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태풍)
1. 개요
'''1년전 루사의 뒤를 잇는 대한민국 2000년대 초중반 태풍 트롤리지의 두번째 태풍.'''
하필 추석연휴에 강타하는 바람에 명절 분위기를 다 망쳐버렸다. 매미는 북한이 제시한 태풍명으로, 문자 그대로 곤충 매미를 뜻한다.셀마, 쁘라삐룬, 루사수준의 크나큰 피해를 입었는데, 2000년 프라피룬이 강풍으로, 2002년 루사가 영동 지방에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입혔다면 매미는 여수와 진주에 200~300mm 넘는 강수와 제주와 부산/경남 해안 지역에 강풍과 해일로 큰 피해를 입혔다. 특히 강풍은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정도였는데, 50m/s까지 견디게 설계되었다는 부산항의 크레인들이 줄줄이 쓰러지고(후에 부실 시공이라는 것이 밝혀짐), 제주에서는 '''순간 최대 풍속 60m/s'''[3][4] 가 두 곳에서나 관측되어 3년 전 프라피룬[5][6] 이 세운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그러나 당시 풍속계의 측정 상한이 60m/s이었기에 실제로는 더욱 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바람에 휩쓸려 넘어지는 걸 볼 수 있을 정도. 게다가 더 중요한 건, 매미가 우리나라를 강타한 게 '''상대적으로 약한 왼손 펀치인 가항반원(안전반원)'''이라는 것이었다.[7] 안전 반원에서 이 정도 피해면 위험 반원이었으면 얼마나 더 끔찍했을진 굳이 말 하지 않아도...
하필 불과 1년전에 루사가 한반도에 22시간이나 머물며 엄청난 비로 초토화 시키고 갔는데 그 뒤를 이어 와서 또 뒤집어 놓고 가고 이후에도 2004년에는 메기가, 2005년에는 나비가 와서 루사로 입은 재해 복구를 하기도 전에 4년 동안 또 태풍으로 인한 재난을 맞아야 했다. 이처럼 강수량을 200mm~300mm넘는 비와 엄청난 강풍으로 인해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힌 나머지, 결국 이 중 셋은 영구제명되어 두 번 다시 태풍 이름으로 쓰이지 못하게 되었다. 참고로 매미의 대체명은 무지개다.[8][9]
4번이 되는 강력한 태풍을 맞은 이후에 2006년부터 태풍에 대한 대비책을 수립하게 되었고, 이때 태풍에 대한 기준도 새롭게 바뀌어 한반도에 강력한 태풍이 올 때마다 뉴스에서 언급되면서 루사와 함께 이번 태풍이 어느 정도 강한지를 비교하는 대상으로 쓰이는 중이다. 즉 전투력 측정기.
2. 태풍의 진행
괌 근처에서 발달하던 열대저기압이 9월 6일 15시 일본 기상청(JMA)에 의해 열대폭풍으로 승격되었다. "매미"로 명명되는 순간이었다. 매미는 발달에 유리한 주변환경 속에서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위성사진에서 눈 구조가 나타나자 JTWC에서는 8일 3시를 기해 SSHS 1등급 태풍으로 승격시켰다.
9일부터는 태풍의 발달에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중국 동해안 부근으로 형성된 거대한 단파골 전면의 상층 남서류와 매미의 북서쪽 방면의 상층 발산류가 서로 합병되었다. 더욱 증대된 상층 발산은 곧 매미의 급발달을 유도하였고, 9일 21시 매미의 1분 평균 최대풍속은 67m/s에 이르면서, SSHS 4등급의 슈퍼 태풍으로 발달하였다. 다음 날 아침까지 매미는 계속 발달 경향을 이어나갔고, '''10일 9시 JTWC 기준 1분 평균 최대풍속 77m/s까지 발달하여, SSHS 5등급의 슈퍼 태풍으로 최성기를 맞이하였고, 같은 날 밤까지 같은 강도를 유지하였다. 이때에 일본 기상청(JMA)은 매미의 세력을 10분 평균 최대풍속 54m/s, 중심기압 910hPa로 해석하였다.'''
11일 4시, 매미는 1분 평균 최대풍속 69m/s의 SSHS 4등급의 슈퍼 태풍으로 일본 류큐 제도의 미야코 섬에 상륙하였다. 미야코 섬의 관측소에서는 해면기압 '''912hPa'''이 관측되었고, 순간최대풍속도 '''74.1m/s'''가 관측되었다.
미야코 섬을 통과한 매미는 11일 아침 동중국해에 진입하였고, 눈벽 교체 순환을 겪으며 한반도를 향해 빠르게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태풍의 발달에 불리한 주변환경이 조성되면서, 매미는 점진적인 약화 과정을 거치며 12일 15시 제주도 남동쪽 해상을 통과하였고,[10] '''같은 날 21시, JTWC 기준 1분 평균 최대풍속 49m/s의 SSHS 2등급 태풍, 10분 평균 풍속 39m/s, 중심기압 954hPa의 세력으로 경남 고성군 일대에 상륙하였다.'''
매미는 상륙 이후 한반도를 통과하는 동안 육상마찰과 함께 빠르게 세력이 약화되면서, 13일 새벽 3시에 울진 앞바다를 통해 동해상으로 진출하며 온대저기압화가 시작되었다.[11] 14일 아침 9시, 오호츠크 해까지 진출한 태풍 매미는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면서, 각국은 감시를 종료하였다.
3. 기록
신기한 점은 태풍 경로의 왼쪽에 위치한 제주와 고산 두 곳에서 '''60.0 m/s'''가 기록된 반면에 똑같이 태풍 경로의 왼쪽에 위치한 일부 중부 내륙(서울, 파주, 원주, 홍천)에서는 '''10 m/s를 밑돌았다'''. 또한 강수량도 '''집중호우가 내린''' 동해안과 달리 수도권, 강원 영서 중서부(철원, 춘천), 충남 서부(서산, 보령, 부여), 전북 북서부(군산)에서는 '''50 mm도 기록되지 않았다'''.[16]
4. 피해
남해안 상륙-동해안 탈출이라는 강원 동해안 및 전남 남해안, 영남 지역 입장에서는 최악의 코스를 그리며 올라온 전형적인 케이스이다. 태풍 전방의 동풍이 부는 지역에 백두대간이 떡 막고 있으면서 비구름이 산맥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대량의 집중호우가 내린 것. 특히 바로 전년도에 비슷한 경로를 그린 루사에 이어서 매미를 얻어맞은 강원 영동 지방도 역시 피해를 입었다.[17] 바로 1년전에 찾아와 엄청난 비를 뿌리고 간 루사 피해를 채 복구도 하지 못한 동해안 지역의 인적, 물적 피해가 매우 막심했었다.
역대 1위의 기록적인 바람과 루사만큼은 아니지만 시간당 80 mm, 누적 300 mm가 넘는 폭우로 특히 200mm넘는 비가 내린 여수와 진주는 시가지가 침수되었다. 이곳에서 오래 산 노인들에게 물으면 최악의 태풍으로 사라호와 매미를 손에 꼽을 정도.
심지어 침수와는 인연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고층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도 수재를 겪었는데, 어찌나 비가 많이 왔는지 빗물이 창틀에 스며들다 못해 넘쳐나서 집안으로 흘러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이 수압에 유리창이 깨진 집들도 많이 나왔다.강원도 피해 간략 정리
4.1. 부산광역시
[image]
매미의 위력을 잘 보여준 부산항의 무너진 크레인들. 다만 나중에 쓰러진 크레인들을 조사해보니 부실 시공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긴 했다. 2016년 9월에 배상이 확정되었다.
- 매미로 인해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반산초등학교의 옥상 위에 임시로 설치해둔 가건물 2층이 날아가면서 1, 2학년 아이들의 교실이 사라졌다... 결국 1, 2학년[18] 아이들은 건물이 증축될 때까지 운동장에서 수업을 하거나 오후 1시에 등교를 하여 다른 학년의 교실을 빌려 수업을 했다.
- 광안리 수변공원에 매우 큰 바위덩어리들이 바닷속에서 날아왔다. 현재는 그중 하나를 태풍 매미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써 그대로 남겨두고 전시(?)하고 있다.[19] 일명 '매미바위'. # 15년 뒤 태풍 콩레이가 왔을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이에 대해 시는 시민들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것은 치우고 나머지 3∼4개는 이 바위처럼 안내판을 붙여 관리하기로 했다. 태풍이 올 때 말 안듣고 함부로 해안에 접근하면 이런 거에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라는 경각심을 일깨우는 차원에서 일부러 남겨두어 관리한다고.
- 부산 해운대 선상 레스토랑이 좌초되었다.#
- 부산 낙동강에 있는 다리, 구포교의 일부 구간이 붕괴되어 사라졌다. # (2005~2008년 사이로 추정) 구포교는 다시는 복구되지 못했고[20] 2008년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졌다.
-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의 일부 지붕이 날아갔다.#
- 거제시로 들어오는 송전탑이 죄다 쓰러지며 거제 전역에 3일간 정전이 일어났다. 삼성, 대우 두 곳의 조선소도 크레인이 쓰러지는 등 개판이 된 것은 덤. 바닷가 인근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는 바닷물이 마구 들어와 자동차들이 죄다 침수되기도 했다.
4.2. 대구광역시
- 또 대구에 많이 심어져 있던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가 강풍에 모조리 넘어지거나 쓰러져버리는 등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는 이 나무가 뿌리가 얕고 바람에 약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경북대와 계명대의 개잎갈나무는 전멸했고, 동대구로의 상징인 개잎갈나무 가로수는 복구하니 마니 갑론을박이 일었다가 지금은 강전정된 채 지지대에 의존하고 있다.
- 신천 고수부지 축대도 곳곳에 피해를 입어 재정비를 해야만 했다.
- 달성군 소재 달성공단에도 상당한 피해를 주었고, 산사태 등으로 인해 공장들이 매몰되는 등의 피해가(천장까지 토사가 차오름) 있었다. 인근 군부대들이 총 출동 하여 약 한 달간 대민피해복구를 실시하였다.
- 대구 계명대학교 대명 캠퍼스 내의 소나무들도 여러 그루 쓰러졌다.
- 대구 도시철도 2호선도 없던 시절,[23] 대구 본시가지에서 시지지구로 가려면 예나 지금이나 무조건 담티고개를 넘어야 하는데[24] , 당시 시지지구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담티고개를 넘는 게 그리도 고역이었다고 한다.
4.3. 마산시(현 창원시)
이 거대한 태풍의 강력한 풍속과 낮은 기압은 마산시(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마산합포구) 해안가에 궤멸적인 상처를 남겼다. 기압 때문에 부풀어오른 바닷물이 만조와 강풍이 겹쳐 '''5미터짜리 해일'''을 몰고왔던 것. 해일은 부두를 넘어 해안가에 있는 아파트단지와 상가의 지하주차장들을 휩쓸었다. 바닷가에 붙어 있는 아파트는 '''2층'''까지 물이 차올랐으며,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경남대 앞 댓거리는 '''부두로부터 1.2km나 내륙'''인 곳이었다. 이 곳은 100년 전까지 바다였던 곳으로 일제시대부터 차츰차츰 매립하고 있던 곳이었다. 옛 어른들은 정확히 매립 전 해안선까지 물이 들어온 것이라고 증언하는데 실제로도 그렇다. 자세한 내용은 마산 문서를 보자."내 육십 평생 살다가 육지에서 배에 치어서 입원해보긴 처음이다."[25]
마산은 이 해일 때문에 수십명이 사망하는 등 당시 가장 처참하게 박살났던 도시다. 심지어 이 이후 마산(현 마산합포구)에서는 터돋움집이 21세기에 부활했고 서항부두 인근에는 당시의 피해와 사망자를 기리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image]
당시 강풍의 습격으로 '''파괴된''' 마산 야구장 조명탑. 이 때문에 원래 마산에서 치를 예정이었던 9월 16~17일 한화전은 급하게 사직으로 옮겨서 치렀다고 한다. 이외에도 해안가 쪽 아파트들은 대부분 전면부 통유리가 파손되었는데, 강풍대가 지나간 시간은 밤 9시부터 11시경까지 불과 2시간 정도에 불과했다.
특히 마산 서항 부두에는 통나무들이 야적되어 있었는데, 이 통나무들이 만조와 해일을 타고 1.3km 내륙의 댓거리까지 밀려들어왔다. 문제는 이것들이 빌딩 출입구를 막는 바람에 지하에 있던 사람들이 탈출하지 못해 인명피해를 키웠다.# 특히 지하 3층에 있던 노래방[26] 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사망했다. 특히 추석을 맞아 가족끼리 노래방에 놀러 나온 일가족, 결혼을 앞둔 남녀 등이 익사한 시신으로 발견되어 충격을 주었다. 이들 피해자의 시신은 육군 향토사단인 제39보병사단 인력과 특전사 출신 예비역(특전동지회), 소방관 인력 및 시청 공무원, 사회복무요원 등의 인력이 투입되어 수습하였고 댓거리 일대 침수피해를 가복구하는 데만 27일이 걸렸다. 시신이 나온 후에는 물이 차오른 컴컴한 지하공간에 맨정신으로 내려갈 수가 없어서 대민지원으로 나온 막걸리를 한 사발씩 마시고 얼얼하게 술기운에 기대서 작업을 해야 했다고 한다. 당시 만조와 함께 마산합포구 일대는 물이 들어차면서 지하노래방에서 경남대 앞 육거리에는 배가 떠 밀려와 올라와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항목 상단의 어부 증언이 여기서 나온 것) 댓거리에는 그나마 어선이 떠밀려온 정도였지만 진동 앞바다 방파제 위에선 '''5천톤급 쇳덩어리 선박'''이 걸려 있었을 정도. 마산 시내는 침수된 자동차와 함께 어선이 도로 한복판에 떠내려와 엉망진창으로 얽혀 있었다.
전기는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복구되었지만 식수는 거의 하루동안 복구되지 않았고 심한 곳은 사흘 뒤에야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배수펌프나 인프라 등도 전부 침수되어버렸기 때문. 이 기간동안 댓거리 지역 주민들은 도시 한가운데의 사막을 경험하였다.
원래 갯벌이던 곳을 매립하여 만든 자유무역지역(구 수출자유지역) 또한 큰 피해를 봤다. 대부분의 공장 및 사무실 건물 1층이 물에 잠겼고 물류창고 또한 파도에 휩쓸렸다. 당시 자유무역지역에 당직으로 근무했던 사람의 증언으로는
라고 한다. 당시 당직 근무자들은 그 비싼 노키아 휴대폰이 박스포장 그대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이 매우 기억에 남는다고.. 또한 IMF를 견뎌낸 수많은 경영인들이 회사를 지키기 위해 직원들과 함께 분투를 벌였고 테이프로 사무실 문을 밀봉하고 모래주머니나 고무타이어 등을 쌓아 임시 방파제를 꾸리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건물 2~3층 높이까지 차오르는 파도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기계 부품 공장을 경영하던 한 경영인은"파도가 밀려와서 도망치려 했는데, 다리가 물에 잠겨서 이동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튼튼한 건물이었던 ○○회사 옥상에 주변회사 당직 근무자들이 모두모여서 가족들에게 전화하기에 바빴다. 3시간쯤 있으니까 물이 빠졌는데, 바닥에 하얀 벽돌같은게 굴러다니더라, 내려와서 자세히 보니 휴대폰들이었다."[27]
라며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노키아 언급은 당시 무역지역에 있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공통으로 증언하는 부분이다. 인상적이긴 인상적이었던 모양."테이프로 유리문 틈틈을 막아 사무실을 밀봉하고 당직근무자들에게 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연락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일단 차를타고 다리를 건너 집으로 가고있는데, 회사를 나온지 20여분 정도도 되지 않아서 전화 한통이 왔다. 회사에 물이 차고 있다는 당직근무자의 연락이었다. 일단 회사를 빠져나오라고 했는데, 20분 그사이에 다리가 물에잠겨서 나갈수가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밖이 더 위험하니 일단 회사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이동할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또 20분쯤 있다 전화가 왔는데, 책상 높이까지 물이 차서 컴퓨터가 다 죽었는데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아, 만만한 태풍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느끼고 일단 다 포기하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라고 얘기했다. 다음 날 한 차례의 파동이 지나가고 공장으로 바로 달려갔다. 군경이 정문다리를 통제하고 있어서 후문으로 갔는데, 이쪽은 소방관들이 통제하고 있더라. 3시간쯤 있으니 통제가 풀려서 회사에 들어갔는데 바닥에 노키아 전화기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공장에 들어가니 먼저 온 다른 직원들이 50cm 가까이 쌓인 모래들을 삽으로 퍼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물에 홀딱 젖어 녹초가 된 당직근무자가 앉아있었고, 가서 괜찮냐고 말을 걸었다. 그 근무자는 '''"막연히 안전한 곳이라고 하면 어카요! 안전한 곳이 어딘지 알려줘야지!"'''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당시 마산의 궤멸적인 피해로 인해 군부대에서는 마산을 고향으로 하는 병사를 특별 휴가를 보내주는 등 전국적으로 피해 복구에 힘썼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 방문 시 특전사들이 당일 멋있게 현장 복구하러 오고 기존에 죽어라 일하던 군인들은 숨으라고 하여 예비군 동대장 중 일부가 이 군인들을 동원, 아는 지하주점을 치우게 했다는 게 당시 복구작업을 한 군인의 증언.
마산 인근 진해시(현 창원시 진해구)도 큰 피해를 받았는데, 이때 진해기지사령부에서 태풍 경보를 내려 대부분의 함정들은 파도가 잔잔한 수역으로 피항을 갔지만 사람 팔뚝만한 강철로 만든 쇠사슬인 닻줄이 파도를 버티지 못하고 끊어져 하마터면 침몰할 뻔한 함정들도 있었고, 해군기지 부둣가는 마산처럼 해일로 인해 2층까지 바닷물이 차오르면서 대부분의 시설물이 유실되고 쑥밭이 되었다. 모 해군부대는 10월에 예정된 훈련을 취소하고 복구작업만 하다 보니 다음 해인 2004년으로 해가 바뀌었다는 경험도 있을 정도. 여담으로 당시 진기사에서 다른 항만으로 피항한 선박 중 DDH-973 양만춘함은 상술한 통나무들이 야적되어 있던 마산 서항부두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괴멸적 피해를 입은 댓거리 지역에서 딱 양만춘함이 정박해 있던 곳 앞의 아파트[28] 와 그 뒤쪽의 문화동 주택가'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 통나무가 떠내려오지도 않았거니와 인근의 창포동성, 해운동성, 경민, 광신, 그리고 구 합포구청 등이 전부 지하실이 다 잠기고 일부는 2층까지도 물이 들어차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곳만 지하주차장이 10cm 정도[29] 잠기고 말았던 것. 이 때문에 지역민들은 양만춘함이 해일을 막아준 것 아니냐고 십수년이 흐른 지금도 이야기하고 있다.
5. 결과
공식 피해 집계에 따르면 사망·실종자만 '''130명''', 재산 피해는 '''4조 2천억여 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매미가 휩쓸고 지나간 수많은 지역이 정전피해를 입었다. 또 전술했듯 2003년 이전에 심은 가로수, 특히 메타세콰이어, 히말라야시더, 소나무 같은 나무들은 이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기울어진 뒤 강전정을 당해 볼품없게 변해버렸다.
2002년 태풍인 루사와 2003년의 매미, 이후에 온 2004년 태풍인 메기와 2005년의 나비가 너무나도 참혹한 피해를 내는 바람에 심지어 원치 않은 부작용도 생겼다. 곤파스같이 수도권을 관통하거나 매미에 비견되는 강력한 태풍이 아닌 이상 전국권 뉴스 속보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서울 공화국 문서 참조.
매미는 이 피해 때문에 제명되어 무지개로 대체되었다. 이후 무지개 마저도 2015년 중국에 끼친 피해로 제명되어 수리개로 대체되었다.
6. 매미성
[image]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대금리 일대에 매미로 인해 폐허가 된 농경지에 태풍 피해를 막기 위한 일명 매미성을 무려 '''16년 6개월''' 동안 계속해서 건설하고 있다.영상 여기서 대단한 점은 백순삼 씨가 혼자서 이것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폐허가 된 곳을 관광지로 만든 이례적인 사례로 다행히 건물관련 법령 위반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의 모양을 보자면 서양풍과 동양풍을 합쳐놓은 형태이다. 지상파 3사에서 방영된 뒤 엄청난 인기가 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특히 거가대교와 가깝고 주변 경관도 아주 좋아서 위키러들도 여기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성 주인 백순삼 씨가 부탁했듯 쓰레기는 버리지 말 것.[30] 미운 우리 새끼에서 김건모가 빽가와 김종민과 함께 김건모의 생후 600개월 축하를 위해 방문했었다.
고현에서는 접근성이 그리 좋지 못하지만 부산광역시에서는 부산-거제 시내직행좌석버스가 자주 다녀줘서 오히려 부산에서 접근성이 더 좋다. 대금교차로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