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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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나라의 제13대 황제이자, 남송의 제4대 황제. 묘호는 영종(寧宗)[2] . 시호는 법천비도순덕무공인문철무성예공효황제(法天備道純德茂功仁文哲武聖睿恭孝皇帝)이다. 휘는 확(擴)으로 광종의 차남이며 아버지 광종이 강제퇴위 당한 이후 뒤를 이어 즉위했다.
2. 생애
2.1. 즉위 전의 삶
1168년, 송광종과 자의황후 이씨(이봉랑)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말을 더듬고 말솜씨도 뛰어나지 않은 데다[3] 여색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더해서 아버지 광종처럼 어리숙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본래부터 스스로를 잘 알고 명철하게 자신을 판단했고, 병풍에 '''찬 음식을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고 술을 많이 마시면 병이 나니 적절히 하자'''라고 적어 놓고 실제로도 병풍에 적은 구절처럼 늘 검소한 생활을 하였기에 신하들이 감탄했다.
정신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광종이 할아버지 효종과 사이가 틀어지고 문안인사를 드리지 않자 이를 반대하여 건의했으며, 광종이 효종의 승하 소식에도 평소처럼 효종을 의심하고 후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자 광종 앞에서 울면서 조부 효종의 승하 소식을 알리고 효종의 장례를 치뤄야 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광종은 아들의 간곡한 호소에도 이마저도 믿지 않으면서 후궁으로 향했고 오히려 의심하였다. 결국 재상 조여우(趙汝愚)[4] , 한탁주(韓侂胄)[5] 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하고 태상황이 되자 조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2.2. 황제로서의 삶
영종은 즉위 전부터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고 이들을 위한 정책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조부 효종때 증조부 고종의 운구를 호송할 당시 길을 가다가 밭에서 힘들게 파종을 하던 농민들의 삶을 두 눈으로 본 뒤, “평상시에 구중 궁궐 안에 있었으니 어떻게 노동의 힘듦을 알 수가 있었겠소.”라고 말했고 즉위 후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안정시키고자 황실종친이자 재상인 조여우의 도움을 받아 매년 조세를 낮추고 벌금과 노역을 면제하는 명을 반포하고 스스로도 즉위 전처럼 소박한 복장으로 살면서 사치품을 가지고 다니거나 사용하지 않았다.
정월대보름인 원소절에도 여느 황제들처럼 연회를 베풀지 않고 홀로 앉아 대보름을 감상하였는데 이에 황제를 모시던 환관이 연회를 왜 베풀지 않냐고 묻자 “네가 뭘 알고 그러느냐! 지금 밖의 백성들은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는데 짐이 술을 마실 생각을 하겠느냐!”라고 크게 화를 내고 꾸짖었던 일화도 있다. 또 영종이 황궁을 나와 경성 내 정원을 구경가던 날, 임안의 백성들이 황제를 앞다퉈 보기 위해 몰렸다가 짓밞혀 죽는 백성들까지 생긴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때 영종은 이를 알고 자신때문에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고 책망하고 크게 후회하였고 이후에는 황궁을 나와 명승지를 구경하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여우의 추천으로 시독으로 주희를 임명해 주희에게 학문을 배웠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광종을 강제퇴위시키고 영종을 즉위시킨 일’을 큰 공로라고 생각하던 한탁주는 조여우와 달리 이 공적으로 권력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탁주의 인격을 좋아하지 않은 조여우 등은 한탁주을 멀리했고 이것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조여우 등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시작해 1195년 대간을 이용하여 재상 조여우를 몰아내고 조여우 편에 섰던 주희, 주필대, 유정, 왕란, 팽귀년 등 59명을 금고형에 처하게 했다. 거기다 한탁주와 그를 따르던 당파들은 주자학을 거짓 학금이라고 탄압했는데 이 사건들을 '''경원의 당금'''이라고 부른다.
영종 재위 연간 중 북쪽에서는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침공했으며 금나라가 점차 망국의 길로 빠지던 상황이었고, 남송에선 1204년 과거 고종때 있던 일을 재평가하여 악비를 악왕(鄂王)으로 추봉하고, 진회의 봉작을 삭탈하였다. 경원의 당금을 일으켜 조여우 등 자신의 반대 당파를 몰아내고 재상이 된 한탁주는 태황태후(이모)와 황후(조카)가 죽은 뒤 자신의 입지가 점점 줄자 1206년 금나라가 비실비실하다고 무리하게 금나라 북벌을 강행했다. 바로 개희북벌(開禧北伐)이라고 부르는 남송과 금나라간의 전쟁인데 애당초 남송 조정 내 북벌론자들조차 반대했고 개전 4개월 뒤 금나라가 본격적으로 반격하면서 대패했다. 이후 남송은 금나라와 가정화의(嘉定和議)라고 불리는 강화협정을 맺었는데, 이때 대노한 금나라 장종은 1207년 열린 남송과의 강화협정 중에 남송이 금나라와 화의하기 위해서 내건 5가지 필수 조건 중 하나로 이 사태를 주도한 재상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했다.
평소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황실과 조정을 농락해오던 한탁주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영종의 계후 공성인렬황후 양씨는 개희북벌 전에 한탁주의 주장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반대했던, 예부시랑 사미원(史弥遠)에게 한탁주를 제거하라는 명분을 실어주었고 조정 내부에서도 한탁주에 대한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6] 아울러 사미원 등은 영종에게 한탁주를 제거할 것을 권했다. 결국 한탁주는 1207년 11월 사미원의 주도로 계획된 정변으로 죽임을 당하고 참수되어 그 머리가 소금에 절여진 뒤 금나라로 보내졌으며, 그의 머리는 금나라 수도 연경의 깃대에 내걸렸다. 이 때 장종은 종묘에 가서 조상들에게 다시 한 번 송나라에 대한 승리를 고했다. 한편 남송에서는 사미원이 전권대신이 되어 금나라와 가정화의를 맺은 이후 26년 동안 재상의 지위를 차지해 남송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영종 연간 동안 남송의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이 벌어졌고 한탁주, 사미원 등 권신들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또한 국제정세 역시 변하기 시작했는데 금나라는 차차 기울어가기 시작한 반면, 몽골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었다. 1207년 몽골은 서하와 전쟁을 시작해 1210년 서하를 복종시켰으며 1211년부터는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영종 재위기 후반에는 남송의 옛 수도였던 개봉으로 천도한 금나라가 남송의 영역으로 침공하여 개희북벌 이후 남송이 다시 전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2.3. 가족관계와 후사문제
영종은 공숙황후 한씨(恭淑皇后 韓氏), 공성인렬황후 양씨(恭聖仁烈皇后 楊氏) 외에도 3명의 후궁을 두었고 아들이 9명이나 있었지만 모두 2살도 못 돼서 요절해버렸다. 더구나 당시에는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광종의 자손이 자신 외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태조의 아들 조덕소의 10세손 조순(趙詢)[7] 을 뽑아 양자로 삼고 황태자로 삼았으나, 조순마저 요절하는 바람에[8] 태조의 아들 조덕방의 9세손인 조횡[9] 을 뽑아 새로 양자로 삼았다. 조횡은 원래 광종의 손자 위(魏)왕 조병[10] 의 양자였으므로 영종은 조카뻘인 조횡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조횡은 양모였던 공성인렬황후 양씨와 사미원을 늘 비방했고, 이 사실을 알던 재상 사미원도 이런 조횡의 행동을 싫어하였기에 서로 불화하여 사이가 좋지 못했다. 이후 사미원을 필두로 한 조정은 노쇠해진 영종에게 조횡을 폐할 것을 건의했지만 영종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리고 얼마 후 영종이 병석이 있을때, 사미원과 그를 따르는 대신들이 공성인렬황후 양씨를 설득해 기왕 조병의 양자이자 태조의 11대손 조귀성(조여거)을 다시 양자로 뽑아 이름을 조윤으로 고치고 태자로 삼게 했다. 조윤은 영종이 승하하자 곧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이종이다. 한편 조횡은 이종 즉위 직후 제왕에 진봉되었다가 사미원에 의해 자진을 강요당한다.
영종은 1224년 죽은 뒤 영무릉에 안장되었다.
3. 둘러보기
[1] 이 연호에서 유래한 경원황제(慶元皇帝)의 별칭이 있다.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2781&sType=_detail&q=&secType=uf&&fq=catePeriod2_fct%3A%EC%A4%91%EA%B5%AD%2F%EC%86%A1&fq=cateType2_fct%3A%EC%9D%B8%EB%AA%85%2F%EC%99%95%EC%8B%A4%2F%EA%B5%AD%EC%99%95[2] 같은 송나라의 황제이자, 북송 시대의 영종과 한자는 다르다.[3] 이런 까닭에 즉위 후 금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자리에서 말솜씨가 좋은 환관들이 병풍 뒤에서 영종을 도와줘야 했다.[4] 태종의 장남인 한공헌왕 조원좌의 7대손이다[5] 북송의 명신 한기의 증손자이며, 외척이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으며 고종의 처조카이자 영종의 황후인 공숙황후(恭淑皇后)의 종조부이다[6] 개희북벌은 애당초 남송 조정 내 강경북벌론자들조차 지금 국력으로는 도저히 무리이며 20년은 철저히 준비하고 실행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로 반대의견이 컸다. 그럼에도 한탁주와 그의 당파들은 이마저 무시하며 북벌을 실행에 옮겼다.[7] 본명은 조여원(趙与愿)[8] 시호는 경헌태자[9] 본명은 조귀화(趙貴和)[10] 광종의 차남 조개의 외아들로 후사없이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