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베르투 파우캉

 


'''호베르투 파우캉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브라질'''}}}
{{{-2 47대
'''일본'''}}}
{{{-2 24대


'''클럽'''





'''호베르투 파우캉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FIFA 월드컵 실버볼 1982'''


'''베스트팀'''
1982 · 1983
1982 · 1983 · 1984




<color=#373a3c> '''1979 Rey del Fútbol de América'''
수상
디에고 마라도나
2위
훌리오 세사르 로메로
3위
'''호베르투 파우캉'''
<color=#373a3c> '''1982 Rey del Fútbol de América'''
수상
지쿠
2위
'''호베르투 파우캉'''
3위
디에고 마라도나
'''1982 Onze d'Or'''
<color=#373a3c> '''Onze d'Or'''
'''Onze d'Argent'''
<color=#373a3c> '''Onze de Bronze'''
파올로 로시
알랭 지레스
'''호베르투 파우캉'''
'''1983 Onze d'Or'''
<color=#373a3c> '''Onze d'Or'''
'''Onze d'Argent'''
<color=#373a3c> '''Onze de Bronze'''
미셸 플라티니
'''호베르투 파우캉'''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image]
<color=#373a3c> '''Player of the Year 1982'''
수상
파올로 로시
2위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3위
'''호베르투 파우캉'''
<color=#373a3c> '''Player of the Year 1983'''
수상
지쿠
2위
미셸 플라티니
3위
'''호베르투 파우캉'''

'''Player of the Year 1982'''
수상
파올로 로시
2위
가에타노 시레아
3위
칼하인츠 푀르스터
'''호베르투 파우캉'''

'''호베르투 파우캉의 기타 정보'''


''' 브라질의 축구감독 '''
''' 이름 '''
'''호베르투 파우캉'''
'''Roberto Falcão'''
''' 본명 '''
파울루 호베르투 파우캉
Paulo Roberto Falcão
''' 출생 '''
1953년 10월 16일 (71세) /
브라질 산타카타리나 주 아벨라르두루스
''' 국적 '''
브라질
''' 신체 '''
183cm
''' 직업 '''
축구선수 (미드필더[1]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인테르나시오나우 (1972~1980)
AS 로마 (1980~1985)'''
상파울루 FC (1985~1986)
''' 감독 '''
브라질 대표팀 (1990~1991)
클루브 아메리카 (1991~1993)
인테르나시오나우 (1993)
일본 대표팀 (1994)
인테르나시오나우 (2011)
EC 바이아 (2012)
스포르트 헤시피 (2015~2016)
인테르나시오나우 (2016)
''' 국가대표 '''
34경기 6골 (브라질 / 1976~1986)
'''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감독 '''
타바레스(1989)(1991)바론(1993)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1. 개요


'''"파우캉은 그의 발을 손처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대단한 선수입니다."'''

닐스 리드홀름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 1977년 팀을 떠난 엘리아스 피게로아의 뒤를 이어 인테르나시오나우의 70년대 전성기를 이끈 선수이다. 1980년부터 AS 로마로 이적하여 전성기를 보냈으며, 1982 스페인 월드컵 브라질 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옮겨다니는 팀마다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영광만 가득했던 선수 시절에 비해 축구 감독으로서는 별 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현시대에 세계적인 스트라이커로 활약한 라다멜 팔카오의 이름이 파우캉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SC 인테르나시오나우 시절


[image]
1972년, 호베르투 파우캉은 19살의 나이에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선수로서 데뷔했다. 그는 데뷔하자마자 바로 팀의 핵심 멤버로 등극했다. 왠만한 선수라면 개인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브라질 축구계이지만, 그는 그 중에서도 중미로서 가장 뛰어난 개인기를 갖추고 있었고 왕성한 활동량과 정밀한 패스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파우캉은 인테르나시오나우가 브라질 세리에 A를 3번 우승(1975년, 1976년, 1979년)시키는 데 기여했고 리오 그란데 주별 리그인 캄페오나투 가우초를 1971년부터 1978년까지 1977년을 제외하고 모조리 제패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렇듯 그는 1972년부터 1980년까지 8년간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대활약했고 많은 인테르나시오나우 팬들은 오늘날까지 그를 팀 역사상 최고의 중미로 평가하고 있다.

2.1.2. AS 로마 시절


'''로마의 8번째 왕'''
1980년, 파우캉은 65만 유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AS 로마로 이적했다. 그는 첫 시즌인 1980-81 시즌부터 탁월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25경기에 출전해 3골을 기록했고 AS 로마가 유벤투스 FC에 이어 리그 2위를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 토리노 FC를 상대로 페널티 킥 골을 기록하며 로마에게 우승컵을 안겨줬다. 비록 로마가 다음 시즌에 3위로 떨어졌지만, 그는 첫 시즌보다 우수한 활약을 선보이며 24경기 6골을 기록했고 세리에 A의 외국인 스타 플레이어로서 유벤투스 FC리엄 브래디와 라이벌 관계를 맺었다.
1982-83 시즌, 파우캉은 리그 27경기 7골을 기록하며 AS 로마가 팀 역사상 2번째로 리그 우승을 거머쥐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이 시즌에 세리에 A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선정되었고 UEFA컵에서도 탁월한 활약을 선보이며 로마가 준결승전까지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AS 로마 팬들은 이러한 그의 멋진 모습에 감탄하며 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일곱 명의 왕들을 빗대어 그에게 '로마의 여덟번째 왕'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1983-84 시즌, 파우캉은 역시나 훌륭한 활약을 선보여 27경기 5골을 기록했고 로마는 그의 활약을 앞세워 시즌 막판까지 유벤투스와 우승 경쟁을 벌였으나 아쉽게도 마지막 경기에서 유벤투스가 우승을 거머쥐었고 로마는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또한 유로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한 로마는 당대 최강의 팀 중 하나였던 리버풀 FC와 맞붙었다. 이때 전문가들은 전력상으로 볼때 리버풀이 로마를 손쉽게 이길 거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파우캉은 대단한 경기력을 보이며 중원을 장악했고 로마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리버풀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결국 경기는 1:1 무승부로 종료되었고 최종적으로 승부차기에서 승부가 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브루노 콘티와 프란체스코 그라치아니가 페널티 킥을 실축하고 말았고 결국 리버풀이 빅 이어를 들어올리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1984-85 시즌, 파우캉은 무릎 부상이 악화되는 바람에 4경기 1골에 그치고 말았고 로마는 성적이 뚝 떨어져 리그 8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후 파우캉은 무릎 수술을 받고자 했으나 로마 팀닥터들은 수술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며 수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우캉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뉴욕으로 가서 무릎 수술을 받았고 이에 로마는 그와 맺었던 계약을 해지했다.

2.1.3. 상파울루 FC 시절


[image]
1985년, 파우캉은 브라질로 돌아와 상파울루 FC와 계약을 체결했다. 그후 그는 1986년까지 활동하며 25경기 7골을 기록했고 1985년에 주별 리그인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차지했다. 그후 팔캉은 1986년에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image]
[image]
1976년 2월 21일, 파우캉은 브라질 축구 대표팀에 데뷔했다. 당시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대단한 활약을 선보이고 있던 그는 곧바로 대표팀 주전 중미로 거듭났고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의 주장으로서 대회에 참가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는 메디컬 테스트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대표팀 합류가 이틀 늦었고 클라우디오 쿠티뉴 감독은 콜롬비아와의 친선 경기를 치른 후 파우캉을 대표팀 월드컵 명단에서 제외시키기로 결정했다.
1980년 AS로마에 이적해버리는 바람에 국가대표팀에 선발될 기회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파우캉의 A매치 기록은 선수의 클래스에 비해 매우 적은 수만이 남아 있는데, 이는 당시 대표팀 선수의 대부분을 브라질 리그에서만 뽑아 쓰는 암묵의 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파우캉은 1982 스페인 월드컵 명단에 선정되었고 지쿠, 토니뉴 세레주, 소크라치스와 함께 '''황금의 사중주''' 멤버로서 활약했다. 그는 브라질 대표팀이 조별 예선에서 소련을 2:1로 제압하고 스코틀랜드를 4:1로 격파하고[2] 뉴질랜드와의 대결에서도 한 골을 기록하며 4:0으로 제압했다. 그후 2번째 라운드에서 아르헨티나, 이탈리아와 만난 브라질은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를 3:1로 제압했으나 파올로 로시해트트릭을 기록한 이탈리아에게 3:2로 패해 토너먼트 진출이 좌절되었다. 파우캉은 훗날 이탈리아에 극적으로 패한 것이 너무나 원통해서 축구 선수를 그만두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파우캉은 1986 멕시코 월드컵에도 뽑혀 교체 멤버로 활동했고 월드컵이 끝난 후 선수 인생을 완전히 정리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파우캉은 1970~80년대 최고의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중 한 명이었는데, 경기 템포를 적절히 조절하면서 패스를 기가 막히게 전달했고 중미치고 골 결정력이 탁월해 무수한 골을 기록했으며 왕성한 활동량과 탁월한 개인기로 상대의 압박을 벗겨내고 중원을 지배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태클능력과 투지 또한 좋아 사실상 육각형 미드필더라 불려도 손색없었다. 뿐만 아니라 리더십도 출중해 경기를 승리를 이끌기 위해 팀 동료들을 통제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부렸다.

4.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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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감독 시절 파우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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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부임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파우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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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르나시오나우 감독 시절 파우캉'''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이 끝난 후, 브라질 축구 연맹은 파우캉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했다. 아직 아무런 감독 커리어도 없던 그를 느닷없이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한 이유는 1990 월드컵에서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브라질 축구 연맹은 다음 월드컵을 대비하고자 선수단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고 선수 시절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줬던 파우캉에게 대표팀 선수들의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1991년 칠레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어 축구협회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 했다. 그러나 파우캉은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영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였고 결국 1991년에 1년도 되지 않아 대표팀 감독 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파우캉은 1991년 클럽 아메리카의 감독으로 부임해 1991년 인터- 아메리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92년에는 CONCACAF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때가 그의 감독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1993년 인테르나시오나우의 감독으로 부임해 한 시즌을 치뤘다.
그러던 1994년, 파우캉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이를 의외의 선임으로 평가했다. 당시 일본축구협회는 대표팀 감독 경력이 많은 인물을 선임하겠다고 밝히고 텔레 산타나를 선임하려 했지만 산타나가 자신을 따르는 코치진을 포함해서 10억엔에 달하는 급료를 지불할 것을 요구하자 일본 축구 협회는 너무 지나치다고 여기고 선임을 포기했다. 전 프랑스 대표팀 감독 미셸 히달고와 전 아르헨티나 대표팀 선수였던 오스발도 아르딜레스에게도 타진했지만 결국 선임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 축구 협회는 꿩 대신 닭이라고 클럽 아메리카에서 좋은 지도력을 보여줬고 한차례 브라질 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던 파우캉을 선임하기로 결정했다.
파우캉은 대표팀 감독에 선임된 후 네덜란드 2부리그에 소속된 SBV 엑셀시오르에서 활동했던 오구라 타카시를 대표팀에 불러들었고 여러 젊은 선수들을 대표팀에 발탁했다. 이때 그는 전술을 세세하게 짜며 선수단을 엄격하게 통제했던 전임 감독 한스 오프트와는 달리 선수들이 알아서 경기를 이끌어가게 놔두었다. 이에 선수들은 "오프트와 다르다."며 당황했고 전술이 별로 세밀하지 않고 선수들을 믿고 맡기는 그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취임 직후에 친선 컵대회에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에 참패했고,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8강전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대표팀에 패한 후 경기장을 떠날 때 관중들은 "브라질로 돌아가라. 다시는 오지 말라."며 그에게 캔을 던져댔고(...) 결국 그는 경질되어 브라질로 쓸쓸히 돌아가야 했다.
일본에서 팬들에게 캔 투척 세례를 받은 것에 큰 충격을 받은 탓인지, 그는 이후 오랜 세월 동안 감독을 맡지 않고 TV와 라디오에서 축구 패널로 활동했다. 그러던 2011년 4월, 그는 인테르나시오나우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인테르나시오나우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전에서 라이벌 그레미우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함에 따라 복귀하자마자 우승 트로피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7월 18일, 그는 브라질 리그 10라운드에서 상파울루에게 3:0으로 패한 후 감독에 부임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2012년 2월, 그는 2010년 브라질 세리에 A로 승격한 EC 바이아의 축구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 팀에서 공격적인 전술로서 팀이 선전할 수 있도록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나친 공격적인 전술의 악영향으로 실점이 늘어났고 상대 팀들이 공격 루트를 보다 효과적으로 차단하면서 득점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결국 EC 바이아는 2012년 세리에 A 강등권에 몰리고 말았고 팔캉은 7울 20일 플루미넨시에게 4:0으로 참패한 후 경질되고 말았다.
2015년 9월, 팔캉은 2012년 브라질 세리에 A로 승격한 스포르트 헤시피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2016년 4월 18일까지 팀을 이끌었고 2016년 7월 인테르나시오나우로 돌아왔으나 불과 한 달 만에 5경기 2무 3패를 기록한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 볼라 지 오우루: 1978, 1979
  • 볼라 지 프라타: 1975, 1978, 1979
  • FIFA 월드컵 실버볼: 1982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82
  •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 1983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82, 1983
  • 옹즈 드 옹즈: 1982, 1983, 1984
  • FIFA XI: 1982
  • FIFA 100: 2004
  • 골든풋: 2019
  • AS 로마 명예의 전당: 2013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6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1] 중앙 미드필더[2] 파우캉은 이 경기에서 마지막 골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