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전쟁

 

1. 개요
2. 발단
3. 전개
4. 현장 상황
5. 전쟁의 의도
6. 만약 프랑스가 정말로 총력전 체제에 돌입해 독일을 공격하였다면?
7. 결말


1. 개요


[image]
독일 국경에 가까운 지역의 '''과수원에서 의자까지 가져다놓고 총은 내려놓은 채 편안하게 앉아서''' 보초를 서는 프랑스군
Phoney war.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일어났던 해프닝. 가짜 전쟁이란 뜻으로 별명이 많다. 독일 언론은 Blitzkrieg(전격전)에서 머릿글자만 바꿔 Sitzkrieg(착석전)이라고 비아냥댔다. 프랑스에서는 Drôle de guerre(웃긴/이상한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대열은 있으나 전투는 없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상황이다. 말 그대로 선전포고는 했는데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던 1939년 9월~1940년 5월 초순까지의 독일-프랑스 국경지대, 즉 서부전선에서의 기묘한 고요를 가리킨다.
결과적으로는 프랑스가 총동원령을 내려 다들 움찔하게 만들고는 웬걸, 독일 땅에 발만 살짝 담갔다가 다시 마지노 선 안으로 유턴함으로써 일단락됐다.

2. 발단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프랑스는 폴란드 파견군을 편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불 어느 쪽도 먼저 독일 국경으로 쳐들어갈 엄두를 못냈다. 프랑스와 영국의 총동원은 아직 완료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제1차 세계 대전참호전의 악몽 때문이었다.[1] 게다가 아직 영불 양국 모두 독일과 전면전이 될지 국지전으로 끝날지 아직 확신이 없었다.
물론 폴란드를 돕는다는 시늉은 해야 했기에 겨우 총동원령을 완료한 9월 초순에서 중순까지 프랑스군이 독일 라인 강 둔치를 따라 침공하긴 했다. 그것도 자그마치 41개 사단에 전차 2,400대를 몰고. 이에 맞선 독일군은 아직 소집도 끝나지 않은 22개 사단이 전부였다.
독일군의 전략적 목표는 폴란드를 아작내고 있던 주력군이 서쪽으로 오기까지 시간을 버는 거였다. 따라서 전투를 회피하고 지뢰밭과 독일 국경 방어선인 지크프리트 선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자의반 타의반 9월 17일까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그냥 독일 영내로 32km 행군해 들어갔다가 지뢰 몇 번 밟고는 '''조용히 나왔다'''(…). 그나마도 '''정작 독일 영내로 돌입한 프랑스군의 실제 병력은 서류상 동원 병력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독일은 삐라확성기 등으로 영불과 전면전할 생각은 없다고 떠들어 댔다. 영불 양국은 할 일이 없이 국경 근처에서 비행기로 삐라나 뿌려대는 게 거의 전부였다.
결국 양쪽의 소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전쟁 상태지만 이렇게 전선에서는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폭풍전야라는 용어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독일이 초기 전략적 목표를 모두 달성하는 동안 영불이 아무 한 게 없다는 점이 주로 꼬집히는 이벤트가 바로 가짜 전쟁이기 때문이다.

3. 전개


폴란드 전역은 약 한 달 만에 독일의 완승으로 결판났지만, 이미 겨울이 다가오는 10월이었기 때문에 독일측은 서부로 바로 공세를 돌리기보다는 폴란드 전역을 치르면서 소모된 물자와 전력을 보충하고 기갑부대와 공군이 활동하기 좋은 날씨를 기다리느라고 1939-1940년 겨울을 소강상태로 보내고 있었다.
1940년 1월 10일, 독일군 공군 정보장교 라인베르거 소령베를린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BF108 연락기를 타고 가다가 악천후를 만나서 벨기에군에게 붙잡힌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라인베르거 소령은 자신들이 내린 곳이 목적지인 베를린이 아니라 벨기에 영토[2]인 것을 깨닫고 기밀 유지를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류를 태우려고 했지만, 급히 달려온 벨기에 군인들에 의해 이 서류는 약간 그을렸을 뿐, 멀쩡하게 노획되었다. 이 서류에는 당시 독일군의 공격계획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는데, 이 비보를 접한 히틀러는 거의 발광하다시피 했고, 참모장 알프레드 요들 장군은 "만약 적들이 그 서류에 기재된 모든 계획을 손에 넣었다면 우리는 끝장이다."라는 절망어린 토로를 일기장에 적을 정도였다.
물론 당시 라인베르거가 빼앗긴 서류는 독일군의 본격적인 계획이었지만 이미 적도 뻔하게 알 수 있는 것이라 비판이 가중된 계획이긴 했다. 또한 바로 이 서류에 기재된 작전내용은 '''제발 독일군이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프랑스가 여기던''' 바로 그런 작전이었다. 그렇기에 프랑스군은 그 계획을 보고 '''아싸 걸렸구나!'''를 외치며 그거에 대응해서 주력부대의 벨기에 진공을 확정했다. 이른바 딜 계획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인해 기존 계획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독일군은 그 유명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의 프랑스 침공 계획을 묻혀있던 곳에서 파내서 수립하며 실제로 벌어진 일은 달라졌지만 그건 조금 뒤의 이야기고, 당장 만들고 있던 정식 계획이 통째로 노출된 독일군 수뇌부는 극심한 패닉에 빠져들어 "우리는 이제 끝장"이라느니 "전쟁에서 또 지면 신이 우리를 돌봐줄까?"라느니 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서 공격 계획을 고쳐야 한다느니, 하면 안된다느니 하면서 날마다 신경전과 논쟁을 거듭하는 형편이었다. 사실 계획 자체도 부실하던 차에 적에게 다 넘어가 버리기까지 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연합군은 '''아무런 대응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취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연합군은 마지노 선 건설을 통해 독일군의 공격 방향을 1914년과 같은 벨기에 루트로 고정했다고 여겼고, 이때 노획된 독일의 작전계획서도 바로 그런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혹시 독일이 딴 생각을 하면 어쩌나, 그들이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뭔가 기상천외한 짓을 벌이면 어쩌나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독일의 계획이 노출되자 프랑스는 다행이라고 여기며 원래의 계획대로, 독일이 침공해 오면 천천히 방어해서 그 힘을 깎아먹고 나서 제대로 한 방 날려버린다는 원래의 계획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연합군의 대독 작전계획이 이렇게도 수동적이었던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훈 때문이었다. 당시의 전훈은 "'''공격은 죽고 싶은 놈들이나 하는 거다. 아니면 압도적으로 병력이 많거나.'''"였다. 즉 '''독일군을 아주 많이 죽여 놓기 전까지는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당시 연합군의 내심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당시 프랑스는 독일이 자신들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믿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구 및 경제규모에서 독일이 프랑스보다 우세했던 탓이었다. 실제 당시 독일의 경제규모는 프랑스의 2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그 격차에 압도되어 프랑스는 독일이 '''재무장을 이제 시작했고, 끝나려면 앞으로도 3~4년은 더 걸린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1941년에 프랑스에서 나온 관련 저술에서는 '''비겁한 독일놈들이 가짜 서류를 뿌려서 고스란히 속아 넘어갔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아무튼 당시 프랑스에는 영국 원정군이 주둔하여 초기 연합군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연합군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독일군과 전면적인 군사적 충돌을 거의 일으키지 않았고, 쌍방이 전혀 다른 배경으로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에피소드가 속출했다.

4. 현장 상황


  • 프랑스와 독일과 룩셈부르크 국경에 쌍둥이같은 두 마을이 있었다.[3] 이 두 마을에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소는 독일에 있었는데, 어느날 독일에서 송전을 멈추자 프랑스군이 즉시 독일 쪽에 있는 마을을 향해 몇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그러자 수 시간만에 다시 송전이 재개되다가 다시 뚝 끊긴지 10여분 후, 갑자기 독일 쪽에서 프랑스어로 "포격은 자제해주십시오. 송전이 중단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순전히 기계가 고장났기 때문입니다."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 방송을 들은 프랑스군 병사들은 한바탕 웃고는 포격을 그만뒀는데, 과연 그 방송이 나온지 2시간 뒤 프랑스 군인들은 독일 발전소가 보내오는 전기를 마음껏 쓸 수 있었다.
  • 지크프리트 선과 마지노 선 사이에서는 영국이 폭격기 부대를 동원해서 밤에 삐라를 뿌리고 나면 독일 쪽은 선전 연설과 밴드 연주를 내보내는 식으로 응수했다. 삐라는 독일군도 사용했는데, 주요 내용은 "우리는 공격받지 않는 한 절대 귀국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 "지금 여러분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동안 당신의 애인을 누군가가 채 갈 것이다. 그러니 돌아가라." 등이었다.
  • 물루즈 부근에서 프랑스군이 라인 강에 걸려있는 철교를 폭파할 때 독일 쪽에 "지금 다리를 부술 테니까 조심하세요."라고 경고했다.
  • 독일군은 프랑스와의 국경 지대에 "독일인은 프랑스인들의 적이 아닙니다. 독일인은 여러분이 총을 쏠 때까지는 결코 총을 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적힌 간판을 세웠는데 프랑스군도 이 제안을 받아들여 결국 독일군이 간판을 다 세울 때까지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또한 독일 군악대가 프랑스 유행가를 연주하는 적도 있었다.
  • 당시 프랑스 군인들이 고향에 보낸 편지들을 보면, '너무나도 고요한 전선', '쥐죽은 듯한 독일군'들이 뭘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더욱 불안하다는 식의 서술이 많다. 여러모로 프랑스인들은 1차 대전에서의 엄청난 피해 때문에 전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심했다.
  • 이 당시 영국군 사이에서 널리 불렸던 노래 '우리는 지크프리트 선으로 빨래를 널러 간다네'가 있는데, 독일군에선 이걸 알곤 같은 곡조에 '진짜 빨래 실력이 뭔지 보여주마'라는 식의 내용을 담은 노래로 응수하기도 했다(...)#
물론 실제 전면전 상황의 전시에서도 워낙 전선이 길어지다 보니 소강상태에 빠진 곳에서는 교전을 형식적으로 치르는 경우가 많았긴 했다. 서로 정해진 시각 정해진 위치에 포격을 가하는 사례나 명절에 서로 파티를 열었던 이야기는 제법 유명하지만, 적어도 이런 사례는 한바탕 끔찍한 전투를 벌인 뒤라든지, 전략 전술적으로 2선, 3선급인 전선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사례지 저렇게 1선급인 전선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지는 않는다.
이후 1940년 초봄에는 독일은 발트해의 입구를 확보하기 위해 전격적인 노르웨이 침공을 개시한다. 노르웨이가 연합국에 가담한다면 독일 해군은 발트해라는 호수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기 때문에... 이때도 북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프랑스 접경지역의 국경에는 아무 일 없었다.

5. 전쟁의 의도


이 전쟁같지도 않은 전쟁은, 이후 프랑스 침공에서 보여주는 독일군의 놀라운 전과로만 미루어 본다면, 어디까지나 독일군의 연막작전처럼 보인다. 하지만 프랑스를 침공하는 그 순간까지도 독일군 고위층에는 승리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은 없었다. 실제로 독일군은 재무장을 한창 '''시작'''하는 중이었고, 일부 부대에는 전투복과 개인 화기도 충분하게 지급되지 않은 부대도 있었다. 독일군은 체코폴란드를 점령 후, 유럽의 초강대국인 영국프랑스의 눈치만 보고 있는 상태였는데, 실제 영국이 대륙 원정군을 조직하고, 프랑스가 독일 국경을 침공하여 부대를 주둔하는 순간이 아마 독일군 고위층의 긴장과 위기감이 최절정인 상태였다. 거의 그 시점에서 독일군은 항복을 고려해보기도 하였다. 물론 히틀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가짜 전쟁이 실제 전투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공포스런 기억 때문이었다. 1차대전에서 나타난, 그야말로 사람이 갈려들어가는 참혹한 소모전, 참호전의 기억 및 국민들을 총알받이로 내몰던 지배층에 대한 여론의 분노로 인해 두 나라 모두 독일을 상대로 단호하게 전쟁을 강행할 의지가 없었다. 게다가 대공황 당시 극심하던 청년실업으로 인한 청년층의 분노는 정치판을 그야말로 난장판으로 바꿔놓았고, 여기에 독일의 여론전까지 더해지면서 두 나라 군대가 전쟁에 돌입하더라도 내부는 다른 결정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즉 2010년대 현재 세계 각국에서 목도되는 내부 고립주의, 청년들의 박탈감이 좀 더 강화된 형태로 두 나라를 잠식했던 것이다. 특히 1차대전 당시 그 지배층에게 소모품처럼 내몰리며 겪었던 자신들의 끔찍한 경험을 아래 세대들이 또다시 겪기를 원치 않았던 장년층의 반전주의 분위기는 청년들보다 더 강했다. 여기에 지배층들 스스로도 독일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등 오판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런 문제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버리고 독일에 대한 공세를 포기했다. 하지만 두 나라의 청장년들도 착각한 게 있었으니, 독일이 폴란드만 잡아먹고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독일은 1940년 5월 본색을 드러내 프랑스를 침공했고, 자신들의 무능을 오직 정신력으로 극복하라고 강요하기만 하고 국민의 희생만을 외쳐대던 영국, 프랑스의 지배층들과 독일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박탈감에만 시달리던 국민들의 반전여론의 합작은 프랑스 점령. 그리고 영국 역시 제국이 해체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결국 두 나라가 내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정신력 드립만 친 결과 모두 다 함께 피를 보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후 전쟁은 5,0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빨아먹는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6. 만약 프랑스가 정말로 총력전 체제에 돌입해 독일을 공격하였다면?


어디까지나 만약이므로 확실한 추정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건 '''2차 대전과 프랑스 침공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시 독일은 아직 완전한 전쟁체제에 돌입할 능력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수천대에 이르는 프랑스 전차부대가 폴란드에서 난장판 피우느라 바쁜 독일의 후방을 후려갈겼더라면 독일은 치명타를 입었을 것이고, 독일이 이를 재건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독일은 한 번 주저앉는 것으로 끝날 나라가 아니었다. '''아니, 히틀러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여기서 프랑스가 독일을 공격해 자신의 전력을 노출하고 독일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면, 얼마 안 가서 독일은 프랑스와 폴란드 전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군대를 마구마구 뽑아내서 더더욱 빠르고 위협적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갔을 것이다.
프랑스 침공은 독일이 한 번의 충동으로 일으킨 일이 아니었다. 낫질 작전에 기반하여 철저한 작전술과 계획을 수립하고 속전속결로 프랑스를 후려갈겨 제압한 것으로, 이를 위해 독일은 굉장히 긴 시간 동안 준비하고 대비해왔다. 무엇보다 나치 독일은 '''프랑스가 단신으로 대적 가능한 나라가 아니었다.''' 영국, 소련, 미국, 그 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동맹국이 독일을 공격했고 독일의 동맹국이라는 이탈리아는 뻘짓으로 괜히 전선만 늘려댔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3년 넘게 버텨냈다.''' 그런 독일이 프랑스 하나 때문에 주저앉을 리는 없다.
물론 프랑스 침공이 좀더 효과적으로 방어되었을 가능성은 고려할 수 있다. 경험이라는 건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독일군과 교전하는 경험이 있게 된다면 프랑스 역시 일찍부터 기동전에 대해 진지한 탐구를 시작했을 것이다.[4] 그렇다면 프랑스는 마지노선의 중요도 하락에 대해 깨닫고 유지 가능 최소인원만 남겨둔 채 대신 전차를 찍어내고 기동전력을 기르는 단계에 돌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확실한 건, '''이 가짜 전쟁이 없었든 있었든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은 기정사실이었다는 것이다.'''

7. 결말


결국 이 가짜 전쟁은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1차때의 황색 작전을 보완한 프랑스 침공(Fall Gelb: 낫질 작전)으로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아주 개박살이 나면서 종결되었다. 파시즘의 침략 전쟁을 방관했기 때문에 프랑스가 벌 받은거라는 의견도 있다.

[1] 1차대전 당시 철조망+참호로 구성된 방어선을 무력화할 수단이 미비했던 탓에 기본적으로 공격자가 매우 불리하였으며, 먼저 공격하는 측이 엄청난 손해를 보는 식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솜 전투베르됭 전투 등 서부 전선에서 있었던 굵직한 전투 상당수에서 선공 측이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지도 못하면서 엄청난 인명피해만 떠안게 되었고, 파스샹달 전투처럼 공격측이 전술 목표를 달성하는 경우에도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때의 경험에서 보자면 독일을 먼저 공격하는 건 이길 가능성도 낮으면서 이기든 지든 엄청난 인명손실을 감수해야하는 일이었다.[2] 지금의 벨기에 림뷔르흐 주 마스메헬렌 인근. 이전 문서에선 마스트리흐트로 되어있었으나 마스트리흐트는 벨기에가 아닌 네덜란드 영토이다.[3] 솅겐조약이 체결된 솅겐 근방이다.[4] 마지노 선은 1차대전식의 참호전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방어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