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양군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왕족, 장조의 서3남 은전군의 양증손자이자 완평군의 큰아들이다.
2. 생애
1857년(철종 8년) 9월 21일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손인 유학 이신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 중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이 근 2 ~ 300년 전 임금이었던 11대조 선조였기에, 태어날 당시 그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만 3세 되던 1860년 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의 양손자이자 풍계군의 양자였던 경평군 이호[1] 가 파양당하고 아버지 이신덕이 대신 입양가면서 그 역시 왕실의 일원이 된다.
이밖의 어린 시절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878년(고종 15년) 고종의 특명으로 군관에 임명되었고 그 해 철종비 철인왕후의 장례 시 빈전도감에 낭청으로 참여한 공로로 어린 말 1필을 받았다. 이듬해인 1879년(고종 16년) 3월 고종의 명으로 이름을 이재근으로 고쳤다. 이후 음서로 출사하여 부사용(副司勇)[2] 과 사용(司勇)[3] 을 지내는 등 주요 군직을 맡았고 1880년(고종 17년) 혼전의 종척 집사(宗戚執事)[4] 로 참여하였다.
1888년(고종 25년) 5월 고종이 친히 낸, 지금으로 치면 시 짓기 대회[5] 에 합격하여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그래서 몇 달 뒤 식년시(式年試)[6]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그 해 11월 16일 영릉(永陵) 참봉[7] 을 역임하고 1889년(고종 26년) 8월에는 선공감감역, 1890년(고종 27년) 1월에는 금부도사를 지냈다. 이 때 몸이 안좋아져 2달 뒤 사직한다 했으나 고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 뒤에 감역(監役)을 거쳐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8] 와 수릉 능령(綏陵陵令)을 거쳤다. 그 무렵 아내 연일 정씨와 사별하고 해주 오씨와 재혼하였다.
1890년대 초중반엔 주로 지방으로 파견나가 고을의 수장을 많이 맡았다. 경기도 진위현령[9] 및 강원도 간성군수, 그리고 경기도 삭녕군수와 수원군 판관을 지냈다. 수원군 판관시절에도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였으나, 고종은 무시하고 오히려 그를 수원군수로 '''승진'''시켰다.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 피살 이후 중앙으로 올라와 다시 종척집사를 맡고 이듬해인 1896년(건양 원년) 3월에는 농상공부참서관(農商工部參書官)이 되었다.
3. 사망과 이후
농상공부참서관으로 재직하던 1896년(건양 원년) 12월 6일 지병으로 40세(만 39세)에 별세하였다.
시신은 경기도 인천부 전반면[10] 묘좌(卯坐)에 안장되었다. 첫부인 연일 정씨의 묘는 경기도 과천군 남면 당정리[11] 에 안장되었다.
생전에는 일반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1899년(광무 3년) 족보 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종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황제의 4대 후손까지는 황족으로 대우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인양도정(仁陽都正)을 거쳐 4년 뒤 인양군(仁陽君)으로 최종 추봉되었다.[12][14]
4. 가족과 후손
첫 부인 연일 정씨와 두 번째 부인 해주 오씨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고 이름없는 첩 사이에서 아들 이헌용 하나만 낳았다. 첩실의 소생인 이헌용은 생가 숙부인 이재현[15] 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러나 인양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그런지 나중에 정실부인 해주 오씨가 이헌용을 자신의 친자로 입적시키고 기른다. 하지만 나중에 상당한 난봉꾼이 되는데 음주로 인한 사고는 기본이고, 돈 2백원으로 유부녀를 매수하여 첩으로 삼았다가 첩이 된 여성의 본 남편이 변호사를 사서 소송을 당한 적도 있었고(...)[16] 뒷날 재산 문제로 적모 오씨 부인을 상대로 소송까지 걸다 오히려 패한 적도 있었다.(...) 이런 방탕한 생활 등으로 대부분의 재산을 잃게 된다.
이헌용은 1921년 사망하는데 아들이 없어 의친왕의 4남 이창(호적명 이해직, 아명 이창길)을 입양해 대를 이었다. 이창은 이광주, 이은주, 이일주, 이석주 등 네 아들을 낳아 현재까지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
[1] 이세보로 더 잘 알려져있다. 원래는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의 후손이다.[2]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종9품 무관직.[3]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둔 정9품 무관직.[4] 조선시대 국상(國喪) 때 왕실 친인척에게 시키는 임시 벼슬.[5] 응제(應制, 통상 '製'로 적지만 이는 일제의 잔재다.)라고 하는데 '어명으로 시를 짓는다'는 뜻이다.[6] 조선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 시험. 식년시에는 크게 소과, 문과, 무과가 있었다. 즉, 우리가 흔히 아는 과거 시험이라 보면 된다.[7]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아닌, 영조의 장남 진종(효장세자)와 효순왕후(현빈) 조씨의 능이다.[8] 중국으로 보내는 직물, 인삼과 의복 및 각종 비단과 물감 ‧ 염색 ‧ 직조 등의 일을 관장하는 제용감의 관리자.[9]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일대.[10] 현재 경기도 시흥시 북부 일대.[11] 현재 경기도 군포시 당정동 일대[12] 작호는 지금의 인천광역시인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에서 유래했다.[13] 작위 수여 당시 고인.[14] 은언군계 : 증(贈)[13] 덕안군 이재덕, 경은군 이재성, 청안군 이재순.
은신군계 : 증(贈) 완림군 이재원, 완순군 이재완, 증(贈) 완영군 이재긍, 완흥군 이재면.
은전군계 : 증(贈) 인양군 이재근, 의양군 이재각, 예양정 이재규.[15] 완평군 이승응의 둘째 아들인데 이승응의 생가(경창군가) 동생 이낙응의 양자로 출계했다. 그래서 장조 추존 당시에도 황족으로서의 군호는 받지 못했다.[16] 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일자, 2면.
은신군계 : 증(贈) 완림군 이재원, 완순군 이재완, 증(贈) 완영군 이재긍, 완흥군 이재면.
은전군계 : 증(贈) 인양군 이재근, 의양군 이재각, 예양정 이재규.[15] 완평군 이승응의 둘째 아들인데 이승응의 생가(경창군가) 동생 이낙응의 양자로 출계했다. 그래서 장조 추존 당시에도 황족으로서의 군호는 받지 못했다.[16] 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일자,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