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림군

 


'''계동궁의 역대 종주'''
3대 남연군 이구[1]

'''4대 완림군 이재원'''

5대 이기용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 계동궁 3대 사손'''
'''完林君
완림군'''

'''군호'''
완림군(完林君)
'''이름'''
이재원(李載元)
''''''
순팔(舜八)
'''시호'''
효정(孝貞)
'''출생'''
1831년 9월 8일(음력 10월 13일)
'''사망'''
1891년 3월 28일(음력 2월 19일) (향년 59세)
1. 개요
2. 생애
2.1. 본격적인 관료 생활
3. 사망과 이후
4. 여담
5. 매체에서
6.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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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출신 관료. 고종 이형흥친왕 이희, 완영군 이재긍의 친 사촌형이자 완순군 이재완의 양 사촌형이며 계동궁의 사손이다.

2. 생애


1831년(순조 31년) 9월 8일, 한성부에서 남연군의 둘째 아들 흥완군 이정응과 부인 대구 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연군의 장손이었기에 태어나자마자 이미 3년 전 자식없이 죽은 큰아버지 흥녕군 이창응양자가 되었다. 그래서 은신군 - 남연군 - 흥녕군의 제사를 받드는 계동궁의 사손이 되었다.

2.1. 본격적인 관료 생활


종친이라 음서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영릉, 선릉능참봉으로 일했다. 1853(철종 4년)년에는 철종이 춘당대[2]에서 시 짓기 행사를 열었을 때, 부(賦)[3]에서 1등을 하여 직부전시[4]의 명을 받았다.
1853년(철종 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역임했다. 이후 홍문관 응교와 교리, 성균관 사성 및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864년 1월 사촌동생 이재황이 고종으로 즉위하고 삼촌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더욱 승승장구한다. 고종 즉위 직후에 동지경연사(同知經延事)로 승진했고, 승진 기념으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면세전[5]를 왕에게 바쳐 승정원 도승지로 임명받았다.
이후에도 사헌부 대사헌, 종친부 유사당상 , 동지돈녕부사, 이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동지춘추관사, 규장각 직제학을 역임했다. 또한 한성부판윤[6]의정부 우찬성 및 공조[7], 예조[8], 형조, 병조[9], 이조[10]의 판서[11]를 지내는 등 조정의 주요보직을 맡았다. 1868년 경복궁 중건 시에는 종정경으로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아 공사를 관리했다. 그 뒤 수원부 유수와 판의금부사 직도 맡았다.
1874년(고종 11년) 11월에 삼촌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잃었다. 다행히 이재원은 정치색이 뚜렷하지 않아 계속 관직에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잘나가지는 못했고, 조정의 중심에서 밀려나 평안도경기도 관찰사 및 광주부강화부유수지방직을 전전했다. 그러다 1879년(고종 16년)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1881년(고종 18년) 개화 정책 추진 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을 개편할 때 군무사당상경리사(軍務司堂上經理事)로 임명받고 교련국(敎鍊局)으로 배치받아 군대근대화에 힘썼다. 1882년(고종 19년)에는 이조판서를, 1884년(고종 21년)에는 병조판서를 재역임했다.
병조판서로 다시 제수받았던 그해 10월에 조선에서 대사건이 일어나니 바로 갑신정변이다. 이 때 왕실 인사들을 포섭하려던 일부 개화당원들의 추천으로 좌의정영의정으로 연달아 임명받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화당 정권의 영의정이었지만 그들과 가깝지 않고, 또 종친이라는 이유로 무사하여 정변 후에도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1885년(고종 22년)에는 독판내무부사, 1887년(고종 24년) 7월에는 예조판서로 임명받았으나 응하지 않아서 한 때 충청도 평택유배갔다. 그러나 곧 풀려나서 판돈녕부사로 임명받았으나 또다시 응하지 않았다. [12] 이후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종정경, 판돈녕부사 직을 재역임했다.

3. 사망과 이후


1891년(고종 28년) 2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 한달 뒤인 3월에 시호 '효정(孝貞)'을 받았다.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13] 계좌에 안장되었다.
1899년(광무 3년) 고조할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받았다. 그래서 황족의 범위에 들어갔기에[14] '완림군(完林君)'으로 추봉받고 상보국숭록대부로 추증받았다.[15]

4. 여담


  •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 때 지은 연생전과 1888년(고종 25년) 복구한 교태전[16]현판을 그가 썼다.## 두 건물 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던 것을 1995년에 복원했는데, 현재 연생전 현판은 새로 써서 만든 것이지만, 교태전 현판은 1900년대 초에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서 지금 경복궁 교태전에 가면 그의 글씨를 볼 수 있다.

5. 매체에서


  • 양영준[17] - 1996년 KBS찬란한 여명
  • 허기호[18] - 2002년 KBS명성황후
[image]
명성황후》의 완림군
갑신정변 에피소드에서 개화당 내각의 좌의정 직을 맡은 모습으로 잠시 등장한다.

6. 후손


부인이 정경 부인 청송 심씨와 수원 김씨 두 명이 있었는데 청송 심씨와의 사이에서 딸 둘을, 수원 김씨 사이에서 딸 하나와 아들 이기용을 얻었다. 이기용은 그가 59세에 낳은 늦둥이었는데 2년 뒤 이재원이 사망하여 고작 3세의 나이에 이기용은 계동궁 사손이 되었다. 이후의 가계는 이기용 문서 참조. 문제는 그아들 이기용이...

[1] 원래 남연군의 장남인 흥녕군 이창응이 차기 계동궁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 남연군보다 일찍 죽어 그의 양자 완림군이 물려받았다.[2] 창덕궁 영화당 앞의 넓은 마당.[3] 《시경(詩經)》에서 이르는 시의 육의(六義) 가운데 하나. 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비유를 쓰지 않고 직접 서술하는 작법이다.[4] 초시,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바로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5] 免稅田. 세금을 면제받은 토지.[6] 현재의 서울특별시장 격.[7] 현재의 대한민국 국토교통부 격.[8] 현재의 대한민국 외교부, 대한민국 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9] 현재의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격.[10] 현재의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격.[11] 현재의 장관 격.[12] 이 때 고종은 정말 많이 서운했는지, "옛 정을 생각안하고 문안도 안오면서 승부하듯이 버티니 '''앞으로 나랑 안볼려는건가?''' 명에 응하든지 말든지 스스로 알아서 해라"고까지 했다.#[13]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14] 황족의 범위는 황제의 4대손까지이다. 그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영조였고, 그는 영조의 5대손이었기에 사도세자 추존 이전에는 종친으로서의 군호를 받을 수 없었다.[15] 군호왕실본관 완산(전주)의 '완(完)'에 양어머니 조씨의 본관 임천(林川)의 '임(림, 林)'에서 따왔다.[16] 경복궁왕비의 침전. 의 침전인 강녕전과 함께 1876년 화재로 불타고 12년이 지난 이 때에야 다시 복구했다.[17]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민우 前 국회부의장 역을,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순재의 친구 신대근 역을 맡았다.[18] 허장강의 장남이자 허준호의 이복 형.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인촌 김성수 역을, 징비록에서 정언지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