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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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
2. 아역배우 시절
유아기 시절인 1980년부터 CF모델로 활동하다 8살 때 정식으로 드라마 데뷔를 하게 되는데 데뷔작이 MBC의 《조선왕조 500년》(1983년)이다. 배우 경력이 벌써 '''41년이 넘는''' 원로배우. 홍경인(1988년 데뷔), 김정현(1994년 데뷔) 등 경력이 나름 길다는 동년배 배우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유명한 왕 전문 배우(...) '''최수종'''(1962년생, 1987년 데뷔)[3] 등 1960년대 초반 출생인 연기자들마저 이민우에게는 경력 때문에 어려워한다는 것이 《라디오 스타》에서 드러났다. # 이 정도 경력은 5살 때 데뷔했다는 안성기나 6살 때 데뷔했다는 하춘화 정도에서나 볼 수 있는 경력이다.(대신 안성기는 10대에는 활동을 했지만, 20대 시절에 배우활동을 쉬었다가 30살이 다 되어 컴백했기에 생각보다는 저런 일이 많지 않았다고 말한 적 있다. 하춘화의 경우는 10대 시절까지 동료가수가 자기보다 후배여도 나이가 훨씬 많으면 그냥 일단 아저씨라고 불렀고, 반말을 자신에게 하도록 허용했다. 남진, 나훈아 등도 그녀보다 데뷔가 늦지만 아저씨라 불렀다.)
데뷔하자마자 뛰어난 연기력으로 청소년 배역을 독차지했다. 당시 KBS 연기대상 남자아역상은 장장 7~8년 동안 이민우와 다른 배우들의 경합이라고 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아역상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나이인 만 18세가 되던 해 에도 아역상을 받았다!
다만 연기 스타일은 동년배인 홍경인이나 정명현과는 달랐는데 홍경인이나 정명현이 전형적인 개구쟁이 스타일의 연기를 담당했다면 이민우는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의 연기를 담당했다. 물론 성인이 된 후에는 논스톱 같은 시트콤에서 장난기 많은 개구쟁이나 바람둥이 연기도 그런대로 하긴 했지만 기존의 신사적인 연기만한 퀄리티가 나오지는 않았다.
3. 사극에서
위에 언급했듯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로 데뷔한 그는 《2화 뿌리깊은 나무》에서 유년기 단종 역[4] 을 맡았고, 《3화 설중매》에서는 연산군의 세자였던 폐세자 이황을, 그리고 《11화 대원군》에서는 왕세자 시절의 순종을 연기했다.
그리고 《한명회》에서 연산군을 맡았다. 주인공 한명회가 죽은 이후를 다루는 후반 4회분에서 극을 사실상 주도하는 역할이며, 연산군 연기로 호평받으면서 이를 기점으로 아역에서 성인 연기자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이 '''19세'''에 이런 연기를 한다(...)[5] 특히 폐비 윤씨(장서희)가 사사된 사실을 알고 오열하며 눈물콧물 흘리고 할머니인 인수대비에게 가서 한맺힌 절규를 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
이어서 《용의 눈물》에서 양녕대군 등을 맡으며 사극계 젊은 배우의 본좌가 되었다. 용의 눈물에서는 충녕대군(세종) 역할의 안재모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도하는 양녕대군 역할을 맡았는데 포스가 유동근이나 김무생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 유동근(태종)과 맞서는 패기 실제 역사의 냉혹하며 세자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려 했던 개망나니 양녕대군은 아직까지도 이민우의 본좌 연기 덕분에 쉴드를 받고 있다(…). # 세자를 물러나는 편지 씬 이 당시 이민우에게 최초로 제의가 갔던 역할은 충녕대군이었고 양녕대군 역은 안정훈이었다고 한다. 충녕대군 역을 준비하기 위해 40여 권의 책을 읽었는데 촬영 2주 전에 양녕대군 역으로 바뀐거라고.# 폐위 후 닭고기 씬
김희선과 함께 한 KBS 드라마 《춘향전》에서는 이몽룡 역할을 맡기도 했다. 농담으로 이 때 이민우가 맡았던 암행어사 역할이 이민우의 사극 배역 중 가장 신분이 낮은 역할이었다고들 한다(…). 그 다음으로 신분이 낮은 역할은 《무인시대》의 정균, 즉 정중부의 아들로, 모략을 꾸미는데 능한 전형적인 기분 나쁜 악역을 보여줬다. 사실상 정중부 정권의 양대산맥.
한 마디로 사극으로는 만렙을 찍은 정태우, 안재모보다 먼저 만렙을 찍어놓은 30대 배우이며 2011년 8월에 방송한 《공주의 남자》 에서 그 포스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2014년 6월 25일 KBS 2TV에서 방영되는 퓨전사극 《조선총잡이》에서 고종역을 맡아 오랜만에 사극으로 컴백한다. 한 가지 배우개그를 말하자면, 이민우는 동시대를 다룬 KBS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박영효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듯, 그보다 훨씬 전에 방영했던 MBC 《조선왕조 500년 - 11화 대원군》 편에서는 세자 시절 '''순종'''으로 나왔었다! 이번에는 그 아버지를 연기하게 된 셈.
3.1. 세자 세손 전문 배우??
참고로 한명회의 연산군은 맡았던 배역 중에 유일하게 '''즉위했던''' 왕이라고 한다. 그 외에는 전부 세자나 세손 등 즉위 전의 아동 시절을 맡았다. 즉, 모두 아역 시절을 연기했다.
- 단종 - 세종대왕의 세손 시절에 맡았다. (83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뿌리 깊은 나무 편)
- 폐세자 이황(연산군의 맏아들) - 설중매에서 연산군의 맏아들인 폐세자 이황 역을 맡았다. 극 중에서 연산군의 큰어머니인 승평부부인 순천 박씨(엄유신 역) 집에서 양육된다. (84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설중매 편)
- 정조 - 역시 사도세자가 죽는 때의 세손 역을 맡았다. (89년, 한중록을 다룬 KBS2 하늘아 하늘아)
- 순종 - 역시 명성황후가 죽을 때의 세자 역을 맡았다. (90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 편)
- 양녕대군- 용의눈물에서 이방원의 맏아들인 세자 양녕대군 역을 맡았다. (96년, KBS 용의눈물)
사극 경력이 세손→세자→왕→세자→권력가 아들→종친으로, 폐위(?)가 된 다음엔 복위를 못하다가 2014년 조선 총잡이의 고종으로 복위 성공. 즉위에 성공한 왕 연기가 둘로 늘었다. 그러나 고종도 일본에 의한 강제 양위가 기다리고 있다(...)
4. 현대극에서
사극으로 이름이 많이 알려진 이민우이지만 현대극에서의 연기도 매우 뛰어나다.
조선왕조 500년 이후 단막극을 거쳐서 일일 연속극 은빛 여울에 출연하였지만,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것은 1986년 어린이 드라마 꾸러기의 주연으로 발탁되면서 부터이다. 당대를 풍미했던 어린이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의 후속작이었던 꾸러기는 그 주제가와 함께 대히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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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이던 1991년에 우리들의 천국에 출연을 했는데, 그는 고등학교 2학년생인 선수 역을 맡았으며, 쌍둥이 동생 미수 역을 맡은 최상진과 더불어 밝은 이미지로 당시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당시 인터뷰 기사). 밝은 이미지로 인한 인기를 반영해서인지 최상진과 같이 광고에도 출연했다.
이후에도 청소년 드라마인 공룡선생, 사랑이 꽃피는 교실, 스타트 등에 출연하였다. 아역 부문 연기자 상을 휩쓴 것이 순수하게 사극빨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드라마 카이스트(1999년)에서 공대생 이민재 역은 그야말로 '''공대생 1'''이라고 할 정도의 포스를 보여 주었다. 소심한 듯 꼼꼼하고 수더분한 인상에 "저는 성실합니다"라고 외치는 듯한 연기 하며... 한 마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냥 공대생 그 자체. 평생지기라고 할 만한 동료 배우 김정현과의 인연도 여기에서 쌓게 된다.[7]
1999년 윤석호 PD가 연출한 '초대'에서 이영애, 추상미, 김민, 김상경, 이창훈과 함께 나와 좋은 결과를 얻었다. 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주목받으며 성인 연기자로 순조롭게 안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관련기사
그러나 큰 기대를 모았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 실패하고 진지한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출연한 시트콤 뉴 논스톱에서도 대두 캐릭터(...)만 얻고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중도하차하면서 주춤하기 시작한다.
2000년대 접어들며 트렌드가 된 기럭지와 비율에 방점을 두는 그런 세련된 외모가 아니어선지 2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현대극에서 카이스트의 이민재 역 같은 주연 오퍼는 들어오지 않게 된다.[8] . 2000년 봄에 방송된 KBS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는 주진모와 주인공급으로 출연했다.
대신 아쉬운 대로 메리대구 공방전, 열아홉 순정, 살맛납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등에서 30대 초반 직장인 역할, 다소 찌질하고 철없는 남편 역할, 강력반에서 형사들을 괴롭히는 지독한 범죄자 악역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면서 조용히 연기 커리어를 쌓았다. 이런 연기도 잘 소화한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연기에서는 도가 텄다고 할 지경.[9]
본인은 사극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어하지만[10] 2011년 또 사극 공주의 남자에 출연하게 되면서 이제 사극이 아닌 현대극에서의 이민우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그의 예전 사극연기를 보지 못했던 10대~20대 초반에게는 사극에서의 이민우가 깊이 각인되었고, 30대 이상에게는 이민우의 기존 사극 이미지가 더욱 단단히 굳어지게 되었기 때문. 거열형씬도 허리가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찍었다고 한다.
5. 영화에서
이민우는 일찍이 영화판에도 진출했었는데 의외로 아는 이가 드물다. 출연작이 죄다 '''쫄딱 망했기 때문'''이다(...). 1994년 《삘구》[11] , 1998년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1999년 《질주》에 모두 주연으로 나왔으나 영화 퀄리티나 흥행면이나 모두 안습 수준. TV 드라마에 최적화 되어있는 배우들은 스크린에선 제 능력을 발휘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민우도 그런 케이스. 본인도 그걸 잘 아는지 이후로 영화 출연은 하지 않고 드라마에만 충실하고 있다.
그러다가 2013년작인 홍상수 감독 영화 《우리 선희》에 오랜만에 나왔는데 전국 40개 극장에서 개봉한 저예산 영화임을 생각하면 전국 관객 68,770명으로 꽤 성공했다.
6. 여담
- 편모 가정에서 자랐다. 태어나기 직전에 아버지가 사망했다고 한다.
- 아주 어릴 때부터 연기를 했기 때문에 연기력은 본좌 그 자체로 그냥 연기를 잘 하는 수준을 넘어, 시청자가 볼 때 이민우가 배역과 혼연일체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또래의 배우 중에서는 연기력이 최상위권에 있다. 자기관리도 굉장히 엄격하여 대본 암기와 연기 구상은 물론, 쉬는 날도 체력관리와 연기 모니터링을 하면서 보낸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해서 대본 암기에는 도가 틀 정도다. 연기를 할 때 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대사까지 다 외우도록 배워왔다고.
- 국방부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에서 연예병사로 군생활을 했다.
- 아역으로 데뷔하여 20대 초반까지 괜찮은 연기 커리어를 쌓았지만, 그 이후 주연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팬들이 적지 않다.
- 운동에 소질이 있는 편이라[12] 평소 운동을 좋아하여, 학창시절 체력검사때도 상위권이었다고 하며, 서전트 점프가 매우 뛰어나다고 한다. 그래서 키에 비해[13] 체격이 더 좋은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머리가 그보다 더 크다고.. 잘 나가던 20대 시절에 정장 의류브랜드 광고모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사진 촬영 전에 이민우 측에서 105사이즈를 요구하여 브랜드 측에서 105사이즈 옷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촬영날 그 의류회사 간부 겸 디자이너가 촬영전에 스튜디오로 이민우를 직접 찾아와서 모델을 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14] 를 했고, 이민우는 아버지뻘 되는 어른의 예의있는 태도에 감격을 받아 평소보다 더 최선을 다해 촬영을 하고 마쳐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인사한 뒤에 갑자기 이민우와 준비된 옷을 번갈아 보더니 "어? 근데 민우씨 옷이 왜 105사이즈로 돼 있어요?"라고 했고 이민우가 "저는 원래 양복 105사이즈를 입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에이~ 아니죠. 이거 전혀 안 맞아요. 저희 회사 옷 작지 않아요. 헐렁하면 모양이 안 나와요. 이렇게 찍으면 안 돼요." 라고 우기더니, 현장의 자기 회사 직원들을 집합시키더니 어떻게 사이즈도 미리 제대로 안 맞췄냐고, 그전과 전혀 다른 무서운 말투로, 상당히 크게 화를 내며 당장 95사이즈를 가져오라고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간부의 갑작스러운 분노에 당황한 이민우[15] 는 어벙벙한 상태로 직원들이 가져온 95사이즈 양복을 입었는데, 역시나 너무 작아서 단추도 제대로 안 잠겨 옷이 상할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이상하다고 느끼다가 뭔가 깨달은 간부는 "어머~ 정말 미안해요. 민우씨. 근데 머리가 도대체 왜 이렇게 커?"라고 하며 원래대로 105사이즈를 입혔다고 한다. 그의 머리가 커서 어깨가 좁아보여, 평균보다 넓은 어깨에도 불구하고 95사이즈로 오해했던 것. 이때부터 머리 큰 게 개인적으로 꽤 큰 인생의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야심만만에서 밝혔던 내용인데, 디자이너 겸 간부가 그 간드러지는 말투로 한 "도대체 머리가 왜 이리 크냐"는 말이 몇년이 지나도 계속 잊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 서울 모 어린이 집에서 아이들에게 골프를 가르쳐주는 봉사 활동을 했다.
7. 출연작
7.1. 영화
7.2. 드라마
7.3. 방송
- 1993년 SBS 《신나는 우리 세상》 ... MC
- 1995년 SBS 《TV 남과 여》 ... MC
- 1995년 KBS2 《슈퍼선데이》 ... MC
- 2012년 JTBC 《사기꾼들》 ... MC
- 2013년 EBS 《토크쇼 부모》 ... MC
- 2013년 MBC 《라디오 스타》 ... 게스트
- 2014년 KBS1 《바다의 제국》 4부작 ... 내레이션
- 2015년 TV조선 《이것은 실화다》 ... MC, 변호사 역
- 2018년 MBC 《MBC스페셜 청춘다큐 다시, 스물 - 뉴 논스톱 편》
7.4. 연극
- 1998년 《로미오와 줄리엣》
7.5. CF
- 1985년 옥시레킷벤키저 옥시크린
- 1985년 동일레나운 아놀드파머
- 1985년 동아제약 미니막스 (Feat.전양자)
- 1985년 롯데칠성 델몬트
- 1985년 ~ 1986년 롯데제과 (롯데 스카치 캔디, 롯데 빠다 코코낫 비스켓, 롯데 홀리데이 아이스크림)
- 1985년 동원F&B 새코미
- 1986년 롯데제과 빼빼로
- 1986년 해태제과 써니텐
- 1986년 조광페인트
- 1986년 후지필름 후지 칼라 필름
- 1986년 삼양식품 삼양 기네스북 * 기네스콘
- 1986년 ~ 1987년 해태상사 썬키스트 레몬
- 1987년 오리온 오리온 코랄버터 캔디
- 1988년 서울문화사 아이큐 점프 (Feat. 전유성)
- 1989년 롯데제과 롯데 카스타드 케이크
- 1990년 오리온 비틀즈
- 1991년 안국약품 토비콤에스 (Feat.최상진)
- 1991년 빙그레 고추맛면 (Feat. 오지명, 서승현)
- 1991년 ~ 1993년 중앙교육진흥연구소 A+ 가정교사
- 1992년 빙그레 해씨호씨
- 1992년 ~ 1993년 롯데제과 씨리얼
- 1994년 롯데제과 캬라멜로
- 1998년 농심 너구리
- 1999년 롯데칠성 델몬트 꼬마 콜드 (Feat.채림)
- 1999년 농심 신라면 큰사발
- 2013년 환경부
7.6. 라디오
- 2012년 EBS FM 스페셜 - DJ
8. 수상
- 1984년 KBS 연기대상 아역상
- 1985년 제21회 백상예술대상 (당시 한국 연극 영화 TV 예술상) 아역상 《TV 문학관 '저승새'》
- 1994년 KBS 연기대상 아역상 《당신이 그리워질 때》, 《춘향전》 《한명회》
- 1995년 제31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신인연기상 《춘향전》
- 1998년 KBS 연기대상 우수연기상 《용의 눈물》
- 1999년 SBS 연기대상 특별상 《카이스트》
- 2011년 KBS 연기대상 베스트 커플상 (with 홍수현) 《공주의 남자》
[1]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2] 95학번으로 입학 당시 수석이었다.[3] 대신 최수종은 부모가 연예계와 인맥이 있어 고등학생 때 모델 활동 등을 하기도 했고, 연예인이 아닌 신분으로도 연예계와 관련된 일을 많이 했다. 정식배우 데뷔가 20대 중반일 뿐.[4] 소년 단종은 신성균이 맡았다. 신성균은 후속작 《설중매》에서도 단종으로 이어서 출연한다.[5] 상술하였듯, 이 연기로 아역상을 받았다. 링크된 영상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기생씬.[6] 당시 우리들의 천국 출연진들. 왼쪽부터 맏형 진수(홍학표 분), 아버지(박인환 분), 어머니(선우용녀 분), 쌍둥이 형제인 미수(최상진 분)와 선수(이민우 분)[7] 2009년 둘이 함께 《절친노트》에 출연하기도 했고, 2013년 라디오스타에도 함께 출연했다.[8] 이민우는 은근히 머리가 큰 편이다. 현대극보다 사극에서 옷빨이 더 잘 받는 이유도 사실은 그 때문(…)[9] 특히나 살맛납니다에서의 그 찌질하면서 사악한 김기욱 역은 장인식(임채무 분)과 더불어 극을 지탱하는 2대 악역으로 꼽혔을 정도..[10] 하지만 사극을 아예 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니며 캐스팅 제의를 받았을 때도 배역에 대한 흥미를 따라간다고 한다.[11] 신인시절의 배용준이 단역으로 나온다.[12] 한때 대한검도회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13] 실제 키도 175이상은 된다고 한다.[14] 말투가 디자이너 특유의 나긋나긋하면서 섬세하고 여성적인 느낌이 강한 말투였다고 한다.[15] 사실 그 간부가 오기 전에 이민우는 이미 한번 그 옷을 입어보고 잘맞는 걸 확인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실 말려야 했는데, 그 나긋나긋하고 여성스러워 보이던 간부가 한순간에 변해서 직원들에게 화를 내는게 무서워서 도저히 그 기세를 말릴 수 없었다고 한다.[16] 상당히 인기 있었던 역할이라고 한다.[17] 한명회에서의 연산군이 아역에서 성인으로의 전환점이었다면 박영효 역할은 본격적인 성인 연기 도전의 시작이었으나, 드라마 시청률이 낮았던 탓인지 크게 기억되진 않은 듯 이 부분도 2013년 3월에야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