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크레이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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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웨스 크레이븐 (Wes Craven | Wesley Earl Craven)
출생
1939년 8월 2일
사망
2015년 8월 30일
학력
휘튼 칼리지 영문학, 심리학 학사 존스 홉킨스 대학교 철학 석사
데뷔
1971년 영화 '투게더'
종교
개신교(침례회)
1. 개요
2. 역사
3. 스타일
4. 기타
5. 필모그래피


1. 개요


데뷔부터 죽기 전까지 호러 장르만 고집했던 진정한 호러영화의 거장.
미국영화 감독, 각본가, 제작자. 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매우 높은 확률로 "호러영화의 거장"이라는 말을 달고 등장한다. 아무래도 인 듯... 비슷한 호칭으로 불리는 다른 거물들과의 차이점은, 그와 함께 1970~80년대의 호러영화를 이끈 감독들은 거의 모두 활동의 맥이 끊기거나, 활동은 하지만 묻혔거나, 아니면 다른 장르로 전업 또는 병행 하게 되었는데 크레이븐은 1990~2000년대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으며[1] 오직 한 우물만 팠다는 점이다. 70세가 넘었는데도 호러 외길 인생이라니 좀 많이 무섭다. 한마디로 '''인생이 호러.''' '''호러물이라는 한 우물만 파신 분.'''
2015년 8월 30일(현지시간), 로스엔젤레스의 자택에서 뇌종양 투병 중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역사


1939년생으로 휘튼 칼리지에서 영문학과 심리학 학사를,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철학과 창작 석사 학위를 딴 인텔리 출신이다. 인터뷰에 따르면 독실한 침례회 원리주의자 집안이라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아버지가 어릴적에 병으로 죽고 어머니는 더더욱 종교에 빠져들어 강요하면서 영화를 아예 금지하여 보질 못했다고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 등의 유럽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졸업 후 대학 강사를 하면서 알바로 영화 편집 일을 하다가 뉴욕으로 이사가면서 강사 일을 그만두고 영화 쪽에 투신하게 된다. 택시 운전도 잠깐 했었다고. 결혼도 하여 두 아이를 가졌으나 아내는 대학 강사 그만두고 어렵게 영화 알바같은 일을 하는 그에게 실망해 1969년 이혼했다.
그러다가 숀 S. 커닝햄[2]이 감독한 포르노 다큐멘터리 "투게더"를 편집하게 되었는데, 투게더가 재미 좀 보자 영화사에서 5만 달러에 호러영화 한편 만들어보라고 제안한다. 커닝햄이 "야 우리가 직접 다 하면 4만으로 떡친다. 만 달러는 우리가 먹자"고 꼬셔서[3] 반 재미삼아 각본 쓰고 감독한 영화가 1972년에 나온 《왼편 마지막 집》. 정작 만들다 보니 예산이 부족해서 4만은 커녕 9만 달러짜리 영화가 되었지만 말이다.
유럽 영화 팬이라 그랬는지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처녀의 샘》을 베이스로 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호러라 불릴만큼 요상하게 무심하고 리얼한 폭력씬을 보여주며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큰 화제가 되었다. 이어 1977년 "공포의 휴가길"(Hills Have Eyes)을 발표하는데, 휴가길을 떠난 가족이 네바다 사막에서 돌연변이 살인마에게 습격당하는 이 영화는 고전 컬트 영화의 반열에 올라 있으며, 2006년 리메이크되어 인기 시리즈가 되기도 했다. 리메이크의 국내 제목은 "힐즈 아이즈". 이 영화의 모티브는 스코틀랜드도시전설소니 빈이다. 소니 빈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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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그는 1982년 만화 스왐프 씽을 영화화한 "늪지의 괴물"을 3백만 달러나 들여 야심차게 내놓지만, 흥행은 쫄딱 망하며 위기에 빠진다. 이 영화는 실험 용액을 뒤집어 써서 녹색 괴물이 된 과학자의 이야기로, 헐크의 호러 버전 같은 영화.
1981년부터 "꿈 속의 살인마가 현실의 사람을 죽인다. 잠들면 죽으니까 못 잔다"라는 실로 빠바박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4] 각본을 쓰고 있던 크레이븐은 "늪지의 괴물" 완성 후 곧바로 영화화를 타진하는데, 월트 디즈니 컴퍼니에서 어린이를 위한 내용으로 순화시키면 제작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뻐큐를 날리며 거절했다. 결국 메이저 영화사를 잡지 못하고 영화 배급만 하던 중소회사인 뉴라인 시네마에서 독립 영화로 제작하게 된다.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1편인 "엘름 가의 악몽"은 180만 달러의 제작비로 미국에서만 26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으며 역사상 가장 유명한 호러영화 프랜차이즈로서 크레이븐의 명성을 확고하게 굳혔다. 제작사인 뉴라인 시네마는 나이트메어 시리즈로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프레디가 세운 회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5]
이후 호러영화의 전성시대를 타고 1년에 1개 꼴로 호떡 찍듯 영화를 발표했으며, 에디 머피뱀파이어로 나오는(...) "브룩클린의 뱀파이어" 같이 좀 그런 영화도 있지만 "공포의 계단", "영혼의 목걸이" 등 호러팬이라면 봐둘만한 작품도 많다. 80년대에는 TV 호러영화도 여럿 감독했는데 1986년 5월 28일 토요명화냉동인간이란 제목으로 더빙 방영한 Chiller(1985)도 그가 감독한 TV 영화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할리우드 호러영화가 틀에 찍은 듯한 졸작만 나오는 답보상태에 빠지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이에 대응하여 크레이븐은 1994년 산으로 가고 있는 기존 시리즈를 대놓고 무시하는 새 나이트메어 "뉴 나이트메어"를 만들어 시리즈를 정리해 완결시키고, 이어서 1996년에는 역사적인 영화 스크림을 내놓으면서 호러영화계에 새로운 한 획을 긋는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인지[6][7] 스크림 시리즈는 이후 직접 감독을 담당하였으며, 2011년에는 4편인 스크림 4G를 발표했다. 4편은 너무 늦게 개봉해서 약간 망하긴 했지만...
스크림 시리즈를 찍으면서도 중간중간에 "커스드", "나이트 플라이트", "마이 소울 투 테이크" 등의 작품을 꾸준히 만들었으며, 자신의 옛날 영화인 "힐즈 아이즈", "왼편 마지막 집"의 리메이크 및 "위시마스터", "피스트", "브리드", "펄스" 등의 제작 또는 각본을 맡았다. 물론 다 호러영화. 정말 호러에 몸을 바친 분이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그가 손댄 작품 중 호러가 아닌 것은 음악을 소재로 한 휴먼 드라마인 메릴 스트립 주연의 "뮤직 오브 하트"(1999). 2006년 유명 감독들의 단편 모음 "파리, 사랑해"(Paris, Je T'Aime)에도 훈훈한 단편이 하나 있긴 한데, 배경이 공동묘지에 유령이 나온다(...). 나이트 플라이트(2005)도 호러라기보다는 정통 스릴러.

3. 스타일


초기 작품은 익스플로이테이션, B급 호러 비슷한 부분이 많지만 80년대 들어서부터 시각적으로 과장된 표현을 줄이고 분위기와 상황으로 공포를 연출하는 경향이 늘었으며 후기작으로 갈수록 잔인함이 줄고 스릴러/서스펜스에 가까워진다. 아울러 "초월적인 공포 앞에서 쪽도 못쓰는 인간의 무력함" 컨셉을 잘 안쓰고 능동적인 캐릭터가 결국 공포를 이겨내고 승리한다는 권선징악적이거나 훈훈한 이야기를 많이 만들기 때문에 존 카펜터와 달리 대중 친화적인 구석이 많다.
현실과 꿈을 오가는 공포라든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라든지 하는 아이디어를 즐겨쓴다. 이것으로부터 그의 가장 큰 히트작 2개가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창조성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능력일 듯.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의 새로운 발상이라는 게 말은 쉽지만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또한 그의 작품은 실제 생활 또는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은유를 깔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심각하고 무겁게 끌고 나가지는 않으며 위트가 가미된 센스있는 연출이 특기.
스크림 시리즈와 그 인기에 편승한 아류작들의 트렌디 & 캐주얼함 때문에 "전형적인 할리우드표 호러 감독"이라는 오해도 있지만 스크림은 그러한 스타일의 원조였을 뿐이고 그의 영화들 중 스크림 시리즈 같은 작품은 스크림 시리즈 밖에 없기 때문에 부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4. 기타


커리어와는 달리, 본인은 딱히 호러 전문 감독이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호러 장르에 대한 사명감이 충만하다든가 한 것도 아닌 듯. 음산하면서 뭔가 확 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호러영화밖에 없었고, 사람들이 좋아해주니 계속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그냥 계속하게 되었다고. 다른 호러영화도 잘 안 본다고 한다(...).
"처음엔 몰랐지만 내가 뭔가 잘하는 게 있으니까 내 작품이 전세계적으로 통하는 것 아니겠나. 이 사실에 만족하고 호러영화 감독이란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더 다양한 작품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호러영화는 이미 내 이름의 일부가 되었다. 지난해 <뉴욕타임스> 십자말풀이에 내 이름이 다섯번 나왔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많은가. 물론 나도 트뤼포 같은 명감독이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걸 어쩌나. 휠씬 못한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만족하기로 했다." (웃음) - 2005년 인터뷰 중에서 -출처

"왼편 마지막 집" 이전에 포르노 영화 제작 일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포르노 산업을 다룬 2005년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딥 스로트"에 출연하여 가명으로 많은 포르노를 만들었음을 증언한 바 있다.
아들 조너선 크레이븐은 1972년 "왼편 마지막 집"에서 아역으로 출연한 비범한 인물로, 1989년 "영혼의 목걸이"부터 편집, 각본, 공동제작 등으로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다.
거미를 무서워했는데, 1981년작 "악령의 리사"에서 샤론 스톤의 가슴 위로 거미가 기어다니는 씬을 찍을 때 스톤이 무명 배우 주제에[8] "니가 한번 해봐"라며 개겼다고 한다. 그 때 거미를 팔에 얹어 본 이후로는 거미공포증이 없어졌다고.출처

5. 필모그래피


제작, 각본을 맡은 작품도 상당히 많지만 일단 극장 개봉된 감독작만 언급한다.
  • 왼편 마지막 집 (The Last House on the Left, 1972)
  • Angela, The Fireworks Woman (1975)
  • 힐즈 아이즈 (The Hills Have Eyes, 1977)
  • Stranger in Our House (1978)
  • 악령의 리사 (Deadly Blessing, 1981)
  • 늪지의 괴물 (Swamp Thing, 1982)
  • 나이트메어 1편 (A Nightmare on Elm Street, 1984)
  • 공포의 휴가길 2 (The Hills Have Eyes 2, 1985)
  • 컴퓨터 인간 (Deadly Friend, 1986)
  • 악령의 관 (The Serpent and the Rainbow, 1988)
  • 영혼의 목걸이 (Shocker, 1989)
  • 공포의 계단 (The People Under the Stairs, 1991)
  • 뉴 나이트메어 (Wes Craven's New Nightmare, 1994)
  • 브룩클린의 뱀파이어 (Vampire in Brooklyn, 1995)
  • 스크림 (1996)
  • 스크림 2 (1997)
  • 뮤직 오브 하트 (1999)
  • 스크림 3 (2000)
  • 커스드 (2005)
  • 나이트 플라이트 (2005)
  • 사랑해, 파리 (2006)
  • 마이 소울 투 테이크 (2010)
  • 스크림 4G (2011)

[1] 2011년에도 신작을 발표했다.[2] 13일의 금요일 시리즈 1편 감독.[3] 근데 웨스 크레이븐은 그때까지도 호러영화가 뭔지 몰랐다고 한다.[4] 킬링필드에서 탈출해 미국에 건너왔으나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죽은 캄보디아 인들에 대한 기사가 모티브가 되었다고 꿈 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프레디 크루거는 어릴적에 우연히 본 큰 화상을 입은 노숙자의 얼굴에 대한 기억으로 만들었다.[5] 현재는 워너브라더스에 합병되었다.[6] 나이트메어에서 정작 크레이븐이 직접 손댄 것은 1편, 3편, 뉴 나이트메어 밖에 없다.[7] 나이트메어 시리즈 중에서 가장 평가가 좋은 것도 크레이븐 감독이 직접 손을 댄 저 세 편이다. 전설이 된 1편은 말할 것도 없고, 3편 드림 워리어즈는 1편을 제외하면 가장 고평가를 받는다. 7편은 망조가 끼어가던 시리즈를 무난하게 마무리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8] 스톤이 대사라는 게 있었던 첫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