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조이스

 


1. 개요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2.2. 파시스트 활동
2.3. 제2차 세계 대전
2.4. 죽음
3. 같이 보면 좋은 자료
4. 같이 보면 좋은 문서
5. 작성하며 참고한 자료

[image]
'''본명'''
'''윌리엄 브루크 조이스 (William Brooke Joyce)'''
'''출생'''
1906년 4월 24일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
'''사망'''
1946년 1월 3일, 영국 런던 원즈워스 교도소 (만 39세)
'''사인'''
사형
'''국적'''
미국[image](1906년~1933년)▶영국 [image](1934년~1939년)▶나치 독일 [image](1940년~1946년)
'''직업'''
정치인, 라디오 방송인
'''학력'''
런던 대학교 버크벡 칼리지
'''정당'''
영국 파시스트당
'''영국 파시스트 연합''''''(1932년~1939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1939년~1946년)'''
'''배우자'''
헤이즐 캐슬린 바(1927년 4월 30일 결혼, 1936년 이혼)[1]

'''자녀'''
헤더, 딸 1명
'''주요
경력
'''
'''제 2차 세계대전 제국방송 아나운서(호호 경) 활동(1939년 9월 18일~1945년 4월 30일)'''

1. 개요


'''호호 경(Lord Haw-Haw)'''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아일랜드계 미국인 출신 영국 정치인. 파시즘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나치 독일로 이민, 영어로 된 선전 방송을 하며 유명세를 떨쳤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군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윌리엄 조이스는 1906년 4월 24일, 뉴욕에서 아일랜드계 미국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이스가 4살이던 1909년에 조이스 가족은 미국을 떠나 자신들이 살던 아일랜드로 되돌아간다. 조이스의 아버지인 마이클 조이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협상국을, 아일랜드 독립 투쟁 당시에는 영국 정부를 지지하였다.[2] 하지만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자 조이스 가족은 독립 지지파의 보복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조이스는 나이를 속이고 영국군에 입대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나이를 들키며 쫓겨난다.
조이스는 1922년 버크벡 칼리지의 입학 시험을 통과한다. 이후 런던 대학교 학군단에 들어간 조이스는 영어영문학역사를 공부해 1927년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후 헤이즐 바(Hazel Barr)라는 여성과 결혼해 두 명의 딸을 가진다.

2.2. 파시스트 활동


이미 1923년 영국 파시스트당(British Fascists)에 가입했던 조이스는 1928년 보수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1933년 조이스는 오스왈드 모슬리 경이 창설한 영국 파시스트 연합에 가입하게 된다. 모슬리는 웨스트런던 지구 행정관을 거쳐 1934년 선전국장이 되고 마지막에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 내에서 모슬리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남편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 해 첫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조이스와 모슬리의 관계는 악화된다. 그는 공적인 자리에서 "내가 아는 영국인 중 최고의 인물"이라고 모슬리를 칭송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 새끼"(The Bleeder)라고 부르면서 욕하게 된다. 모슬리에게 반유대주의와 과격함이 부족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슬리에 의해 쫓겨난 조이스는 더더욱 친 나치적이고 더더욱 반유대적이고 당원 수는 거의 없는 국가사회주의자연합(National Socialist League)을 만든다.

2.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4월 27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 회랑의 할양을 요구하며 새로운 세계 대전의 전조가 나타날 무렵 조이스는 두번째 아내 마가렛 조이스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버린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8일, 조이스는 제국방송(Reichsrundfunk)의 선전방송 아나운서 자리를 얻게 된다. 이후 영국 신문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라디오 평론가 조나 배링턴(Jonah Barrington)[3]이 영어 선전방송의 아나운서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내가 만나고 싶은 신사분은 주기적으로 제센[4]

에 나와 투덜거리시는 분이다. 이분은 "호호, 시발 방해 말고 꺼져"같은 느낌[5]의 영어를 말하며 신사적인 분노에 능하시다.

서리의 데일리 익스프레스 단파 방송국에서 전쟁 상황을 라디오로 듣는 존 배링턴이 "호호 경"을 소개한다. (중략) 그의 억양과 성격은 이런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희미한 턱과 뭔가를 찾아다니는 코를 가졌으며 성긴 금발머리를 뒤로 넘겨 빗은데다가 멍한 눈에 단안경을 끼우고 단춧구멍에는 치자나무 꽃을 꽂은 그런 사람 말이다. P. G. 우드하우스 소설에 나오는 버티 우스터(Bertie Wooster)와 비슷하다.

제국 전쟁 박물관에서는 배링턴이 비평한 아나운서가 조이스가 아니라 볼프 미틀러(Wolff Mittler)라는 독일인이었을거라고 추측하지만 배링턴이 붙인 별명인 "호호 경"은 조이스의 별명이 된다. 그는 독일이 부른다(Germany Calling)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선전 방송을 진행한다. 영국인들은 호호 경의 뉴스를 웃기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호호 경은 영국인들 모두가 아는 인물이 된다. 1940년 1월에는 영국 성인 여섯 명 중 한 명이 호호 경의 방송을 정기적으로 들으며 세 명이 가끔 듣는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였다. 연극 기획자 조지 블랙(George Black)은 "호호"라는 제목의 풍자극을 만들었으며 풍자 노래를 부르는 코미디언 듀오인 웨스턴 형제(Western Brothers)는 "함부르크의 사기꾼 호호 경"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국민들이 호호 경의 뉴스를 듣다가 그 사상에 물들 것을 우려한 영국 정부와 BBC가 노먼 버켓(Norman Birkett)[6]이라는 법조인과 에드거 루스트가르텐(Edgar Lustgarten)이라는 범죄학자를 투입해 선전전을 벌일 정도였다. 하지만 가짜 전쟁이 끝나고 영국이 본격적인 전쟁에 휘말리게되자 호호 경의 인기는 하락하게 된다.

2.4. 죽음


호호 경의 마지막 방송은 1945년 4월 30일 이루어졌다. 그는 방송에서 "솔직히 영국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저는 독일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날은 히틀러가 자살한 날이었다.
독일이 항복한 이후, 독일-덴마크 국경 근처에서 빌헬름 한센(Wilhelm Hansen)이라는 가명을 쓰며 숨어 있던 조이스는 5월 28일 땔감을 수집하러 나갔다가 두 명의 영국군 장교와 마주친다. 그 중 그를 알아본 조프리 페리(Geoffrey Perry)[7] 중위가 신분을 묻자 가짜 여권을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총을 꺼내려는 것으로 오인받아 엉덩이에 총을 맞고 붙잡힌다. 이후 수색 과정에서 윌리엄 조이스 명의의 여권이 추가로 발견되며 조이스는 정체를 들킨다.
[image]

조이스는 영국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게된다. 이때 조이스의 신분이 문제가 된다. 조이스는 출생 당시에는 미국인이었는데 1934년에 자신이 영국인이라고 거짓말을 해 영국 여권을 얻었으며 1940년에 독일 시민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조이스가 진짜로 배신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조국에 충성한 것 뿐인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영국 법정은 조이스가 붙잡힐 당시 영국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조이스가 독일인이기 이전에 영국인이었다고 결론내리고 대역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다.
윌리엄 조이스는 정치권과 상원 등에 구명을 청원했으나 아무도 그를 위해 나서주지 않았고, 결국 1946년 1월 3일 오전 9시, 런던의 HM 원즈워스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체는 30년간 원즈워스 교도소에 묻혀있다가 1976년 딸에 의해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아일랜드 골웨이에 있는 공동묘지로 이장된다.
그는 집행 직전 마지막 유언으로 전쟁의 원인은 유대인이라고 비난하고, 소련의 제국주의에 대해 경고한다고 말했으며, 자신의 이상을 위해 죽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싸우는 이유를 모르고 죽은 영국의 아들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 마가렛 역시 선전방송에서 발언한 대가로 반역죄가 적용될 예정이었으나 윌리엄 조이스의 전기 작가 나이젤 판데일에 의하면 그와 MI5와의 연결고리를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검찰과의 사법거래로 기소를 면했다는 내용의 문서가 2000년에서 2005년 사이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마가렛 조이스는 독일 선전방송에 활용된 32명의 영국인 중 유일하게 기소되지 않았다.

3. 같이 보면 좋은 자료



4. 같이 보면 좋은 문서



5. 작성하며 참고한 자료



[1] 이혼 후 오스왈드 모슬리의 보디가드인 에릭 피어시와 재혼했다.[2] 조이스가 당시 영국 정부 밑에서 전범 행위를 벌이던 예비군 부대인 블랙 앤 탠즈(Black and Tans) 소속이었다는 주장이 있다.[3] 본명은 시릴 댈메인(Cyril Dalmaine)[4] 해외방송 전문 방송시설이 있는 독일 마을[5] haw-haw, damit-get-out-of-my-way variety[6]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영국측 대리 판사가 되는 인물이다.[7] 본명은 호르스트 핀셰버(Horst Pinschewer)로 본래 베를린 출신이었지만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었다. 201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