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친왕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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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운현궁의 역대 주인'''
1대 흥선대원군 이하응

'''2대 흥친왕 이희'''

3대 영선군 이준용




<colcolor=#ffd800>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 운현궁 1대 사손
흥친왕 이희
興親王 李熹'''
'''작호'''
완흥군(完興君) → 흥친왕(興親王)
'''이름'''
이재록(李載錄) → 이재면(李載冕) → 이희(李熹)
'''자'''
무경(武卿)
'''호'''
우석(又石)
'''출생'''
1845년 8월 22일 (음력 7월 20일)
'''사망'''
1912년 9월 9일 (향년 67세)
1. 개요
2. 이름
3. 생애
4. 평가
5. 가족과 후손
6. 창작물에서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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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족, 대한제국의 황족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 '''흥선대원군의 적장자로 고종황제의 친형'''이다.
다만, 고종은 익종(효명세자)양자로 가서 영조의 5대손이 되었고, 흥친왕은 족보상으로 영조의 동생인 연령군의 5대손[1]이므로, '''친형제이지만 법적으로는 12촌'''이다.

2. 이름


이름이 총 3개이다. 초명은 이재록(李載錄)이고[2] 13살 때인 1858년 8월에 이재면(李載冕)으로 고쳤다. 1910년 8월 친왕으로 봉해진 후 다시 바꾼 이름은 이희(李熹)이지만 보통 가장 오랜 기간 썼던 이름인 이재면으로 알려져있다.

3. 생애


1845년에 서울 안국동 운현궁에서 흥선군(훗날의 흥선대원군)과 현부인 여흥 민씨(훗날의 여흥부대부인)의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흥선군은 안동 김씨 김병기의 의심을 피해 바보인척 하면서 고의로 장남인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했다고. 어린 시절 잠깐 둘째 큰아버지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출계했다가 동생 고종이 즉위한 뒤 다시 본가로 돌아갔다.[3] 흥선대원군은 나이가 찬 이재면 대신[4] 아직 어려 당분간 섭정할 수 있는 차남 이명복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집권 때 문과에 급제하고, 규장각과 예문관 등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승정원 도승지로 승진한다. 1874년 아버지 대원군이 축출당한 뒤에도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하는 성격 덕택에(...) 관직을 유지했다. 사실 대원군의 축출 과정에서 아버지가 축출당하는 것을 방조했는데 적장남임에도 아버지가 자신이 아닌 동생을 왕으로 추대한 것에 불만이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흥선대원군이 믿고 의지한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소설가 장덕조에 의하면 그가 '오랫동안 불우한 환경에서 염량세태의 무정함과, 인간의 배신을 뼈저리게 느껴온 흥선대원군은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좁은 범위 안의 복심인물(復心人物)과 골육을 등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1882년 청나라로 끌려간 흥선대원군은 그에게 살려달라는 편지를 여러 통 띄워 보낸다. 아버지의 편지를 본 이재면은 바로 청나라 텐진으로 달려가 아버지를 모셨다. 흥선대원군이 귀국한 후 정변을 기도할 때마다 이런저런 관직에 임명됐지만 실패로 끝나면서 축출당했다.
1898년 흥선대원군이 죽을 때 어가가 궁궐을 출발했느냐는 질문을 연발했지만,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전했다가는 동생 손에 죽을 것이 두려워서 끝까지 입다물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약하고 무능한 아버지라서 그랬는지 그의 장남 이준용은 아버지 이재면이 죽을 때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아서 무루공자[5]라고 조롱받았다고 한다.
고종은 대원군과 함께 여러차례 쿠데타 모의를 했던 조카 이준용을 상당히 미워했고, 이는 그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이재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재면은 동생 고종에게 별다른 해코지를 가하지 않았는데도 동생한테 찬밥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쿠데타에 연루된것 만으로도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단순 연루된 정도가 아니라 쿠데타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까지 된 이재면은 목숨을 부지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왕족으로서 대우받았으므로 고종은 형을 최대한 비호했다고 볼 수 있다.
1899년 족보 상 고조부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어 완흥군(完興君) 군호를 받고[6][8] 1910년에 육군 부장에 임명되면서 흥친왕(興親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얼마 못가 한일합방으로 왕공족이 되어 친왕에서 공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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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에서 친척들과 함께.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영선군 이준용,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전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한일병합 당시 특별하게 행동한 것은 없지만, 어째서인지 일본은 그에게 다른 인사들의 몇 배나 되는 거액의 은사금을 줬고 그는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별 말 없이 이걸 그대로 받았다(...). 결국 이 때문에 심한 비난을 받고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덕분에 아들 이준용과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의 엄밀성을 고려하면 거의 확정범.

5. 가족과 후손


정실 부인 2명과 첩실 1명 사이에서 총 2남 3녀를 두었다. 첫째 부인 풍산 홍씨는 그보다 1살 위였으며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1887년에 사별한 후 1902년에 여주 이씨와 재혼하였다. 그런데 나이 차이가 무려 38살이나 차이난다. 20세에 58세의 흥친왕과 결혼한 것.(,,,) 이씨 부인은 흥친왕 사후 66년을 더 살고 1978년 1월 8일에 93세로 사망했다.링크 소실은 주씨로 슬하에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위에서도 언급한 영선군 이준용이고 차남은 이문용이다. 이문용은 20세에 자식없이 요절하였고, 이준용은 47세까지 살았으나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흥친왕의 실제 남계 자손은 단절되었다. 단, 둘 다 양자를 들여 법적인 후손은 있다. 이준용의 양자는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차남 이우이고, 이문용의 양자는 완순군의 손자 이해명이다.
장녀는 군수 김인규와 혼인하여 슬하에 2남을 두었고, 차녀는 비서승을 지낸 김두한[9]과 혼인하였다. 측실에게서 본 3녀는 주사를 지냈던 김규정과 혼인하였다.#

6.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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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둘째 큰아버지 흥완군양자로 갔다가 동생 고종(유영휘 분[10])이 즉위한 후 성인이 된 모습으로 본가에 돌아왔다. 전반적으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임동진 분)의 말을 잘듣는 순한 성격으로 묘사되었으며 고종(김홍석 분[11])과의 갈등도 묘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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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유동근 분)의 장남. 아버지로부터 '소 같은 바보'라고 멸시당해서 한때 외삼촌인 민승호(김효원 분)의 편에 가담한다.[12] 대체로 강직하고 아버지와 동생에 대한 애정 이 지극하지만[13], 우유부단하고 심약해 아버지에게 거의 항상 한소리 듣는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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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천봉삼(장혁 분)을 찾아와 명성황후(최지나 분)의 얼굴 그림을 보여주면서 중전을 꼭 찾아내라 하며 보부청에 힘을 실어주겠다 한다. 여담으로 극 중에서 '완흥군'으로 언급되는데 이재면은 대한제국 수립 후 완흥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오류이다.
  • 김병재의 대체 역사 소설 《프린스 코리아》에서는 죽은 후에야 미래의 상황을 알게 된 이재면 본인이 어쩌다가 어린 시절로 회귀한 후, 조선을 떠나 유럽에서 맹활약을 한다.
  • 대체역사소설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대만이 독립한 뒤 흥친왕을 자국의 국왕으로 추대한다. 여기에선 상당한 개념인으로 나온다. 자신이 훌륭한 왕재가 아님은 인정하면서도 대만인들을 진심으로 자신의 백성들로 생각하고 유자(儒者)로서 선정을 베풀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7. 여담


  • 고종의 친형이었으니 외모나 생김새도 상당히 많이 닮았다. 단 흥친왕이 더 얼굴에 양미간 팔자 주름이 깊고, 어깨가 넓고 통통한 편이 그나마 두 형제를 구별할 수 있는 차이점.

[1] 연령군 - 낙천군(양자, 생부는 경창군의 5대손 이채) - 은신군(양자, 생부는 장조(사도세자)) - 남연군(양자, 생부는 인평대군의 5대손 이병원) - 흥선대원군(4남) - 흥친왕(장남).[2]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이희공실록(李熹公實錄)》 에 따르면 태어나자마자 지은 이름은 이재록이라고 한다.[3] 원래 흥완군은 자신의 친아들 이재원이 있었는데 자식없이 죽은 큰형 흥녕군 이창응양자로 보낸 뒤 자식을 새로 얻지 못하고 일찍 죽어 정작 자신의 후사가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재면을 입양했는데 그마저 돌아가 다시 양자를 들여야했고 결국 21촌(...)이나 되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10대손 완순군 이재완이 입적되어 대를 이었다.[4] 철종이 승하할 당시 이재면의 나이는 19세, 즉 당시 기준으로는 이미 성인이었다. 따라서 이재면을 왕위에 올리면 사실상 흥선대원군은 섭정을 할 수가 없다.[5] 無漏公子. 눈물없는 사나이.[6] 군호는 왕실의 본관 완산(전주)의 '완(完)'에 어머니 민씨의 본관 여흥의 '흥(興)'에서 따왔다.[7] 작위 수여 당시 고인.[8] 은언군계 : 증(贈)[7] 덕안군 이재덕, 경안군 이재성, 청안군 이재순.
은신군계 : 증(贈) 완림군 이재원, 완순군 이재완, 증(贈) 완영군 이재긍, 완흥군 이재면.
은전군계 : 증(贈) 인양군 이재근, 의양군 이재각, 예양정 이재규.
[9] 이 인물과는 동명이인.[10] 아역.[11] 성인.[12] KBS의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 인물 소개글[13] 외숙 민승호나 훗날 자신 대신 이재선(이우석 분)을 추대한 안기영(이원용 분)에게 '동생(고종, 이진우 분)에게 보위를 뺐겼다' 운운하는 말을 들을 때 화를 내고 일본과 결탁해 임금이 되려던 아들 이준용(안승민 분)을 불효자라며 혼내는 것으로 보아, 동생이 임금임과 자신 및 아들이 왕재가 아님을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