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보현
1. 소개
대한민국의 강력 범죄자로, 택시 연쇄살인마."'''내 나이만큼 사람들을 죽이겠다'''."[2]
2. 온보현, 그는 어떤 사람인가?
연쇄택시강도사건 온보현의 성장배경
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 선암리 봉성 온씨[3] 집성촌 마을에서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다 중퇴했다. 이 때문에 학력미달로 군대도 면제되었다. 어릴 때 온순하고 착했던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예쁨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의 삶에서 항상 문제가 되어왔던 것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목격한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심하게 때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란 그는 아버지에 대해 분노를 품은채 자랐다. 그의 분노는 1981년 그가 24살이 되던 해, 결국 폭발해 아버지와 심하게 싸운 뒤 '다시는 집에 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혈서를 써놓고 집을 나가 당시 빈민가였던 서울의 수유리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는 이후 1984년 8월 13일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독약을 마시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 미워하던 아버지를 만났는데 서울에 사는 아버지가 이날 다시 고향에 내려온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자살하기 위해 인근 야산에 구덩이까지 팠었다. 『내가 죽어서 이 사실 이 언론에 알려지면 아버지가 다시는 고향에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해 정신연령이 매우 낮은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온보현은 서울 상경 직후 한 여자와 교제,어느정도 안정을 찾았지만 교통사고를내 여섯살난 어린이에게 부상을 입힌 혐의로 벌금형을 받은뒤 여자와 헤어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경찰에서『교통사고를 낸 것이 아니라 혼자 넘어져 상처를입은 어린 아이를 치료해 주려고 인근 병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갑자기 내가 교통사고를 낸 것처럼 뒤집어 썼다』고 말해 사회에대한 극심한 피해의식을 보였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공사판에서 노동을 하는 등 막일을 하다 택시 회사에 들어갔다. 퇴직을 한 그는 채소 사업을 하였는데, 사업이 잘 되지 않아 결국 경제적, 심리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평소에도 그는 가족, 친구, 친척들과 연락을 끊은 채 고립된 삶을 살았기에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온보현은 사건 당시 나이 37세였고,[4] 거주지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1동이었다.[5]
2.1. 연쇄살인범으로서의 성향
온보현의 범행 동기는 크게 두 가지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 해소와 영국의 콜린 아일랜드처럼 유명세를 얻는 것이었다.
그는 붙잡힌 뒤 "79년부터 1년동안 여자를 사귀며 택시운전을 해왔는데, 이때 상계동 부근에서 교통사고를 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재판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이로 인해 사귀던 여자와 헤어졌다. 양심적으로 살아오려 했으나 사회를 보는 눈이 바뀌고 특히 여자가 미워졌다."라고 주장하며 여성에 대한 증오를 드러냈다. 다만 온보현이 1980년 교통사고를 내 여섯살 난 어린이에게 부상을 입힌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는 사건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애인이 그를 떠난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니라 그냥 헤어지기 위한 빌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자신이 붙잡힐 때를 대비해 범행 일지를 작성하는 등 일종의 극장형 범죄를 저질렀으며, 지존파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아들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아버지가 다시는 고향에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십시오"라고 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심했다#. 그의 바람대로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연쇄살인 역사에 똑똑히 남게 되었다.
2008년 방영된 tvN의 범죄 재연 다큐드라마 범죄의 재구성 온보현 에피소드에 삽입된 인터뷰에서 한 범죄 심리학자는 그의 불안정한 성장 과정을 언급하면서 그가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온보현이 도덕이나 법률을 무시하는 성향(즉 상대방에 대해 분노, 공격성을 표출하는)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불행한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을 근거로 그가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게다가 살인의 대상이 여성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감안하면 성장 배경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유영철의 범행 심리에서도 드러나듯 연쇄 살인마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그들 역시 범행을 저지르다 자신보다 육체적으로 강한 이들을 만나 도리어 제압 당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그러한 원인으로 범행이 미수에 그치게 되면 몹시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면서 연쇄 살인의 휴식기에 돌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온보현 또한 희생자의 거센 저항으로 부상을 입으면서 연쇄 살인을 중단하게 되었고 이후 자수하기에 이르렀다. 즉 온보현 사례는 여성에 대한 깊은 분노가 원인으로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연쇄 살인마의 보편적인 사례가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보편적인 상식으로 내면화해온 가정 폭력의 피해자가 자신보다 약한 상대만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러야 하기 때문에 여자를 타겟으로 하게 되는 연쇄살인마의 보편적인 사례인 것.
3. 사건 일지
- 1994년 8월 13일경
그는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약 20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를 만났는데 서울에 사는 아버지가 이날 다시 고향에 내려온 것을 보고 화가 났다. 이때부터 살인 계획을 세웠고 숙부 집에서 4일 동안 얹혀 살며, 이웃으로부터 삽과 낫을 빌려 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구덩이를 팠다. 그의 고향이 곧 그의 본관이어서 조상들의 묘소가 뒷산에 있었는데, 숙부는 그가 벌초를 한다고 생각하고 기특하게 여겼다.
- 1994년 8월 5일 ~ 15일
그는 곧 구체적인 살인 계획을 세우고 살인 수첩까지 장만하였다. 구체적인 살인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중, 그는 그가 전에 했던 택시 기사 일을 연상하고는, 차고에 세워져 있던 강북수유리의 국제운수 소속의 서울 1 바 1287 스텔라 차량을 절도하였고, 곧이어 미사리 쪽에서 대진운수 경기 1 바 1237로 번호판을 위조하였다.
- 1994년 8월 28일경
그는 강동구 암사동 사거리에서 한 명의 여성을 태웠다. 그는 흉기로 여성을 겁박해서 학생증을 뺏은 후, 그녀를 야산으로 끌고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차문을 여는 순간 피해자는 살려달라고 크게 외치며 영동고속도로 이천 부근에서 도망쳤다. 그는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를 뒤쫓지 않은채 그대로 도주하였다.
- 1994년 9월 1일
이후 그는 한 동안 숨어 지내다가 곤지암 주차장에서 에스페로 택시와 택시 회사 사명과 번호판을 바꾸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거리로 나갔다. 다음날 새벽 1시~3시경 그는 43세 권모 씨를 차에 태워 구리~안산고속도로 입구에서 성폭행을 한 차례 한 후, 그의 고향 쪽인 김제 영천마을 야산으로 피해자를 끌고 가서 앞서 파 놓았던 구덩이 옆에서 한 차례 더 성폭행을 하였다. 그 후 그는 피해자의 입과 팔 그리고 다리를 포박한 뒤 구덩이 안으로 밀어넣었다. 피해자는 그가 숲 근처에서 잠깐 잠을 자는 사이에 도주하여 인근에 위치하였던 공사장의 인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한편 잠에서 깨고 난 뒤 피해자가 도주한 사실을 깨달은 온보현은 그날 아침까지 숨어 있었는데, 경찰이 그가 운전하던 택시를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본 뒤, 그날로 대전으로 택시를 타고서 도주하였다. 이후 경찰은 지난 5년 간 수유리 근처에서 일했던 모든 택시 기사들의 이력서들을 수집한 뒤, 피해자와 대조 심문을 통하여 범인을 확정 짓고 범인의 신상을 파악하였다.
- 1994년 9월 11일
온보현은 저녁 8시 30분경에 서울 독산동 부근에서 21세 호텔 종업원 엄모 씨를 태웠다. 그는 올림픽대로에서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강원도 횡성군에 위치한 한 야산으로 끌고 가서 성폭행을 두 번에 걸쳐서 한 뒤, 피해자를 나무에 포박하였다. 그는 피해자를 죽이지 않은 채 친구를 데려오겠다고 말한 뒤, 2차 범행을 하러 야산을 내려갔다. 이틈을 탄 피해자는 포박을 풀고 도주하였다.
- 1994년 9월 12일(1차 살인)
그는 저녁 8시 30분 경에 양재동 부근에서 26세 회사원 허모 씨[6] 를 태웠다. 그는 서초 톨게이트 부근에서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전날 피해자를 포박해 놓았던 강원도 횡성의 야산으로 끌고 갔으나, 포박 당한 채 남겨졌던 피해자가 도망간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분노에 가득 차 피해자를 나무에 묶고 피해자의 얼굴, 무릎, 다리 등을 삽으로 끔찍하게 폭행한 뒤 도주하였다. 상처가 심했던 피해자 허 씨는 숨을 거두었다. 한편 범행 현장에서 벗어난 온 씨는 신한은행 풍납동 지점에서 피해자 허 씨의 외환은행 카드를 이용하여 61만 원을 인출하여 사용하였다.
- 1994년 9월 13일
그 후 그는 강동구 천호동 사거리 부근에서 19세 회사원 노모 씨를 태웠다.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한 뒤 그는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김천시에 위치한 여관으로 끌고가 강제로 범하였다. 피해자는 다른 피해자들과는 달리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고 차분했기에 그는 피해자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온씨는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장이 되어 홀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피해자의 말에 묘한 감정을 느껴 14일 새벽에 피해자를 고덕동에 위치한 피해자의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 1994년 9월 14일(2차 살인)
온씨는 가락동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H 모 특수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박모 씨(당시 24세)를 태운 뒤, 가락동 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 앞 사거리 부근에서 칼로 피해자를 위협했으나, 피해자가 심하게 반항한 나머지 흉기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이에 극도로 흥분한 온 씨는 피해자의 허벅지와 배 등을 수차례 칼로 난자하여 확인 사살한 뒤,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외곽)에 위치한 도로변에 시신을 유기하였다. 이후 상처를 치료하고 은신하기 위해 서울 천호동에 위치한 모 여관 3층의 구석진 방에서 13일 동안 은신하였다. 손을 베인 온 씨는 범행을 중단하였는데, 부상과 더불어 이전까지 겪을 수 없었던 피해자의 심한 반항으로 인하여 본디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했던 온보현은 범행을 저지르고자 하는 의욕을 잃었다. 이에 대하여 범죄 프로 파일러 표창원 교수는 마지막 희생자였던 박모 씨의 거룩한 희생이 추가적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았다고 저서 <한국의 연쇄살인>에서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여전히 온 씨의 행방을 확인하지 못 한 채였다.
- 1994년 9월 20일
지존파가 검거되었다. 이와 함께 온보현과 관련된 강력 범죄 사건 공개 수사가 시작되었다. 대대적인 공개 수배와 더불어 그가 택시 기사이자 범행에 택시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어 불심 검문 탐문 수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 1994년 9월 27일
그는 당시 지존파를 검거하여 유명해졌던 서울 서초경찰서 입구에서 의경에게 "자수하러 왔다" 고 말하며 자수하였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밝히기를, "지존파와 나를 비교해보고 싶다. 지존파와 같은 감방에 넣어달라" 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의도를 갖고 자수를 했으니 선처가 될 리 없었다. 그가 바랐던 것과 같이 온보현은 지존파 못지않게 매스컴에 대서 특필되었던 것은 물론 다음 해인 1995년 11월에 신속하게 집행된 사형으로 생을 마감했다.[7]
- 1994년 10월 31일
서울지검 강력부 박충근 검사는 온씨가 훔친 택시를 이용하여 부녀자 여섯 명을 납치하고, 이 가운데 두 명을 살해한 혐의를 들어 그를 구속 및 기소한지 18일 만에 사형을 구형하였다.
- 1994년 11월 14일
서울형사지법 합의 25부(재판장 김주형 부장 판사)는 피고인 온보현(37)에게 강도 살인 및 시체유기죄 등을 적용하였고, 앞서 구형된대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 1995년 2월 24일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되었고, 온보현이 상고를 포기해 사형이 확정됐다.
- 1995년 11월 2일
그는 지존파 등 19명과 함께 사형되었다. <범죄의 재구성>에 따르면 그는 자신과 같은 흉악범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강력 범죄자들에게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 줄 것이며, 형을 신속하게 집행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4. 경찰은 무능했다에 대한 의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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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보현은 대놓고 은행 CCTV에 얼굴을 남길 정도였다.
사건 당시에나 지금이나 경찰이 많이 무능해 보인다는 평가가 많다.
'''1994년이었던 시대상을 감안한다고 해도 부실 수사가 맞으며 경찰이 무능했던 것도 맞다.''' 팟캐스트 방송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크라임>, <김복준 김윤희의 사건의뢰> 등에서는 당시 경찰의 부실 수사를 지적하고 있다. 당시 프로파일러였던 표창원은 이하와 같이 강도 높게 비판했다.
프로파일러 배상훈은 전국 경찰서가 공조 수사만 했어도 사건이 이렇게 길어지지 않았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특히 세번째 피해자인 엄 양이 횡성 야산에서 도망쳤을 때 경찰은 수사의 기본인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돌아온다."를 간과한 데다가 특히나 온보현은 엄 양에게 '''친구를 데리고 돌아온다'''는 말까지 했었는데 그 장소에서의 잠복 수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공개 수배, 공조 수사의 중요성과 비공개 수사, 수사 정보 독점의 폐해를 여지없이 드러낸 사건이었다. 낮은 지적 능력을 가진 사회 낙오자 온보현의 서툰 범행이 여러 차례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었던 데는 경찰 수사 시스템의 후진성도 일조했다고 봐야 한다'
또 당시 실종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다루던 경찰 태도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2차 살해 피해자이자 마지막 피해자인 박모 씨(당시 24세)[8][9] 의 부모에 따르면 실종된 다음날 바로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으나, '''단순 치정 문제로 인한 가출로 여기며 무시'''했다고 한다. 2009년 부녀자 연쇄 납치 살인마 강호순의 검거 이전엔 성인 여성 실종을 단순 가출로 단정하고 수사를 부실하게 하여 장기 실종, 미제 사건이 된 경우가 많았다.
5. 여담
- 8년 뒤에 유사 사건인 용인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불행히도 이 때 살해 당한 사람은 6명이었다.
- 이 사건은 2013년 티케스트 계열인 E채널의 "대한민국 사건파일 No.5 - 교통수단에서의 잔혹 범죄" 에피소드에서 1위에 올랐다.
- 팟캐스트 방송 <프로파일러 권일용의 검은 방 시즌1> 사회적 분노 : 서울에 나타난 살인택시
- 팟캐스트 방송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온보현1: 내 나이만큼 죽이겠다, 살인 택시가 출발했다 온보현2: 왜 누구는 죽이고, 누군 살려줬나? 자존감과 살인
6. 둘러보기
[1] 출처[2] 하지만 그가 자수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3] 온씨는 전국에 5,500여명 밖에 안되는 희성이다.[4] 현재 살아있다면 67세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에 속한다.[5] 1994년 당시 수유동은 도봉구 관할이었다. 지금의 강북구는 이듬해인 1995년 3월에 도봉구에서 분구되어 신설되었다.[6] "대한민국 사건파일 No.5"이라는 프로그램의 내용에 의하면 피해자 허모 씨는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였다고 한다.[7] 참고로 온보현의 사형 집행은 지존파와 함께 문민정부 당시에 일어났던 살인사건 중에서 사형이 집행된 단 두 개의 사례 중 하나이다.[8] 귀가 도중에 가락동에서 납치되었으며, 실종 13일 만에 사체로 발견되었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살해 1년 전인 1993년부터 E 모 여자 대학교 특수교육학과를 졸업 한 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H 모 특수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었으며, 장애인 특수 교육에 종사하던 여성이었다. 여담으로, 온보현의 살인 희생자들은 모두 사회 봉사에 관심을 가지고 힘쓰던 바르게 자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봉사가 끝나고 오던 길에 희생된 피해자도 있었다.[9] 당시 프로파일러였던 표창원은 박 씨의 용감한 저항이 다른 많은 여성들을 구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박 씨의 맹렬한 저항이 원래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온보현의 살인 의욕과 자신감을 꺾었다는 것. 실제로 박 씨 강간 살인 사건 이후 온보현은 보름 정도 범행 과정에서 다친 손을 치료하며 은둔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