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정(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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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愚貞.
생몰기간: 1923년 8월 1일 ~ 2002년 5월 30일 (향년 78세)
1. 소개
'''한국 기독교 페미니즘의 대모'''.
대한민국의 신학자, 페미니스트, 인권운동가, 교수 출신 정치인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2. 생애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현 포천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12대손이었으나 11대조 복평군이 인평대군의 동생 용성대군의 후계로 입적되어 법적으로는 용성대군의 12대손이 되었다. 이우정의 집이 바로 그 용성대군의 종가(宗家)였기에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지만 그만큼 집안 분위기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할아버지가 신소설의 선구자인 개화지식인 이해조로, 그래도 당시로서는 의식이 깨어있는 편이었지만[1] 아버지는 반대로 아주 가부장적인 인물이었고[2] 이 때문에 어머니가 상당히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일찍이 봉건적 가족 제도에 반감을 품었다.
부모님을 모두 일찍 여의어서 오빠들과 상당히 힘든 시절을 보냈다. 둘째 오빠 이우경은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다가 6.25 전쟁 때 납북되어 광산에서 노역을 하다 사망했고 큰 오빠는 페인트 공장을 운영했는데 역시 전쟁 때 인민군에게 압수당해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아버지가 사주단지를 들고 와 결혼하라고 종용했다. 당시 결혼하지 않은 많은 여성들이 일제에 의해 정신대로 끌려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피해 숨어있는 동안 기독교를 처음 접하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게 된다. 이후 조선신학원(현 한신대학교),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엠마누엘 칼리지 과정을 졸업하였다. 조선신학원에서 진보 성향 목사인 김재준 목사의 영향을 받았다.
1953년 한신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1970년까지 재직하면서 해방신학과 페미니즘을 강의하였다. 1953년 김재준 목사가 예수교장로회에서 이단으로 파문당한 뒤 세운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교수직을 그만둔 뒤 서울지역 청계천 등 영세 공장단지 여공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작업장의 비위생과 사고 위험 요인을 목격했고 이후 노동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문을 직접 낭독하였다. 이것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 때는 한국방송공사의 편파방송에 항의하여 수신료 납부 거부 운동에 참여하였고 1987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하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김대중 양김 단일화를 성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재야의 임채정, 박영숙, 김영진 등과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1990년 보안사 사찰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관련 기사.
1991년 평화민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신민주연합당에서 수석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제5번)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9월 1일부터 6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아시아 평화와 여성의 역할' 3차 토론회에 권영자[3] , 한명숙[4] , 윤정옥[5] 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에서 상임고문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