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color=#fff> '''3·1절
三一節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ay'''[1][2]
'''종로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만세운동을 하는 여학생'''[3]
'''오늘날 독립문 앞에서 만세삼창'''
<color=#fff> '''1919년 3월 1일
2021년 105주년'''
'''동탄아트스페이스의 3.1절 100주년 기념 일러스트'''

삼일절! 이 날은 가장 신성한 날이요.

대한민국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니 진실로 상제가 허하신 날이오.

이 날은 일이 개인이 작정한 것이 아니오. 2천만이 하였고

다만 소리로만 한 것이 아니오. 순결한 남녀의 혈로 작정한 신성한 날이오.

-

안창호, 3.1절 제1주년 축사에서

아! 경사로다! '''건국의 기념일이여!'''

반도강산 이천만 민족의 생명은 이 날부터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 날이 다시 돌아오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지 않을 수 없다.

굽히지 않는 열성과 꺾이지 않는 충정으로 원수의 엄혹한 단속에도 굴하지 않고 찬란하고 위대한 활동을 위하여 축하해야 할 것이다.

아는가? 3월 1일이 무슨 날인지?

-

대한민국 2년 2월 27일 혈성단(血誠團) 3.1절 축하 경고문

1. 개요
2. 역사
2.2.1. 100주년 기념식
3. 노래
4. 역대 경축식장
5. 여담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개요


'''조선 독립 만세!'''[4]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중략) 을 계승하고 (후략)

대한민국 헌법 전문 中

'''3·1절'''()은 대한민국국경일로,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1일 토요일 (음력1월 29일), 독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인 '''독립선언일'''이자 대한민국 헌법에서 명시한 헌법이념인 3.1운동 정신의 탄생을 경축하는 날이다.
3.1 운동은 세계에서도 비슷한 예가 많지 않은 대규모의 집단적 저항 운동으로 광복에 대한 한국인의 염원과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린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헌법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으며 그 정신을 승계하여 정부를 수립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광복절건국절이 아닌 이유가 삼일절과도 관련이 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존재하던 독립운동 구심체가 통일된 민주주의 제도의 임시정부 수립운동으로 이어져, 서울의 한성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가 상하이 상해정부가 합쳐지는 형태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이다. 즉, 3.1 운동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인 민주공화국 체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고 이 임시정부의 헌장과 강령, 헌법 등이 대한민국 제헌 헌법을 통해 계승되어 오늘날 헌정의 뿌리가 되었기에 '''대한민국의 출발일'''로서 국가가 축하하는 것이다.[5]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공공기관에서마저 삼일절이 '''국경일'''임에도 이날을 ''''조의를 표하는 날'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대한민국 자유와 평등의 생일'''이라고 연설했다.
이 사건이 있기 며칠 전에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이라는 빈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서를 발표하고 잡혀갈 예정이었으므로, 백업 요원으로 실제 시위를 주도할 15인이 더 있었다고 한다. 다만 여기에는 14인설과 16인설도 있으며 정노식을 제외하느냐, 김세환을 추가하느냐에 따라서 나뉜다.
어쨌거나 실제 시위를 15인까지 모두 합쳐서 민족대표 48인이라고 불린다. 이 중 1인만 빼고 모두 변절했다는 암울한 헛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사실은 서너명 정도만 변절했을 뿐이고, '''나머지는 끝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께 감사하자.''' 구체적으로 33인 중 3인인 박희도, 정춘수, 최린이 변절한 사람들이고, 48인 중에서는 최남선이 포함되어 4인이 된다. 이들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바로 기미독립선언서다.
400년 동안 삼일절은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각각 58번씩 오고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57번, 월요일수요일에는 56번이 온다. 삼일절이 주말인 경우는 400년 동안 115번, 연휴가 되는 경우는 400년 동안 113번이다.
  • 삼일절 연휴의 연도별은 다음과 같다.
2013년, 2019년, 2024년, 2030년, 2041년, 2047년, 2052년, 2058년: 3월 1일 (금) ~ 3월 3일 (일)
2010년, 2021년, 2027년, 2038년, 2049년, 2055년: 2월 27일 (토) ~ 3월 1일 (월) - 이럴 경우 공휴일 중 최소 5일이 날아간다.
2004년, 2032년, 2060년: 2월 28일 (토) ~ 3월 1일 (월) - 이럴 경우 공휴일 중 최소 5일이 날아간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최대 국경일의 지위에 있었으며 다채로운 경축 행사가 베풀어졌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대부분의 축하 문화가 사라져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자세한 것은 3.1절의 역사 문단 참조.
현재는 100세 이상의 노인들 정도만 ‘3.1운동 때 몇 살’ 하는 식으로 자신의 나이를 센다고 한다.


2. 역사



2.1. 20세기


삼일절의 역사는 독립 선포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 함께 시작된다.
1920년 2월 임시정부는 내무부 포고령 1호를 통해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 준비회를 발족하고 성대한 식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3월 1일 당일 상하이에서는 오전부터 한인 가옥마다 국기가 나부끼기 시작했으며, 정부 차원의 경축식은 오전 10시에 이동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임시의정원 대의원, 인성학교 학생이 모인 가운데 상해 올림픽 대극장에서 봉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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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오후 2시에는 대한교민단이 주최하는 3.1절 축하회가 성대히 열려 여운형 교민단장의 연설과 이동휘, 안창호의 축사, 중국 남녀 학생들의 축하무를 아우르며 오후 4시 반 기념 행사가 끝이 났다. 이와 동시에 한인들은 상하이 시가지에서 일본총영사관 앞까지 태극기를 들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대한민국 2년(1920) 당시 발행된 임시정부의 관보인 독립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삼월 일일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선언한 삼월 일일,

이천만 대한인은 간 곳마다 있는 곳마다,

천년 후 만년 후까지 자자손손히 '''열성과 환희로써 지켜 축하할 삼월 일일'''

대한의 자녀들은 어떻게 이날을 지켰는가.

삼월일일 오전 육시경부터 상해시내의 한인의 주가에는 부활한 태극국기가 날기 시작하엿다. 바로 밤새기를 기다리기가 어려웠던 것 갓다 명덕리 보강리 급로비로 일대에는 여긔져긔 태극기가 날닌다. 혹 개인으로 한인의 이층을 빌어잇는 이들도 다 국기를 달아 이날을 경축하엿다. 아마 법계 일대만 하여도 사오십은 된 것이니 상해시내에 이러케 대한의 국기가 날닌 것은 금차가 처음이다 이날에 비로소 세계 각국인이 모혀 사는 상해 한복판에서 우리는 대한인이다 하는 표를 보엿다 매일요와 경절에 영법미의 국기가 호호에 날닐 때에 우리는 얼마나 그를 부러워하엿던고. 동포들은 아해들까지도 수일전부터 이 신성한 국경일의 준비를 하야 작일에 지하야 아조 명절기분이 되엿섯다. 날은 흐럿스나 중춘일기에 그러치아나도 심신이 자못 상쾌하거늘 문전로두에 빗나는 태극기가 경풍에 편편함을 볼 때에 대한인의 감격이야 얼마나 하엿스랴. 아직 촌척도 회복치못한 고강, 차금 옥중에 게신 형제와 자매 모다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듯 하지마는 '''천만대에 기념할 우리 민족의 부활일인 오늘 하로를 무한히 깃부게 축하하자,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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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경축 식전은 임시정부와 국내 주요 지역은 물론이고 미국, 러시아, 쿠바, 심지어는 일본 등 각국의 도시에서도 치러졌는데, 특히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다뉴바 시에서 300인의 한인이 회집하여 태극기를 단 차량과 간호복을 입은 여성,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부대가 시가행진을 벌였다. 해외에서의 3.1절 행사는 강당이나 운동장, 교회 등을 빌려 여는 경축대회와 태극기와 깃발, 전단을 휘날리는 기습 시위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중국과 미주, 연해주에서, 후자는 주로 일본 유학생들이 자주 행하던 방식이었다.
상해에서 치러졌던 삼일절 경축식의 경우, 올림픽대극장이나 침례교당 등지를 빌려 만국기와 태극기로 장식을 하고 군악대를 초청하여 독립군가와 애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서 치러졌다. 식전이 끝난 뒤에는 차량을 빌려 태극기와 독립기[6]를 달고 악대를 앞세워 일본 영사관까지 가두행진을 하거나 축하연회, 기념연극 등을 베풀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중국을 비롯하여 대만, 필리핀, 인도, 베트남, 몽골 등 동아시아의 피압박민족 독립운동 대표단이 식전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반 제국주의 연대를 확인하기도 했다.[7]
상해 이외의 지역의 경우, 쿠바에서는 대포를 빌려 삼일절 식전 전에 21발의 예포를 쏘기도 했고, 1942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한인들의 군사 조직인 한인경비대가 이날을 경축하는 의미에서 열병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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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경비대의 삼일절 경축 열병식 사진자료)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1920년부터 사용되었으나, 당시 임시의정원에서 법률로 정한 국경일의 명칭은 '''독립선언기념일'''이었으며, 때때로 독립기념일, 국경일로 불리었다. 삼일절이라는 명칭은 중화민국의 쌍십절이나 미국 독립기념일의 별칭인 Fourth of July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8]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20년부터 공휴일로 삼고 있다. #
한편 임시정부 시기 독립운동가들과 해외 교포들은 삼일절을 '''대한민국 건국기념일'''로 인식하였는데, 1920년 포암 장병준 선생이 국내에 잠입해서 살포한 전단 <대한독립1주년축하경고문>에 3월 1일이 '''건국의 기념일'''로 언급되어 있었으며 이날을 '''대한의 자유독립을 선언한 이래 1주년 되는 첫 생일로 민족이 영원히 기념할 축일'''로 명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 이외에도 미주 지역 한인 신문인 <신한민보>(The New Korea)의 경우 3.1절을 '''Korean Independence Day'''로, 기념의 대상을 '''3.1운동대한민국 수립'''으로 언급한 바 있으며[9], 1943년 주미외교위원부가 미국 상원 의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3월 1일에 세계의 한국인들이 한국 독립선언대한민국 수립, 임시정부 창립을 기념했다는 내용이 담겨 3.1절이 당대 한인들에게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간주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윤봉길 의사의 천장절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피난을 함에 따라 성대한 식전은 치르기 어려워졌으나 간소하게나마 경축식을 이어나갔고, 중국 측 언론에서도 3.1절을 '''한국 혁명기념일'''로 표현하는 등 명실상부한 한인의 국경일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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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이후 대한민주의원에서 3월 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제정하였고,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삼일절 경축식이 거행되었다. 식전에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이 참석하였으며, 김규식 박사의 만세삼창 제창으로 식을 마쳤다.
다만 광복 직후 3.1절은 좌우익 대립의 장으로 대두되고는 했는데, 국가 건설의 정통성을 3.1 운동에 두려는 좌파우파가 서로 대결함에 따라 경축식이 개별적으로 열리는 것은 물론 상호 간의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11] 때문에 1940년대 당시 3월 1일이 다가오면 경찰들은 신경을 곤두섰다고. 다만 3.1절 경축 공연이 곳곳에서 열리는 등 축하 행사도 함께 이루어져 문화 생활에 목말라 하던 당시 민초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도 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성립된 이후 3.1절은 4대절에 포함되었으며, 대한민국 건립의 시원이 되는 최대의 국경일로 간주되었다.

오늘은 3월 1일! 우리 겨레 삼천만의 최대 국경일인 삼일절이다… 이날에는 명실상부하게 거족적인 국경일로 남북의 삼천만이 다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즐겁게 노래하고 맘껏 뛰놀며 이날을 경축하자.''' 이것이 최대 국경일인 오늘을 맞이하여 최대의 축원(祝願)이며 최고의 이상이다. 1949년 3월 1일 동아일보 사설 中

은빛 나래를 번뜩이며 저공비행을 하는 편대기와 부딪힐 것만 같은 기념탑, 빌딩 문 앞에는 화려한 기념장식 독립문을 본떠 만든 모형이며 그 밖에 오색 조화로 장식된 꽃전차가 네거리를 휘돌아간 후 기념식전에 참석하였던 군중들의 장쾌한 시가행진이 시작되었다. 우렁찬 행진곡을 연주하는 브라스 밴드가 지나가면 가장행렬단과 어울린 농악대가 멋들어진 날라리 소리로 길 양 옆의 군중들의 어깨춤을 유발시킨다. 인파 인파 인파 인파, 온 장안은 경축일색으로 물들고 시민들은 오는 해의 이날에는 반드시 남북의 동포가 서로 손을 맞잡고 정말 '''즐거운 축제'''를 지내야 한다는 굳은 결의를 가슴마다 간직하는 것이었다. 휘날리는 감격의 태극기 (1950.3.3 동아일보)

삼일절은 역사적 항쟁의 민족적 기념일 이며 '''국가적으로 최대의 경절일(慶節日)입니다.''' 역사적 전통과 민족적 긍지와 강인한 독립운동 정신으로 여러분과 같이 이날을 기념하고 또 경축하고자...

1950년 3월 1일 동아일보 사고(社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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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3월 1일 열린 제39주년 삼일절 경축 가장행렬)
1950년대까지 삼일절에는 명절처럼 상점들이 일제 철시하고 국기를 내걸었으며, 음악회, 학예회, 시열식, 시가행진, 봉화제 등이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1965년 한일협정 이후 3.1절의 위상이 크게 낮아지며 정부 차원의 형식적인 식전과 탑골공원 추념식만 사실상 남게 되었으며, 최대 국경일의 위치도 광복절에 내주게 되었다.[12] 1980년대 대한민국 제5공화국 동안에는 국무총리가 축하연설을 대독할 정도로 천시당했으며, 이때부터 3.1절 경축사가 사실상 정부 정책 홍보의 장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1999년 3.1절 80주년 이후로는 전국 각지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하여 만세행진 재현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사학계에서 이를 두고 '''3.1절을 잘못 기리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SBS 뉴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3.1운동의 본질은 민족공동체의 본질적 주권(real sovereignty)를 바탕으로 자주독립을 선포한 것이고 우리가 흔히 아는 만세시위는 그러한 독립선언식을 축하하기 위한 요식 행위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만세운동을 한 것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2.2. 21세기



2.2.1. 100주년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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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 상징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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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절 100주년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민간에서는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설립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서울시에서도 자체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중앙 정부 차원의 위원회는 2018년 7월 3일 발족되었으며, 현재 중앙경축식을 비롯하여 문화축제, 아리랑대축제, 독립의 횃불 봉송 등 다채로운 기념 행사를 준비 중에 있다. 대통령 직속 3.1절 100주년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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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일 3.1절 100주년를 맞이하여 전국 각지에서 행사가 개최됐다. 그 중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정부서울청사를 비롯한 인근 건물에는 대형 태극기가 내걸렸으며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과 각부 장관, 각계 인사와 시민 약 1만 명이 참석하였다. 국민대표 33인의 행진과 독립선언문 낭독, 독립유공자 포상이 진행되었고, 독립유공자 334명에 대한 포상에서는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정오에는 전국에서 동시에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타종과 만세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서울 보신각에서 열린 타종 행사에는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씨와 유관순 열사의 조카 유장부씨 등 독립유공자 후손 12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서울광장 일대에서는 만세 행진과 공연이 이어졌고, 시민 3,000명이 참여한 대합창 행사도 열렸다.

3. 노래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13]

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14]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날을 길이 빛내자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 '삼일절 노래'


4. 역대 경축식장



5. 여담


  • 광복절과 삼일절은 대통령이 축사를 하기 때문에, 이때 연설이 대일외교의 기조를 강하게 드러낸다. 강경이냐 온건이냐...... 그래서 일본의 정계/외교가/언론이 주목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에는 대통령 선거가 3월[15]로 옮겨지면서, 신임 대통령과 새 정부의 대일외교 기조는 삼일절이 아니라 광복절에 드러나게 되었다. 또 해마다 생존/순국 독립운동가에 대한 건국훈장 수여식도 개최하며, 순국선열의 경우 유가족이 받는다.
  • 광복절과 더불어 자신들의 애국심을 표출하겠다며 질주하는 폭주족들을 쉽게 볼 수 있는 날이다. 다행히도 2009년 경부터는 이런 폭주족들을 보기 힘들어졌고, 2013년부터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경찰이 강력한 단속 의지를 표출한 이유도 있고, 세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3.1 폭주를 선배로부터 대물림받아 전통처럼 뛰던 세대가 나이를 먹고 폭주를 관두면서 그 자리를 대신 채울 신세대 폭주족이 적어진 것도 있고 위험한 오토바이 폭주를 즐기기보다는 그냥 다른 걸 더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진 것. 불경기의 영향이라는 분석도 있다.
  • 취업, 실업 문제를 나타내는 신조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31살 되기 전까지 취업하지 못하면 끝장이다'를 줄여서 삼일절이라 청년층이 자조적으로 말하는 것. 2000년대 후반때부터 대두된 고용, 취업난 문제가 고스란히 담긴 신조어다. 자세한 사항은 나이 제한 문서로.
  • 북한에서는 대한민국의 경축일과 같은 의미인 명절이 아니며 공휴일도 아니다. 북한에서도 3.1 운동을 기념하지만, 다른 국경일에 밀려 공휴일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단계론의 단순도식적 해석은 차치하더라도, 민족대표 33인이 중상계급 이상의 부르주아지이자 종교인이라는 점, 그리고 김일성이 지나치리 만큼 게릴라항일무장투쟁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이 날은 대한민국에서 새 학년이 시작되는 날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모두 해당한다. 물론 삼일절 당일은 공휴일이므로 실제 등교일은 바로 다음에 오는 평일(2~4일[16])이다.
  • 다만 고등교육법에서는 예외를 인정해서 학교에 따라서는 2월에 개강 및 입학식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한편 고등교육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학교의 경우, 카이스트는 2월 초 개강, 5월 말에 종강으로 석달이 넘는 기나긴 여름방학을 자랑한다.
  • 새 학년이 시작되는 날이자 공휴일인 관계로 적지 않은 수의 학교들이 비정규직 교직원을 채용할 때 이 날을 근무일에서 빼는 일이 있었다. 즉 계약기간을 3월 2일부터 2월 말일까지로 하는 것. 이렇게 하면 계약일이 364일이므로 1년 만근시 줘야되는 퇴직금을 안 줄 수 있고 2년 이상 연속 계약시 정규직 전환을 해야하는 조항도 피해갈 수 있는 것을 이용한 꼼수다.
  • 한국의 스키장들은 삼일절에도 개장하기 때문에 삼일절에는 막바지 스키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스키장이 북적인다고 한다. 강원도는 3월 평균기온이 낮아서 3월이 사실상 겨울이라 가능한 현상. 최전방에서는 군인들이 삼일절에 제설작전을 펼치기도 한다. 남부 지방에서는 2월부터 봄이기 때문에 삼일절이면 이미 봄이다. 다만, 2019년은 겨울이 짧아서였는지 2월 26일부터 완연한 봄이었고, 따라서 삼일절에는 봄이었다.
  • 2010년 경인년 3.1절에는 현재까지도 커뮤니티에서 회자되고 있는 사건인 한·일 사이버 대전쟁 또는 경인대첩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일어나였다.
  • 2014년 3월 1일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구단 트위터에 95주년을 기념하는 트윗을 올렸다.(사용자 지정으로 한국 지역에 사는 사람만 볼 수 있는 글. 즉, 외국인은 못 보는 글이다.)
  • 실제로는 저 시기에는 대한독립만세와 조선독립만세가 혼용되었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이름보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서 그런지는 몰라도.[17] 현재 모든 역사교과서에서는 대한독립만세로 부른 것처럼 표시하고 있다. 뭐 실제로 대한독립군도 나중에 생겼고.
  • 삼일절을 독립절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다. 경향신문 논설을 스크랩한 블로그 그도 그럴 것이 미국만 봐도 최대의 명절 인디펜던스데이(독립기념일) 7월 4일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한 날이 아닌 영국에게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미국에서는 영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한 9월 3일은 기념하지 않는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일부 국가들이 독립선언일 혹은 독립전쟁개시일을 독립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위키백과 링크 근데 광복하고 독립하고의 의미는 살짝 다르다. 광복은 빛을 되찾는 것이고, 독립은 선언할 때 바로 이루어지는 것. 결론은 독립절이 되어도, 광복절에 쉴 수 있을 것 같다.
  • 위의 주장과 관련하여, 정치권에서도 2019년 3월 1일, 대한민국 독립선언 100주년을 성대히 기념하기 위한 국민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 2015년 3월 1일, 미 국무부 정무차관인 웬디 셔먼이 한·중·일 과거사 문제는 세 나라 모두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기사
  • 2018년 3.1절 기념식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같은 날에 광화문광장에서는 일제 강제 징용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3·1절 추모제도 열렸는데, 하필이면 광화문광장의 태극기집회 측과 서로 충돌했다. 그리고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일제 강제 징용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삼일절 추모제 측을 향해 "친북세력, 빨갱이들은 물러가라" 라는 매국노 인증 개소리를 지껄이며 추모제를 방해하는 몰상식한 짓거리를 저질렀다. 이들은 성조기이스라엘 국기 등 3.1절과 별 관계없는 깃발을 들고 온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거리 행진에서는 일장기가 그려진 현수막을 들기도 했다![18][19] 대한민국 극우 세력이라는 작자들이 왜 가짜 보수주의라고 욕을 처먹는지 자기들 스스로 그 이유를 확인해 준 어처구니 없는 만행. 이들은 100주년을 맞은 이듬 해 3.1절에도 집회를 열어 모처럼 즐거운 100주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또 다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들은 이 전해인 2017년에도 삼일절 당일은 물론이고 주말마다 태극기 집회를 열어서, 태극기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빠지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다른 단체들도 삼일절을 기념하는 태극기 게양 행사를 축소, 변경하는 경우가 발생했고 광복회마저 나서서 '태극기의 의미가 너무 왜곡되고 있다'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 2019시즌 K리그1은 삼일절 100주년에 개막했다.
  • 5세대 포켓몬 게임에서는 3월이 가을이기 때문에 삼일절에 돌려 보면 뜬금없이 계절이 가을로 나온다.
  • 가끔씩 삼일절과 정월대보름이 겹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전년도에 윤달이 있어서 설날이 밀린 경우다. 실제로도 삼일절이 있는 3월 1일을 음력으로 환산하면 1~2월이고 윤달인 경우는 윤1월이다.[20]
  • 3.1절의 요일을 기점으로 그 해의 달력이 본격적으로 결정된다.[21] 3.1절이 금요일일 경우 목요일이 공휴일이 많아서 평일 공휴일이 많다. 대표적으로 2019년, 2024년이다. 3.1절이 수요일이나 목요일, 토요일이어도 연휴가 다소 많은 편이다. 다만 2015년, 2020년처럼 3.1절이 일요일인 경우 공휴일이 토요일에 주로 겹쳐 주말 공휴일이 많으며 2021년처럼 3.1절이 월요일일 경우, 일요일이 공휴일이 대부분이며 공휴일 중 최소 5일이 날아간다.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은 일요일이고 한글날, 크리스마스는 토요일이기 때문이다. 3.1절이 화요일일 경우는 월요일이 공휴일이 많아 심하지는 않으나 일요일이 공휴일인 경우도 다소 있고 개천절 이후 공휴일이 날아간다.
  • 축구 감독 김학범과 야구선수 양현종의 생일이 바로 이 삼일절이다.
  • 롤러코스터 타이쿤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는 한국 공휴일이다. 이는 크리스마스, 신정, 설날이 모두 게임상에 존재하지 않는 날이기 때문.
  • 2019년 3.1절에는 청송군 부동면을 주왕산면으로, 산하의 이전리를 주산지리로 명칭을 변경했다.
  • 미군정 시절인 1947년 3·1절에는 제주도에서 4.3 사건의 발단이 되는 발포 사건이 일어났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1976년 3·1절에는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해풍 김씨는 삼일절에 종친회를 한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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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시나 삼점일절이라고 읽는 일이 없도록 하자.[2] 현행 대한민국의 삼일절 공식 영문표기는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Day이다. 하지만, 임정 시기 3·1절은 영어로 '''Korean Independence Day'''로 표기되었다. 삼일절 경축 전시공채 해외에서도 독립선언일을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라고 칭하는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 독립기념일. 멕시코와 브라질, 필리핀, 베트남 등도 우리와 비슷하다. 주한미국대사관에서는 Independence Movement Day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3] 사진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하는 모습.[4]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전이었고, 대한제국 명칭이 일제강점기 시대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지 않아서 대부분 "조선 독립 만세!" 라고 외쳤다. 그리고 이후 현대에는 두 가지 구호를 같이 사용하는 것으로 되었다. [5] 정부 수립 이후 삼일절의 국경일 제정 의도는 '''대한민국의 기원(紀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출처 : 광복 이후 통일국가수립운동과 국가상징의 제정과정<김혜수>)[6] 대한독립만세 따위의 글귀를 새긴 흰 깃발을 말한다.[7] 출처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3·1절 기념과 3·1운동 인식 (윤대원)[8] 근데 아이러니한 것은 정부 수립 이후 별칭으로 사용됐던 삼일절이란 명칭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광복 직후 1947년 기사에 3.1절을 독립기념일로 부른 적이 있으며, 3.1절 40주년인 1959년에도 이날을 독립기념일이라 부른 기록이 남아 있다.[9] 한국사데이터베이스[10]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모르지만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3.1운동은 '''3.1 혁명'''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3.1운동이 독립운동의 성격을 띈 것은 사실이나 단순 독립운동을 넘어 민주자유를 선언한 민주공화제의 기원절이라는 인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이 명칭은 제헌 헌법 전문에도 반영될 예정이었으나 친일 정당 한국민주당에서 딴지를 거는 바람에 3.1운동으로 명칭이 바뀌어 헌법에 실리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3.1운동 문서 참조.[11] 특히 1947년 제주도에 있었던 3.1절 기념행사 때 있었던 발포사건은 4.3 사건이라는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12] 다만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경축 예술제나 불꽃놀이 등 일부 경축행사는 간간히 이어졌다. 3.1절이 사실상 천시된 것은 10월 유신 이후의 일이다.[13] 사실 이 구절은 고증오류.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당시의 한반도 인구는 2천만이 채 되지 않았다.[14] '선열아'의 오타가 아니다. '하'는 '~이시여'라는 뜻의 옛말이다. 용비어천가의 '님금(임금)하 아라쇼셔(임금이시여 알아주소서)'나 정읍사의 '달하 노피곰 도다샤(달님이시여, 높이 돋으시어)'를 생각해보면 될 듯하다. 다만 현대에는 안 쓰는 표현이라 '''선열아'''라고 가사를 표기한 경우도 많이 보이는데, 이렇게 부르면 안 된다.[15] 19대 대선은 당선 직후 취임하였기 때문에 5월 9일에 치뤄졌으나, 이후 선거는 취임 2개월 전인 3월 초에 치뤄질 예정이다.[16] 4일일 경우는 삼일절이 금요일일 경우이다. 주5일제 이전에는 3월 2일이 개교기념일인 경우에만 3월 4일까지 밀렸다.[17] 독립선언문에서는 '조선의 독립'으로 표기하고 있다.[18] 3·1절 광화문에 성조기 물결, "文대통령 퇴진" 요구[19] [발칙한 뉴스]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 삼일절에 일장기까지 들었다?[20] 가장 최근에 삼일절과 정월대보름이 겹친 해는 1991년이었고 앞으로는 2037년에 찾아온다. 이런 경우는 평년인 경우 설날이 2월 15일, 윤년인 경우 설날이 2월 16일인 해이다.[21] 2020년의 경우 시작 요일은 2014년과 같았으나 3.1절 이후 달력이 2015년과 일치한다. 따라서 2020년 달력을 보면 2015년이랑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