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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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증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손자이자[1] 익평군의 서자이다.
2. 생애
1860년(철종 11년) 11월 10일, 익평군와 그의 소실[2]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만 2세) 때인 1863년(철종 14년) 9월에 아버지 익평군을 잃었다. 실제 핏줄로만 보면 그가 익평군의 가계(家係)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서자인데다 당시 아주 어렸기 때문에 덕흥대원군의 12대손인 이덕주[3] 가 익평군의 적장자로 입적해서 가문을 이었다.
익평군 사후 경은군은 영평군 이경응과 함께 '''효종의 혈통을 물려받은 단 둘뿐인 왕족'''이었다.[4][5] 익평군 사후 몇 달 지나지 않은 1864년 1월에 철종 역시 승하했는데, '''핏줄과 항렬을 두루 따졌을 때 차기 왕위에 그가 가장 가까웠다.'''[6] 하지만 만 3세라는 너무 어린 나이, 서출의 한계[7] , 그리고 흥선군과 신정왕후 조씨의 커넥션 등 여러 문제로 왕이 되지 못했다.
2.1. 관직 생활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20살 때인 1879년(고종 16년) 9월 승문원[8] 이문학관에 임명받았다.
그가 맡은 벼슬은 주로 왕실 관련 직책이었다. 국상 때마다[9] 종척집사[10] 를 지냈고, 종정원 주사[11] 를 역임했으며, 《선원보략》[12] 을 수정할 때 그것을 관리감독했다. 또한 향관(享官)[13] 과 사직서령[14] 을 역임했고, 시종원 시어[15] , 전선사 주사[16] , 비서원승[17] 등 임금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직책을 맡았다.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후, 종실과 여러 대신들과 함께 고종에게 칭제건원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같은 해부터 독립협회에 종친 자격으로 찬조금을 후원했다.
대한제국 수립 직후에는 이천군수, 원구단 황궁우 역소 별감, 내부 시찰관 등을 지냈다. 후원해주던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후에는 담배 제조 공장인 연초제조주식회사(煙草製造株式會社)를 세워서 경영했다.
1899년(광무 3년) 말에 고조할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종대왕을 거쳐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았다. 이에 황제의 4대손은 황족으로 대우한다는 예법에 따라 경은도정(景恩都正) 작호를 받았고 1900년(광무 4년) 경은군(景恩君)으로 승격했다.
경은군으로 승격할 무렵, 경운궁(덕수궁) 담장 확장 공사를 마무리한 공적으로 종2품으로 품계가 올라갔다.[18] 같은 해 2월 13일 회양군 공립 소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19] 해고당하고 경은군 작위 또한 박탈당했다가 1902년(광무 6년)에 사면받았다.
1903년(광무 7년) 8월에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20][21] 으로 임명받으면서 다시 경은군(景恩君)으로 봉해졌다.
1906년(광무 10년) 7월 고종에게 훈 1등 태극장을 하사받았다.
순종 즉위 후, 1907년(융희 원년) 10월 14일에는 항일 의병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로 벼슬자리에서 쫓겨났다.[22][23]
3. 말년
1910년(융희 4년) 3월에 행방불명되었다. 같은 달 23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거처를 알지 못해 경시청에서 그 종적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24]
이 후의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언제 죽었는지,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첫번째 부인 안동 권씨의 묘가 서울 왕십리에 있었으나 그마저도 위치를 잊고 말았다.
4. 여담
- 1898년(광무 2년) 이천 군수로 재직할 당시, 경기도 관찰부에 납부해야 할 3000원을 도둑맞았다.(...) 그 때문에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김영덕이 이천의 세금을 면제해줄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 이천군수로 재직 시, 백성들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 들어 그들의 고충을 잘 듣고 이해해주었다고 한다.
- 승문원 이문학관으로 일할 때, 항상 관복을 똑바로 차려입고 정시 출근하도록 했으나 탈이 있다고 하여 얼마 못가 교체당했다고 한다. 또한 황족으로써 독립협회에 후원한 것과 의병들과 어울린 점을 통틀어 보면, 그의 성격은 아마 기존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건 하는 성격이었으며,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정의롭게 살고자 했던 스타일로 보인다. 이런 면은 조카 뻘인 의친왕과 비슷하다.
4.1. 가족과 후손
부인이 둘 있었다. 첫 부인은 한 살 연상의 안동 권씨로 1888년 4월에 사망했고 두 번째 부인은 19살 연하(...)의 여흥 이씨로 사망 년월일은 알 수 없다.
슬하에 2남을 두었다. 권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장남 이춘용(李䡅鎔)을,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 이우용(李萭鎔)을 두었다. 이 외의 경은군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철종 사후 생존해있던 효종의 생물학적 남계 후손은 영평군과 경은군 단 둘뿐이었다. 영평군은 친아들을 낳지 못했으므로[25] , 만약 경은군 이재성의 두 아들이 대를 잇지 못했다면 효종의 실제 남계 자손은 현재 완전히 사라진 셈이 된다.
[1] 친할아버지는 상계군의 동생 풍계군.[2] 성씨와 이름은 알 수 없다.[3] 이재성과는 생가로 22촌 형제 뻘이다.[4] 이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다 덕흥대원군, 선조, 인조 대에서 갈라진 사람들이 입양 온 것이었다.'''[5] 효종의 아들 현종은 독자, 현종의 아들 숙종도 독자였다. 숙종의 장성한 세 아들 중 경종과 연령군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영조만 아들 둘을 남겼다. 영조의 장자였던 효장세자는 9살에 요절했고, 차남 사도세자가 5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장남 의소세자도 3살에 죽었고, 차남 정조가 슬하에 2남을 두었으나 정조의 대는 헌종을 끝으로 결국 다 끊기고 말았다. 4남 은신군과 5남 은전군은 아예 자녀가 없었고, 유일하게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만이 슬하에 무려 8남을 두었다. 그런데 그중 6명은 아들이 없었고, 풍계군과 전계대원군만 아들을 낳았다. 전계대원군은 3남(회평군, 영평군, 철종)을 두었는데, 이 3명 다 아들을 못 낳았거나, 낳았어도 일찍 죽었고 둘째 영평군만이 철종 사후에도 생존했다. 풍계군은 독자 익평군을 낳았고, 익평군도 (서자이지만) 독자 경은군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철종 사후 효종의 생물학적 남계 후손이 '''영평군과 경은군 둘뿐이었던 것이다.'''[6] 철종과 가장 가까운 핏줄은 당연히 형제인 영평군이었다. 그러나 영평군은 철종의 동생이 아니고 형이었던 데다 고질병이 있어서 철종의 뒤를 이을 수 없었다.[7] 애당초 서자라 본가의 계통도 잇지 못했으니(...).[8] 조선시대에 외교 문서를 맡은 관청.[9] 신정왕후(1890년)와 명성황후(1895년), 효정왕후(1904년), 순명효황후(1904년).[10] 조선시대 국상 때 가까운 왕실의 종친 및 인척에게 시키는 임시 벼슬.[11] 宗正院. 종정원은 조선 말기 왕실 계보에 관한 업무를 맡아 보던 관청이다.[12] 왕실 족보.[13] 국가에서 실시하는 각 왕릉, 선원전 등의 제사를 맡아보는 관리.[14] 社稷署令, 사직단과 그 주변의 청소을 관리하던 사직서(社稷署)의 벼슬이다.[15] 侍從院. 1895년 관제 개혁 때 왕실 사무를 관장하는 궁내부 아래에 새로 소속 된 관청. 시어(侍御)는 왕을 곁에서 보좌하는 직책을 말한다.[16] 典膳司. 고종 시기 궁중 내의 식사 공급 업무를 맡았던 관청.[17] 秘書院. 비서원은 조선 말기에 왕명의 출납과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비서원승(秘書院丞)은 최고 책임자인 비서원경 바로 아랫 서열.[18] 경운궁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이후 몇 년 간 계속 확장 공사를 했다.[19] 무슨 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에도 없다.[20] 궁내부는 조선 말기 왕실 내부의 여러 업무를 총괄하던 관청으로, 특진관은 16명 이하의 인원으로 구성된 관리직이다.[21] 칙임관(勅任官) 4등.[22] 이틀 뒤인 1907년 10월 16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원문이다. "직명을 거두다 - 경은군 리ᄌᆡ셩씨ᄂᆞᆫ 죵젹이 슈상ᄒᆞ고 의병으로 간셥ᄒᆞ였다ᄒᆞ여 그 직텹을 위션 거두어 드리라고 죠칙이 ᄂᆞ리셧더라(현대 한국어: 경은군 이재성씨는 종적이 수상하고 의병으로 간섭했다하여 그 직첩을 우선 거두어 들이라고 조칙을 내리셨더라)"[23] 이 때 순종이 내린 명은 "경은군(景恩君) 이재성(李載星)이 남몰래 행동하면서 나쁜 무리와 호응한다고 하니, 직명(職名)을 우선 환수하도록 하라."였다. 이 소식은 황성신문에서 10월 18일자 제1면 1단으로 보도했다.[24] 기사 원문이다. "가ᄂᆞᆫᄃᆡ가 어디여 - 경은군 리ᄌᆡ셩씨ᄂᆞᆫ 근일에 무ᄉᆞᆷ ᄉᆞ건을 인ᄒᆞᆷ인지 거쳐를 알지못ᄒᆞᆫ다ᄂᆞᆫᄃᆡ 경시쳥에서 그죵젹을 형탐ᄒᆞᆫ다는 말이 잇다더라(현대 한국어: 가는데가 어디여 - 경은군 이재성씨는 요새 무슨 사건 때문인지 거처를 알지 못한다는데 경시청에서 그 종적을 샅샅이 찾는다는 말이 있다더라)"[25] 단, 양자를 들여 법적인 후손들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