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안대군(이화)

 



'''의안대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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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환조의 왕자'''
'''의안대군
義安大君'''

'''작호'''
의안백(義安伯), 의안공(義安公), 의안군(義安君) → 의안대군(義安大君)
'''시호'''
양소(襄昭)
'''본관'''
전주(全州)
'''성명'''
이화(李和)
''''''
이요정(二樂亭)
'''부왕'''
조선 환조
'''생모'''
정안옹주 정빈 김씨(定嬪 金氏)
'''부인'''
삼한국대부인 순흥 안씨(順興 安氏)
삼한국대부인 교하 노씨(交河 盧氏)
'''자녀'''
7남 1녀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생몰
기간
'''
'''음력'''
1348년 미상 ~ 1408년 10월 6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여담
5.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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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자춘서자#s-1이자 조선 태조의 이복동생. 이방원정몽주를 살해하는 데 협력했으며 조선 개창 이후 개국공신이 되었다. 본래는 의안백(義安伯), 의안군(義安君), 의안공(義安公) 등으로 불리다가 태종 때 작위 체계가 정비되고 오등작이 폐지되면서 의안대군(義安大君)이 되었다.

2. 생애


1348년(충목왕 4년) 동북면 화주에서 이자춘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정빈 김씨(定嬪 金氏)로 본래 이자춘의 여종이었다. 이자춘이 죽자 이성계는 그녀를 개경으로 데려와 극진히 모셨으며 심지어는 그녀의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조선 개국 후 정안옹주(定安翁主)로 봉해졌고 1404년(태종 4년)에 죽은 뒤 정빈으로 추봉되었다.
1차 왕자의 난, 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을 도와서 정사공신, 좌명공신이 되기도 했다. 자신을 돌봐준 이복형의 뒤통수를 친 셈.[1]
원래 조선 왕조에서 왕의 동생은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으나, 태종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의 직계가 아닌 왕족은 왕위 계승에서 제외시키는 대신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2] 영의정부사에 오르기도 했다. 영의정에 오르고 나서는 외척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 대한 탄핵을 주도하여 그들을 귀양보냈다.

3. 사후


죽은 후에는 이복형 태조의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모셔졌다. 그의 무덤은 실전되었다가 순조 대에 후손들이 다시 찾아냈다고 한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으며, 평내동에 있는 '의안로'라는 도로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

4. 여담


  • 의안대군 이방석에게는 숙부인데, 한자는 다르지만 군호가 같아서 종종 혼동되기도 한다. 심지어 의안대군 이방석 묘에 세워진 안내판에 묘의 위치가 실전되었다가 순조 대에 후손들이 다시 찾아냈다고 써 있기도 했다. 지금은 고쳐진 상태.
  • 조선 초기 최고의 땅부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유는 공신으로 서훈되면서 받은 토지가 어마어마해서인데, 이화 같은 경우 태조 이성계를 호종하는 과정에서 위화도 회군 참가를 통한 무진년 회군공신, 조선 개국공신 칭호를 얻고 이후 1차, 2차 왕자의 난에 참여, 지지하면서 정사공신, 좌명공신의 칭호를 얻어 공신칭호가 무려 네 번이고 그에 따른 상급으로 공신전 토지를 매번 하사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받은 토지가 대략 570결[3] 정도. 이화가 받은 공신전의 면적을 당시 1등전 한결의 면적(대략 3천여평)으로 환산하면, 170만평 정도가 되는데, 이는 현대의 여의도 면적의 2배 정도되는 크기이다.[4] 이 때문에 후에는 공신들이 너무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나왔고, 이후 공신록을 받은 당사자 사망 후에는 공신칭호 수여 횟수와 등급에 따라서 자손에게 상속되는 토지에 제한이 생겼다. 그리고 당연히 남은 땅은 국가로 다시 귀속된다. 나중에 정조 때 그의 후손들이 농민으로 전락하여 가난하게 살았는데, 안타깝께 여긴 정조가 그 후손에게 양반직을 복직시키고 세역과 노역을 면제하였다. 정조 때 의안대군 후손이 노역을 면제받게 된 계기는 의안대군의 자손 16명이 계유정난으로 화를 입어서 인천 이씨[5][6], 광산 이씨[7], 홍주 이씨[8] 등과 같이 변관(變貫)해서 연좌제를 피하고 역적의 자손을 숨기고 살다가 숙종 때 신원되면서 세상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9]

5. 매체에서


방송 매체에선 용의 눈물을 제외하곤 제대로 등장한 적이 없다. 용의 눈물에선 상당히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개국 이후 정도전이 추진한 사병 혁파와 진법 훈련에 반발하면서도 이방원처럼 대립각을 세우진 않고 이래저래 눈치를 본다. 이런 모습 때문에 정도전에게 불만을 품고 진법 훈련에 불참한 이지란에게 찾아가서 진법 훈련에 대해 볼맨소리를 할 때 박쥐 노릇 하지 말라며 한 소리 듣는다. 이후에는 1차, 2차 왕자의 난 때 갑옷을 챙겨 입고 이방원의 편에 서는 모습과 민씨 형제가 탄핵당했을 때 태종의 의중에 따라 충실하게 탄핵에 앞장서는 모습이 모두 충실하게 그려졌다. 민제의 사망을 앞두고 민씨 형제를 불러들이는 문제를 놓고 대신들 간 갑론을박할 때 격렬하게 민씨 형제를 불러와선 안 된다고 주장하다 심장마비로 급사한다. 사망 소식을 들은 원경왕후에게 하늘이 무심치 않다는 고인드립을 당한다. 배우는 원석연.


[1] 이화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장손인 이복근을 위시로 상당수의 종친들이 이성계의 이해할 수 없는 세자 책봉과 종친 견제에 불만을 품고 이방원의 편을 들었다.[2] 이성계의 방계 왕족들이 죄다 이방원 편을 들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다. 어차피 태조가 아들이 많아서 왕위 계승권이 멀기도 했고.[3] 1결은 농민 한 가구가 먹고 살 만큼의 토지를 말하는데, 시대에 따라 면적이 달라졌고,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서도 면적이 차이가 났는데, 비옥도가 떨어져 척박한 낮은 등급의 토지로 갈수록 더 넓어졌다.[4] 1등전 외에 비옥도가 떨어져 소출이 적은 하등전도 섞여있을 거라고 추정하면 200여만 평 정도라고 볼 수도 있는 면적[5] 육종영(六宗英)의 한 사람이었던 하령군(河寧君) 이양은 인천 이씨 8세(또는 11세)로 나오며, 그의 아들인 여양군(礪陽君) 이승윤의 관직이 헌납(獻納)으로 나와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1982년판 인천이씨대동보에서는 언급되어 있지만 2009년판 인천이씨대동보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6] 의안대군의 손자인 한산군(韓山君) 이의산은 인천 이씨 14세로 나오며, 계유정난에 순절했다는 내용은 둘 다 나온다. 이의산에게는 해령군(海寧君) 이우경이 있는데 의안대군파보에서는 순절한 걸로 나오지만 인천이씨대동보에서는 이름을 순석(恂碩)으로 바꾸고 대구 수성으로 은거했다는 내용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2009년판 인천이씨대동보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7] 여양군 이승윤의 두 아들인 이소조와 이계조는 광산이씨 상서공파 중시조 7세로 나오며, 계유정난에 화를 입었고 장릉(莊陵) 배식단에 모셔졌다는 내용이 양쪽 다 나온다.[8] 조선 개국 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이서의 본관이다. 광산 이씨와는 다르게 여양군의 두 아들들은 이서의 손자로 나와 있고 관직명도 적혀 있다. 더불어서 자손이 있다고 나오는데, 자손의 일부는 봉산 이씨와 겹치는 부분이 나타난다.[9] 물론 신원되었다고 하더라도, 전주 이씨로 복관하지 못 하고 변관한 걸로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