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미셸 바스키아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출생'''
1960년 12월 22일, 뉴욕 브루클린
'''사망'''
1988년 8월 12일
'''국적'''
미국 [image]
'''직업'''
현대미술가, 그래피티 아티스트
'''가족'''
부모님 제라르 바스키아(Gerard Basquiat), 마틸드 안드라데스(Matilde Andrades)
'''링크'''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2. 생애
3. 작품
3.1. 대표 작품
3.2. 미국 아티스트 중 최고가 낙찰
4. 기타


1. 개요


미국그래피티 아티스트. 통칭 '''검은 피카소'''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낙서, 인종주의, 해부학, 흑인영웅, 만화, 자전적 이야기,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어 충격적인 작품을 남겼다. 팝아트 계열의 천재적인 자유구상화가로서 지하철 등의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키스 해링과 같이 거리예술의 틀을 구축한 1세대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현 세대 그래피티라이터들 사이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설적인 아티스트이다.

2. 생애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 출신의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Gerard Basquiat)와 푸에르토리코 혈통의 어머니 마틸드 안드라데스(Matilde Andrades)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장 미셸 바스키아는 유색 인종으로서 차별을 경험했고, 자연스럽게 슬럼가에서 살았다. 바스키아가 7세 되던 무렵 부모가 이혼하자 수차례 가출을 시도하고 다니던 학교마저 뛰쳐나왔다.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바스키아는 1980년대 당시 브레이크 댄스, 펑크족의 출현, 레게, 힙합 등의 흑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래피티를 그렸다. 바스키아는 슬럼가에 사는 10대들이 그린 낙서에 담긴 특유의 반항 의식을 예술로 만들었다.
'''세이모 시절의 바스키아'''
'''세이모가 해체했을 당시 남긴 그래피티 '세이모는 죽었다(SAMO IS DEAD)''''
이후 바스키아는 영재들을 위한 시티애즈스쿨(City-as-School)에서 낙서 화가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나 낙서그룹 SAMO(Same Old Shit의 약자)를 조직하고 스프레이 낙서를 시작하였다. 그 후 뉴욕현대미술관 앞에서 엽서티셔츠 위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의 미술대학(시각예술학교)을 다니던 이들과 유흥가에서 어울렸고, 특히 이 시기 바스키아는 키스 해링과 만났다고 한다. 이후 1980년 바스키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된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워홀은 바스키아를 자신의 스튜디오인 '팩토리'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워홀은 자신의 재력과 타고난 마케팅 실력을 바탕으로 '화가 바스키아'의 몸값을 끌어올렸고 바스키아는 그런 워홀 덕분에 '유명한 화가'라는 목표에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나 성공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지 않았는데 전에 없던 독창적인 작품 세계로 뉴욕 미술계를 휩쓸었던 바스키아는 어느덧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 되어있었고 그 유명세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이용당했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동성연애 중이다.'같은 여러 소문들과 갈등이 바스키아를 괴롭혔고 결국 바스키아는 워홀과의 공동 전시 실패를 계기로 교류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1987년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는데 바로 워홀의 사망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바스키아에게 큰 상실감과 심각한 마약 중독을 초래했는데 결국 바스키아는 헤로인 중독으로 27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3. 작품


'''Untitled (Fallen Angel), 1981'''
바스키아는 마치 원시인이나 어린 아이같은 그림을 그린다. 후대의 평론가들은 바스키아의 그림을 인종 문제를 비롯해 당시 뉴욕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비극유머가 공존하는 풍자적인 화풍이 그의 아이덴티티다.

3.1. 대표 작품


'''Crown, 1982'''
우리가 흔히 아는 이 뾰족뾰족한 왕관이 바스키아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특정 아티스트 그리고 흑인들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 이 왕관은 훗날 왕관만을 그려 넣는 것 외에 점차 본인의 서명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소유권과 권위를 나타내는 ‘도장’과 다름 없는 부분이 되었다.

3.2. 미국 아티스트 중 최고가 낙찰


죽어도 바스키아를 놓아주지 않는 명성

작품 무제가 소더비 경매에서 일본의 패션 이커머스 조조타운의 창업자 마에자와 유사쿠에 의해 앤디 워홀의 기존 기록을 뛰어넘는 최고 가격인 '''110,500,000 달러'''로 낙찰되었다.

4. 기타


  • 여담으로 앤디 워홀을 우연히 본 바스키아가 자신의 그림을 10달러에 강매하려고 했었던 일화가 있는데 앤디 워홀은 너무 대충 그린 그림이라며 거절을 했었고 그때 당시 바스키아가 "당신 그림도 그렇잖아요?"라고 응수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