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국

 

吳龍國
1904년 ~ ?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군위(軍威).
1904년 전라남도 대정군 우면 신효동(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신효동)[1]#에서 태어났다. 제주공립농업학교(현 제주고등학교),일본 도쿄대학 법제학회를 졸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제주도 서귀면 회계, 제주농회 서기, 제주도 안덕면장, 제주도 서귀면장, 서귀면 효돈수리조합장 등을 지냈다.
8.15 광복 후 남조선과도입법의회 의원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제주도 남제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제주도 남제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강경옥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납북되었다.
한편, 1962년 6월 8일 동아일보 - 납북인사 북한생활기 - 죽음의 세월 53회에는 그의 납북 이후의 행적이 잘 기록되어 있는데, 오용국은 납북 직후 최린·손진태·백관수·서정희·현상윤·고원훈·정인보·백붕제·김상덕·강○택(姜○澤)·형덕기(刑德基)·이담(李潭)·김창덕(金昌德) 등과 함께 반동분자로 낙인찍혔다고 한다.죽음의 세월 7회
휴전협정 체결 후 그는 같은 제헌 국회의원 출신인 김경도와 함께 평양직할시의 어느 도자기 공장으로 보내져 일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직업총연맹 회의에서 신랄한 사상비판을 받았고, 이에 그는 홧김에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되려 '무식한 자들'이라고 욕을 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곧 평양시 연화동 근처의 어느 창고 같은 병영에 수용되었고, 그곳에 있던 30여명의 남성들과 함께 평안북도 철산군에 있는 광산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져 탄광 광부로서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전후로 완전히 숙청남조선노동당원들로 수천명에 이르렀다. 그 수용소의 노동반장은 유독 오용국에 대하여 밤낮으로 계획 수량을 완수하지 못한다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상부에 보고하여 식량배급을 줄이고 감봉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는데, 실제로 6개월의 감봉을 당했고 일당 7백그램의 식량에서 1백그램으로 식량배급이 줄여지기도 했다.
오용국은 이에 보복심으로 가득찼고, 어느 비가 몹시 퍼붓던 날 곡괭이로 노동반장의 허리를 수 차례 내리찍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는 곧 내무서원에 체포되어 어디론가 연행되었고, 이후의 생사는 알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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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근의 상예동, 서호동, 호근동, 서홍동, 동홍동, 토평동, 상효동, 하효동과 함께 군위 오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