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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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晉泰
1900년 12월 28일 - ?
1. 개요
2. 생애
3. 학문적 업적
3.1. 민속학 분야에서의 업적
3.2. 신민족주의 사학
3.3. 기타의 연구


1. 개요


일제강점기의 사학자. 우리 역사에서 등한시하기 쉬운 민속학과 고대 문화 전반에 걸치는 폭넓은 연구를 한 특이한 학풍의 학자. 저서 『조선민족문화의 연구』와 『조선민족사개론』은 한국 민속과 한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지금까지 학술적으로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정도이다.

2. 생애


1900년 12월 28일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현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에서 손수인의 차남으로 탄생하였다. 5살되던 해에 해일로 어머니를 여의고 가난에 쫓겨 생활 근거지를 옮기며 전전하였다. 5살에 하단리를 떠나 12살까지 구포에서 생활하였는데 양산군 좌이면 남창리(현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였기 때문에 호를 남창(南滄)으로 썼다. 12살에 한성으로 올라 왔다가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양에서 잡화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19년 다시 구포에 왔다가 3.1 운동에 동참하였는데 3월 29일 구포 장터에서 일어났던 독립 만세 운동에 앞장서다가 주동자로 잡혀 4개월 징역 언도를 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다 최규동의 도움으로 중동학교에 입학하였고 1921년 중동학교를 15회로 졸업하였다.
그 후 경상북도 성주 이부자의 후원으로 동경에 건너가서 1924년 3월 와세다 제1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1927년 졸업하였다. 그 때의 지도교수가 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로 일본사인류학이 전공이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 민속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 1920년대 중반 동경에서 방정환 선생과 함께 '색동회' 활동을 하였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는 1930년부터 동양문고의 직원으로 근무를 하였는데[2] 이 때 시라토리 구라키치(泊鳥庫吉)와 같은 학자들을 만났으며 이 기간 동안 일본학사원 관비로 한국 전역을 답사하고 민속 조사를 하였다. 1932년 정인섭, 송석하 등과 '조선민속학회'를 결성하였고 연영화 여사와 결혼하였으며 장남을 보았다. 1933년 이병도, 조윤제 등과 함께 '진단학회'를 결성하였으며 1934년 영구 귀국한 이후부터 민속학 연구에서 차츰 한국사 연구로 그 관심이 바뀌어갔는데 연희전문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여 동양문화사를 강의하였다.
1934년 9월 보성전문학교안암동으로 옮기자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문명사를 강의하다가 1937년 도서관 건물이 완공되자 문명사를 강의하는 전임 강사와 함께 도서관장을 맡았다.[3] 1939년 보성전문학교에서 문명사를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으며 도서관장도 계속 맡았다. 그가 도서관장을 맡으면서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민속학 자료들은 후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기반이 되었는데 오늘날에도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희귀한 민속 자료가 방대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에 감탄한다고 한다.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8년 동안 보성전문학교에서 문명사를 강의하는 교수 겸 도서관장을 맡고 있었으며 이때 가깝게 지내던 이가 안호상 교수였다.
1946년 서울대학교에 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위장병과 학생들의 동맹 휴학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949년 3월 5일 '학생 호국대'를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안호상이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맡기도 하였다. 1949년 9월 7일 서울대학교 사범대 학장을 그만두었다가 1950년 5월 18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 학장을 맡았는데 문리과대 학장 재임시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교직원들에게 밀린 4달치 월급을 나눠주다 시간을 놓쳐 한강을 넘지 못하였다. 이후 삼각산에 숨어 있다가 9.28 서울 수복 직전에 발각되어 납북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4]

3. 학문적 업적



3.1. 민속학 분야에서의 업적


한 마디로 한국 민속학 연구의 거인이었다. 민속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26년부터였는데, 처음에는 '토속여행답사기', '장승조사기' 등을 썼다.
최초의 저서는 '조선상고문화 의 연구'로 1926년에 일본어로 저술되었다. 당시 일본을 비롯하여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사조였던 진화주의에 의거한 연구로서, 샤머니즘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함께 이를 조선의 구체적 상황에 비추어 종교학적으로 구분하려는 시도가 매우 독보적인 작업이었다.
1927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민속학 논문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온돌, 민간설화, 중국민족의 원시신앙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지도교수인 니시무라의 영향이었다.
1930년, 동양문고에 근무하면서 논문 발표의 주제가 다양해졌다.[5] 이 시기 문헌에서 민속과 관련된 자료를 뽑아 놓은 노트가 13권이나 되며, 사료를 정리한 것이 수십 묶음이 남아 있다. 민속조사를 하며 면담한 내용을 적어 놓은 것도 수십가지나 남아 있다. 또한 영어나 불어로 된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요약해놓은 노트도 몇 가지가 남아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어와 몽골어 공부를 하던 노트가 남아 있어, 그가 얼마나 학문에 정진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특히 민간신앙, 구비전승, 사회생활 분야에 힘을 쏟았다. 민간신앙 분야에서는 복학무와 맹격을 포함한 무속일반과 서낭당, 장승, 솟대, 선돌, 삼신, 산신, 검줄, 그리고 역사문헌에 입각하여 조선과 중국 민족의 신앙도 연구하였다.
구비전승에 있어서는 신화, 전설, 민담, 무가, 동요, 그리고 욕설까지 연구대상으로 하였고, 사회 생활분야로는 데릴사위제, 과부약탈혼, 근친혼을 포함한 혼인풍속, 민간의 주거형태, 온돌, 뒷간, 석전, 갑자, 고구마의 전래문제, 줄다리기, 세시풍속, 그리고 고고학의 대상도 되는 고인돌을 연구하였다.
그가 한결같이 보여준 연구태도 및 방법은 사실 조선의 전통적인 학풍에 토대한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일부 민속분야의 서술에서 보여준 기본태도는 역시 역사문헌과 현지자료를 연계시키고 또한 인근 민족과 비교하는 데 있었다.[6]

3.2. 신민족주의 사학


1940년대에 들어서는 민속학 논문을 거의 쓰지 않고 역사와 사상에 대한 논문을 주로 발표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던 때부터는 신민족주의에 입각한 한국사의 저술을 계획하였다.[7] 남아 있는 친필 유고를 보면 孔子, 老子, 韓非子, 墨子, 孟子 등에 대한 요약과 그에 대한 비판을 적은 강의안이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중 '孟子와 社會思想'과 같은 글이 논문으로 발표된 것이다. 해방 이전에 이미 한국사 관계 자료를 발췌하고 체계화하였다.
그 후 신민족주의 사학을 외치면서 한국사를 저술하였다. 당대에 식민사관에서 자유롭지 않은 역사가들이 주류가 되어 실증사학이 대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민족주의 사학을 감히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하에서 처신한 행동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인 기준에서는'''.
그의 신민족주의사학은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면서, 또한 종래의 관념적인 민족주의적 한국사관을 실천적, 과학적인 민족주의적 한국사관으로 발전시키려 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란 감성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라고 하며 부인하였고,'''[8] '''앞으로의 민족주의는 감성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며. 현실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진정한 민족주의란 개방적이요, 세계적이요, 평등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신민족주의는 국제적으로는 모든 민족의 평등과 친화와 자주독립을 요청한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모든 국민의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균등과 그에 인한 약소민족의 단결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신민족주의는 국제적으로 전쟁을 부인함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계급투쟁을 거부한다. 인류의 이상은 투쟁과 파괴에 있지 않고 친선과 건설에 있어야 할 것이니, 민족의 이상도 그러하다는 것.
또한 진정한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적 민족주의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민족주의는 다시 봉건적인 것과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구별된다. 기존의 민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려고 한다면 봉건적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민족주의여야 한다. 다시 말해 신민족주의는 신민주주의와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9]
그의 신민족주의 사학은 1970년대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재조명을 받았다. '남창 손진태선생전집'이 1981년에 출간된 것도 그러한 일환에서이다. 그 후 1990년대에 들어와 '국제화'와 '세계화'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그의 신민족주의사학은 '열린 민족주의'라는 입장에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또한 21세기 들어 문화사와 생활사가 국내 역사연구의 주요 관심사가 되면서 그의 민속학 연구가 재조명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선악론, 감계주의, 교훈주의, 계급투쟁 부정의식 등으로 말미암아 한국역사에서 자본주의 사회 단계를 설정하지 못하였다는 비판도 동시에 제기되었다. 또한 신민족주의사관은 여전히 일원론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지나치게 현재적인 관심이 오히려 사실의 객관적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3.3. 기타의 연구


역사학과 민속학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구전으로 전승되는 자료인 설화, 무가, 민요 등의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하였다.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에 실려 있는 설화도 연구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시조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1] 그의 소장 도서 중에 1940년에 나온 니시무라 신지의 저서가 있는 것을 보면 그와의 관계는 오래 지속된 것 같으며 쓰다 소오키치(津田左右吉)의 지도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2] 와세다대학을 다니던 시절인 1925년부터 이미 동양문고를 드나들었다.[3] 김성수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 동양문고의 사서로 있었던만큼 도서관 경영에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서 적임자라 생각했다고 한다.[4] 사망 년도가 미상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5] 아마도 동양문고에서 많은 자료들을 섭렵하면서 민속관계 문헌을 많이 참고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6] 그들은 어떤 민속을 현장에서 목격하든지, 아니면 역사문헌에서 어떤 민속을 발견한다면, 그것들이 역사문헌과 민속현장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 궁금해 했다. 그리고 그러한 민속의 시간성과 지역성에 주목하고 초보적이나마 해석해 내려고 하였다. 또한 때로는 인근 지역의 민속과 비교하여 그 보편성과 특수성을 지적하고, 역시 그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시도하였다.[7] 이러한 변화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귀국해서 담당한 강의가 민속학이 아니라 동양문화사와 문명사였기 때문일 것이다.[8] 그러한 민족주의는 쇄국적, 배타적, 독선적인 것으로, 대외적으로는 침략적이며, 대내적으로는 전제정치 등의 문제를 일으킨다고 비판하였다.[9] 그러한 견지에서 종래의 우리나라 역사서술이 왕이나 귀족 중심의 역사였음을 간파하고, 역사가 온 계층이 통합되어 반영된 역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속학이나 고대문화에 전념한 것도 민중의 문화유산을 찾으려는 일념에서 나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