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창군

 

'''도정궁의 역대 주인'''
12대 완성군 이희

'''13대 완창군 이시인'''

14대 경원군 이하전

'''조선 중종의 13대손 | 도정궁 12대 사손'''
'''완창군
完昌君'''

'''군호'''
완창군(完昌君)[1]
'''본관'''
전주(全州)
'''이름'''
시인(時仁)
''''''
덕일(德一)
'''양부'''
완성군
'''양모'''
임천군부인 임천 조씨(林川 趙氏)
'''생부'''
이옥[3]
'''생모'''
경주 김씨(慶州 金氏)
'''부인'''
경주군부인 경주 김씨(慶州 金氏)
'''자녀'''
2남
'''생몰
기간
'''
'''음력'''
1805년 5월 2일 ~ 1843년 3월 11일
'''양력'''
1805년 5월 30일 ~ 1843년 4월 10일
1. 개요
2. 생애
3. 가족과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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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도정궁의 제12대 사손(嗣孫)[4]이자 제13대 주인이다.

2. 생애


1805년(순조 5년)[5] 5월 2일 한성부에서 덕흥대원군의 9대 사손 판돈녕부사 이풍(李灃)[6]차남이자 달선군 이영의 양자인 이민식의 둘째 아들 이옥과 경주 김씨 부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년) 6월에 생가 큰아버지이자 족보 상으로 7촌 숙부가 되는 완성군 이희의 양자가 되었다.
양자가 된 그 해에 목릉(穆陵)[7] 참봉을 역임하는 것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년 뒤에는 산 부지 문제로 다툼이 있어 친형 이시학과 함께 의금부에 잡히기도 했다.(...) 1837년(헌종 3년)에는 대왕대비 순원왕후에 의해 도정궁 사손 자격으로 세습되는 군 작위를 받아 완창군(完昌君)에 봉작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사옹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 편찬 때 감독을 맡기도 했고 순조의 딸 덕온공주의 혼례 때 가례청의 책임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 문안 재신(問安宰臣)이라 하여 청나라에서 온 사신의 숙소에 찾아가 문안하는 일도 맡았다. 이후에도 오위도총부 도총관, 큰 제사 때마다 헌관을 맡았고 1840년(헌종 6년)에는 진위(陳慰) 겸 진향사(進香使)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크고 작은 국가적 일들을 많이 맡았다.
1843년(헌종 9년) 3월 11일에 별세하였다. 향년 39세. 묘는 수락산 끝자락,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에 있다.

3. 가족과 자손


정실부인으로 남원군부인 윤씨와 경주군부인 김씨가 있다. 그리고 소실이 하나 있었다. 남원군부인 윤씨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고 경주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아들 경원군 이하전을 두었다. 이하전은 철종 시기 역모로 몰려 사형당했다. 이 때문에 이미 죽은 완창군도 파양당했고 사판이 훼철되는 등 수난을 겪다가 고종 대에 복권되었다. 자세한 것은 경원군(1842) 항목 참조. 첩 한 명에게서는 서장남 이우용(李禹鎔)[8]을 두었다.
참고로 생가 누이 이씨는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5대손 민치구와 혼인했는데 그 사이에서 난 딸이 여흥부대부인 민씨, 즉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생모다. 그래서 고종은 그의 외외종손 겸 동생 뻘이 된다.[9]

[1] 작위는 왕실의 본관인 완산에서 유래했다. 양아버지 완성군의 경우도 마찬가지.[2] 풍과 례 두 가지 음이 있어 이례로도 읽는다.[3] 덕흥대원군의 9대 사손 판돈녕부사 이풍(李灃)[2]차남이자 달선군 이영의 양자가 된 이민식의 둘째 아들.[4]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란 뜻이다.[5] 순조는 완창군의 할아버지 뻘이나 나이는 15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즉, 완창군은 고종과 같은 항렬이다.[6] 풍과 례 두 가지 음이 있어 이례로도 읽는다.[7] 선조의 능.[8] 초명은 이우전(李禹銓). 1868년에 이우용으로 개명.[9] 둘 다 덕흥대원군의 12대손이다. 부계 기준 촌수로는 무려 24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