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군(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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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이자 문신, 정치가. 본명은 이하전(李夏銓). 도정궁의 제13대 사손(嗣孫)[4] 이며 제14대 주인이다.
2. 생애
1842년(헌종 8년)[5] 2월 15일에 한성부 서부 인달방 도정궁에서 태어났다. 생후 1년 만에 아버지 완창군이 세상을 떠나 겨우 만 1세로 도정궁 사손이 되었다.
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돈녕부의 참봉과 전부[6] 가 되었고 여러 벼슬을 거쳐 원릉령[7] 과 진찬소 낭관[8] 으로 임명받았다. 만 15세인 1857년(철종 8년)에는 경모궁령, 사직서령 등을 지냈으며 1858년(철종 9년)에는 뭔가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국왕 또는 관부에 사정을 호소하겠다고 하다 파직당했다가 곧 복직했다. 이후에도 종친부 전부[9] 와 전생서 판관[10] , 및 충훈부도사[11] 등을 거쳤다.
3. 세도가와의 대립 및 최후
안동 김씨의 세도로 관직이 임명되는 것에 분개한 그는 철종에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김씨의 나라입니까?"'''[12] 라 말하며 세도가를 비판했다. 당연히 이 소식을 듣고 가만있을 안동 김씨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후 줄곧 이하전을 비난하며 이하전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고 누명을 씌우기도 했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1862년(철종 13년) 7월에 오위장 이재두 등이 무고하여 전 오위장(五衛將) 김순성과 이극선 등이 체포당했는데, 그 내용이 '''이하전을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같은 달 19일부터 23일까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김순성은 이항로, 이하전의 서족(庶族)인 이돈 및 이하전의 사촌 이사규 등과 모의하여 이하전을 왕위에 올리려 했으며, 이항로의 집에서 모의했다고 밝혔다. 이에 2달 뒤 의금부도사 조성교가 이항로를 잡아와 심문했으나 이항로는 혐의를 부인했고, 별다른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항로는 나이가 많은데다 이돈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해서 풀려났다.[13]
그러나 본인의 잘못이 없다해도 역적들의 수장으로 추대받았던 이하전이 형벌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리하여 1862년(철종 13년) 7월 25일 전라도 제주목[14] 으로 유배를 간 뒤, 바로 위리안치형[15] 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사헌부와 사간원, 빈청 등에서 계속 그를 탄핵했다. 결국 같은 해 8월 20일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향년 21세.
이 사건은 이하전을 역모로 엮어 제거하려는 안동 김씨들의 음모였다는 주장이 있다. 역모 사건 치고는 너무도 엉성하고 관련자들을 잡아다 문초해도 별 다른 게 안나와 대부분 풀려난 것, 그리고 이하전이 당시 이미 안동 김씨의 눈 밖에 났다는 등의 배경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 설에 따르면, 병약한 철종의 사후를 대비하여 총명한 왕족을 제거하려는 김흥근과 김좌근 등의 책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안동 김씨와 대척점에 있던 또 다른 세도가인 풍양 조씨 계열은 이 사건으로 자파의 지지 세력인 이하전 일파 등이 받을 타격을 최소화 하려한 반면, 안동 김씨는 이 기회를 틈타 풍양 조씨 지지 세력을 확실히 밟아버리기 위해 사태를 확대시키려고 했다.
유능하기는 했으나, 젊은 혈기로 안동 김씨와 맞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신중함이 부족했던 인물이라 하겠다.
4. 사후
이하전이 죽은 후 이하전은 물론, 이미 죽은 이하전의 아버지 완창군 이시인 또한 파양당해[16] 도정궁 사손 지위를 잃었다. 그 자리는 3대 사손 응천군 이돈의 동생 밀산군 이찬의 9대손 이익주[17] 가 완창군의 양아버지 완성군 이희의 양자로 들어가 대신 맡았다.
고종이 즉위한 후 이하전의 복권 논의가 일었고, 고종은 1872년(고종 9년) 7월 25일 도정궁 사손으로 다시 이하전을 정하면서 완전히 신원을 복권시켰다.[18] 그리고 이하전의 후사는 조카 뻘 먼 친척을 입양하여 잇게 했다. 자세한 것은 아래의 가족과 후손 단락 참조.
순종 즉위 후인 1908년(융희 2년) 5월에 경원군(慶原君)으로 추봉받았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덕송리 덕릉마을 내 덕흥대원군묘 권역에 있다.
5. 여담
- 이하전이 죽을 때 그의 아내가 금부도사가 가져온 사약을 직접 달여줬다는 설이 있다.
- 이름이 이하전이라서 본명이 이하응인 흥선대원군과 형제지간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이하전이 형인줄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아니고 실제로는 이하응이 이하전보다 22살 많은 24촌 할아버지 뻘이다.[19] 이하전은 흥선대원군의 손자들인 영선군(흥친왕의 아들), 순종황제, 의친왕, 영친왕(고종의 아들)과 같은 항렬이다.
- 부인 서대혜는 대한제국 시기 계몽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1908년(융희 2년)에는 양며느리 이씨[20] 와 함께 청진동에 양심여학교(養心女學校)를 세우고 자금을 적극 후원했다. 양심여학교는 이후 종친 이재극[21] 과 김인화가 설립한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에 합병되었다. 동덕여자의숙은 동원여자의숙과 다시 합쳐져 동덕여학교를 거쳐 현재 동덕여자중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가 되었다.
6. 헌종, 철종 시기 왕위 계승 유력 후보?
세간에는 헌종, 철종 시기에 이하전이 '''유력한''' 차기 왕위 계승 후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 '역모 사건에서 추대 대상'이었던 것과 '생전 활발한 활동을 한 왕족'이었다는 점, 또 '안동 김씨와 대척점에 있다 결국 그들 집권기에 젊은 나이로 사사당한 총명한 왕족'이란 점이 안타까움을 자아내서 그런 듯 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조선 왕실 직계와 촌수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저 둘은 실제 혈통으로는 덕흥대원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고 법적으로는 중종의 아들 대에 갈라졌다.(선조가 명종의 양자이기에.) 그래서 헌종과 실제로는 '''25촌'''(...), 법적으로는 '''27촌'''(...)이다. 굳이 설명이 더 필요한지?
단, 그냥 덕흥대원군에서 갈라진 다른 사람이라면 논의 대상 자체가 아니었겠지만, 이하전의 경우는 특수했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 들어 왕실 자손이 거의 씨가 마르기 직전까지 가(...) 1819년(순조 19년) 순조가 일종의 보험 개념으로 10대 사손 진안군 이언식 대 부터 '''대원군가 종손에 한해서''' 군 작위 수여 및 왕족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23] 13대 사손인 이하전은 종친부에서 관리하는 엄연한 왕족이었고 그래서 언급할 수 있는 대상이긴 했다.
그리고 이하전이 다른 종친들보다 유리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항렬'''. 원래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르면, 선왕의 다음 항렬 대에서 새 왕이 나와야하는데 그럴 왕족이 없긴 했다. 헌종은 덕흥대원군의 13세손(12대손)이고 그 아랫대가 14세손(13대손)인데, 왕과 가까운 친척들 중 14세손은 '''단 1명도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해당했던 왕족이 도정궁 종손 이하전이었던 것.[24] 어찌 보면 당연하다. 비록 왕통을 계승한 건 덕흥대원군의 셋째인 선조 계열이었지만, 덕흥대원군의 장남 계열로만 계속 이어지는 종가가 바로 도정궁이기 때문에 왕실 직계보다 세대 진행이 빨랐기 때문이다.[25] 어쨌든 그래서 실제로 헌종 사후 풍양 조씨와 뜻을 같이하던 권돈인이 직접 이하전을 후계자로 세우기를 호명한 적도 있었다.[26]
그러나 이 때 헌종에게는 비록 항렬 상 숙부 뻘이긴 하지만 7촌인 이욱과 이원범이 있었고 안동 김씨들은 이들을 지지해 결국 이원범이 즉위했다. 아무리 항렬이 중요하다해도 선왕 헌종과 '''7촌'''인 숙부와 '''25촌 - 27촌''' 조카 뻘 중에 누구한테 왕위를 물려줄 것인지는 더 말을 안해도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항렬이 역행해버린 이상 그 다음 왕위는 철종의 조카 뻘이자 헌종의 형제 뻘이 즉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철종 재위기에 그 항렬 대의 왕손들은 꽤 있었기 때문에[27] 설령 이하전이 철종이 승하할 때까지 살아있었다해도 즉위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한다.
7. 매체에서
경평군(반문섭 분)에게 다음 보위를 준비하란 말을 듣지만, 손사레치며 흥선군(이순재 분)을 찾아가라고 한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하자 노들강가[29] 에서 김순성(조재훈 분[30] ), 이긍선(김시원 분[31] )과 술을 마시며 정치상황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는데 옆에 있던 하인이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민란을 부추긴 죄로 사약받아 죽는다. 이후 이상지(안병경 분)가 이하전의 죽음이 흥선군 책임이라 하여 흥선군을 죽이려다 실패한 장면도 나온다.
철종의 원자가 죽자 흥선군(임동진 분)을 찾아가 화를 내며 제대로 살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배 위에서 김순성(정명환 분), 이긍선(이재룡 분)과 술을 마시다 그들에게 반정을 권유받는데 뱃사공이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의금부로 잡혀가 사약을 마셨고 가솔들은 관노로 전락한다. 《풍운》과 작가가 같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두 작품의 묘사가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나라의 안위와 종친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파락호 생활을 하던 철종(정욱 분)이 종친에게 양위하려하자 조대비(김보연 분)가 철종에게 데려와 인사시키는 것으로 첫 등장. 영리하고 야심도 큰 모습으로 나온다. 최천중(박시후 분)과 흥선군(전광렬 분)의 경고를 무시하고 안동 김씨 축출에 나섰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한다.# 단, 몇 가지 고증오류가 있다. 극중에서 이하전이 경원군으로 불리는데 그의 군호는 1908년(융희 2년)에 추증한 것이기 때문에 생전에는 경원군이 아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뻘인 흥선군을 형님, 종형으로 부른다.[33]
병약한 8. 가족과 자손
부인은 앞서 언급한 달성군부인 서대혜(徐大慧)로 일제강점기인 1925년까지 살았다. 이하전이 사형당할 당시, 서대혜는 임신 중이었는데 자살 시도를 했으나 다행히 살았다. 하지만 꽤 오래 혼절하여 아이를 낳았는지 안 낳았는지, 만약 낳았다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불분명해졌고 이는 60년 뒤 도정궁에 큰 파란을 일으킨다. 자세한 것은 도정궁 친자 논란 참조.
공식적으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후사(後嗣)는 23촌 조카 뻘인 밀산군 이찬의 11대손 이봉길(이해창으로 개명)이 입양와서 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창산군 참조.
[1] 사후 추증.[2] 군호는 경상북도 경주군(慶州郡)에서 유래했다.[3] 후술하겠지만 양자이다.[4]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란 뜻이다.[5] 헌종은 경원군의 아저씨 뻘이다. 즉, 경원군은 순종과 같은 항렬이다.[6] 敦寧府,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관리하던 관청.[7] 元陵,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능.[8] 進饌所. 왕실 연회인 진찬에 관한 일을 맡은 임시 관청. 낭관은 각 부처의 실무 책임을 맡은 정랑(正郎)과 좌랑(佐郎)의 통칭이다.[9] 조선시대 종친부의 정5품 관직으로 정원은 음관 1원이다. 종친부 대부분의 관직이 거의 명예직이지만 전부만큼은 실권이 있었다.[10] 조선 시대에 동물의 사육을 담당하던 관청[11] 忠勳府.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에 포상 및 작우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 현재의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격이다.[12] 단, 이 말 자체는 경평군 이호가 했다는 설도 있다. [13] 근데 이돈은 실존 인물 맞다. 당시 50대로 이하전의 10촌 형이었으나 서얼이었다.[14]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15] 죄인을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벌.[16] 완창군은 원래 이전 도정궁 사손이었던 완성군 이희의 조카였으나 완성군의 아들이 없어 양자로 갔다.[17] 李益周, 1868년 이후 이재익(李載益)으로 개명.[18] 사손을 대신했던 이재익(1868년 이전 이익주)은 본가로 돌아갔다.[19] 이하응과 이하전의 가계는 덕흥대원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다. 이하응은 덕흥대원군의 11대손(12세손)이고 이하전은 13대손(14세손)이다.[20] 이하전 - 서대혜의 양자인 창산군 이해창의 부인.[21] 이하전에게는 아저씨 뻘 된다.[22] 사실 이하응과 철종, 고종은 저 때 태어나지도 않았다.[23] 조선 왕실에서 대원군에 봉해졌던 사람은 4명이다. 덕흥대원군, 정원대원군, 전계대원군, 흥선대원군. 그런데 1819년 당시엔 철종, 고종 즉위 전이라 이광과 이하응은 대원군이 아니었고[22] , 정원대원군은 원종으로 추존받아 법적으로는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덕흥대원군의 봉사손들만을 대상으로 내린 왕명이었다.[24] 참고로 도정궁 계열을 제외한 왕실 종친 중에서 (아기 때 요절한 사람 제외하고)이하전과 같은 항렬의 왕손으로 처음 태어난 사람이 '''1868년 생''' 완친왕(완화군)이다.[25] 이하전과 같은 항렬의 임금은 그보다 30여 년 뒤에 태어난 순종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항렬('용(鎔)'자 돌림)이나 한 칸 밑의 조카뻘 항렬('해(海)'자 돌림)을 보면, 현대의 인물이거나 심지어 네이버의 이해진이나 DL그룹의 이해욱처럼 2020년대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사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꽤 있다.[26] 그러면 헌종과 같은 항렬의 왕손은 없냐고 할 수도 있다. 딱 2명 있었다. 은신군의 증손자인 이재원(흥선군의 형 흥녕군의 아들)과 이재면(흥선군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법적으로는 헌종과 8촌이었지만, 실제로는 인평대군의 8대손이라 18촌이었으며(...) 더군다나 이재면은 불과 만 4살 밖에 안된 아주 어린 아이였다. 후술하겠지만 실제 핏줄 상으로는 헌종과 7촌인 이원범 형제에게 밀리고, 항렬로는 아랫 세대인 이하전에게 밀리고, 이래저래 애매하게 끼어서(?) 당시엔 아예 주목 대상조차 못되었다. [27] 철종 사망 당시 헌종과 동항렬인 왕족들은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이재덕, 이재성, 이재원, 이재긍, 이재면, 이명복, 이재근 등이 있었다.[28] 제4공화국, 제5공화국에서 박종규 전 대통령 경호실장 역을 맡았다.[29] 지금의 노량진 일대 한강변.[30] 《야인시대》에서 시대일보 편집국장 역을 맡았다. 배우 조향기, 조기쁨의 아버지.[31] 《태조 왕건》에서 수달, 《연개소문》에서 강이식 역을 맡았다.[32] 상도에서 순조를, 제5공화국에서 김재익 경제수석을, 그리고 무신에서 주숙 역을 맡았다.[33] 형님 호칭은 봐줄 여지가 있다. 이하응은 이하전 고모(완창군 이시인의 생가 누이)의 사위, 즉 고종사촌누나(여흥부대부인)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형(친척 형)으로 부른 건 확실히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