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부마)

 


鄭悰, ? ~ 1461년
1. 개요
2. 잔인한 죽음
3. 후손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문서


1. 개요



문종의 적녀인 경혜공주의 남편.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에 경혜공주[1]와 혼인하였으며, 후에 문종 즉위 후, 왕의 부마로서 영양위로 봉해졌다. 문종은 그와 경혜공주의 거처를 짓기 위해 당시 대표적인 부촌인 양덕방(陽德坊) 향교동에 약 30여채의 많은 집을 철거해 커다란 저택을 지어 내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문종이 얼마 못가 승하하고 즉위한 단종 역시, 하나뿐인 친누나[2]의 남편이니 단종의 신뢰도 두터웠을 것으로 보이며,[3] 단종이 계유정난 당시 있었던 곳도 경혜공주의 집, 즉 매형 정종의 집이었다.

2. 잔인한 죽음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이곳 저곳으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승려인 '성탄' 등과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로 거열형을 당했다. 이때 국문을 당하면서도 "어서 죽여달라"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영조 때 신원되어 순충적덕보조공신(順忠積德補祚功臣) 의정부 영의정(領議政) 영양부원군(寧陽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반역죄로 거열형에 처해져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서인지 묘는 실전되었고,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경혜공주 묘역에 가묘를 썼다.

3. 후손


경혜공주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얻었다. 아들 정미수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탄핵에도 불구하고[4] 정희왕후성종의 보호 하에 꾸준히 관직을 역임해 후에 중종반정의 반정공신의 반열에 올라 해평부원군에 봉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자손이 없어, 문종의 핏줄은 여기서 끊어진다. 다만 7촌 조카인 정승휴를 양자로 입양해 가문은 이어갔다. 그리고 정승휴의 외동딸은 희빈 홍씨의 장남 금원군과 혼인했다.

4. 대중매체에서


단종세조 관련 사극들에서 조연들로 등장한다.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 홍선용이 연기했다.
같은 방송사의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전현이 연기했다. 훗날 전현은 정종의 장인 문종의 동생 금성대군과 문종의 조상 이린도 연기한다.

4.1. 공주의 남자


공주의 남자에서는 주연급으로 등장한다. 영양위 정종이 최초로 부각된 사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이민우가 열연했는데 경혜공주 역의 홍수현과 더불어 작중 젊은 연기자들 중에선 연기력이 가장 뛰어난 편에 속하다 보니, 감정이입이 메인 커플보다 더 잘 된다는 얘기가 많았다. 게다가 이민우는 1983년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뿌리깊은 나무에서 단종을 연기한 적이 있어서 평행세계의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는 배우개그도 성립한다.
일찍부터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실제 역사적 사실[5]과 달리, 드라마에서는 사채까지 끌어다 써야 할 정도로 몰락한 명문가의 자제로 허랑방탕하게 사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러다 장터에서 몰래 궁 밖으로 나온 경혜공주와 우연히 마주치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다.
얼마 뒤 정종이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한미한 가문 출신인 것을 노린 수양대군의 배후조정 덕분에 경혜공주부마가 된다. 앞서 기술하였듯이 실제 역사에선 문종이 즉위도 하기 전인 세종대왕 시절에 이미 혼인하였다.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를 잃고 홀로 남은 아버지 (세자 시절의) 문종이 애처로워서인지 경혜공주는 당시로서는 대개 12세 즈음에 혼인하는 왕녀들과 달리 16세에 이르기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인 세종대왕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급히 혼인한다. 이는 만약 세종이 승하하면, 국상을 3년상으로 치르는 동안 혼인할 수 없기 때문에, 3년 탈상을 하고 나면 경혜공주의 나이가 20살에 가까워 너무 과년하게 되기 때문.
부마가 된 뒤로는 몰락 양반으로 살던 때의 철없고 재미난 모습을 점점 버리고 점점 진지한 모습으로 변하며, 경혜공주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과 처남인 단종에 대한 충성심을 보인다. 경혜공주는 처음에는 정종을 남편 대접은커녕 듣보잡 취급하지만[6] 힘없는 처지에서도 자신과 남동생 단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종의 모습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경혜공주의 사랑을 받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육신의 거사에 가담했다 사육신과 거열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인다. 물론 실제 역사상으로는 이미 경혜공주와 통진에 유배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드라마에서처럼 사육신의 거사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육신과 함께 심문받는 장면도 역사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
그러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세조에게 무릎을 꿇은 경혜공주 덕분에 경혜공주와 전라도 광주로 유배가게 된다. 그곳에서 잠시나마 신혼 생활을 누리고 경혜공주가 아이[7]까지 가지게 되지만, 금성대군의 역모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거열형에 처해진다. 참고로 실제 역사로는 금성대군의 역모에 연루되지 않았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죽은 뒤 4년이나 지난 1461년 승려인 성탄 등과 함께 역모를 꾸미다 처형당한다.
거열형에 처해지기 전 세조에게 일갈하는 모습과 처형장에 온 경혜공주와 마지막으로 눈맞춤을 하는 애절한 모습, 거열형에 처해질 때의 처절한 모습까지 소화한 이민우의 열연으로, 평소에 공주의 남자를 보지 않는 시청자들에게까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종이야말로 진정한 공주의 남자라는 평을 받을 정도.
여담으로 이민우는 이전에 사극 무인시대에서 정균을 연기했는데, 하필이면 정균도 해주정씨[8]이고, 작중 정균은 공주의 남자(부마)가 되려다 결국 경대승 일파에게 끔살당했기 때문에, 드라마 리뷰 등에서 이에 대해 배우 드립을 치기도 했다. 물론 작중 희대의 광기 캐릭터인 정균과, 한량이었다가 나중에 충성스런 신하이자 헌신적인 남편으로 각성하는 정종은 서로 특성이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5. 관련 문서


[1] 혼인 당시는 문종 즉위 전이므로 '''평창군주(平昌郡主)'''라 불리었다.[2] 문종의 후궁사칙 양씨(司則 楊氏)의 딸인 경숙옹주가 더 있지만 경혜공주는 어머니도 같은 동복누이였다.[3] 실제로 정종은 부마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종 재위 초기 형조판서까지 역임하기까지 했다. 보통 부마가 명예직이어서 관직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종의 총애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4] 성종실록에서 정미수와 관련된 기사는 대개 정미수를 탄핵하는 내용이다.[5] 정종의 가문은 정종 본인이 부마가 되기 전부터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세종의 둘째 형 효령대군의 부인이 정종의 고모이며, 정종의 누나 또한 경혜공주의 숙부이자 수양대군의 막내동생인 영응대군의 둘째 부인이었다. 다만 영응대군의 경우 정종의 누나와 혼례를 맺기 전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고모인 송씨와 이미 부부였으나 송씨가 병이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 세종에 의해 강제이혼당하고 정종의 누나와 재혼한 것이다. 이 당시 정종의 아버지 정충경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관례상 정종의 누이를 왕실의 인원과 혼인시키는 것은 어긋나는 일이지만 세종은 이를 다 씹고 자신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정종의 누이와 재혼시켰다. 하지만 영응대군 본인은 전처 송씨를 잊지 못해 계속 만남을 가지면서 그 사이에서 딸까지 낳아버리는 대형사고까지 치게 된다. 나중에 수양대군이 이 둘을 적극적으로 재결합시켜주었고, 자신의 형에게 고마움을 느꼈던 영응대군은 이후 수양대군을 적극 지지해주기까지 한다. 여담으로 영응대군은 드라마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세종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가장 큰 총애와 귀여움을 받고 자랐으며, 심지어 세종은 승하할 때도 자신의 막내아들의 사저에서 승하할 정도였고 세종 살아생전에도 유일하게 자신의 아버지를 아바마마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런 총애와 귀여움을 독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응대군 자신은 나중에 아버지가 맺어준 부부관계를 마음대로 깨버리고 수양대군에게 붙어먹기까지 했으니....[6] 자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와 혼인하는 것이 좌절되어 낙심한 데다, 처음 만났을 때 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던 찌질한 모습 때문에 정종을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7] 드라마에서는 이 아이가 정미수로, 정종이 처형된 뒤 태어난 유복자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정종이 죽을 때 정미수는 이미 3살이었고, 당시 경혜공주의 뱃속의 아이는 둘째인 딸이었다. 드라마의 전개 속도와 극적인 임팩트 때문에 딸은 생략되고 정미수가 유복자로 묘사된 것.[8] 물론 정중부 가문은 멸문 당했기 때문에 정균과 정종은 본관만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