하자 여러 성들이 항복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사나운 팽월이 우리를 해칠 수 있기에, 외황(外黃)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짐짓 항복한 척 하고 대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오시더니 외황의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고 하십니다. 어찌 백성들이 대왕께 몸을 의탁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곳 외황 동쪽 양나라 땅의 10여 개 성은 모두 두려워하여 필사적으로 항거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한고조는 서초패왕과 대조되는 처신과 인식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도적떼들에 가까웠던 한 군대가 약탈과 유린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았는데, 장량이 한고조에게 고하자 한고조는 함양에 들어가는 것을 그만두고 인근에 머물렀다. 이외에도 간단한 법제로 가혹한 법에 지쳐있던 진 국민들을 배려하고 자영을 후히 대우해서 진 사람들의 민심을 손에 넣었다. 직후 항우가 함양에서 만행까지 저질렀으니 진 사람들이 누구 편을 들지는 보나마나였다.
초한쟁패에서 한고조는 관중을 장악한 뒤 관중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초한쟁패 당시 관중으로부터 막대한 인원과 물자를 징발하고 계속된 싸움으로 관중이 피폐해졌음에도 관중은 별다른 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관중의 민심을 다잡은 소하의 공적도 크지만 항우에 대한 구 진나라의 증오심이 그만큼 거대했다고 볼 수 있다.[14]
항우의 학살은 여러 차례 만행으로 언급되고, 유방은 이걸로 항우를 매도했으며, 한신은 전략적 관점에서 한이 중원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삼진을 무너뜨릴 요소로 평가하는 등 당대에도 주목을 받았다. 도무지 옹호할 수 없는 학살이었던 것. 그러나 항우는 자기가 한 짓이 자기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걸 모르는지 전사할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즉, '''나는 잘못 없고 그저 싸우기만 했는데, 지금 내가 망하게 된 것은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하늘이 나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살 관련한 부분만 해도 그렇고, 그외에 항우의 여러 실책을 고려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말.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전혀 이해를 못했던 것이다.''' 항우가 패망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었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 사기 항우 본기
사마천을 비롯한 후대의 역사가들은, 항우의 인식에 대해 이러한 평을 남겼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다. 이에 5년 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사마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초가 해하(垓下)에서 패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었는데, 말하기를 '하늘아!'라고 하였다니, 믿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대답하였다. "한은 여러 정책을 다하였고, 여러 정책은 여러 명의 힘을 다하게 하였지만, 초는 여러 정책을 싫어하고 스스로 그 자신의 힘을 다하였던 것이오. '''다른 사람을 다하게 하는 사람은 이기고, 스스로 다하는 사람은 지는 것이오.'''" 그러니, 하늘이 무슨 까닭이겠소. ─ '''양웅'''[15]
4. 매체
드라마 초한전기에도 42화에 신안학살이 나온다.
장한이 항복한 이후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는데, 20만명이나 불어난지라 진격속도가 늦어진 데다, 원래 군량도 부족한데 숫자만 늘어난지라 항우 입장에선 이래저래 골치아픈 상황이었다. 게다가 진나라 병사들에겐 형편없는 식량이 지급되자 진나라 병사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가 몇몇 병사들이 난동을 피우기도 한다. 신안에 도달할 때쯤 항우는 진나라 병사들의 배급을 초나라 병사들 것과 같게 지급하라고 지시하나, 이미 병사들의 불만은 끝에 도달했고, 결국 몇 천 명의 진나라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용저가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개박살나고 용저 혼자 간신히 살아남는다. 물론 반란은 곧 진압된다.
이 사건 직후 항우는 부하 장수들을 불러놓고 진나라 병사들을 어찌 처리할지 의논하는데, 항우가 다 죽이자고 하자 범증도 별 수가 없었는지 항우의 의견에 따른다. 결국 병사들을 골짜기에 몰아넣은 뒤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병사들은 찔러 죽이다가 막판에는 '''기름을 뿌려서 다 태워버린다.'''
항우는 이 광경을 보면서 진나라와의 전투에서 죽은 초나라 장병들의 명복을 비며 어쩔 수 없이 죽인 거라고 정신승리를 시전한다. 진짜 싸이코패스다(...).
이전에 나온 양성 학살에서 항우는 '망국의 한'이라는 미명 아래 진나라 사람들을 학살한 것을 되려 자랑스러워하다 못해 스스로를 합리화하기까지 해 숙부에게 손찌검까지 당했으나 신안대학살에선 범증이 '저들을 보십시오. 님이 행동에 따라 부하가 될 수도, 적이 될 수도 있음. 천하가 그런 거임'이라는 말에 깨달은 바가 있는지 상당히 그들을 배려했으나 일이 틀어지자 어쩔 수 없이 행한 것으로 묘사했다. 이후 43화 초반부까지 우희의 품 속에서 흐느끼는 항우가 나오는 등 항우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묘사했으며, 그 부하들 역시 충격을 심하게 받았는지 경계근무시간에 투입조차 안한 채 술을 퍼마시는 한신에게 종리매가 아무 말도 못하는 등 초나라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상반된 묘사를 보여준다. 실제 역사랑은 달리 항우에게 상당한 옹호를 해주고 있다.
다만 학살이 시작되기 직전에 진나라 병사들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조카와 같이 진나라 군대로 종군했던 삼촌이 화살맞고 죽어가는 조카를 살려보려고 애쓰는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 그 외에도 구덩이 안에 몰린 병사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찌됐건 잔인한 학살극이란 사실도 빠트리진 않았다.
5. 그 외
역사에서 신안대학살과 비슷한 사례로 삼국시대(중국) 때 조조가 저지른 서주 대학살이 있다. 신안대학살에 비해 그 충격과 파급력은 적어보이지만, 그렇다고 조조의 학살이 당대에 아예 무시되고 없었던 일로 치부되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실제로 서주 대학살 직후 여포가 조조를 공격할 구실로 써먹었고 연주 지역의 백성들과 호족들이 장막과 여포에게 호응했던 것은 조조의 서주대학살로 인한 민심의 이반의 영향이 대단히 컸으며, 이는 조조가 복양성에서 악전고투를 펼치는 원인이 되었다. 민심이 반조조로 돌아선 데다가 유비도 이 사건을 계기로 조조에게 사실상 등을 돌렸으며, 그뿐만 아니라 서주 부근의 인구와 당대 명사들이 조조의 대학살을 보고 겪거나 전해듣고 형주나 양주 등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이들은 고스란히 손권 세력과 유비 세력의 중진이 되었다.[16][17] 뒷날 조조의 형주 침공 당시 형주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가재를 챙겨 유비를 따라갔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유비의 인망도 있겠으나 서주대학살로 인한 백성들의 공포가 아직도 크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같은 일을 겪을까봐 도망가려고 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조조의 천하 통일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촉한과 동오에서 잘 써먹었다. 무엇보다 조조도 관도 대전 이후에는 더 이상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대를 넘어 후세에까지 조조의 대악행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신안대학살과 마찬가지로 역시 학살자한테 악영향을 끼치고 그 적대세력에 이득을 줘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