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
1. 개요
안석주[1] 작사, 안병원 작곡의 동요. 1947년 발표되었다.
1947년,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부생이었던 안병원이 조선방송협회에서 어린이 프로그램 담당으로 근무하던 친구의 의뢰를 수락하면서 작곡되었다. 당시 3·1절 특선 아동 뮤지컬이었던 "독립의 날"에 포함되어 있던 다섯 곡 중 하나였으나, 현재는 이 곡만이 남아 불려지고 있다.[2]
중간에 가사가 한번 바뀐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가사가 통일이 아닌 '''독립'''이었었다. 미군정기인 당시에는 일본 제국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았으나 미군정이 행정을 총괄하고 좌우익으로 상징하는 냉전체제의 대립이 극심했던 탓에 진정한 의미의 '''자주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이후 1948년, 자주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되고 '''6.25 전쟁'''으로 분단이 격화되면서 1954년 문교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통일'''로 수정이 되었다.
2013년 이 노래를 작곡한 안병원 씨가 "이제는 이 노래를 그만 불렀으면 좋겠다"는 씁쓸한 인터뷰를 하였다. 원작자라는 이유로 갑질을 한 것이 아니라, 어서 빨리 통일이 와서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이 노래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안병원 씨는 통일을 보지 못하고 2015년 별세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평소에 이 노래를 즐겨 불렀으며 2009년 8월 23일에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영결식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장송곡 중 하나로 연주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집권시기인 80년대부터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에 의해 알음알음 퍼지다가,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개최된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계기로 북한 인민대중에게도 전파되었다. 김정은 역시 애비가 부른 노래인만큼 어느정도 용인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금지곡으로 선포하고 보위부, 인민보안부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단속했는데, 김정은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강성대국(...)이 되는 것"'''이라고 교시한 것이 이유라고.
그러나 2018년 문재인 정부 시기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 당시 레드벨벳이 부르기도 하였고, 금강산에서 개최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북측 이산가족들과 적십자회 보장성원들이 이 노래를 부른 것을 보면, 즉흥적으로 선포되었다가 주민들의 반발[3] 이나 남한 관계를 의식해 은근슬쩍 해금한 것으로 보인다.
2. 가사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찾는데[4]
통일통일이여 어서오라
통일이여 오라
3. 매체에서
- 1983년 KBS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을 방영할 당시, 가수 조영남이 부른 이 노래를 프로그램의 엔딩 타이틀로 삽입하였다.
- 영화 쉬리에서 북한 8군단 출신 공작원 박무영(최민식)이 남측 요원 한석규에게 하는 남북관계를 비꼬는 대사에서 이 노래가 등장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니들이 한가롭게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이 순간에도 우리 북녘의 인민들은 못 먹고 병들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어. 나무껍데기에 풀뿌리도 모자라서 이젠 흙까지 파먹고 있어. 새파란 우리 인민의 아들딸들이 국경 넘어 매춘부에 그것도 단돈 100달러에 개 팔리듯 팔리고 있어. 굶어 죽은 지 새끼의 인육마저 뜯어먹는 그 애미, 그 애비를, 너는 본 적이 있어? 썩은 치즈에 콜라 햄버거를 먹고 자란 니들이 그걸 알 리 없지.”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인 주성하 기자는 이 장면을 두고 "놀라웠다. 치즈에 콜라나 빠는 작가가 쓴 것 같지도, 햄버거를 먹는 배우가 연기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분노해야 할 대상은 모두 평양에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사실 공작원으로 선발될 정도면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극에 달한 핵심계층이기 때문에 북한 체제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지적하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이다.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인 주성하 기자는 이 장면을 두고 "놀라웠다. 치즈에 콜라나 빠는 작가가 쓴 것 같지도, 햄버거를 먹는 배우가 연기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분노해야 할 대상은 모두 평양에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사실 공작원으로 선발될 정도면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극에 달한 핵심계층이기 때문에 북한 체제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지적하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이다.
4. 기타
심영도 불렀다. (2분 43초부터)
[1] 1901년~1950년. 안병원의 아버지로, 한때 영화감독, 각본가, 만화가, 작가 등 예술계의 팔방미인으로 활동하면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하기도 하였으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모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등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여담으로, 돈지랄 문서에 나온 조선일보 1934년판 만화를 그린 안석영이 바로 안석주이다.[2] 여담으로, 이 뮤지컬이 선보였던 1947년 3·1절은 제주도에서 4.3 사건의 단초가 된 날이기도 하다.[3] 상술했던 것처럼 애비가 즐겨 불렀던 것을 금지곡으로 만든 탓에 주민들의 불만이 컸다.[4] 또는 "살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