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키 유타카

 

'''오자키 유타카
((ざき(ゆたか|𝐘𝐔𝐓𝐀𝐊𝐀 𝐎𝐙𝐀𝐊𝐈
'''

'''이름'''
'''오자키 유타카 (尾崎 豊, Yutaka Ozaki)'''
'''국적'''
'''일본 [image]'''
'''출생'''
'''1965년 11월 29일, 도쿄도 세타가야구'''
'''사망'''
'''1992년 4월 25일 (향년 만 26세), 도쿄도 도쿄 니혼의과대학 부속병원'''
'''직업'''
'''가수, 싱어송라이터'''
'''학력'''
'''아오야마 고등학교 중퇴'''
'''신장'''
'''178cm'''
'''활동'''
'''1983 –1992'''
'''가족'''
'''父 오자키 켄이치
母 오자키 키누에
兄 오자키 야스시
妻 오자키 시게미
오자키 히로야'''
보다 자세한 내용은 블로그 참조.
1. 개요
2. 생애
3. 갑작스런 죽음과 논란
4. 평가 및 영향
5. 여담
6. 정규 앨범


1. 개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민을 내가 대신 짊어지는 일은 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예를 들어서 내 말을 이해하고서 나와 무언가를 나누어 가지려고 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지금의 나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안아줄 수 있다고 생각해. 때로는 과실을 범하는 일도 있겠지. 하지만 과실조차도 자신의 몸으로 부딪히면서 하나하나를 자신이 해결해가지 않는다면 새로운 걸음을 디딜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들어. 그걸 위해서 상처받는 일도 많을지 몰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새로운 첫걸음을 위해서 이 목숨을 걸어. 이게 내 삶의 방식이야. 웃고 싶은 녀석은 웃어! 나를 믿는 녀석은 따라와! 난...진실을 추구하고 있는 너희를 사랑하고 있어.'''

- 1985년 11월 15일, 국립 요요기 경기장 공연 중 <열다섯의 밤(15の夜)>을 부르기 직전의 MC.

일본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한국에서는 포지션이 리메이크한 I Love You 등 발라드 곡의 원곡자로 유명하지만, 자국에서는 록큰롤 전반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전설적인 뮤지션으로 평가받고 있다. 활동 당시에는 고등학교를 중퇴한 10대 락커라는 반항적이고 파격적인 컨셉으로 주로 젊은 연령대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현지 나이로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의문사한 이후부터는 그가 발표한 곡들 자체에 보다 집중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굳이 한국의 아티스트와 비교하자면 김광석[1] 또는 김현식[2]과 비슷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의 오자키 유타카는 그들보다 훨씬 클래식하다. 김광석, 김현식 모두 한국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가수이지만 젊은 세대에겐 이미 구식인데, 오자키 유타카는 아직 일본에서 10대, 20대에 의해 흔하게 커버되며 옛날 노래라는 인식도 거의 없다.[3][4] 그의 주요 CD와 DVD는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절판되지 않고 계속 판매되고 있고, 가끔 신상품이 발매되기도 한다. 아마존이나 HMV 같은 인터넷 음반 쇼핑몰에도 새로운 구매 리뷰가 계속해서 등록되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사노 모토하루[5]의 적자라 할 만 하며 잭슨 브라운, 브루스 스프링스틴, 빌리 조엘, 하마다 쇼고, 이노우에 요스이, 아나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활동 당시에는 반항적인 이미지를 배경으로 한 절대적 인기때문에 터부시되었으나 그가 죽고 난 후에 곡들이 재평가되어 〈열다섯의 밤(15の夜)〉이 '학교에서 담배를 피운다', '집을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훔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나간다' 등의 반항적인 내용의 가사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사진과 함께 실리게 되었다. 교과서의 설명에는 '1980년대에 활약하여 요절한 싱어송라이터', '작사 작곡에 몰두하여 라이브에서 자신의 곡을 전심전력을 다해서 노래한~' 등의 글이 실려있다. 실제로 라이브 때 오자키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는 듯이 절규하듯이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중간중간에 독백을 자주 넣곤 했다.
오자키의 음악은 알게 모르게 90년대 일본 음악의 밴드 붐에 크게 일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오자키가 일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관련된 고뇌를 적극적으로 가사에 다루며 인기를 끌었던 최초의 가수이기 때문이다. 오자키 이후 등장한 Mr.Children, Spitz 등은 이러한 자아성찰적인 면모를 자신들의 음악에서 주로 다루었고, 9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고, 그 후에 등장하는 범프 오브 치킨이나 RADWIMPS 또한 이러한 사조를 이어받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사잔 올 스타즈, 핫피 엔도 등 오자키 이전에도 일본에서 록이라는 장르에 크게 기여하며 큰 대중적인 지지를 얻은 밴드, 싱어송라이터들은 꽤 있었으나, 오자키처럼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드러내었던 아티스트는 꽤나 드물었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면에서 가치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2. 생애


학생 시절에는 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명문고인 아오야마가쿠인에 합격함과 동시에 육상자위대소년공과학교에 20대 1의 경쟁률로 합격. 그러나 머리를 짧게 깎아야하는 교칙 때문에 아오야마가쿠인으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흡연'''으로 정학, 밤 중에 시부야에서 친구들과 '''술마시다''' 대학생들과 한판 붙어 경찰이 출동하는 등의 말썽을 일으켜 무기한 정학을 받는 반항아적인 성향이 있었고. 결국 퇴학위기까지 가게되자 자퇴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이것이 첫번째 앨범을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6]
1983년 17세 나이에 《열다섯의 밤(15の夜)》[7], 《I Love You》 등이 수록된 1집 <17세의 지도>로 데뷔했으며 1985년에 발표한 2집 <회귀선>에 수록된 《졸업》이 '''락음악이라는 장르 + 사춘기의 10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사 + 곱상한 외모 +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가수로 데뷔한 이력''' 등으로 대히트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팬을 자처하는 10대들이 계속 늘어나기 시작하고 언론으로부터도 '10대들의 대변자'라는 명칭을 받게 되자 오자키는 학교 폭력이 문제시되었던 80년대와 맞몰려서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졸업》의 가사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여 학교 창문을 박살내는 학생들까지 나타나자 이 노래는 '''당대 일본에서 금지곡이 되었다.''' 당시 소속사측은 "오자키 유타카는 자신이 부를 곡을 직접 쓰는 뮤지션이지 아이돌이 아니다." 라며 오자키의 TV 출연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오자키 유타카를 접할 수 있는 매체는 라이브 공연, 잡지에 실린 그의 사진들과 인터뷰가 전부였다. 당시 오자키 유타카의 소속사인 마더 엔터프라이즈는 오자키의 카리스마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 매체에 실리는 오자키의 사진을 항상 흑백 사진으로 찍었고 오자키가 미소 짓는 모습이 파파라치 등에게 찍히지 못하게 철저히 막았다고 한다.
<졸업>의 히트로 오자키 유타카라는 이름은 굉장히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그의 인기는 데뷔 2년도 채 되지 않은 1985년 8월에 오사카 구장을 매진시키는 쾌거를 이룰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85년 11월 1일 부터 <Last Teenage Apperance> 투어를 시작하였고, 11월 14일, 15일 이틀에 걸친 국립 요요기 경기장에서의 공연 또한 성황리에 마쳤다. 그러나 이 즈음 원래는 소년소녀 팬들이 본인에게 보낸 편지에 답장하는 것 조차 '여러분들의 일은 자신이 찾아가는 거다. 무대에서의 내 모습을 보고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길 바랄 뿐'이라고 말하며 신중하게 꺼려하던 오자키는 공연 도중 MC로 '이곳에 모인 너희들 중 나와 함께 진실과 진정한 사랑을 찾아 걸어나가는 동지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겠어!'라고 말하는 등, 당시 필요 이상으로 그를 신격화하던 10대들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여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그 자신이 신격화되는 것을 즐기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였다.[8] 또한 이 Last Teenage Appearance 투어부터 조금씩 오자키의 정신적 상태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는데, 요요기 공연 이후부터 그는 공연이 끝나고 구토 하기를 반복하였으며, 한 공연에서는 앙코르 곡으로 <I Love You>를 부르던 도중 팬들이 따라 부르자 '내 노래니까 부르지마!'라고 소리치며 그대로 공연을 거부하고 화장실로 구토하러 가기도 하였다고. 당시에 오자키가 이상하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소속사는 이를 잘 무마시켰다. 투어 중 오자키의 20세 생일 전날인 1985년 11월 28일에 10대 3부작의 마지막 앨범 <부서진 문을 넘어>[9]가 발매되었으며, 1986년 1월 1일,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오자키는 돌연 무기한 활동 정지를 선언한다. 일본에서 휴식을 취하던 도중, 오자키는 소속사로부터 미국 유학 제안을 받게 되고, 1986년 중순 즈음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그의 불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86년 말, 미국에서 일본으로 귀국한 오자키는 새로운 곡 작업을 시작한다. 《I Love You》와 《졸업》의 히트로 확실히 뜨는데는 성공했지만 이때부터 점차 오자키 유타카는 '불량한 10대들의 대변자'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시도하였고, 소속사는 기존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시키려고 한데다가[10] 오자키를 무리하게 굴려서 다른 사업[11]에 투자하여 생긴 빚을 갚으려는 행태를 보였다. 오자키는 미국 유학 당시 이미 각성제에 중독된 상태였으나, 소속사는 1987년 7월 1일부터 1988년 1월까지로 무리한 투어 일정을 잡는다. 마약 중독으로 그의 목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8월 3일 오사카 구장, 8월 29일과 30일 이틀에 걸친 아리아케 콜로세움에서의 대형 공연을 전부 매진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다가 1987년 9월 24일 오자키의 컨디션이 악화되어 투어를 중단하였고[12], 이후 10월 1일 6번째 싱글인 '핵 (CORE)'를 발매한다. 이렇게 점점 각성제에 중독되어가던 오자키는 결국 12월 22일 각성제 복용혐의로 구속되었다. (언론에 보도된 것은 1988년 1월 8일)[13]
1988년 2월. 오자키는 집행유예로 출소했고[14] 같은 해 5월에는 자신이 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유일하게 꾸준히 면회를 오던 시게미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1988년 6월 21일 싱글 <太陽の破片(태양의 파편)>을, 9월 1일에는 4집 앨범 <가로수>를 발표하고 9월 12일 도쿄 돔에서 부활 라이브를 가졌다. 그러나 당시 오자키는 소속사 마더 엔터프라이즈와의 마찰과 마약 중독의 후유증으로 두차례의 자살 미수 사건을 일으킬 정도로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보였기에 도쿄 돔 공연 이후, 오자키는 1년간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15]
활동 휴지 기간 도중에도 '다른 소속사로 이적하려면 상당한 위약금을 물어주어야 한다'는 식의 소속사의 압박과 금전적 문제 등으로 나날이 피폐해져가던 중[16], 1989년 아들 오자키 히로야가 태어나게 된다. 1990년 기존 소속사와의 관계가 정리되자 오자키는 절치부심하여 1990년 11월 15일 5집 <탄생>을 더블 앨범으로 발표, 오리콘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며 성공적으로 재기했고 12월 19일에는 자신의 개인 사무소 ISOTOPE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재기의 기쁨도 잠시, 오자키는 1991년 당시 인기 여배우였던 사이토 유키불륜 스캔들이라는 큰 물의를 일으켰고 안 그래도 부인 시게미와 이혼 소송중이었는데 여기에 제대로 찬물을 끼었게 된다. [17] 오자키와 시게미는 아들인 히로야 출산 직후까지는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으나, 4집 발매 이후부터 오자키가 소속사와의 마찰로 인해 정신적으로 심하게 방황하였고, 이로 인해 시게미한테 폭력을 휘두르는 등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기에 이혼 소송으로 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불륜 스캔들 까지 터져서, 시게미는 원래 3000만엔이었던 합의금을 3억엔까지 올렸다. 당시의 오자키는 경제적으로 좋은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한 큰 돈을 구할 수 없었고, 결국 이혼 소송은 어찌저찌 무마되고 이혼은 없었던 것으로 된다. 이 합의금 문제 때문에 사이토 유키 쪽에서 결별 의사를 표시하며 마무리 짓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스캔들이 터질 당시 사이토 유키는 오자키와의 밀회 사실을 부인했으나 오자키 사후인 1993년 오자키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시끄러웠던 이혼 소송과 스캔들이 마무리되고, 오자키는 1991년 3월 공식 팬클럽 Edge Of Street를 창단했고 3월 21일에는 자신의 곡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인 <I Love You>를 정식 싱글로 발표했다.[18] 5월 20일부터는 요코하마 아레나를 시작으로 약 3년만에 투어를 재개하여 10월 30일 국립 요요기 경기장 공연을 끝으로 성황리에 마쳤다. 투어 직후에는 6집 작업에 들어갔으며, 가족과도 단란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등 그가 그토록 원했던 삶의 안정을 되찾는 듯 보였다.[19]
오자키가 사망한 현 시점에서 생각하면 그의 마지막 행보는 미묘한 점들이 여럿 있다. 마지막 투어의 마지막 공연에서 그가 오디션에서 처음으로 불렀던 <댄스 홀>이라는 곡을 마지막 곡으로 부르고, 유작 앨범인 6집 자켓을 십자가 모양에 누워있는 듯한 모습으로 찍는 등. 본인의 의도를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어쩌면 오자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 또는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말도 종종 나올 정도이다.

3. '''갑작스런 죽음과 논란'''


'''사망 이틀 전 찍은 사진으로, 생전 마지막 공식적인 사진이다.'''
'''6집 앨범 녹음을 끝마친 지 일주일 후이자 오자키가 그토록 염원하던 일본무도관에서의 공연[20]이 2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인 1992년 4월 25일 아침 5시 45분경, 오자키는 한 민가 앞에서 나체로 쓰러진 채로 동네 주민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발견 당시 오자키의 온 몸에는 멍과 끔찍한 상처 투성이였고''' 그를 진찰했던 의사는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 있으니 전문의에게 진찰을 받아보라고 진단하였으나, 부인 시게미와 오자키의 형은 그를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10시경이 되어 상태가 급변, 호흡이 멈춰 있는 것을 발견한 가족이 약 1시간 후인 11시 9분에 119에 신고, 일본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낮12시6분 사망이 확인되었다. 오자키의 공식적인 사인은 폐수종[21]이다. 그러나 민가 앞에서 발견된 모습이 '''아무리 봐도 집단으로 구타당해서 쓰러진 모습'''이었고[22] 당시 오자키는 마약중독에서 완전히 치유된 상태였으며 사망 당시 폐수종의 전조 증상도 보이지 않았기에 죽음에 대한 논란이 아직까지도 꺼지지 않고 있다.
실제로 오자키 유타카는 죽기 직전 불편한 관계였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우선 오자키는 자신이 속해있었던 소속사 마더 엔터프라이즈에서 독립하여 자신만의 회사를 설립, 기존의 반항적인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순수한 뮤지션으로서의 이미지로 활동을 재기하며 투어를 성공적으로 돌았고 '''민가 앞에서 발견되기 일주일 전 새 앨범 녹음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전 소속사 대표인 후쿠다와 상당히 관계가 안 좋았다.[23] 오자키는 복귀 후 인터뷰에서 "마더 엔터프라이즈 시절 자신의 모습은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단 '노예' 였을 뿐이었다."고 표현하면서 마더 엔터프라이즈의 사장 후쿠다를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가장 싫어하는 사람으로 언급하며 가열차게 비난하였다. 마더 엔터프라이즈의 사장인 후쿠다가 자신을 묶어놓기 위해 자신을 미국에 보내서 강제로 각성제에 중독시켰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또한, 오자키는 개인 사무소 ISOTOPE 사무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경영에 미숙함을 보였다. 오로지 오자키의 팬이라는 이유로 회사에 지원한 젊은이들을 많이 고용하여 회사의 일 처리가 신통치 않았고 오자키 본인도 투자자들과 마찰을 자주 빚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오자키는 사이토 유키와의 불륜으로 부인이었던 시게미와 이혼 소송을 거친 상태였고 죽기 직전까지 연재 했던 소설에서 시게미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동의도 하지 않고 폭로하여 그녀가 오자키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상태였다. 생전 오자키가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확인되는 사람도 4월 24일 밤 같이 술자리를 가진 전 부인 시게미였으며 그녀가 계속해서 오자키의 의문사 가능성을 완고히 부정했다는 점이 당시에 꽤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오자키의 몇몇 팬들은 아직까지도 '오자키는 시게미가 죽였다'라고 의심하는 판국이다.
하지만, 그녀가 범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실제로 1994년 TV 아사히에서 오자키 유타카의 의문사 의혹을 보도하는 특집 방송을 제작하기 위해 취재를 하던 도중 제작진이 오자키의 부인 시게미가 오자키의 사망과 관련되어있다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시게미는 제작진을 고소하였고 재판에서 승소하여 프로그램이 엎어져버렸다. 비록 시게미는 오자키와의 이혼 소송이 진행중이었고 오자키가 사망한 당일 1차 술자리에 같이 있긴 했지만 오자키가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마주치자 직접 시게미에게 술 한잔 더 마실테니 먼저 돌아가라고 말한 장면이 CCTV와 종업원들의 진술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 오자키는 사이토 유키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시게미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였던 터라 그런 와중에 그녀가 갑자기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고 보기 힘든 건 사실이다.[24]
이렇게 여러가지 설들이 있으나, '''타살은 아니다'''는 정황도 꽤 있는 편이다.
오자키 사후에 부검 결과가 공개되었는데, 오자키의 폐를 포함한 체내에서 각성제 성분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상해치사의 가능성이 제기 되었으나, 부검 결과 폭행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고, 경찰이 오자키가 넘어지거나 난폭하게 뒹굴고 있었다는 주위의 증언을 확보하여 상해치사와 관련해서는 '사건성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한 바 있다. 혼자 넘어지거나 구르는 행동은 각성제 중독자에게서 흔히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오자키의 아들이 성인이 된 후인 2011년에 오자키의 '유서'라고 밝혀진 글 두 개가 문춘에 게재되며 자살설이 부추겨졌다. 다만 오자키는 생전에도 자살 기도를 시도한 경력이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그 두 유서가 언제 작성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하나는 시기 판별이 아예 불가능하고, 다른 하나 역시 작성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해당 유서는 놀랍게도 사망 약 4개월 전인 자신의 어머니의 부고 날 영정 옆에 놓았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생존해 있는 오자키의 아버지와 형은 '타살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자살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결국 오자키 유타카의 죽음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는지는 죽은 본인만 아는 셈. 확실한 것은 이 당시 오자키는 끊은 줄 알았던 각성제를 다시 복용했으며, 이것이 죽음에 관여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자살로 보기에도, 타살로 보기에도 반론할만한 근거들이 여러가지 있어 굉장히 애매한 것이 사실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사망 원인을 폐수종으로 계속 주장하며 의문사 가능성을 완고히 부정해서 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던 부인 시게미는 2007년 신문 인터뷰를 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시게미는 오자키가 민가 앞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지인들 중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이었으며 오자키는 당시 병원에서 주사를 맞은 것을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놓은 것이라며 무서워 했다고 한다. 결국 연락을 받고 온 매니저와 함께 의사의 말에 따라 오자키를 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직후 자신의 손을 붙잡고 "이겨낼 수 있을려나... 미안해"라는 말을 남긴 뒤 사망했다고.[25] 그리고 상술된 두 개의 '유서'가 공개된 2011년에 시게미가 유독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이유가 밝혀졌는데, 그녀는 아들인 히로야가 성인이 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밝히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의 발인은 사망 5일 후인 4월 30일에 치뤄졌으며 오치아이 화장장에서 화장 후 사이타마현 토코로자와시에 위치한 사야마 호반 묘지에 안장되었다. 영결식에는 무려 '''3만 7천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는 쇼와를 상징하는 여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장례식 이후 가장 큰 규모였다. 자료 영상을 보면 팬들이 단체로 <졸업>을 울부짖으며 합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소라 히바리의 죽음으로 대중들은 '진정한 쇼와 시대의 끝'을 느낀 것 처럼, 당대 젊은이들은 오자키의 죽음으로 진정한 80년대의 막을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우연찮게도 그의 죽음 이후에 90년대의 일본 밴드 붐이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80년대의 음악 사조와는 사뭇 다른 색채를 띄우게 된다. 또한 오자키 사후 일본의 거품 경제가 조금씩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몇 번이나 넘어졌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서던 청년 뮤지션 오자키 유타카의 삶은 결국 여러가지 논란과 의문에 둘러싸인 채로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사망 직후 '''오자키의 앨범 5개가 오리콘 앨범 차트 10위 안에 전부 올라가게 되며 대기록이 세워진다.''' 이는 사후 3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일본내에서 깨지지 않은 기록이라고 한다.
현재 오자키 유타카의 곡에 대한 판권은 소니뮤직으로 옮겨갔는데 그야말로 우려먹기의 신화를 써가고 있다. [26]
그의 유작인 6집 '방열에의 증거'는 그가 사망하고 얼마 안 지난 1992년 5월 10일에 발매 되었는데, 재밌게도 이 날은 훗날 일본의 전설적인 국민밴드가 되는 미스터 칠드런의 데뷔일이기도 하다. 오자키 유타카라는 큰 별이 짐과 동시에 새로운 별이 떠오른 것.

4. 평가 및 영향


오자키 유타카의 인생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자면, 우선 자의든 타의든 그는 순탄한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하였고, 본인이 생애 내내 갈망하던 '자유'를 찾기 위해 가수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꽤 성공적이었으나, 자신을 영리적으로만 이용하려던 소속사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불신[27] 때문에 다시 방황하게 되고, 이후 방황에서 빠져 나온 뒤 가정을 얻고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되는 듯 보였던 순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전반적인 노래를 들으면 알 수 있듯, 그는 항상 '자아'와 '자유'를 그토록 갈망했으나, 결국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목표를 완전히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나마 괜찮아 보였다는 말년에도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부고로 그는 다시 한 번 방황하다가 삶을 마감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기구한 인생.
물론 동시에 비판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우선 오자키는 학창시절 '''미성년자 음주, 흡연, 그리고 집단 싸움''' 등 충분히 비행 청소년으로 판단할 수 있는 행동들을 숱하게 저질렀다. 학교의 선생님들이 그에게 지나치게 대한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가 단순히 억울한 피해자 입장으로 보기엔 충분히 문제아로 판단될 만 했다는 것. 또한 가수가 된 이후에도 '''마약과 불륜'''이라는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힘든 일들을 두 개나 저지르기도 하였다. 당장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저지른 차게 앤 아스카의 아스카가 현재 어떤 꼴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오자키가 얼마나 큰 사건들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올 것이다.[28]
결국 오자키라는 인물 자체는 동정론과 비판론이 동시에 존재한다. 부정적인 면모들도 여럿 있으나, 그런 와중에도 굉장히 안쓰러운 인물이라는 것.[29]
이렇게 부정적인 면모가 어느 정도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후 3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오자키 유타카라는 뮤지션이 꾸준히 재조명되고, 고평가를 받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불안정한 내면과 삶을 숨기지 않고 음악을 통해 승화시키면서 내면의 성장을 이루려고한 흔적이 그의 음악속에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30] 그는 자신의 내면을 음악을 통해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으며, 그러하였기 때문에 당대의 젊은이들은 노래속 그의 이야기를 듣고 삶 속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자신들과 같은 슬픔, 외로움, 그리고 갈망을 이 가수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위로받을 수 있었다. 음악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지닌 복합적인 감정, 수많은 시간과 장소 속에서 보고 느낀 것들, 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지내온 사람들에 대한 애정 등을 그리며 앞으로의 한 발자국을 도모하였던 것이다.[31]
그의 이러한 자전적인 음악적 성향은, 일본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오자키 이전에도 싱어송라이터들은 여럿 있었고, 자신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음악에 담았던 뮤지션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분명 하나의 이야기를 읇조리는 듯한 '소설'과 같은 느낌을 주곤 하였다. 그러나 오자키 유타카라는 뮤지션이 등장하고,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그의 음악을 듣고 자라온 어린 학생들이 뮤지션이 되면서, 음악 속에 자기 자신의 삶과 내면의 이야기를 담았고, 이러한 사조는 2020년대까지도 이어지게 된다. 바로 그 뮤지션들이 현재의 Mr.Children, Spitz, 마키하라 노리유키, 우타다 히카루 등인 것이다. 일본이 한국과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음악들이 더욱 메인스트림을 이루고 사랑받게 된 것은 바로 오자키 유타카의 영향이 굉장히 컸다고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오자키 유타카는 음악을 통해 끊임없는 자아성찰을 해온 뮤지션이며, 그의 사후에도 후배 가수들이 이러한 사조를 이어오면서 J-POP의 거대한 축을 이루게 되었고 일본인들의 정서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이 그를 일본 현대 음악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만드는 특징인 것이다.

5. 여담


  • '10대 3부작'이라 불리는 정규 1집, 2집, 3집은 세 장이 전부 다 버릴 곡 하나 없는 명반이다. 일본 팬들 사이에서는 오자키의 음악은 10대와 20대로 나뉜다는 말도 흔하게 오고갈 정도. 특히 1집 '17세의 지도'는 베스트 앨범보다 더 좋다는 평을 받는 마스터피스로, 일본 음악사로 놓고 봐도 중요한 앨범 중 하나이다.
  • 대한민국에서 일본 대중문화 금지 정책으로 인해 일본 가수들의 빽판 유통이 활발하던 시기에 인기를 얻었던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당대 빽판이 존재했는지를 알아보기 굉장히 힘든 가수이다. 당대 인기있던 사잔 올 스타즈, Off Course 등이 빽판으로 마니아들 사이에선 알려졌던 것과는 대조적.
  • 미남이다. 유튜브 등에서 그가 나오는 영상들을 보면 전혀 멋을 부리지 않는데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포지션I Love You의 원곡자로 알려져 있지만 잘생긴 외모로도 알려져 있고 거기에 키도 우리나라와 일본 성인 남성 평균 키를 훌쩍 넘는 178cm이다. 일본에서도 잘생긴 외모로 인기가 많았다.
  • 라이브 실력의 기복이 심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오자키의 라이브 실력이 처음부터 들쭉날쭉 했던 것은 아니다. 초창기인 84~85년도의 경우에서는 대체적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가혹한 스케줄로 인해 조금씩 무리가 오던 85년도 말기의 Last Teenage Appearance 투어 때도 불안하긴 하지만 별 탈 없이 소화해 냈다. 그러나 미국 유학 이후 오자키가 마약에 빠져들게 된 이후인 87년도 투어에서는 목소리가 이전 같지 않게 되었으며, 남아 있는 영상의 자료들을 보면 투어 후반기로 갈 수록 목 상태가 악화되고, 나중에는 제대로 일어서는 것 조차 힘겨워 해서 아예 누워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종종 나온다. 그렇게 1988년 마약으로 입건되고 반성의 시간을 갖은 다음 이루어진 첫 방송 출연에서는 괜찮은 라이브를 보여주었으나...동년 9월의 도쿄 돔 라이브에서 가혹한 리허설로 인해 최악의 목 상태를 보여주며[32] 공연을 완전히 망쳤고, 이후 약 1년 반 동안 휴식기에 들어간다. 의외로 마지막 투어의 첫 공연인 1991년도 요코하마 공연 실황에서는 대부분의 곡들을 키 안낮추고 안정적으로 소화해냈는데, 완전히 10대 시절로 돌아간 듯한 목소리를 들려주며 현재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베스트 공연으로 꼽힐 정도. 다만 그 이후의 공연에서는 요코하마 때만큼의 목소리는 나오지 못하였는데, 결국 오자키는 마약에 쩔어있던 87년도 이후 전반적으로 성대가 이전 같지 않게 되었고, 공연을 오래하면 할 수록 목 상태를 유지하는데 무리가 오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 2020년대까지 살아있었다면 생목으로 부르는 오자키의 창법 특성상 목소리가 더 변하였을 가능성이 꽤 크다. 실제로 생목 창법을 구사하던 리암 갤러거, 조성모 등이 데뷔하고 약 10년 정도 지나서는 전성기 시절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져 결국엔 창법을 바꾸게 된 것을 보면 오자키 또한 목소리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거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심지어 오자키는 생전에 상당한 골초였던데다가 목 관리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지라 나중에 무리가 오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황혼기의 오자키는 때때로 상태가 괜찮을 때에는 10대 시절의 그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초창기에 비하면 특히 저음부분의 목소리가 많이 중후해졌다. 이는 1,2,3집과 5, 6집 앨범의 곡들을 비교하며 들으면 확 다가올 것이다. 사망 당시에조차도 오자키는 데뷔 10년도 안 지난 20대 중반의 젊은 청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목소리가 굉장히 빠르게 변한 편이다.[33][34]
  • 생전 그의 콘서트는 상당한 예매율을 자랑했다. 2집 발매 직후에 이미 2만 6천석의 오사카 스타디움 공연을 매진시켰으며, 88년도에 그 도쿄 돔 공연 매진을 이루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소속사 사장 후쿠다의 인터뷰에서 밝혀진 굉장히 재미있는 점은, 통계상 오자키의 공연은 단체 예매가 굉장히 적었고, 대부분이 개인 단위의 예매였다고 하며, 실제로 오자키의 공연을 가기 위한 단체 버스는 이용자간의 소통이 거의 없어 굉장히 조용했다고 한다. 후쿠다 사장은 이를 보고 '세상에는 예상 외로 고독감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많고, 그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 그의 공연을 예매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 생전에 자신은 아이돌이 아니라며 TV 출연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오자키를 접할 수 있는 매체는 라이브 공연, 잡지에 실린 그의 사진들과 인터뷰가 전부였다. 오자키의 유일한 TV 출연은 각성제 복용으로 구속된 후 1988년에 복귀했을 때 사죄의 의미로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 太陽の破片(태양의 파편)을 부른 것. 참고로 이때 녹화가 끝나고 나카모리 아키나의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誰かのクラクション(누군가의 클락션) 이라는 제목의 라디오를 진행하기는 했다.[35]
  • 학생 시절 검도 대회로 일본무도관을 방문하였던 오자키는 '반드시 이곳에서 공연한다'라고 낙서하였을 정도로 무도관에 대한 공연을 염원하였으나 아쉽게도 끝내 무도관 공연을 하지 못하였는데, 사실 오자키는 무도관 공연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1987년 TREES LINING A STREET 투어의 마지막 공연으로 잡혀있었으나 투어 도중 심각한 마약 중독 상태를 보이는 바람에 투어 자체가 취소되며 무산되었고, 1992년 6집 투어에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았으나, 투어 시작 직전 본인이 사망한다. 결국 일본무도관은 오자키 팬들에게 있어서는 요절한 뮤지션의 못다한 꿈과 같은 곳이 되어버린 셈.
  • 현재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라이브 음원, 영상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020년 현재 풀 버전이 공개된 공연은 신주쿠 루이드에서의 데뷔 라이브와 1988년 도쿄 돔 공연 뿐이고, 1991년 10월 30일 생애 마지막 공연이 음원이나 영상 등으로 대부분이 공개되었으며, 그 외 DVD나 블루레이로 공개된 공연들은 일부 곡이 누락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1985년 오사카 구장 공연, 동일 해 국립 요요기 경기장 공연, 1987년 아리아케 콜로세움에서의 공연[36] 등이 풀버전으로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러한 누락된 곡들은 매년 방송하는 NHK 오자키 특별 프로그램 등이나 베스트 앨범의 한정판 등으로 일부 공개되기도 하였고, 영상으로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음원으로만 공개되는 등의 경우도 있다. 일본 현지 팬들은 위의 공연들의 풀버전 공개를 위해 지속적으로 서명 운동을 하는 중. 이외에도 뜬금없이 존재 여부조차 몰랐던 공연의 음원이 공개되기도 한다.[37]
  • 그의 형인 오자키 야스시(尾崎 康)는 판사 출신의 변호사이다. 형제 간의 사이는 원만했고 오자키 유타카는 5살 연상의 형을 존경하여 잘 따랐다고 한다. 오자키 유타카의 '15の夜'의 유명한 가사 '훔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나간다.'에서 훔친 오토바이는 오자키 야스시의 오토바이라고 한다. 오자키 유타카 사후 1994년 회고록 '동생 오자키 유타카의 사랑과 죽음(弟尾崎豊の愛と死と)'을 집필하였는데, 오자키 형제의 유년기와 방황의 시절, 각성제 사건, 소속사 문제 등의 여러가지 사정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 싱어송라이터이자 동시대에 비슷한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던 오카무라 야스유키와는 둘도 없는 절친으로 아주 유명했다. 오카무라가 오자키의 부음을 듣고 난 뒤, 한동안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오열하며 지낼 정도였다고.
  • 2003년 TBS 테레비의 유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학교에 가자(学校へ行こう)의 코너였던 B-Rap High School[38]에서 그의 이름을 패러디한 오자키 마메(尾崎 豆)(...)라는 남성 참가자가 있었다. 오자키 유타카의 한자 이름에서 豊(유타카)[39]의 윗부분인 曲자를 빼버려 豆(마메)[40]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네이밍 센스로는 연식글로브와 필적할 정도의 수준으로, 오자키 유타카의 이름을 패러디 한 만큼 노래도 그의 명곡들을 골라 자신의 작은키 때문에 겪는 에피소드들을 셀프디스 형식으로 코믹하게 개사하여 표현했고, 음성변조를 한 거 같은 특이한 목소리까지 웃음 포인트가 되는 바람에 연식 글로브의 명맥을 잇는 인기 참가자로서 상당히 인기를 얻으며 리퀘스트 어워드에서 연식글로브를 비롯한 쟁쟁한 참가자들 중에 우승을 차지 할 정도였다.
  • 오자키가 1989년에 낳은 아들 오자키 히로야는 아버지의 뜻을 물려받았는지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2004년 15세 때 오자키의 데뷔곡인 15の夜(열다섯의 밤)을 불렀다. 목소리는 오자키 특유의 음정불안까지 아버지를 빼다 박은 듯이 비슷하다. 팬들조차도 오자키의 커버를 그 아들만큼 잘 해낼 수 있는 가수나 모창자는 없다고 평가할 정도. 다만 히로야의 경우 아버지에 비해 음색이 맑고 고음이 깨끗하게 올라가는 편이다. 어쨌든 그는 아들에게 목소리라는 거대한 유산을 남겨주면서 어떻게 보면 그가 떠나고도 그의 목소리로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셈.
  • 일본에서 국민적 인기를 누린 드라마 북쪽 고향에서에서는, 주인공 쿠로이타 준이 첫사랑과 함께 좋아했던 가수로 나온다. 각본가는 오자키 유타카의 곡이 나오는 장면을 쓰기 전, 주연배우인 요시오카 히데타카에게 그저 젊은층이 좋아하는 유행가를 조사해오라고 시켰었는데, 요시오카는 바로 오자키 유타카를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한다.
  • 아라카와 히로무백성귀족 1권에서 작가가 담당기자 이시이와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이시이가 열다섯의 밤을 부르는데,우리의 소여사님은 훔친 오토바이부분을 훔친 덤프트럭으로 바꿔 부른다.
  • 상술했듯 상당한 골초였다. 가사에는 담배를 피는 묘사가 굉장히 많고, 심지어 정황상 중학교 시절부터 피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즐겨 피웠던 담배는 세븐 스타. 오자키의 기일마다 묘소에는 세븐 스타 담배가 가득히 놓여있다.
  • 일드 바람의 소년~오자키 유타카 영원한 전설에서는 나리미야 히로키가 맡았다. 실제로 그 두 사람이 매우 닮았음을 알 수 있다.
  • 우리나라에서 김광석이랑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받는다. 김광석이나 오자키 유타카나 인기를 얻은 곡들의 대부분이 자아성찰과 인생관에 관련된 곡이고, 그들의 사랑 노래에도 그러한 경향이 깊게 드러난 다는 것이 공통점이며, 주로 포크 록을 추구하고 앨범에 적절히 발라드를 섞어 주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또한 사망에 굉장히 의혹이 많고 거기에 아내가 엮여있었다가 아닌 것으로 판명난 것도 비슷하다.[41] 차이점이라면, 김광석은 살아 생전에도 팬층의 나이대가 높은 편이었는데, 오자키는 10대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청소년, 청년들에게 인기를 얻었다는 점이다. 또한,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 전성기가 찾아오며 가수 생활을 보낸 김광석과는 달리 오자키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에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김광석과 오자키는 나이 차이가 꽤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김광석은 64년생, 오자키는 65년생으로, 고작 1살 차이다...
  • 해외로 범위를 넓혀보면 오자키와 비슷한 보컬 성향을 가진 가수는 리암 갤러거가 있다. 리암과 오자키 모두 데뷔 전부터 1집까지는 청량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으나, 잦은 음주와 흡연 습관으로 인해 2집부터 목소리 변화의 조짐이 보였으며, 둘 다 생목 창법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 점 또한 목에 무리가 오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결국 나중에는 보컬 스타일이 완전히 변하게 된다. 둘 다 잘나가던 시기에 마약에 손을 댄 적이 있었다는 것도 공통점. 차이점은 오자키의 경우 자신의 삶을 여러 차례 비관한 시기도 있었으나, 리암의 경우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낙천적 성향을 줄곧 유지하며 비관적인 마인드를 지양하였고, 이는 음악 스타일에서의 큰 차이로 이어진다. 오자키와 음악적 스타일이 비슷했던 해외 뮤지션을 꼽자면 더 스미스모리세이가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젊은 시절 자신의 내면과 불안한 정서를 바탕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6. 정규 앨범


오자키 유타카/음반 목록을 참고하십시오.

[1] 일본인이 대구 김광석 거리로 여행을 올 때 한국의 오자키 유타카라고 이해한다고 하며, 일본인의 관광 소개 또한 한국의 오자키 유타카로 소개한다. 죽음 과정에서 사이가 극히 좋지 않은 아내가 일으킨 타살이라는 설이 나돌고, 이 설이 조사결과 사실이 아님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 또한 비슷한 면이 있다. 더구나 둘 다 인생에 관해 철학적인 가사를 담은 노래를 상당수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사후 두 가수에 대한 재조명 및 재평가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2] 공통점으로는 음악적 스타일이라던가 고등학교 중퇴, 젊은 날에 요절, 약물 중독, 반항적인 삶, 사후 계속되는 재평가 및 재조명이 있는데, 오자키 유타카가 조금 더 사회에 대한 비판, 반항적인 노래를 많이 만들었다.[3] 이는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시기와 팝 음악을 전면적으로 수용한 시기가 한국보다 빠르기 때문인 것도 있다. 오자키의 노래도 당시의 최신식 스타일로 편곡되고 녹음되었기 때문에 같은 80년대 음악이라도 한국 음악은 상대적으로 더 낡은 느낌이 든다. 물론 이걸 감안해도 오자키의 음악은 유독 덜 구식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긴 하다. 비슷한 시대를 풍미했던 7,80년대의 사잔 올 스타즈마츠다 세이코의 음악은 일본에서도 구식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오자키 사후 인기를 얻기 시작한 B'z도 일본에서는 아재 음악(...) 취급 받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들과는 달리 오자키의 음악이 현 세대에서도 계속 회자되는 이유는 적절한 시대상과 자아성찰이 반영된 가사와 멜로디 자체가 시대를 덜 타기 때문일 것이다.[4] 지금은 잘 떠올려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자키의 음반 소속사였던 소니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시기 당시 레코딩 기술, 프로듀싱 수준, 자본력에서 업계 내 세계 최고였다.(헐리우드의 5대 메이저 스튜디오 중 하나인 컬럼비아 픽처스소니가 인수한 것도 당시의 일이다.) 넘쳐나는 돈으로 세계 굴지의 레코딩 엔지니어와 프로듀서를 모셔와서 음반을 제작하던 곳에서 오자키도 음반을 만든 것이다. 현재 1980년대의 유명 록 음반들은 대부분 리마스터링된 후 판매되고 있고 90년대 음반도 리마스터링 재발매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오자키의 음반은 판매량이 보장된 인기 품목인데도 아직까지 1번도 리마스터링된 적이 없다. 처음에 원본 마스터를 제작할 때부터 워낙 뛰어난 기술력으로 잘 만들었으니 아직까지 손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외로는 4집인데, 4집은 소니가 아닌 당시 오자키의 소속사인 마더 엔터프라이즈의 자체 레이블 마더 앤 칠드런에서 레코딩 되어 당대에도 음질에 대한 논란이 있었을 정도로 질이 떨어진다. 그리하여 수 해가 지난 후 리마스터링이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었다.[5] '''마츠다 세이코'''가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싱글인 하트의 이어링의 작곡가(=Holland Rose).[6] 오자키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유급당하더라도 학교를 졸업해서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그를 담당했던 선생님이 그에게 졸업할 때까지 매일 반성일기를 쓰라고 강요했고, 이에 격분해 선생님과 말다툼을 한 뒤 "자퇴서를 낼거라면 나를 죽이고 가라"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이 후 오자키는 고등학교 졸업은 어떻게든 하고 싶어 가수 활동을 하며 야간 학생 신분으로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2집 발매 이후 무리한 스케줄로 인해 결국 포기하게 된다.[7] 그가 중학교 시절에 가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곡으로 친구가 두발규정에 걸린 것이 가출의 동기였다고 한다.[8] 오자키의 '10대의 대변자'라는 호칭은 이 시기 나온 것으로, 원래는 그에 대한 평론가들의 비꼼의 의도였다.[9] 10대 3부작의 마지막 앨범인 3집은 10대가 끝나기 전에 부랴부랴 만들어져서 굉장히 급조된 앨범이다. 심지어 앨범 발매 불과 며칠 전에 완성하고 녹음한 곡이 있는데, 그 곡이 바로 ''''Forget-me-not(물망초)''''. 좋지 않은 상황에서 급조된 곡이 불후의 명곡으로 남게 된 것. 다만 대다수의 곡들은 2집 발매전부터 공연에서 부르며 조금씩 수정을 거친 곡들이기는 하다.[10] 이는 오자키라는 이름값 자체가 오자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너무 커져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즉, 본인이 그 이미지를 버리기엔 이미 여러 사람들의 밥줄이 걸린 하나의 '상품'이 되어있던 것.[11] 이 시기 오자키의 소속사인 마더 엔터프라이즈는 본인들이 직접 마더 앤 칠드런이라는 음반사를 세우는데, 얼마나 급조하여 세운것인지 제대로 된 시설조차 갖추어지지 않아 오자키는 소니의 녹음실을 빌려야했다.[12] 투어 중엔 이미 심각한 마약중독 상태였는데, 어느 날 그 부작용으로 콘서트 직전 대기실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쓰러지게 되어 온몸이 묶이는 지경까지 가게되고 결국 투어는 중단된다.[13] 다른 마약 스캔들과 다르게 오자키가 구속까지 가게된 것은 무려 '''아버지와 형이 경찰에 직접 신고하였기 때문이었다.''' 가족은 이미 그가 중독 상태인 것을 알았고, 그를 정상적으로 되돌리고 싶어 설득을 하였으나, 오자키는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며 반문만 할 뿐이었고,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와 형이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신고하게 된 것.[14] 판사는 판결을 내리면서 오자키에게 "인기 가수로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업무상의 슬럼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이 금지하고있는 각성제의 사용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부모가 가수 생명이 끊길 위험을 감수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아들이 마약에서 벗어나게 하려 한 열정을 참작하여 다시 갱생의 기회를 준다. 하루 빨리 회복하라 "고 말했다. 오자키는 판결이 내려 질 때까지 자신이 실형을 살것이라 생각했다고.[15] 오자키는 여러 차례 소속사를 떠나려고 하였으나 계약기간이 1년 정도 남은 상태였고, 그 계약 기간 동안 새로운 음악 작업을 하면 결국 소속사가 바라는 대로만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냥 계약기간만 채우려고 의도적으로 1년 동안 활동을 휴지한 것이라고 한다. 이 때 <태양의 파편>이 꽤 히트를 했음에도 직후 발매된 4집에는 수록하지 않았는데, 이것 또한 히트 싱글을 정규 앨범에 수록하지 않음으로써 정규 앨범 판매량이 잘 나오지 않게끔 하여 소속사가 그를 먼저 포기하게끔 하려던 오자키의 의도였다고. 그러나 당시 이미 오자키 유타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상품성이 엄청났기에 그런 계획은 어림도 없었고(...), 당연히 소속사는 그를 포기하지 못하였다.[16] 이 시기 오자키가 얼마나 심적으로 고생을 하였는지 알 수 있는 것이, 마약 중독 직후에도 큰 변화는 없었던 그의 얼굴이 91년 첫 투어 당시에는 너무나도 초췌해져 있었으며, 이미 변하고 있던 목소리가 더욱 변하게 된다.[17] 오자키 유타카의 유작 앨범인 6집에는 사이토 유키와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가사가 많이 들어있으며 6집의 표지 사진도 사이토 유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는 주장이 있다. 특히 다른 곡들은 의견이 갈려도 발라드 곡인 '두 개의 마음'은 사이토 유키와의 관계에서 나온 곡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6집의 작업은 사이토 유키와의 결별 후에 작업이 들어갔고 곡들도 이후에 완성된 곡들이 여럿 있어서 그녀와의 관계가 6집 자체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18] 그 전까지 <I Love You>는 싱글로 발매된 적이 없었다.[19] 물론 말년에도 오자키는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떠나기 직전, 항상 그의 편이 되어 주고 묵묵히 응원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정서적 불안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을 뜨기 약 5일 전, 그는 아내 시게미에게 '내가 죽으면 같이 죽어줄 수 있어?' 라고 말하기도 했다고...[20] 이미 도쿄 돔 공연까지 매진시킨 오자키에게 무도관 공연이 크게 와닿을까 싶지만, 그 당시 무도관의 상징성은 도쿄 돔 이상이었다.[21] 폐포 속에 많은 점액이 축적되어 팽창하는 질환. 주로 '''마약중독'''이나 폐가 약할때, 또는 천식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이나 심부전인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질병이다.[22] 문서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구글에 검색해보면 사망 직전 그의 처참한 모습을 사진으로 찾을 수 있다.[23] 참고로 일본은 한국과 달리 기획사와 음반사가 다르다. 소속사는 가수의 매니지먼트를, 음반사는 앨범의 제작 및 판매를 전담한다. 위키에 쓰여져있던 것과는 달리 오자키와 소니 뮤직과의 사이는 좋았다. 죽기 일주일 전 녹음한 새 앨범도 소니 뮤직 산하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24] 이와는 별개로 오자키의 팬들 사이에서 시게미의 이미지는 매우 안 좋은데, 그 이유는 오자키의 사후 저작권 등 관련 수익을 그의 친족인 형과 아버지와는 일절 분배하지 않은 채로 거의 대부분의 금전적인 이득을 다 본인이 가져갔기 때문이다. 오자키의 형은 이러한 상황에 시게미에게 매우 화났고, 소송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조카인 히로야가 그런 더러운 꼴을 보는 것은 싫어서 참았다고. 또한 시게미가 남편을 추모하며 쓴 책인 '친애하는 먼 당신에게'에서 본인만 불쌍하고 가련한 여성인 척을 한다는 느낌이 있어 이러한 점도 이미지 반감에 크게 한 몫 하였다.[25] 위의 글들을 보면 둘 사이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결국 오자키의 긴 방황 끝에 둘은 평화롭게 재결합하는데 성공하였고, 91년 크리스마스에 가족 파티를 함께 보내는 등 가정 분위기를 회복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상태였다. 즉, 시게미가 오자키를 죽였다고 하기엔 그 당시엔 이미 둘의 갈등이 많이 해결된 상황이었다.[26] 싱글 <핵>, <태양의 파편>은 제대로 된 재발매가 한동안 이루어지지 않고 라이브 DVD에도 미수록되어 왔는데, 이 두 싱글 앨범은 마더 앤 칠드런에서 발매되어 소니에게 판권이 없기 때문이다.[27] 첫 소속사와의 갈등을 계기로 오자키는 업계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굉장히 심해졌다. 마더 앤 칠드런과의 계약 해지 이후 새로운 소속사와 계약을 맺어 5집 음반을 내었으나, 결국 본인 내면의 불신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하고 개인 사무소를 차리게 된 것이다. 오자키는 자신을 '상품'으로 대하는 업계 사람들을 무척이나 싫어했고 죽기 직전까지 변호사였던 형에게 영업 제의를 하는 등 자신의 회사를 일종의 가족회사로 만들려고 노력했다.[28] 아니 이 중 하나만 저질러도 일본 연예계에서는 연예인 생활이 끝장나거나 오랫동안 활동을 하지 못한 케이스가 굉장히 많다.[29] 그의 부정적인 면모들도 관점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동정표를 던질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그가 정신적으로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에는 그를 둘러싼 환경(학교 문제, 소속사 문제 등)이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0] 대표적으로 마지막 앨범이자 유작 앨범인 <방열에의 증거>에서 유일하게 싱글 컷 된 곡인 <더럽혀진 인연>이 있다. 이 곡은 지금까지 함께 해 온 연인과의 미래를 다짐하는 곡인데, 여기서 오자키는 아내인 시게미에게 저지른 과오(가정 폭력, 불륜 등)를 반성하고 이제는 가정의 행복을 도모해 나갈 것이라는 태도를 보인다.[31] 그의 사랑 노래들(I Love You, Forget-me-not 등)에서 조차도 이러한 성향이 드러난다. 그는 사랑 속에서도 자아를 향해 나아갔던 흔적을 여실히 드러내었던 것.[32] 그 마약에 쩔어있던 87년도 보다도 더 심각했다. 어느 정도냐면, 만약 오자키가 아직도 살아있었으면 그 유명한 전인권의 '고추 털 뽑기 창법'이나 김장훈의 '으락캬' 급의 하나의 밈으로까지 승화되었을 정도였다... 다만 이 공연은 오자키가 전날까지도 하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속사의 강행으로 인해 할 수 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뒷배경이 있긴 하다. 때문에 망친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팬들에게는 당시 오자키가 자신의 암울한 상황에 대해 쉰 목소리로 절규를 하는 것과 같이 받아들여져 꽤 상징적이고 의미있는 공연으로 남아있으며, 2013년에 완전판 블루레이까지 발매되었다![33] 이런데에는 88년도까지 오자키의 소속사였던 마더 엔터프라이즈가 무리한 투어 스케줄을 강행했던 것도 한 몫 하였다. 우선 투어 한 번 진행하면 거의 쉴 틈 없이 공연 스케줄이 잡혀있었고, 투어가 끝난 다음에는 새로운 투어를 진행시켰다(...). 이러한 정신 나간 스케줄의 절정이 87년도 투어였는데, 이 투어는 원래에는 7월부터 88년도 1월 까지 공연이 잡혀있었다! 도중에 오자키가 마약 중독으로 인해 불안 증세를 노출하자 취소되었지만.[34] 오자키가 투어를 무리하게 하지 않고 목 관리에 신경을 썼더라면 목소리를 오래 유지했을 수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 바로 그의 아들 오자키 히로야이다. 히로야는 2020년 기준 만 30세를 넘어 이미 아버지보다 오래 산 상태이나, 목소리가 여전히 18~19세 시기의 아버지의 목소리 그 자체이다. 이런 데에는 히로야가 아버지에 비하면 무리한 투어를 하지 않았던 것도 있겠으나, 본인이 목소리에 크게 영향을 주는 행위(흡연 등)를 지양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꽤 크다.[35] 청취자들이 보내온 사연이나 자신이 감명깊게 읽은 글귀들을 오자키가 낭독하는 방송이었다. 사전 녹음으로 제작되었다. 1985년 10월부터 1986 년 3월, 1986년 10월부터 1987 년 3월까지 방송. 방송일자를 보면 알겠지만 오자키가 Last Teenage Appearance 투어를 끝내고 무기한 활동중지를 선언하고 휴식 겸 음악연수를 받으러 뉴욕에 있을 때 송출되었다. 참고로 이 시기에 TV에서 《너무 빠른 전설》이라는 타이틀로 오자키 유타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도 했다.[36] 이 공연의 경우 일부 곡들의 판권 문제가 꼬여있어 풀버전을 발매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37] 대표적으로는 Livebeat Box에서 공개된 첫 번째 투어의 마지막 공연인 삿포로에서의 의 음원(첫 번째 투어는 이전까지는 1984년 12월 아키타, 1985년 1월 도쿄 일본청년관에서의 공연만이 영상으로 일부 공개되었다.), 1987년 투어의 첫 공연인 이바라키 공연의 일부 영상 등.[38] 연식글로브가 출연했던 그 코너다.[39] 우리나라에서는 풍년 풍으로 유명한 한자다. 참고로 삼풍백화점에도 들어가는 한자다(...)[40] 우리나라에서는 '콩 두'로 불리는 한자.[41] 오자키의 석연치 않은 죽음은 오히려 한국의 김성재의 죽음과 굉장히 비슷하다. 둘 다 약물과 죽음이 관련되었고, 그 죽음이 자살인가 타살인가로 수십년이 지난 현재에도 논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