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비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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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선수시절 아스날과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성기를 이끈 중원의 사령관이다. 출중한 리더십의 소유자였고, 특히 아스널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 프리미어 리그와 FA컵 등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클럽과 국가대표 가리지 않고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다.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FIFA 월드컵 베스트 XI에 이름을 각 한 차례 이름을 올렸으며 자국 언론 옹즈 몽디알에서 선정하는 유럽 리그 베스트팀 옹즈 드 옹즈에 6차례나 선정되는 등 개인 커리어 역시 아주 훌륭하다.
2. 유년 시절
세네갈의 다카르에서 카보베르데인 부모로부터 태어났으나, 8살 때 부모를 따라 프랑스로 이주해왔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이혼했고 어머니와 살게 된다. 이후 아버지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비에라라는 이름은 카보베르데에서 유래했으며[6] 어머니쪽 성씨이다.
3. 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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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초기
17세에 AS 칸에서 성인팀에 데뷔하였으며, 19세에 이미 주장을 맡았을 정도로 뛰어난 리더십을 가졌다. 1995년 여름 이탈리아 세리에 A의 AC 밀란으로 이적하였으나 경기에는 출장하지 못하고 대부분 벤치에 머물렀다.
3.2. 아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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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벵거가 이끌던 전성기 아스날에서 중원의 핵심이었던 비에이라. AC 밀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던 그를 벵거가 영입하여 1997-98 시즌 프리미어리그와 FA컵 더블을 이루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토니 아담스가 주장이던 때에 부주장을 맡았는데 아담스가 은퇴하고 주장이 된다. 주장이 된 첫 시즌인 2001-02 시즌에 또다시 리그와 FA컵을 거머쥔다. 2003-04 시즌에는 질베르투 실바, 로베르 피레스 등과 함께 강력한 미드필더진을 형성하여 26승 12무 승점 90점으로 그 유명한 무패 우승을 달성한다.[7]
당시 월드클래스 선수로 도배되다시피한 아스날인데다가 공격진에서 티에리 앙리, 데니스 베르캄프 조합이 쩔기도 해서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는 적지만 아스날에서 비에이라의 존재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라이벌이던 맨유의 공격적인 영입 정책과 달리 아스날은 소극적인 영입 정책을 펼쳤고 비에이라는 항상 불만을 제기해왔다. 레알 마드리드가 매년 여름마다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은 유명한 일. 비에이라도 레알로 갈 것처럼 행보를 보여오면서도 항상 아스날에는 꼬박꼬박 남았으나...
피지컬적인 측면에서 점차 하향세가 오던 그에게 2004-05 시즌이 끝나고 유벤투스가 접근해왔고 비싼 값에 마지막으로 팔 수 있는 시점이라 여긴 벵거 감독이 그에게 새로운 도전을 허락해주었다.[8] 비에이라는 늘 챔스 트로피를 열망했고 장기적으로 팀이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으로 옮기는 데에 따른 소극적인 이적시장 정책을 계속해서 보일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 늦기전에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고 2004-2005시즌 FA컵 트로피를 마지막으로 팀을 떠난다.
이후 벵거는 자기 자신이 아스날을 떠날 때까지 대체자를 구하지 못했다. [9][10]
2016년 기준으로 오늘날 슈퍼 퀄리티로(?) 도배된 벵거 아스날의 미드필더진이 가진 최대 약점 중 하나가 피지컬인데[11] 외질, 카솔라, 램친놈 등등 암만 좋게 이야기를 해 줘도 이 미드필더들이 패싱플레이에는 매우 뛰어나지만 훌륭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한 중원장악력을 가졌다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문제는 아스날과 경쟁하는 클래스의 팀들은 대부분 그러한 피지컬적 우위, 완벽한 피지컬적 우위가 아니더라도 태클을 통해 볼을 탈취하여 동료들로 하여금 중원을 장악하도록 하는 스타일의 선수를 왠만해서는 한명씩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비에이라는 비슷한 클래스의 팀들과의 경쟁에서 이러한 우위를 한가지라도 만들어 줄 수 있는, 벵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슈퍼 퀄리티의 선수였다는 것이다.
프랜시스 코클랭이 14-15 시즌에 수비적 역할을 잘 해주면서 역할을 해서 벵거에게 부족한 퍼즐을 하나 매꿨고 15-16 시즌에도 부상 전 까지 활약했으니...
3.3. 아스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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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4일 그의 유벤투스행이 확정되었다. 유벤투스로 이적했으나 경기력은 아스날 시절보다는 다소 떨어졌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친정팀 아스날을 상대하였는데 자신의 등번호를 이어받은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면서 유벤투스를 제압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하지만 2006년 월드컵에서는 좋은 활약을 보여 클래스는 죽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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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시즌 칼치오폴리로 유벤투스가 세리에 B로 강등되면서 비에이라는 인테르로 이적했다. 인테르 이적 이후에는 과거와 같은 포스를 보여주지 못했다. 첫 시즌은 인테르의 압도적인 스쿠데토 획득에 기여했지만 점점 나이도 30대가 넘어가면서 피지컬이 하락하여 과거와 같은 운동 능력은 보여주지 못했고, 잔부상에 시달리면서 팀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2008-09 시즌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맨유를 상대했지만 별다른 활약 없이 인테르는 패배하였다. 이후 하비에르 사네티가 중앙 미드필더 롤을 소화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다음 시즌 티아고 모타, 베슬리 스네이더르의 합류로 인해 완전히 후보로 전락하여 벤치에만 머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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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0년 1월 꾸준한 출장을 위해 맨체스터 시티로 임대를 떠났고 다음 시즌 완전 이적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팀을 떠난 후 인테르는 세리에A, 코파 이탈리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여 이탈리아 클럽 최초의 트레블을 달성하는 위업을 이뤘다. 여러모로 챔스 트로피와는 인연이 지독하게도 없다.
이후 맨체스터 시티에서 한 시즌을 더 뛰다가 2011년 여름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4.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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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숙한 선배들이 줄줄이 늘어선 1998 월드컵 때는 1994년 대회의 호나우두나 2002년 대회의 카카처럼 경험을 쌓게 해 주는 차원에서 대표팀에 승선시킨 유망주로 백업의 백업이었다. 프랑스의 3선은 디디에 데샹, 에마뉘엘 프티, 크리스티앙 카랑뵈가 1옵션이었고, 백업은 삼프도리아의 앙리 보고시앙[12] , 비에라는 그 다음에 위치했다. 주전들 체력 안배 차원에서 조별리그 3차전 덴마크전에서 풀타임을 소화한 것과 결승전 75분에 굳히기 차원에서 공격수 유리 조르카에프와 교체되어 들어가는 것으로 대회를 마쳤다.
유로 2000부터 당당한 경쟁력을 갖추면서 막강 프랑스 중원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13] 2002 월드컵과 유로 2004 등에서는 부진했다.
2006 월드컵에서 비에라는 클로드 마켈렐레와 함께 플레이메이커 지네딘 지단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막강한 후위 미들진을 구성하였다.
비에라는 조별 리그 3차전 토고전에서 1골 1어시를 기록하는 맹활약하며, 팀을 토너먼트 16강으로 올리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14]
프랑스는 16강에서 스페인을 만났는데, 비에라의 스페인전 활약은 최고의 백미였다. 비에라는 스페인전에서 1골 1어시를 기록하였고, 차비 에르난데스, 샤비 알론소, 세스크 파브레가스 등을 주축으로 한 미드필더진을 지네딘 지단과 함께 축구 레슨을 시켜주며 탈탈 털었다.
비에라는 이후 8강에선 브라질, 4강에선 포르투갈 중원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프랑스의 결승 진출에 기여한다.
지단이 독일 월드컵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로는 그 후임 주장에 임명되었는데, 유로 2008에서는 부상으로 인해 뛰지 못했고 월드컵 준우승팀이었던 프랑스도 세대교체 실패와 주전들의 노쇠화가 겹치면서 최악의 성적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그 과정에서 비에이라는 잦은 부상에 노쇠화로 점점 국가대표 차출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결국 2010 월드컵 최종 명단에는 탈락하였다.
5. 플레이 스타일
그의 최고 장점은 중원 장악력. 190이 넘는 키를 비롯한 압도적인 피지컬을 바탕으로 중원을 언제나 장악했다. 그가 중원에 있을 때는 묵직한 느낌이 있었고, 비에라의 팀은 중심을 확실하게 잡아주는 비에라를 믿고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 이를 뒷받침한 수비적 전술이해도는 당대 최고였다. 게다가 장신임에도 스피드가 빨랐다. 그렇다고 무사 시소코마냥 빨랐던 건 아니고 딱 어느 정도냐 하면, 프랭크 램파드보다 더 나은 스피드를 가졌었다.
활동반경이 매우 넓으며, 경기장 어디에서나 나타났다. 그럼에도 앨런 스미스처럼 쓸데없는 움직임을 보여 체력만 깎아먹는 일은 없었다. 중앙 미드필더로서 수비시 위치선정은 역대 최고 수준. 상대 선수는 비에라의 강력한 체력과 도저히 뚫어낼 수 없는 신체조건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키가 커도 수비를 못하는 선수가 많지만, 비에라는 중앙 미드필더 중 최고의 수비 실력을 가진 선수였다. 태클, 인터셉트, 몸싸움 등 빠지는 것이 하나 없었다. 공중볼도 적극적으로 따내려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제공권이 워낙 좋다 보니 경합을 붙었다 하면 십중팔구 승리했다. 지네딘 지단이 자신이 만나본 최고의 '''수비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비에이라를 꼽았을 정도. 국대 팀 연습때만 적으로 만나서 다행이라는 립서비스는 덤. 이때 프랑스 수비라인에는 튀랑과 마케렐레가 있을 때였다.
공격적인 부분에서는 특출나지 않았지만, 팀의 패스플레이와 공격 전개의 한 축을 맡으며 안정적인 볼 배급을 해주었다. 여차하면 적극적으로 드리블해 상대 수비라인을 초토화시키기도 했을 정도로 볼 컨트롤 역시 훌륭해 공을 빼앗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 보통 페널티박스 밖에 머무르지만 가끔 침투해서 득점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골 결정력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그래서 수비 지향적인 중앙미드필더치고 우수한 스탯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피지컬과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뛰는 BTB 스타일이다 보니 경기를 조율하는 능력은 뛰어나다고 보긴 어려웠다. 패스에 있어 부정확한 패스로 공 소유권을 내주고, 위기를 초래하는 수준은 아니였으나 알론소나 피를로처럼 3선에서 빌드업과 플레이메이킹을 맡기고 기대하기는 힘든 선수다. 아스날과 프랑스에서는 출중한 2선 자원들이 있어 비에라의 빌드업 문제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유벤투스와 지단이 없는 프랑스에서는 정말 답답한 경기운영능력을 보여줬다. 유벤투스에서 브라질의 에메르송과의 함께한 미들 조합이 이론상 최강으로만 남고 과거 마켈렐레와 조합이 안맞았던 이유도 이런 점에 근거하게 된다.[15] 하지만 2006 월드컵에선 지단이 2선~3선을 왕성히 오가며 빌드업을 직접 이끌자 둘은 장점인 미들 장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8강에서 최고의 공격진을 내세운 브라질을 경기력에서 압도하며 결승전까지 간 끝에 아쉽게 준우승의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상당히 터프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 192의 덩치가 무지막지한 피지컬을 앞세워 돌격해 오는 것도 무섭다만, 그런 선수가 거칠기까지 하다면 상대방의 공포는 극에 달했을 터. 보통 터프한 수준이 아니라 굉장히 터프한 수준이다. 프리미어리그 통산 '''76장'''의 옐로카드를 받아 역대 16위에 올라 있으며, 무려 '''8장'''의 레드카드를 받아 리차드 던, 던컨 퍼거슨과 함께 해당 분야 '''공동 1위'''에 올라 있다.
6. 지도자 경력
6.1. 맨체스터 시티 유스
2011년 은퇴 직후 맨체스터 시티 FC로부터 청소년 육성훈련 개발 이사직을 받았고 2013년까지 재직했다. 그리고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맨체스터 시티 U-23팀 감독 겸 엘리트 개발 팀 매니저로 일했다.
6.2. 뉴욕 시티 FC
2015년 11월부터 2018년 6월까지 재직했다. 2016년부터 동부지구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MLS 성적은 아쉬웠다.
6.3. OGC 니스
2018년 6월 부임하여 2018-19 시즌 7위를 기록하였다.
2020년 12월 4일 경질되었다.
유로파를 처참한 성적으로 탈락하고 팀의 부진아 쌓여 경질되었다.
7. 기록
7.1. 대회 기록
- 아스날 FC (1996~2005)
- 프리미어 리그: 1997-98, 2001-02, 2003-04
- FA컵: 1997-98, 2001-02, 2002-03, 2004-05
- FA 커뮤니티 실드: 1998, 1999, 2002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6~2010)
- 세리에 A: 2006-07, 2007-08, 2008-09, 2009-10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2006, 2008
- 맨체스터 시티 FC (2010~2011)
- FA컵: 2010-11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98
- UEFA 유로: 2000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2001
7.2. 개인 수상
- UEFA 올해의 팀: 2001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0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6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실버볼: 2001
- 프리미어 리그 시즌의 선수: 2000-01
-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베스트 XI[16] : 2003
- PFA 올해의 팀: 1998-99, 1999-00, 2000-01, 2001-02, 2002-03, 2003-04
- 디비지옹 1 올해의 영플레이어: 1995
- 리그 1 20년간 베스트 XI: 2011
- 프랑스 올해의 선수: 2001
- FIFA 100: 2004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14
- 골든풋: 2019
7.3. 수훈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1998
7.4. 클럽 기록
8. 비에라에 대한 언사
'''그는 미드필드로서의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위대한 선수이다. 수비면에서의 공헌은 물론이고 전방으로 패스를 공급하는 면으로서도 팀에서는 없어선 안될 플레이어다.'''
'''티에리 앙리'''
'''지금의 아스널이 있게 한 장본인이다. 만약 비에이라가 당시 중원에 없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도 못 했을것이다.'''
'''아르센 벵거'''
'''세계 최고의 수비력을 가진 미드필더다.'''
'''지네딘 지단'''
'''비에이라의 플레이는 놀라움 그 자체다. 미드필드를 장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비에이라는 환상적인 패스나 몸놀림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미드필드 만큼은 확실하게 거머쥔다. 또한 그의 막강한 파워는 몸집만큼 거대하며 여러모로 대단한 선수임을 느끼게 한다.'''
'''데니스 베르캄프'''
'''비에이라는 상대할때마다 완벽한 미드필더라는 느낌이 든다.'''
'''프랭크 램파드'''
'''세계 넘버원의 수비형 미드필더 라고 생각한다. 그 포지션에서 그 정도의 테크닉을 가진 사람은 없다.'''
'''스티븐 제라드'''
'''그는 타고난 주장이였고 팀원들 모두 그를 믿고 의지할수 있었다.'''
'''세스크 파브레가스'''
9. 이야깃거리
- 전형적인 만능 육각형 미드필더답게 FM시리즈에서는 능력치가 20으로 도배되어 있는 선수로 유명했다(...) 원조 FM사기유닛. 당연히 피파와 위닝에서도 피지컬 좋은 박투박 미드필더란 이유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 심지어 위닝에선 패스 스탯이 미드필더치곤 상당히 나쁨에도 상대 중원을 혼자서도 씹어먹는 피지컬과 활동량 때문에 아이코닉 모멘트 출시 이전까진 크루이프와 영베컴(위닝에서 베컴은 여러버젼이 있다.)과 함께 사기 레전드 3강으로 꼽혔을 정도. 아이코닉 버전은 플레이 스타일이 강한 압박에서 산소탱크로 바뀌며 주가가 더욱 상승했다.
- 상당한 성질로 유명하다. 로이 킨과의 앙숙관계는 이미 전설[17][18] 이며 그 마리오 발로텔리마저도 비에이라의 말은 고분고분 들었다고 한다.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서 그를 자극하면 말릴 수 없을 정도이고 실제로 그는 인종차별퇴치 홍보대사이기도 했지만...반대로 다른 선수를 괜히 자극하는 경우도 있었다.미하일로비치라든가...[19] 반면 놀랍게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는 서로 친근한 사이라고 한다. 즐라탄에 자서전에 따르면 둘 다 서로 한성깔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싸우다보니 친해졌다고...
- 클로드 마켈렐레와 영혼의 듀오로 손꼽혔지만 그건 2006 독일 월드컵만 본 사람들의 평가[20] 로 출장시마다 잉글랜드의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의 조합처럼 현실은 시궁창인 조합이였다. 무엇보다 플레이스타일이 유사한 둘의 플레이는 시너지는 커녕 서로의 동선만 방해하는 플레이만 보여주었다. 뭐, 그래도 끝까지 답을 못 찾은 제라드-램파드 조합과는 다르게, 2006 월드컵에서 기어이 제대로된 콤비플레이를 보여줬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확실히 월드컵 토너먼트에서는 지단의 마지막 불꽃과 마켈렐레-비에이라 조합의 포텐이 터진 것 때문에 프랑스가 결승에 갈 수 있었다.
- 아스날에서의 마지막 시즌때 스페인파[21] 선수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레예스가 아스날에서 떠나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알려진 선수 중 한 명. 그리고 아넬카가 과거 자서전에서 언급하기를 라커룸에서 과거 자신에게 본인의 ' 그것 ' 을 보여줬다고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베르캄프가 준 완벽한 찬스를 놓친 후 자기를 죽일 듯이 비에이라가 노려보고 샤워 도중에 처들어와서 ' 그것 '으로 아넬카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당연히 아넬카는 기분 개썩었고... 대충 평을 보면, 반할과 같은 성격이지 않았을까 싶다는...
- 그의 다리는 워낙 길어서 구너들이 학다리라고 불렀었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그의 다리는 한쪽 다리가 다른쪽 다리보다 3cm나 길다고 한다. 뛸 때야 모르겠지만 사실 반듯하게 선 자세를 가만 보면 매우 구부정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좋지 못한 신체조건이 하향세가 빨리 오는 결과를 낳았다. 비에이라가 아스날에서 뛰던 시절 토니 아담스가 비에이라의 다리 길이가 상이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말년에는 부상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고 발언했었는데 과연 그 말대로 30대가 넘어간 인테르 시절 이후부터 점점 부상이 많아졌다.[22]
- 2011년 은퇴 이후 맨체스터 시티의 기술 이사로 일하면서 유소년 훈련 시스템을 개혁 및 개발 하였고 2013년 5월에는 맨체스터 시티의 리저브 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2015년 12월까지 2년 7개월동안 활동했다. 2015년 5월에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 부임 설이 있었으나 단순 설에 그쳤다. 그리고 2016년 1월 뉴욕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했다.[23]
- 비에라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비에이라가 떠난 이후에 아스날이 리그 우승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FA컵 역시 9년이 걸려서야 우승했다.) 세스크의 등장이후, 벵거의 축구철학과 세스크 위주로 전술이 편성되면서 피지컬을 소홀히 했던지라 아스날은 비에라가 있을때와 달리 스토크나 터프한 빅샘류 축구에 약점을 보여주었다. 또한, 나름 비에이라의 대체자가 되어야 했었던 디아비가 완전한 성장곡선을 못 그려낸게 아스날이 더더욱 비에라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 아르센 벵거 감독이 2018년에 사임한 이후 비에라의 아스날 감독 부임설이 계속 돌고 있으나 본인은 기회가 와도 부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 2019년 All Football 팬 투표에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올타임 베스트 XI에 선정되었다.
[1] 1998년 FIFA 월드컵 수훈,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Légion d'Honneur Chevalier[2] 프랑스어에서 ei는 /ɛ/'에'로 발음된다.[3] 세네갈계이지만 이민 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다. 세네갈은 만 25세 이상 성인에게 복수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4] 선수시절 85-90kg[5] 시즌 중도 경질.[6] 정확히는 카보베르데의 옛 식민모국이었던 포르투갈계 성이다.[7] 이 당시 맨유의 로이 킨과의 라이벌리는 유명했다.[8] 말이 좋아 새로운 도전이었지 사실상 내친 거나 다름없었다. 이후 인터뷰에서 비에이라는 이 당시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도 팀으로부터 재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슬프고 당황했다고 말했다. 유벤투스 이적 이후 밝혀진 비화에서는 벵거가 이제 세스크 파브레가스도 써야 하니 비에이라에게 주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자극했다. 지금이야 세스크가 월드클래스 미드필더 중 하나로 꼽히지만 당시엔 비에이라는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였고 세스크는 미래가 촉망되어도 17살짜리 꼬맹이었다.[9] 대부분의 선수들은 비에이라 수준의 퀄리티를 갖추지 못했고, 상대적으로 그런 퀄리티에 근접한 야야 투레는 유망주 시절 영입하고자 했고, 실제 합의까지 했으나 워크퍼밋 때문에 영입하지 못하고 여러 과정을 거져 결과적으로(...) 맨시티가 가져가버렸다.[10] 만약 그러한 선수를 영입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유망주가 아니고서야 벵거가 무리해서 영입하진 않았을 것이다.[11] 벵거에게 있어 선수들의 피지컬은 전술상 이점을 갖고 + 짱짱한 피지컬로 무장한 무리뉴의 첼시에 항상 지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12] 프랑스 대표팀 레몽 도메네크 밑에서 수석코치를 지낸바 있다.[13] 이 때 프랑스는 데샹을 고정으로 놓고 프티와 비에이라를 로테이션으로 이용하면서 매 경기 다른 중원 구성을 선보였다.[14] 여담이지만 해당 경기는 비에이라의 생일이었다고 한다.[15] 마켈렐레는 중원 장악에 탁월한 선수였고, 패스도 눈이 썩을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 빌드업을 이끌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16] 1992~2002[17] 둘의 앙숙 역사는 이 동영상으로 정리되는데 로이 킨은 자신의 두 번째 자서전에서 비에이라와 대치할때 속으로는 무척 겁을 먹었다고 고백했다. 만약 비에이라가 폭발한다면 자신은 비에이라의 상대가 되지 못할거라고. [18] 앙숙과는 별개로 서로의 실력은 인정하는 편으로 비에이라가 아이스버킷 챌린지때 로이킨을 지명했다 +뱅거는 덤. 그리고 은퇴하고 나서는 같이 인터뷰도 할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9] 경기 도중 비에이라가 미하일로비치에게 먼저 "집시 쉿"(Gypsy Shit, 쓰레기 집시라는 뜻.)이라고 그의 면전에서 대놓고 말했다가 이걸 들은 미하일로비치는 유고 내전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분노하여 비에이라한테 "네로 데 메르다"(Nero de merda, 깜둥이란 뜻.)라고 욕을 했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20] 국내에 해축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2005년으로 마켈렐레는 유로 2004 이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한 상황이라 당시 소속팀인 첼시에서의 활약만 볼수 있었다. 2005년에 다시 국가대표 복귀했다.[21] 파브레가스, 레예스, 로렌을 위주로 한 선수들.[22] 종목은 다르지만 NBA의 역대급 실패한 1픽인 그렉 오든도 선천적으로 다리 길이가 달라서 부상에 시달리다 은퇴했다. 이쪽은 덩치가 비에이라보다도 크다보니 데뷔 직후부터 부상이 찾아온 케이스.[23] 뉴욕 시티 감독 임명 자체는 2015년 11월에 발표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활동을 시작한건 2016년 1월부터이다.
분류
- 1976년 출생
- 프랑스의 축구선수
- 프랑스의 축구감독
- AS 칸/은퇴, 이적
- 아스날 FC/은퇴, 이적
- 유벤투스 FC/은퇴, 이적
- 맨체스터 시티 FC/은퇴, 이적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은퇴, 이적
- AC 밀란/은퇴, 이적
- 뉴욕 시티 FC/역대 감독
- OGC 니스/역대 감독
- 프랑스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선수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0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4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8 참가 선수
-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 아프리카계 프랑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