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박
1. 개요
미국의 전기 바이올리니스트. 한국계 미국인이다.
1.1. 음악적인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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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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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어드 재학 시절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 거리공연
유진 박은 1960년대 활동했던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 그리고 90년대의 너바나, 펄 잼을 좋아했으며 장르에 대해 구분 짓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장르에 대한 구분은 무의미하며 모든 음악은 결국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관객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연주할 수 있다고 늘 얘기한다. 그는 16세 때부터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거리 공연을 종종 해왔고 뉴욕의 명소인 《CAFE WHA?》에도 직접 찾아가서 지배인에게 하우스밴드와 잼을 하고 싶다고 요청하는 등 어릴 때부터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재즈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유진박의 음악적 성향은 락에 가깝다. 실제 그가 발표한 1집 데뷔 음반은 락 앨범이다. 재즈를 즐겨하는 건 아무래도 자신의 기분을 즉흥 연주로 표현하는 데 있어 적합한 장르이기 때문이며 재즈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곡들을 연주할 때도 즉흥 연주를 즐겨한다. 연주 스타일은 예쁜 소리를 뽑아내기보다는 일렉트릭 기타의 주법을 많이 활용하는 편이다. 이펙터는 아예 쓰지 않는다.
1.2.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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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양극성 장애를 진단받고 클래식에서 전기 바이올린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물론 15세 때부터 전기 바이올린을 했고, 락이나 블루스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양극성 장애가 발병하지 않았다면 줄리아드 내에서도 신동으로 소문난 유진 박이 전기 바이올린으로 대중음악을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며 전기 바이올린은 그저 취미로만 그쳤을 것이다.
1996년 한국에 데뷔할 때부터 정신적인 불안 증세와 심하면 환청이 들리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증세가 심한 날이면 돌발행동을 하거나 연주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모습들이 양극성 장애 때문이다. 미국에서 처음 진단한 정신과 의사가 유진 박을 사로잡고 있는 이상한 에너지는 사용하기 나름이며, 사람을 해치는 악한 기운이 될 수도 있지만 음악적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2. 행적
2.1. 바이올린 신동
미국 뉴욕에서 의사인 아버지 박성유와 어머니 이장주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미 3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잡아 '''당시로서는 최연소 기록인 8살 때 전액 장학금을 받고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입학했으며[1] , 10살 때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을 정도로 줄리아드 내에서도 바이올린 신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
미국 최고 수준의 명문 사립학교인 Collegiate School[2] 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하버드 대학교 입학 커트라인에 속했던 유진 박은[3] 줄리아드 요청으로 하버드에 입학하지 않고, 16세의 나이로 줄리아드 스쿨에 입학한다. [4]
17세 때 클래식에서 전기 바이올린으로 전공을 바꾸고 뉴욕 라디오 시티 뮤직 홀 공연, 슈퍼볼 전야 축제 오프닝 공연, 아스팬 재즈앙상블 협연을 했고, 지미 헨드릭스, 밥 딜런이 공연을 했던 뉴욕의 명소이자 유명 라이브 클럽 《카페 와 Wha?》, 《블루노트 Blue Note》에서 윈튼 마설리스 등 세계 최고의 뮤지션과의 수많은 협연을 했다. 그 무렵 유진 박은 뉴욕 타임즈 및 뉴욕 포스트에 기사가 날만큼 뉴욕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고,[5] 1995년 <KBS 스페셜 - 줄리어드>를 통해 한국에도 알려졌다. 또한 유진 박은 줄리아드 스쿨 역사상 최초로 일렉트릭 바이올린으로 리싸이틀을 여는 등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2.2. 한국 활동 시작
1996년 줄리아드 스쿨을 졸업하고 당시 뉴욕 최대 매니지먼트사인 스카시 스켓과의 계약을 거부한 채 한국의 열린음악회 출연을 계기로 국내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너바나, 재니스 조플린, 윈튼 마살리스, 지미 헨드릭스 등의 영향을 받아 정통 클래식이 아닌 얼터너티브 록, 재즈, 팝, 펑크, 크로스오버 스타일의 음악을 하였고, 국내 최초로 일렉트릭 바이올린을 이용한 연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또한 IMF 이후에 만들어진 당대 인기가수 총집결곡 '''하나되어'''에 유진 박의 독주장면이 상대적으로 긴 시간 동안 배정되기도 했다[6] . 1990년대 후반 당시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날리던 홍콩 스타 여명의 'Sugar in the marmalade'에 피쳐링[7] 하여 마이클 잭슨공연라이브 무대에도 함께 출연[8] 하고, 리듬게임 펌프 잇 업의 반야 오리지널 곡의 제작에 참여한 것은 이에 비하면 뭐...
유진박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음악들을 소개하였고 마치 일렉기타를 연상케하는 즉흥연주의 실력을 뽐내며 클래식과 대중음악계에 충격을 선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진박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대한민국 음악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9]
현재까지도 국내에서 유진박에 비견될 만한 전자 바이올리니스트는 존재하지 않는것으로보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느낄수 있다. [10] 클래식으로 확대해도 유진 박처럼 성공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손꼽을 정도다.[11] 연주뿐만 아니라 데뷔음반의 모든 곡을 유진 박이 작사, 작곡, 편곡까지 하며 천재음악가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국내에서 연주음반을 단기간에 그렇게 팔아치운 사례는 유진 박이 유일하다.
1999년 MBC FM 골든디스크에서 발표한 한국인이 사랑하는 역대 연주곡 32곡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유진박의 자작곡인 드라마틱 펑크가 선정되었다.
2.3. 매니저의 감금 및 폭행 사건
이후 시간이 흐르고 다소 잊혀진 이름이 된 유진 박이 다시 세간의 화제로 떠오는 때는 2009년 중반기였다. 당시 그는 소규모 행사장과 유흥업소 등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고, 또한 소속사에 의해 착복을 착취를 당하고 있었으며, 덧붙여 구타까지 당하였다고 한다. 어느 땐가부터 그가 오랜 감금생활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는 루머가 떠돌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사실임이 뉴스에서 보도되었다.
사실 유진 박 그는 예전부터 한국어에 익숙지 않은 데다가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반말을 사용하거나 어리숙한 말투를 사용하여 사람됨이 순진하게 여겨지거나 그가 자폐증을 앓고 있다고 의심될 만큼[12] 한국 사회 속에서 거의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유진 박의 상태를 이용하여 소속사가 그를 함부로 다루며 착복하고 이용하였다는 사실에 네티즌들은 분노하여 인터넷 여러 사이트에 소속사의 부당함을 호소하여 유진 박 구명운동을 벌였다.[13][14]
아래 두 영상을 한 번 비교해보자.
▲유진 박의 한국 최초 공연.[15]
망가졌던 시절 공연. 그 풍채는 온데간데없고 심지어 여기저기서 곡을 틀리기까지 한다. 이상할 정도로 생기 없는 얼굴, 힘없는 걸음, 이해하기 어려운 타이밍에서의 쇼맨쉽, 무엇보다 납득하기 어려운 종류의 실수 등..조울증 관리가 전혀 안 된 모습이다.
이 문제의 소속사에 의해 만들어진 유진 박 3집은 평론가들에게도 상당한 혹평이었다. 1, 2집과 완성도 차이가 심하다는 것이다. 문제의 사장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음악을 제작하면서 완성도가 떨어졌다.
2.4. 어머니에 대한 논란
이번에는 그의 어머니인 이장주 씨와 함께 구설수에 올랐다. 어머니인 이장주씨가 유진 박이 폭행, 감금당할 당시에도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다는 계약금과 손해배상금에만 목을 멨다는 이야기와 무분별한 각종행사에 집착했다는 이야기들이 인터넷에 논란이 되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유진 박의 어머니는 3대 독자인 유진 박을 특별히 아꼈고, 주위에 도움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아들을 위해 자신이 죽기 전에 유진 박이 혼자서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하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이며, 인간 극장 '헤이 유진'에서 유진 박이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걸 보면 그저 의혹일 뿐이다.
2015년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아버지는 2004년 사망) 미국 뉴저지, 한국 제주도 등 부동산을 상속 받았다. 그러나 이 상속 재산들은 대부분 하술할 매니저 K씨가 헐가 매입 하는 형식 등으로 사실상 갈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양극성 장애, 한국어 사용의 미숙함 등 혼자서 생활하는데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유진 박을 대신해 생전 어머니가 관리해주던 수입과 자산을 어머니 사후 매니저 K씨가 일임하여 관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유진 박은 인터뷰를 통해 제주도의 부동산은 상속 사실 자체를 몰랐다고 증언했다.
2.5. 매니저의 사기 사건
▲MBC스페셜 예고편
유진박을 한국에 데뷔시키고, 2015년부터 계약을 맺고 활동해 온 매니저 K씨의 사기행각이 드러났다. 2019년 6월 10일 MBC기사 PD의 취재 후기
2.6. 마미손과 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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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11월 18일, 소년점프로 유명한 마미손의 정규 1집 '나의슬픔' 타이틀곡 '별의 노래'에 일렉 바이올린 피처링을 하면서 오랜만에 네티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어이, 박 형! 시원하게 한 번 울어줘!'''[16]
노래 자체가 '이젠 울어도 된다'는 내용인데, 그 자체가 유진 박에게 너무도 잘 맞고 마치 곡 전체가 유진 박을 위한 헌정 같다는 의견도 많다. 개그스러운 분위기의 뮤직비디오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는 반응이 많다. 특히 마지막의 미소는 필견할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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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자를 카메라 앞에 들이밀고 있다. 인터뷰 촬영 당시 유진 박은 손을 병적으로 떠는 모습을 보였으나 실제로는 단순 긴장 때문에 떤 것이며, 특별히 건강에 문제는 없다고 근황올림픽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유진 박은 아티스트로서의 뛰어난 재능, 괴상한 언동, 어수룩한 성품으로 얕보여 여럿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다. 그래도 마미손과의 콜라보에서 보인 연주로 아직 그의 예술혼과 혈기가 죽지 않았음을 과시했다. 적어도 그의 건강은 겉으로 보기엔 퇴폐적이지 않다. 과거에 가학적인 소속사에게 시달렸던 모습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 마미손과 아티스트와 아티스트로서의 공감을 가지며 큰 기쁨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묘하게 과거 사탐1타 최진기과 닮았다...
3. 앨범
3.1. 1집 The 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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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s
1996년 열린음악회를 시작으로 한국 활동을 시작한 유진박은 소니 뮤직과 계약하고 1997년 생애 첫 1집을 발표한다.
유진 박 1집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한국 바이올린 연주 앨범으로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고, 프로듀서는 물론 작사, 작곡까지 도맡으면서 음악적인 역량을 마음껏 뽐낸 앨범이다. 아울러 실험적이며 예술성있는 음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쉬인의 '서머타임'은 락으로 편곡, 비발디의 사계 겨울 1악장은 테크노풍의 락으로 편곡해서 인기를 모았다. 자작곡인 '드라마틱 펑크'는 여러 방송프로그램 오프닝&엔딩을 장식했으며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히트곡이다. 1999년 MBC FM 골든디스크에서 한국인이 사랑하는 역대 연주곡[17] 으로 '드라마틱 펑크' 선정되기도 하였다. 1집의 성공으로 유진박은 홍콩스타 '여명'과의 음악작업, 에이스 크래커 CF,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자서전발간, 드라마 주연발탁 등..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명반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음원사이트에서 10년 넘게 음원이 막혀있어 들을 수 없는 상황이다.
4. 여담
- 여담으로 2003년 태풍 매미 당시 수해로 박살난 가고파문화센터[18] 수해복구 자원봉사자들을 대상으로 1층에서 공연을 해 주고 간 적이 있다. 무대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은박 돗자리 하나 깔아놓은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해 연주하는 모습에 당시 시 관계자들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미디어에서 보인 이미지는 날카롭고 까칠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막상 협업해 보니 말수 적고 수줍은 순둥순둥한 교포 청년이 와 있었단다. 그런데 그가 바이올린을 드니까 눈빛이 달라지더라고....
- 공식 유튜브에서 근황을 알 수 있다. 연주 영상이 가끔 올라오며, 유진 박의 연주를 애정하는 팬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통 채널. 가끔 본인이 댓글도 달아준다. 또한 본인과 협업하는 밴드인 Hey Eugene이란 팀을 꾸렸으며,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충북 제천에 유진 박 연주홀을 개장하였다. 위 유튜브 링크의 크리스마스 연주 영상이 유진박 연주홀에서 촬영한 것.
[1] 베를린 필 악장인 다이신 가시모토에 의해 기록이 깨졌다. 가시모토는 내한 공연 때 한국하면 유진박이 떠오른다고 인터뷰한 적도 있다.[2] 뉴욕 맨해튼에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립학교이다. 2007년 월스트릿 저널에서 뽑은 최고의 명문데이 스쿨 1위에 선정된 적이 있을 정도로 미국 전역에서 손꼽히는 학교로 평가받고 있으며 졸업생들은 하버드,예일,프리스턴 대학교에 높은 진학율을 기록하고 있다.[3] 어릴 때부터 음악뿐만 아니라 학업 성적이 정말 뛰어났다고 한다.[4]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 실력으로 남들보다 1년 일찍 입학 허가를 받았다.[5] 한국에 오기 전부터 이미 뉴욕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6] 전형적인 We Are The World식 곡이어서 한 명에게 배정된 것이 짧으면 한 소절, 길면 2, 3소절인 곡이다. 이 앨범에는 유진 박의 연주곡도 있다.[7] 여명이 유진박의 음반을 듣고 음반작업을 요청해왔으며 뮤직비디오에도 주연으로 출연했다. 단순한 바이올린 연주 피쳐링을 넘어서 클라이막스 파트의 간주를 담당하며 랩퍼가 유진박을 연신 외치며 흥까지 돋울 정도였다. 여명의 음반은 그해 홍콩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기록되었다,[8] 1999년 마이클 잭슨의 내한 공연에 여명이 게스트로 출연하며 함께 공연하였다.[9] 열린음악회가 끝나고 방송사에 유진박에 대한 문의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10] 국내 전자바이올린 연주자들은 대부분 기존 곡에 별다른 편곡없이 커버하는 수준이고 바네사메이나 본드 아류작일 뿐이다. 또한 자기음악을 하는 연주자는 현재까지 유진 박이 유일하다.[11] 유진 박의 등장으로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들이 늘어났고, 1998년에는 10대들이 뽑은 문화예술인 2위에 뽑힐 정도로 단순히 바이올리니스트 그 이상의 인기를 누렸다.[12] 유진 박이 앓고 있는 조울증은 자폐 등의 질환과는 일체의 관계가 없는 병이다.[13] 그러나 사건 후 그가 영어로 심경을 토로한 인터뷰에서는 더듬거림이나 어색한 표현없이 차분하게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아마도 한국어가 서투른 그의 개인적인 문제였던 듯하다. 물론 유진박이 성격이 순하고 심약한 것이야 사실이다.[14] 학창 시절에 공부도 잘 했고 그만큼 지적 수준이 높은 그가 순진하게 소속사와 매니저에게 이용만 당하고 살았냐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많긴 한데, 의사나 변호사같은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들 중에서도 사기로 인한 피해자가 나타나는 게 사회의 현실이다. 지적 수준이나 지능과는 별개로 사회에 대해 어둡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특히 한국어에 서툴며 한국 사회에 대해 어두운 유진 박의 경우 더더욱 그럴 수 있으며, 연예인, 음악가, 아티스트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바깥 세상과 단절된 경우가 많아 딱히 이상할 것까진 없다.[15] 잘 보면 뒤에 앉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어이 없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잘보면 신성일(강신성일)과 부인 엄앵란, 손학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볼 수 있다.[16] 직후 나오는 유진박의 연주는 소름이 돋을정도. 인터뷰에서 밝히길 심지어 즉흥연주였다고..[17] 총 32곡을 선정했는데 한국인은 유진박이 유일하다.[18] 구 마산시 합포구청이자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합포도서관으로, 해안 매립지에 있다. 매미 해일 월파 당시 1층이 1.5미터 높이까지 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