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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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기도 양주시를 근거지로 했던 제6군단 소속 사단. 별칭은 '''밀물부대'''. 1974년 10월 1일 창설되었으며, 2017년 11월 30일 해체되었다.
2. 상세
대한민국 육군의 보병 사단. 1974년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제65훈련단'''으로 창설되어 1982년에 보병 사단으로 승격 후 1984년에 경기도 양주시로 부대를 이전하였다, 이후 2017년 11월 30일 해체 되었다.
현재 사단 주둔지에는 제8기동사단 예하 50,95포병대대 2개와 군수지원대대,보충중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주둔지 명칭은 천보대로 개칭되었다.
심볼은 커다란 5각형의 6자로 65사단의 부대번호를 형상화하였다.[1]
3. 예하부대
3.1. 사단직할대
3.2. 제183보병연대 적토마
- 연대본부
- 전투지원중대
- 수색중대
- 의무중대
- 수송중대
- 통신중대
- 본부중대
- 1대대
- 2대대
- 3대대
3.3. 제185보병연대 비호
- 연대본부
- 전투지원중대, 수색중대, 의무중대, 수송중대, 통신중대, 본부중대
- 1대대
- 2대대
- 3대대
3.4. 제186보병연대 독수리
- 연대직할중대
- 전투지원중대, 수색중대, 의무중대, 수송중대, 통신중대, 본부중대
- 1대대
- 2대대
- 3대대
규모도 꽤 커서 여름철이면 다른 부대에서 전투 수영을 즐기러 오기도 하였다.
3.5. 포병연대
- 연대본부
- 제356포병대대
- 제357포병대대
- 제358포병대대
- 제932포병대대
4. 과거부대
5. 출신인물
5.1. 사단장
5.2. 장교/부사관
- 김용우(군인)
대령시절 본 사단의 183연대장으로 재직한 이력이 있다.
대령시절 본 사단의 185연대장으로 재직한 이력이 있다.
5.3. 병
- 곽정욱(배우) - 65사단 186연대 전투지원중대에서 복무하였다[6] .
- 강성호(프로게이머) - 2007년 군번이며 김주명 사단장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인터넷도 시켜주고 전역하기 전에 말뚝 권유까지 받을 정도였다고...
6. 기타
동원사단으로 자체적인 신교대가 없기 때문에 주로 같은 6군단 소속의 제28보병사단, (구)제26기계화보병사단[7] , 제5보병사단 신교대나 그 외 육군훈련소에서 병력이 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간혹 제3보병사단, 제8기동사단이나 수도기계화보병사단, (구)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구)제26기계화보병사단, 제55보병사단 같은 생뚱맞은 곳에서 병력이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8] 각지의 신교대에서 배치받기 때문에 자대에 도착하면 각자의 신교대 간 부심 및 신경전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이다.
간부들 역시 대부분 65사단의 존재나 위치에 대해서 거의 모르기 때문에, 자대에 배치되기 직전까지는 본 사단에 대해서 어떠한 정보도 접하기 어려운 곳이었다.[9]
6.1. 근무환경
동원사단 답게 대다수의 군필자들 조차도 모르는 존재감 없는 극마이너한 부대로, 전역하고 사회에 나오면 같은 대대, 연대는 커녕 같은 사단 출신 조차도 찾기 힘들 정도다. 동원사단 특성상 병력이 적기 때문에 일부 부대의 경우 1개 생활관에 모두 모여서 대대장 훈시를 들을 수 있고, 병력이 적기 때문에 뽑히기도 매우 힘든 부대다.[10] 그야말로 평범하고 무난한 동원사단의 전형적인 모습으로서 대체적으로 매우 무난한 일정과 무난한 훈련, 무난한 생활등 군 생활을 큰 굴곡없이 무난하게 할 수 있는 부대라고 평가받았다.
동원사단의 특성상 병력대비 간부의 수가 매우 많은 편[11] 이기 때문에 악폐습은 타 사단에 비해 눈에 띄지는 않았던 편[12] 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당연하지만 전형적인 동원사단 답게 영관급 장교들이 꽤 많다보니 그런 듯하다. 게다가 같은 6군단 예하 사단인 28사단 530GP 사건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악폐습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편이었다. 때문에 이등병이나 일병때는 생활하기가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라는 말이 사단 내에서 주로 주장되기도 했다. 그래도 눈에 띄지 않게 크고 작은 흉흉한 사고는 꾸준히 발생하기는 했다. 오히려 대형 사고라고 볼만한 여지가 있는 일도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사단이라는 이유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그래도 후술할 내용이지만 자살률이 가장 낮은 사단 중에 하나였으며 실제로도 부대 창설 이후 자살자가 처음 나온게 1977년 이래 26년이 지난 2003년이었으며, 해체 전까지 65사단의 유일한 자살자였다고 하니 상당히 관리가 잘된 부대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1년의 대략적인 훈련 및 일과표는 1-5월까지 대침투, 전면전 등 기본적인 훈련 및 사격과 병기본을 실시하고, 6-9월달까지 동원훈련 준비 및 동원훈련, 동원훈련 정리를 실시하고, 7-12월달까지는 유격, 혹한기 및 하반기 병기본과 사격, 대침투, 전면전 훈련을 하는 식으로 돌아갔다. 그다지 힘들지 않은 무난한 일정이지만 그래도 일과는 일과대로 매일 짜여져 있던 터라 생각처럼 편하지는 않다.
부대 규모에 비하면 영내시설은 당시 기준으로 제법 좋은편이다. 면회 장소를 겸하는 복지회관은 위병소를 넘어 바로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2층 구조로 1층에는 고기를 파는 식당과 노래방, 카페가 자리 잡고 있으며 2층에는 면회객들이 머무를 수 있는 객실과 연회장이 있다. 대체로 냉면 정도를 제외하면 음식의 질과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고 평가되었으며, 1층 카운터에서 치킨이나 피자 등을 주문할 수 있는데 면회가 끝나면 그걸 가지고 생활관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가끔 훈련준비나 정비기간 같은 시기에 마음씨 좋은 중대장들이 고생한다고 피자 사주기도 해서 병사들이 포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에 따르면 면회시설은 육군에서 5위안에 든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또한 부대에서 기독교, 천주교, 불교 3대 종교 행사장이 그렇게 멀지 않으며, 성당은 아예 부대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외 여름에 부대 단결활동 등으로 개방되는 전투 수영장[13] 이 존재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각 연대 및 직할대의 기본 복지시설 (노래방, 사이버 지식 정보방, 체력 단련장 등)도 어느정도는 갖춰져 있었다. 막사 시설은 1980년대 초반에 완공되어 중급 수준이지만. 2013년 경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로 막사 자체 방한성을 다소 높였고, 생활관을 증축하고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새로 공사하여 어느정도 쓸만하게 개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컨테이너 생활관에서 비참하게 먹고자는 직할 부대가 몇몇 있기는 했었고, 이들은 사단이 해체될 때까지 이러한 비참한 생활여건을 견뎌내야 했다.
보통 한 연대에는 막사건물에 두개 대대와 연대본부가 같이 있었기때문에 2층에는 병사들이 거주하며 1층에는 무려 두개의 대대장실과 한개의 연대장실이 공존하는 병사들에게는 끔찍한 거주환경이라고 회자된다.
사이버 지식 정보방의 경우 PC의 사양이 펜티엄 4급으로 매우 낮고 노후화로 인하여 고장이 잦아서 이용하기가 대단히 힘들었지만, 2012년에 샌디브릿지 사양을 가진 PC가 보급되어 사이버 지식 정보방 이용이 상당히 편해졌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14] 다만 사이버 지식 정보방 내 컴퓨터 보급이 충분하지 않은 곳이 많았으며[15] , 인터넷 망 개선등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인터넷 속도는 2010년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저속을 자랑했으며, 유튜브, 페이스북 등의 외국계 사이트는 물론 네이버까지 접속이 불가능한 날이 부지기수였다. 일부 예하 연대는 2015년 말경부터 컴퓨터 교체사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복지시설에 대해 빠르게 개선이 되어야 했지만 사단 해체가 논의되면서 필수적인 생활시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개선사업이 중단되었기에 해체 이전까지 많은 부대의 병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교통에 있어서는 여건이 아주 좋은 축에 속했었다. 부대 바로 앞에 양주신도시가 조성중이었기에 교통편을 통한 부대 접근성이 좋아서 서울 버스 108 한번에 의정부 시내로 나갈수도 있었다는 점이 큰 강점으로 꼽혔었다. 그리고 버스에 오래 앉아있어야 한다는 것만 감안한다면 휴가때는 한번에 서울로 나가는것도 가능하긴 했다. 다만 당시 기준, 사단의 위수지역에는 서울을 비롯한 의정부 이남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외박시 버스를 타고 한번에 서울로 점프하려다가 걸리면 큰 곤경에 쳐해야 할 각오를 해야하기는 했다.
6.2. 사단가
사단가는 2절로 되어 있었다.백두산 굽이쳐서 뻗어내린 곳
자랑스런 대한의 피끓는 건아
조국의 부름 받아 총칼을 들고
이 국토 지키고자 여기 모였다
아- 아- 영광스런 대한의 용사
겨레의 빛이 되리 육십오사단
태평양 거센 파도 부딪는 곳에
수려한 한반도의 대장부로다
역사의 소명 따라 목숨을 걸고
나라의 번영 위해 떨쳐 나섰다
아- 아- 영광스런 조국의 용사
겨레의 빛이 되리 육십오사단
7. 사건사고
8. 여담
- 동원사단이지만 꽤나 눈에 띄는 비범한 기록들을 세우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 중인 2002년에 동원사단 최초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바가 있으며,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인 2007년에도 대통령 표창을 받은 바가 있다.
- 2010년에 호국 훈련에 참가한 경력이 있다. 1999년에 전군 최초로 쌍용훈련[16] 을 실시하였다. 2015년 쌍용훈련은 동원훈련과 같이 실시되어 평범한 동원훈련인줄 알고 널널하게 참가했던 예비군들은 입소시작부터 완전군장(!)[17] 을 지고 행군[18] (!!)을 해 숙영지까지 걸어가 3박 4일동안 야외숙영(!!!)을 했다. 중간에 작계지까지 화포 장비 다 지고 걸어갔다가 걸어오는건 덤(...). 식사도 절반 이상이 전투식량으로 배식되었고, 쌍용훈련이 아니라 쌍욕이 나오는 훈련이라는 증언이 심심찮다. 참고로 이때 훈련을 참관한 사람들이 무려 3군사령관, 6군단장, 65사단장. 여담이지만 포병연대에서 예비역과 함께 실사격훈련을 진행했는데 당시 현역병 중 실사격을 해본 인원은 각 대대(100여명)에 3~4명뿐이었다.(한대대만 제외하고) 덕분에 예비역들이 직접 실사훈련을 진행하며 현역병을 가르쳐주는 일반 동원훈련때와는 다른 모습이 보여졌다.
- 자살률이 가장 낮은 사단 중에 하나이기도 했는데, 부대 창설 이후 자살자가 처음 나온게 1977년 이래 26년이 지난 2003년이었으며 해체 전까지 65사단의 유일한 자살자였다고 하니 사실상 부대 내에서 자살 사례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물론 사건 사고가 아에 없는 부대는 아니었다. 2013년 후반 한 연대에서 탈영사건이 있어 전 병력 대기상태에 들어간적 있었으며, 때문에 그날 비 내리는 야간에 대규모 수색이 이루어졌고 결국 부대 치장창고 옆 숨어 있던 것을 발견하여 종료된 적이 있다. 이후 2014년 초 한 연대 이등병이 화장실에서 자살시도를 했지만 줄이 끊어지며 자살 실패에 그쳐 비극적인 일이 생길 뻔했다. 2014년에도 직할대에서 악폐습으로 인한 한번의 탈영사건이(2명) 발생했다.[19] 다만 사단 규모가 상비 연대규모이고 상기 발생한 일 이후에는 크게 터진 일들이 없는 데다가 후속조치를 매우 철저하게 하여 이후 큰 문제가 보고되지는 않았다. 2016년에는 포병연대 연대본부 병사 한 명이 자살 소동을 벌여 그린캠프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를 감안해도 같은 제6군단 소속의 형제 사단중에 하나이자 사건사고로 악명높은 제28보병사단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 동원사단에는 군종 신부를 파견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깨진 첫번째 동원사단이기도 했다.
- 전체적인 기준에서 사건사고도 거의 없는 수준의 부대였고, 동원사단 중에서 꽤나 많은 업적을 쌓아서 여러모로 해체되기에 아까운 부대였으나 차기동원사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업적에 비하면 국방부에서의 취급이 안습한 것이 비운의 동원사단이라고 할 만하다. 대신 형제 사단인 제73보병사단은 최초의 차기 동원사단으로 살아남았다.
[1] 묘하게 지금은 사라진 68사단 마크와 비슷하다.[2] 사단에서 관리하는 동원장과 함께 연천에 있었다. 다만 연천 내부의 위치는 달랐으며, 전차중대보다 동원장이 더 북쪽에 있었다.[3] 상사 혹은 원사가 관리관으로 1명, 관리병이 1~2명 존재했다.[4] 2008년경 암으로 사망[5] 원광대학교[6] 한달도 안돼서 사단장 cp병으로 팔려갔다. 연예인 신분이라 아무래도 데려간 것 같다[7] 2016년 12월 1일자로 제26기계화보병사단은 7기동군단으로 이관되었다가 2018년 11월 30일 해체되었다.[8] 예를 들어 이 부대를 전역한 한 위키어는 (구)306보충대 → 17사단 신교대대(현재는 일반 보병대대) → 65사단으로 왔다고 한다.[9] 심지어 '(구)306보충대대' 사람들 조차도 어디 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자대 발표때 65사단이 나오면 여러모로 미스터리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306보충대와 26사단 신교대에서 병사포함 간부조차 아무도 모른다던 그 사단) 특히 이 느낌은 겨울에 배치받았을 때 안개 낀 위병소의 모습을 병력수송 버스 창문 너머로 봤을 때 실감하게 된다.[10] 상비사단의 1/10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분, 소대는 없고 중대가 최하위 편제이며 보병연대의 경우 중대당 10명 남짓. 대대는 4-50명. 연대별 막사로 나눠서 생활한다.[11] 대대의 경우 병사 10명에 부사관 한명, 위관급 한명꼴이었다. 그 위관급도 대위(진)인 중위 혹은 대위이다. 심지어 연대직할은 대대에 비해 인원수도 적고 보직도 세분화 되어있어 지원중대, 수색중대, 수송중대 같은 경우는 병사 5명에 부사관 한명, 위관급 한명꼴이었고, 통신중대, 본부중대 같은 경우는 병사 2명에 부사관 한명 혹은 위관급 한명꼴이었다. 의무중대 같은 경우 군의관이 1명 배정되어있긴 했으나 서류상으로 배정되어있을 뿐이지 사단 의무대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사실상 간부는 0명이었다.[12] 다만 소속부대 별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때문에 적은 편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어도 '없는 편'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2006년 수색대대에서는 줄빠따 사건으로 가해자들이 군단헌병대에서 재판까지 받은 사례도 존재한다.[13] 정확히는 수영장이라기보다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고 수영 목적으로 개방한 것이다. 물이 받아진지 얼마 안된 개방 초에는 그럭저럭 괜찮게 수영 할 수 있지만 며칠만 있으면 수질을 장담할 수 없다. 장마때는 산에서 흙탕물내려와서 수영장이 흙으로 가득 차서 관리 부대가 난리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국방일보에서도 몇차례 다뤄졌을 만큼 일종의 사단 명물로 손꼽히기도 했다.[14] 그런데 당시 모든 PC를 교체한것이 아니기때문에 펜티엄4급의 PC와 같이 공존하였으며, 몇몇 연대에서는 한개 대대당 배정된 컴퓨터 중 일명 슈퍼컴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15] 때문에 많은 예하 부대가 일과 후 자유롭게 사지방을 이용하지 못하고 계급을 막론하고 일주일에 2-3회 정도 순서를 기다려 1시간 반씩 사용하도록 규칙을 정한 곳들이 많았다.[16] 해당 연도 1999년에는 동원훈련과 쌍용훈련 모두 정상적으로 이행되었다. 99년 6월에는 동원훈련을, 99년 9월에는 쌍용훈련을 각각 실시하였다.[17] 그냥 군장이 아니다. 각자 받은 보직별로 중화기까지 들고 갔다...[18] 숙영지까지 약 2-3km 정도의 거리. 거기서 작계지까지 또 3-5km...[19] 인천에 있는 자택으로 갔는데 부모님이 오히려 부대에 신고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