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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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및 대한제국의 황족 겸 관료. 은전군의 양손자이자 풍계군의 양자로[3] 은전군가의 2대 종주이다.
2. 생애
1836년(헌종 2년) 경기도 안산에서 조선 선조의 9남 경창군의 8대손인 참판 이도식(李道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 원래 이름은 이신덕(李愼德).[A]
원래 조선 왕실 직계와는 선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200여 년 ~ 300여 년이 지난 당시에 그의 일가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25살인 1860년(철종 11년) 11월에 은전군의 양자 풍계군의 양아들 경평군 이호가 안동 김씨 세도가들을 비판했다가 그들의 눈 밖에 나 파양당하자 대신 풍계군의 양자로 입적해 종친이 되었다. 처음에는 완평도정(完平都正) 작호를 받았다가 2달 뒤 완평군(完平君)으로 봉해졌고 이름도 이병(李昺)으로 고쳤다.
왕실 족보를 감수하는 일과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 그리고 사옹원 제조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 철종 사망 후에는 종척집사(宗戚執事) 및 능을 지키는 수릉관이 되었으며 이후 치른 여러 국상 때도 같은 직을 맡아 활동했다.
고종 즉위 초 연간에 음직으로 참판을 지냈으며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이 종친 항렬자 통일령을 내리자 이승응(李昇應)으로 다시 개명했다.
그 후에도 진하사 및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종묘제례 때 인의인헌관(引儀引獻官)과 영릉 제조 및 판돈녕원사, 책비시정사(冊妃時正使)를 지냈으며 잔치가 있을 때마다 대표로써 술잔을 올리는 등 왕실 행사마다 종친의 큰 어른으로 왕성히 활동했다.[5]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도 명성황후와 완화군의 황후 · 친왕 추봉 등에도 큰 역할을 했다.
1899년(광무 3년)에는 장산회사 사장으로 추대받았다. 장산회사는 황해도 장연군 장산곶 뒤의 산맥을 판 뒤 바닷물을 통하게 해서 선박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게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회사였다.[6]
교육 활동도 활발히 했다. 1908년(융희 2년) 1월에는 교육, 산업발달을 주 목적으로 세워진 애국계몽단체 ‘기호흥학회’에 특별찬성회원(特別贊成會員)으로 참가했다. 그해 5월에는 집에 사숙(私塾)을 세웠고[7] , 9월에는 영선군 이준용이 세운 돈명학교에 만원을 기부했다.[8]
3. 사망과 이후
1909년(융희 3년) 초부터 지병을 앓다가 그해 10월 3일 밤에 한성부 자택에서 별세했다. 당시 태상황이었던 고종이 직접 제문을 지어 애도했다. 시호 효헌(孝憲)이란 시호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의정대신 영종정경부사 직위를 추증받았다. 〈황성신문〉에 따르면, 발인은 같은달 11일 오후 6시에 했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산 67번지에 있다. 한동안 잊힌 채 위치를 몰랐는데 2013년 경 안산향토사연구소에서 발견했다. 후손들이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는지 봉분 위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을 정도라고.(...) #
4. 여담
- 그가 죽었을 당시 《승정원일기》에 그를 '저하(邸下)'로 부른 것이 적혀있다. # 고종황제의 직계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방계 황족들의 경칭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본래 '저하'의 용법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5. 매체에서
6. 후손
19세 되던 해 진주 류씨 류원기의 딸과 혼인했다. 류씨 부인 사이에서 아들 3명을, 측실에게서 아들 1명을 두었다. 장남이 인양군 이재근(1857년 ~ 1896년)이고 차남은 이재현(1870년 ~ ?)인데 완평군의 생가 동생 이낙응의 양자로 출계해 종친 자격을 잃어[9] 군호를 받지 못했다.[10] 그 다음 셋째 아들이 의양군 이재각(1874년 ~ 1935년), 그리고 막내 아들이 예양정 이재규(1877년 ~ ?) 이다. 인양군과 의양군, 예양정에 관해선 각 항목 참조.
[1] 이인응 항목 본문 참조.[2] 원래 완평군의 장남인 인양군 이재근이 차기 은전궁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 완평군보다 일찍 죽어 그의 아들 이헌용이 물려받았다.[A] A B 위키백과에서는 '자(字)'로 소개한다.#[3] 단, 풍계군 역시 은전군의 양자다. 생부는 은전군의 형 은언군.[4] 경창군 이주 - 창림군 이일 - 영평군 이완 - 하계군 이거 - 이정렬 - 이정 - 이유일 - 이병초 - 이도식 - '''완평군 이승응'''.[5]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완평군 이승'''응'''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같은 항렬이다. 즉 임금(고종)에겐 아저씨 뻘인 서열 높은 종친이었다.[6] 출처: 1899년(광무 3년) 09월 14일 자 〈독립신문〉, 1899년 12월 16일 자 〈황성신문〉.[7] 출처: 1908년(융희 2년) 5월 8일 자 〈대한매일신보〉.[8] 출처: 1908년(융희 2년) 9월 4일 자 〈황성신문〉.[9] 완평군의 생가는 언급했듯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다.[10] 다만, 1899년(광무 3년) 9월 22일 자 〈독립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재현도 봉군받을 수 있었지만 완평군이 사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