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기계화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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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 (구)제20기계화보병사단. 일명 양기사(양평기계화보병사단). 정식명칭은 결전부대. 경례구호는 단결, 충성을 거쳐 구호는 "결전"이다. 2019년 11월 29일 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폐합되면서 부대가 해체되었다.
2. 상세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2월 9일 한국군의 2차 증강계획에 따라 제1교육여단을 모체로 창설되었다. 창설 직후 강원도 양구군 백석산 일대를 방어하던 제7보병사단과 임무교대를 한 뒤 M-1고지 전투를 치룬다. 이후 전쟁 말기엔 미 육군 40사단을 대신해 가칠봉 일대를 방어하며 휴전을 맞이했다.
전후 창설된 제29보병사단이 해체되면서 당시 29사단의 병력은 20사단에 흡수되었다.
1981년에 보병사단에서 차량화보병사단으로 승격하였고, 다시 1983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맹호부대에 이은 두 번째 기계화보병 사단이며 서로 라이벌 관계로 인식되고있다. 현재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함께 제7군단의 예하부대로 편성되어있으며, 경기도 일대에 주둔하고 있다. 장성에 있는 육군 기계화 학교에서는 '''수기사'''와 짝을 지어 '''양기사'''라고 부르는데, 막상 이 부대 장병들은 그렇게 불리는 걸 대단히 싫어한다고 한다지만[1][2] 사실 그쪽에서 뭐라고 부르건 별 관심이 없다. 훈련이 아닌 이상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든 판에… 개중에는 양기사가 본래 명칭인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라이벌 관계(?)인지 K1 전차는 수기사에 최초 배치되었는데, K1A1 전차는 20사단에 먼저 배치되었다. K21 보병전투차량도 20기보사가 먼저 배치되었다. 덩달아 기존의 K200은 전장비 이상의 집중관리[3] 를 통해 기름과 흙먼지에 찌들은 물건을 준 A급 수준으로 만들어 제8기동사단에 인계하였다. 반대로 수기사는 계속 K200쓰는 중이다. 안습…[4] . 물론 신형 장갑차 들어온다고 고생할 뻔한 수기사 병사들은 20사단 병사들에게 애도를 표할 뿐이다(...) 그러나 2012년부터 수기사에도 K-21이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20사단이 겪은 생고생을 수기사도 그대로 겪게 되었다. 전차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아 K-2 흑표를 여태까지 시험 운행[5] 해왔는데 K-21에 이어서 흑표까지 오면 간부나 병사나 또 다시 죽어나갈 판이다. 그러나 K-2 흑표의 배치가 늦어짐에 따라 K1A1을 개량한 K1A2가 수기사에 배치되니 전세 역전. 하지만 2014년 6월부터 K-2 흑표가 20사단에 1개 중대씩 7월에 배치되었다.
이후 2018년 11월 30일에 올라온 통폐합 소식에 의하면 제20기계화보병사단이 추후 해체되고 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합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광주 5.18민주화운동 진압에 대한 보복 내지는 박근혜정권 시절 중시됐던 부대라는 점이 해체사유라고 주장하지만[6] 별다른 근거는 없다. 11사와 20사에서 어느 쪽이 해체되든 통합되면 결과물은 똑같은 상황에서 양기사가 주둔한 양평에서는 부대가 빠지기를 원하고 있었고[7] 11사단의 경우 존속을 희망하고 적극적으로 주민과 예비역이 나섰기에 11사단이 살아남은 것이다. 무엇보다 20사단이 시민군 진압에 개입한 부대라서 해체되었다면 역시 진압에 개입한 3공수, 7공수, 11공수는 해체되지 않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019년 11월 29일 해체되어 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합이 완료되고 11사단의 20기보여단이 독립하여 제20기갑여단으로 창설되었다.#
부대 마크의 의미는 4명의 병사가 서로의 방탄헬멧을 부딪치며 단결력을 돋우는 행위를 상징한다...라는 건 근래에 새로 만들어낸 구실이고, 원래 의미는 가운데의 빨간 다이아몬드가 공산주의자, 그것을 감싸 옥죄는 4개의 파란 반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화살표 마크는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자유 대한군의 진격이다. 부대 마크가 자일리톨 껌의 상표와 비슷하다고 해서 자일리톨 부대라고 부르는 병사가 많다. 이에 대해 사단인원들은 맹호부대를 치토스라며 깐다.[8]
부대해체 후 주둔지에는 제2신속대응사단 창설준비단이 주둔해 있다.
3. 신병교육대
일단 신병교육대를 20사단, 2, 3중대가 걸리면 환호성을 외치는 게 좋을 것이다. 침대는 아니지만 2008년에 지어진 침상형 막사라 매트리스 2개에 3명이 껴자는 306보충대의 참사는 잊을 수 있을 것이다. 1중대는 상대적으로 낡았지만 사단 본부대보단 나은 막사에서 생활한다(적어도 단층 一자형 막사는 아니다!). 1중대 막사는 90년대 말에 지었기 때문에 2000년경에는 이쪽이 번쩍번쩍하는 새 막사였고 2, 3중대는 건물이 다 썩어가고 있었으니, 세상 만사는 역시 돌고 도는 것. 다만 세면시설은 어느 중대나 비슷한 수준으로 조성되어 있다. 훈련병 주제에 정수기물을 떠먹을 수 있으며 10월부터는 온수를 틀어주기에 샤워통제시간 때 행동만 빠릿빠릿하면, 온수샤워를 할 수 있을 것이다.[9]
짬밥 또한 306보충대에서 갓 넘어왔다면 지옥에서 극락을 맛볼정도로 미각을 정화할수 있다. 여담이지만 2010년도에는 짬(잔반)량에 따라서 삼겹살을 지급한다는 사단장의 명령이 있었지만, 결국 훈련소에서는 꿈 같은 이야기일 뿐이라 나왔다 해도, 조교들 뱃속으로 다 들어갔을 것이다. 볼펜이나 수첩 같은 경우엔 첫날 생지부를 작성할 때 지급해주는데, 되도록이면 잃어버리지 말자.
훈련소답게 담배를 들고 왔다면 수거할 때 자진납세(?)하자. 건물 주변이나 화장실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 하면 무조건 전 중대 훈련병을 죄다 밖으로 소집해서 얼차려를 시키니 괜한 중대원 얼차려 시키지 말고 무조건 담배 내랄 때 내자. 조교들에게 걸려서 압수당한 담배는 절대 돌려주지 않지만, 수거 시 자진납세한 담배는 훈련소 퇴소 시 돌려받을 수 있다.
신병교육대인 만큼 훈련장도 막사랑 그리 멀지 않아서 이동하기도 편하지만 그만큼 '''남는 시간도 많다.''' 사격장, 각개전투 교장, 가스실 등 여러 훈련장에서 가장 가까운 것도 1중대다.
종교시설은 개신교, 불교, 천주교 3종이 선택가능하며 1중대 연병장 바로 건너편에 교회, 법당, 성당이 순서대로 늘어서 있다. 이 중 개신교 예배당[10] 은 매주 찾아오는 맛소스 찬양단이 유명하다. CCM, 찬양 등을 하는데 원곡에 비해 템포가 빠른 편이라 다른 두 곳에 비해서 분위기는 가장 신난다. 여자를 볼 수 있다는 메리트 때문에 가장 많은 훈련병들이 여기로 가지만, 다만 먹을 것은 약한 편이어서 주는 건 초코파이 하나와 음료수 한 캔뿐(…).[11] 이에 반해 불교는 떡과 과일[12] , 천주교는 핫초코와 3~4개의 초코파이가 있었다. 게다가 '''신부님이 담배를 주는 '''경우가 있어서 흡연자인 훈련병들은 눈물을 흘리며 열성 신자가 되기도 했다.
덧붙여서 2010년 천주교는 '쇼 음악중X' 과 같은 음악 프로그램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점차 개신교 불교 인원이 줄고 천주교가 거대해지는 요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다만 개신교의 경우는 아무리 줄어들어도 일정 인원수는 확보되는데 불교는 처참하게 망하는 경우도 발생..(10명 미만) 10년도 초의 경우 이로 인해 불교에서도 다른 채널의 음악 프로그램을 보여주는 초강수를 두었으나, 보여준지 다음 주에 바로 기기 고장으로 인해 방송은 방송대로 나오지 않고, 거기에 더불어서 하필 그날 분 강력한 바람으로 인해 불교 건물 입구에 있던 간판이 통째로 날라가 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훈련병들은 불교에 망조가 들었다, 불교 망했어요 라며 더욱 기피한 현상이 발생.
한가지 신교대에 관련해 흑역사가 있다면, 신교대 훈련장(영점 사격장) 부근을 지나다 보면 호수 옆에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2004년에 TNT폭파 시범교육하던 중에 발생한 끔찍한 대형사고 때문이다.
'''-20사단 신병교육대 TNT 폭파사고-'''
당시 상황은 2004년 12월 9일, 연말이라 사단에서 교탄소모로 TNT 12파운드를 소모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통상 2파운드씩 묶어서 1회 수중폭파 시범인것을 감안하면 6회 폭파시범 분량이 내려온 셈. 때 마침 각개전투 교관은 각개과목을 처음 맡게된 하사. 그리고 역시 신임이었던 중대장은 교관교류방문차 타부대 방문(사고가 나려면 날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각개전투의 마지막인 TNT폭파 시범이 끝나면 바로 점심식사가 있었기 때문에, 6회의 폭파 시범은 너무나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교관은 TNT를 도폭선으로 2파운드씩 동시에 묶어서 빨리 진행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엄청난 실수가 생긴다. 스위치를 연결한 선들이 6가닥이라 엉켜있게 되어 착각한 나머지, 물속에 넣어둔 TNT가 아닌, 다음에 터뜨릴 TNT에 격발 스위치를 연결하게 되었고, 하필 이 TNT는 희생된 조교의 손에 들려있었으니 결과는 감히 말로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격발시범을 지겨워하며 바라보는 배고픈 훈련병에게 교관은 격발 스위치를 눌러 보지 않겠냐는 자원자를 받았고 이에 한 훈련병이 자원하여 스위치를 눌렀다. 이때 상병조교의 손에들린 육지위의 TNT가 터지며 순식간에 교장은 아수라 장이 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200여명의 훈련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사망자는 각개전투 교관인 하사(사고직후 후송되었으나 10일을 못넘기고 숨졌다), 그리고 손에 TNT를 들고 있던 상병이 그자리에서 숨졌다.(슬프게도 그날이 휴가출발일이었고 생일이었다고 한다.) 또, 두 명의 교관은 지휘소 벽을 사이에 두고 있어 엄폐되어, 신체는 보호를 받았으나 고막이 터지고 및 외상후 스트레스 장해(중사1, 여군소위1), 그리고 상대적으로 거리를 두고 격발을 시도했던 훈련병 두 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사망2 중경상 4 및 이를 지켜본 훈련병들까지 생각하면 어마무시하고 심각한 사고였다. 관련 기사, 사단의 교탄소모 종용 및 지휘관의 부재, 교관의 미숙, 어이없는 훈련병 참여, 교탄 사용안전수칙 미준수 등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면 사고가 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완벽하게 만들어 진 것이다.
또 하나로 아침 점호를 받던 중 훈련병이 갑자기 쓰러져 사망한 사건도 이 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당시 매일 아침 점호 받을 때 연병장에 항상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취사장 앞에 위치한 '선웅광장'이 그 사건으로부터 유래했다. 사망한 훈련병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따 지었다. 원래는 명칭과 차광 시설조차 없던 공터였으나. 부대에서 훈련병의 부모님께 위로금을 모아 전달했는데 부모님이 이를 되돌려주며 다른 훈련병들과 부대를 위해 써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신교대 측에서는 뙤약볕 밑에서 식사대기하는 훈련병들을 위해 차광 시설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훈련병들이 땡볕과 폭우 아래서도 불편함 없이 식사 대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5부 합동 조사 이후, 사단의 교탄 과다불출 책임은 무마되고, 신교대에서 모든 책임을 떠맡아, 신교대장 보직해임, 중대장 이하 간부들은 모두 보직 재편성되었다. 이후 위험성 교탄 부사관 및 여군 사용금지, 훈련전문 교관등용 등의 후속조치가 생겼다. 사고 이후 TNT 격발 시범은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하지 않으며 수류탄 훈련 이후 클레이모어 폭파 시범만을 보여주고 있다. 사망한 교관인, 하사의 부모님의 직업이 석공이었으며, 이를 슬퍼한 나머지 위령비를 만들어 해당 부대에 세웠다.
여담으로 20사단 신교대는 과거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 때 삼청교육대였던 곳이었다.(신병교육대와 같이 있는 사단 직할대대로 정찰대가 있는데, 정찰대 있는 자리가 바로 舊삼청교육대 자리.
20사단 훈련소 출신(20사단 정식 복무자 제외)으로 유명한 사람으로는 1중대에서 훈련받은 박진영, 3중대에서 4주군사훈련을 이수한 차두리, [엠씨스나이퍼]배우 박정진, 싸이로 알려진 박재상, 그리고 엠투엠의 손준혁 등이 있다.
2019년 11월 29일 사단 해체로 신병교육대도 해체되었다.
4. 예하부대
4.1. 직할대
- 본부대
- 공병대대
별칭 : 맘모스대대
1995년 K1 AVLB(K1 교량전차) 실전배치됨.
직할대 중 양평 시내랑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그만큼 휴가나 외출 외박에 용이한 지역에 있다. 또한 2012년에 지어진 신막사로 침상이 아닌 침대로 이루어져 있어 부대 환경은 가장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 기계화보병사단에 각 여단의 훈련을 지원해주어야 하는 부분으로 이전에는 군용트럭을 사용하였으나[13] 빠른 기동력이 요구되어 각 분대별 K200 장갑차가 배치되어 있다.
1995년 K1 AVLB(K1 교량전차) 실전배치됨.
직할대 중 양평 시내랑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그만큼 휴가나 외출 외박에 용이한 지역에 있다. 또한 2012년에 지어진 신막사로 침상이 아닌 침대로 이루어져 있어 부대 환경은 가장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 기계화보병사단에 각 여단의 훈련을 지원해주어야 하는 부분으로 이전에는 군용트럭을 사용하였으나[13] 빠른 기동력이 요구되어 각 분대별 K200 장갑차가 배치되어 있다.
보수대대 옆 정비대대와 이웃해 있다. 때문에 보급계 및 관련 행정병들이 도보로 넘어가서 업무처리를 하기도 한다.
다수의 건설장비를 보유하여 사단 내 모든 공사 및 종훈장 공사필요시 조작병들이 파견나가 근무한다.
공병 주특기 훈련 등 전투중대 훈련량이 많으며 대체로 본부중대는 일과 업무가 있으므로 훈련량은 낮은 편이다.
- 정비대대
정비대대는 대대지만 일반지원 중대만 대대에 있으며 1,2,3중대는 근접지원중대로 각 여단에 장기 파견 중으로 모두 떨어져있다. 일반지원중대로 간다면 근무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보급수송대대
- 정보대대
뛰어라! 보아라! 살아라! 최강정찰대
- 2019년 10월 18일 해체, 1,2,3,본부중대 중 2중대는 11기계화사단에서 독립기계화여단으로 변경되, 3군단직할 배속 변경되는 20기계화여단 정찰중대로 모체로 배속변경되며, 주둔지는 11사단 구:신교대에 보충중대 주둔했던 곳에 위치
- 2019년 10월 18일 해체, 1,2,3,본부중대 중 2중대는 11기계화사단에서 독립기계화여단으로 변경되, 3군단직할 배속 변경되는 20기계화여단 정찰중대로 모체로 배속변경되며, 주둔지는 11사단 구:신교대에 보충중대 주둔했던 곳에 위치
- 의무근무대 [14]
- 기갑수색대대
- 20차량화보병사단시절 사단직할독립전차중대 (보병사단 전차중대)에서 기갑수색대대로 변경
- 2019년 11기계화사단 기갑수색대대와 통합/해체
- 2019년 11기계화사단 기갑수색대대와 통합/해체
인원에 비해 관리하는 지역이 많아 작업량이 많기로 사단에서 손꼽힌다. 사단 사격장[15] , 사단 유격장, 전적비 모두 수색대 관할이며 특히 눈이 쌓이면 저 장소의 눈도 치워야 한다.
수색대 막사 리모델링 작업을 했는데, 리모델링 전의 구 막사는 중대 화장실 변기 절반이 복구 불가 상태였고, 그나마 작동하는 변기도 심심하면 막히는 상태였던 것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목욕탕도 대중 목욕탕 수준으로 리뉴얼 되었다.
- 정보통신대대
- 헌병대
- 화학대 → 화생방지원대(화학대에서 화생방지원대로 명칭이바뀌었다.)
- 신병교육대
2019년 해체, 타부대 주둔
- 방공대대[16]
직할대 중 유일하게 넘버링이 붙어있다. 부대 별명은 대대장이 바뀔때마다 변경된다. 총 4개 중대로 이루어져 있다. 2018년 12월부로 제60여단은 26사단이 8사단에 흡수개편되면서 60여단에 위치한 3중대 전병력이 부대로 복귀했다[17]
3개의 방공진지가 존재하며 덕분에 진지로 항상 인원이 차출된다. 본부대에도 방공반인원을 파견보내다보니 부대내에 근무를 설 인력이 부족하다.[18] 거기다 진지에 가더라도 그곳 역시 근무가 말도 안 되게 많기 때문에 괴롭다. 또한 지원을 자주 나가기 때문에 훈련도 굉장히 많으며 훈련인원을 보내고 난뒤 중대는 근무가 더더욱 헬이 되어버린다. 보통의 다른 부대 같으면 운정병은 보통 근무를 빼주는데 여기는 그런 거 없다. 급한 운행이면 근무를 조치해서 가야된다. 근무인원이 빡빡하니 근무짜는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셈. 부대 경계구역도 탄약고 위병소에 추가로 유류고초소가 있기 때문에 힘들다.[19] 이 인원으로 근무가 돌아가는 게 신기할 정도. 오죽하면 근무취침한 병장당직병이 그날 야간 근무를 들어간다. 병사들도 근무에 예민해서 조금만 싸이클이 잘못되거나 근무에 빠진인원이 있으면 반감을 들고 따지러 온다. 갑자기 근무자 한명이 급한운행이나 업무로 빠져버리면 보통 다른 시간대 근무자랑 근무조치를 하는데 그렇게 하지도 못할 경우엔 근무짜는 간부나 그 날 당직병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근무 때문에 외박, 외출, 휴가 또한 조정해야하므로 행정병도 스트레스가 심하다. 거진 근무만 서다가 전역하는 병사도 수두룩. 다른 부대와 비교했을 때 여기보다 많은곳은 본 적이 없다. 중대별로 근무는 차이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근무이야기는 항상 나온다.
1개월 동기제에서 선진병영문화 정착을 의미로 2018년 말에 3개월 동기제로 바뀌었다. 생활관도 동기제 생활관으로 바뀌었다. 부대의 엄청 큰 파장이다. 계급간 부조리는 거의 없어졌고 병사들 간 아랫계급을 간섭하는일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동기 내에서의 신고가 많아진 것 같다. 이 부분은 모든 부대가 비슷할 듯.
막사가 굉장히 오래되었지만[20] 2017년 여름 에어컨이 설치되어 그래도 살 만해 졌다. 막사내 본부중대에만 전자렌지가 있는데 대회에서 상으로 받아왔다고 한다. PX는 깔끔하고 전자레인지도 넉넉하다.
주 무장은 발칸과 비호, 그리고 복합 비호로 짬뽕 되어있으며 간부에 의하면 육군 방공 병과 중 유일하게 지상사격을 꾸준히 하는 부대이기 때문에 실제 전투력도 수준급이라고.
도심 중간에 있어서 많은 차량이 부대 앞에 차를 대거나 유턴을 하기도 하고 가끔 취객을 상대하기도 하기 때문에 위병소 근무자들이 정말 고생한다. 시내가 근거리 이여 외출 외박 시 이점이 있으며, 걸어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어, 타부대보다 휴가가기는 나쁘지 않다.
종교시설은 기독교는 영내에, 천주교는 근처 민간 성당, 불교는 수색대 불교를 가게된다. 하지만 인원이 적어 종교활동 때도 트럭을 타고 방탄을 착용한 채로 이동한다. 눈이 오나 비가오나 마찬가지. 전체적으로 직할대 중 화생방지원대와 함께 손꼽히는 열약함을 보여준다.
4.2. (8사단으로 예속 전환)
4.3. (구)61여단
4.4. (구)62여단
- 제109기계화보병대대 백마대대 네이밍이 유치하지만 넘어가자~~
1982년 제62연대 1대대가 207차량화보병대대로 창설
1986년 109계화보병대대로 창설 (207+208차보대 해체)
2019년 12월 01일부로 해체와 동시 창설되는 군수지원대대의 모체로 변경, 62여단 본부 주둔지로 이전 (62여단본부 주둔지에는 7군단 예하 7공병여단도 이전 주둔)
* 제111기계화보병대대 무적번개대대 [21][22]1986년 109계화보병대대로 창설 (207+208차보대 해체)
2019년 12월 01일부로 해체와 동시 창설되는 군수지원대대의 모체로 변경, 62여단 본부 주둔지로 이전 (62여단본부 주둔지에는 7군단 예하 7공병여단도 이전 주둔)
1983년 제60연대3대대가 제111기계화보병대대 창설
2004년 3중대 이라크 파병
2019년 12월 01일부로 11기계화보병사단 편성변경
2004년 3중대 이라크 파병
2019년 12월 01일부로 11기계화보병사단 편성변경
- 제31전차대대 비호
1983년 62연대 2대대 주둔지에서 제31전차대대로 창설
1995년 하반기 K242 4.2인치 박격포 차량 실전배치
1995년 하반기 화기소대(대대지원 4.2인치 박격포) 창설
2019년 11월30일 부대해체
62여단은 111기보대대를 제외한 여단본부 포함 부대 해체1995년 하반기 K242 4.2인치 박격포 차량 실전배치
1995년 하반기 화기소대(대대지원 4.2인치 박격포) 창설
2019년 11월30일 부대해체
여단 주둔지는 사단본부와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위치에 있다. 2008년 이전에는 군용 텐트를 지휘통제실로 사용했다는 도시전설급 이야기가 있었으나 2008년 이후 신막사가 들어서 사단 내 시설은 뛰어난 편이며, 전투력으로 유명한 여단이다. 기본적인 시설이 좋다 보니 내무 부조리는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장점도 있다.
여단본부에서는 수송, 통신, 본부, 참모 등 인원을 제외한 경비소대가 부대의 작업을 담당한다. 말이 소대지 경계근무나 휴가 등으로 인원이 빠져 실질적으로는 분대 규모로 작업을 하기에 부대 전체 업무를 담당하기엔 감당하기 벅차다. 따라서 대대에 협조를 요청한다곤 하지만 대대와 여단의 특성상 소속병사의 머릿수와 주임원사의 짬밥 차이가 나기 때문에 많은 작업과 경계 임무를 대대로 떠넘기는 둥의 사소한 문제가 있다. 주둔지를 같이 쓰는 109대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는 X빠지게 작업하는데 여단 저놈들은 5대기도 안 해, 야간 경계도 안 나가, 취사장도 안 치워, 주둔지 정비도 안 해, 그런데 지들끼리 대체 뭘 하는 거지?'인 셈. 최근에는 위병소 주간근무도 대대 측이 근무서게 되면서 여단 쪽이 외곽근무를 서는 건 여단탄약고뿐. 하지만 여전히 여단 내에서 막 굴리기 좋은 병력은 이 1개 소대뿐이다. '그럼 나머지 병사들은 뭐냐?'라는 의문이 생길지도 모르나 그들은 중대 단위로 여단에 파견 온 직할대원들이라 자기들의 지원임무 및 야간 근무 외에는 관여를 안 한다.
그래도 여단본부에 파견의무중대가 붙어있어 심하게 다쳤을 시 치료여건은 다른 예하대대에 비해 좋은 편. X레이 검사장비라든지 여타 치료 물품에 있어 대대 의무실과의 차이가 확연하다. 중환자가 발생했을 때 다른 대대가 앰뷸런스에 환자 싣고 사단의무대까지 가야할 때 이 대대는 일단 의무중대에 올라가 보면 웬만한 건 다 처치 끝난다.[23]
111대대는 일정 빡빡하기로 소문난 62여단에서 가장 빡세기로 유명하다.[24] 병영 프로젝트 완공이 2012년에 완료되어 시설은 사단 내에서 최고급이라 꼽히긴 하지만 정작 설치해놓은 에어컨[25] , 통풍이 잘 되도록 설계하여 겨울에는 생활관이 영하의 온도를 유지하는 등 매우 추워 믿지 못하겠지만 침낭번데기가 되어 취침을 취한다. 차라리 구막사는 온돌이라 뜨끈하기라도 했지...겨울에는 1층에 위치한 1중대는 칼바람에 얼어죽을 지경이고, 여름에는 3층에 위치한 3중대가 쪄죽는다. 3중대 위가 옥상이라 한낮에 달궈진 콘크리트의 열기가 밤에도 뿜어져 나와 가장 덥다.
신막사 건축 당시 3중대 구막사는 헐렸기 때문에 몇 년간 컨테이너 막사에서 생활하였다. 다만 공사 도중 건축회사가 '부도' 나버리는 악재가 있어 시공사를 재선정하는 과정을 거치느라 공사가 중단되어 '꿈의 신막사'는 오랜기간 '흉물'로 방치되어있었다.우여곡절 끝에 완공되어 2011년 12월 신막사로의 입주를 시작하였다.
컨테이너 막사가 보기에는 불편할 것 같아도, 내부에 에어컨과 전기장판이 시공되어있어 전 중대 막사 중에 가장 좋았다. 어느정도였냐면, 더운 한여름 밤에도 에어컨을 춥게 켜고, 동시에 바닥의 전기장판으로 바닥을 뜨뜻하게(...) 하는 전기 낭비가 가능했다. 다른 중대 막사였다면 꿈도 못 꿀 상황. 게다가 간부들이 컨테이너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생활관 내에서 뭘 하는지 알 수 없어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었다. 대신 샤워장과 화장실이 많이 불편했던 게 사실이다.
최근 진짜사나이에 방영된 부대. 이전 당시만 해도 폐급의 구막사를 안 써도 된다며 다들 좋아했지만 막상 이전을 하고나선 컨테이너에서 지내던 3 중대를 제외하곤 폐급의 구막사를 그리워하는 여론이 많았다. 차고지까지 거리 늘었지, 타 중대랑 같은 건물을 사용하여 마주치는 간부늘었지, 노래방 등 여가시설이 모두 공용이 되어버렸지, 침대, 관물대 빼곤 나아진 게 없지, 선진병영프로젝트랍시고 14개 생활관에 같은 계급끼리 쑤셔박아버리고생활관마다 분대장 개념(생활관 실장이라고 부른다) 비슷한 병사를 두어 할당량은 더 늘어 말이 엄청 많았다.
2010년 여름 하천에 떠내려가던 노인을 몸소 강에 뛰어들어 유명해진 임국선 현 2작사 부사령관이 111대대의 대대장 출신으로 이 대대에 엄청난 애정을 가지고 있어 20사단장 시절 신병영프로젝트 당시에는 다른 대대, 여단으로 작업을 전부 떠넘겨주고[26] 군단장 부임이후 이 대대의 부대 개방행사 때는 '''직접 방문'''해서 거울과 시계를 선물할 정도. 참고로 나무를 심는 작업을 진행할 때 '''군단직할 공병대가 왔다.''' 덕분에 이 대대로 넘어갈 작업을 어거지로 대신 수행한 타 대대 간부, 예비역병사들이 111대대보다는 임국선 장군을 정말 싫어한다(...) 2012년 호국훈련 당시 뉴스 및 기사에 나온 곳이 이 대대의 1중대이다.
109대대는 신막사 개선이 되지 않아 여단 내에서 최악의 시설을 자랑(?)하고 있다. 여단본부와 같은 주둔지를 이용하는데, 그 덕분에 업무 분담의 문제가 생겨 109대대의 병사와 여단병사들간의 사이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여단의 고질적인 인원부족과 시설 공유 문제.
그 외의 문제로109대대는 여단본부와 저수조를 공유하다보니 단수가 심하다. 예기치 못하게 물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 시간에 물을 틀어준다고 하는 것이 맞을 정도의 수준. 아침, 밤에만 물이 나온다. 이상하게 대대는 단수시켰는데 여단본부는 물을 틀어줄 때도 많은데 이는 저수조는 같이 쓰지만 물을 퍼올리는 심정 펌프가 따로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단본부는 낙뢰 상황을 제외하면 물(온수!) 사용과 세탁기 사용에 거의 제약이 없다.상술했듯 109대대와 여단본부 간 견원지간이 된 이유 중 하나. 때문에 세탁기같이 물이 관련된 시설에 대한 부조리가 심하다. 2014년 7월부로 상수도공사 실시 예정이지만 25일 현재까지 감감 무소식.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대 인원이 대규모로 씻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 여단 목욕탕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 또 다른 공유시설은 다름 아닌 PX. 가뜩이나 규모도 크지 않은데 전자레인지도 부족해 냉동 한 번 제대로 먹기 힘들다.
31대대는 여단 본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부대로 여단본부에 이어 2번째로 병영프로젝트가 완료된 부대. 덕분에 초창기에는 타 대대의 부러움을 샀지만 타 대대 또한 병영프로젝트가 완공된 현재 가장 구린 시설을 자랑한다(...). 전차대대 특성상 인원이 모자라 경계지옥이 펼쳐지지만 장점이 하나 있다면 타 부대가 유격 혹은 전술 훈련등으로 부대를 비우게 되면 경계전담 파견을 나가지 않는다.
2019년 11월 30일 사단 해체로 여단이 해체.
4.5. (구)포병여단(11사단으로 통합)
- 여단본부
홍천에 있는 11사단 포병여단본부 해체, 20사단 포병여단 존속으로 2019년 12월 01일 11사단 배속변경
- 제69포병대대 맹호 (18년 12월 부대해체 후 대대원 인접, 91대대 78대대로 분산)
- 제70포병대대 백곰 (19년 11월 부대해체 후 대대원 인접, 91대대 78대대로 분산)
- 제78포병대대 승리
2019년 12월01일 11기계화사단 배속변경
- 제91포병대대 백호
2019년 12월01일부로 11기계화사단으로 배속변경
주둔지는 경기도 양평 지역으로, 사단본부를 중심으로 각지에 분산되어 있다. 포병여단 예하 대대는 사단예하 여단들과 직할대 사격지원 역할을 한다. 69, 70, 78 대대가 각각 60, 61, 62여단의 사격 지원을 맡고, 91대대는 직할대 및 다른 여단의 요청이 있을 때 지원도 들어간다. 자연히 91대대는 훈련량이 무지막지하게 많다. 여단 훈련이 있을 때에는 해당 여단 지원 포병 대대가 같이 훈련을 나가게 되는데, 이때 사단 정찰대라도 훈련에 포함되면 91대대는 무조건 같이 나간다. 사단 전체 훈련일 때는 물론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여도 보병 여단에서 추가 화력 지원을 요청하면 얄짤없이 불려나가는게 91대대이다. 훈련량이 많다는 제7기동군단 중에서 20사단, 그중에서도 91대대는...정말 훈련이 많다. 4개 대대 중 가장 늦게 K-55자주포를 받아왔으나 2009년 가장 우선 K-9 신형 자주포 변경91포병대대는 신막사이므로 포병여단 예하 대대 중 가장 시설이 좋다. 완공년도는 2010년 8월이었다. 이때 완공식하느라 10년 군번이 고생했다. 또한 최신 자주포인 K-9이 배치되어 있다. K-9이 가장 먼저 전력화된 이유도, 91대대가 사단 직할대 및 다른 여단의 추가 지원을 맡는 대대이기 때문이다. K-9이 전력화될 때의 일화를 소개하자면, 원래 91대대는 본부포대와 차리 포대가 함께 있고, 알파/브라보 포대는 독립 포대로 떨어져있었다. 그런데 K-9을 운용하려다보니 알파/브라보 포대의 주둔지 입구가 좁아서 K-9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포병 대대와 주둔지를 바꾸면서 대대가 하나로 모이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주둔지가 넓고 다른 대대와 달리 주둔지가 눈에 잘 뛰는 37번 국도변이 아닌 지방도에 위치해 눈에 잘안뛰어 전력노출이 적은 69대대와 2009년에 주둔지 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래저래 밖으로 보여지는 얼굴 마담격이라 가장 시설이 좋다. 20사단 포병교육대 훈련도 91대대에서 받는다. 하지만, 훈련병들은 컨테이너박스에서 지낸다.
69포병대대
18년 모월 모일부로 부대가 해체되었다. 독립,본부포대 모두 해체되었으며 남아있던 장병들은 다른 대대로 뿔뿔히 흩어졌다.
70포병대대는 포병여단 예하대대 중 가장 시설이 좋지 않다. 영화 실미도에 나왔던 그러한 모습의 통합막사라는 사실...(1내무실-포반-에 신병 전입 간 날 내 위로 50명이 같은 내무실을 썼었다.) 요즘은 대부분의 신교대 건물이 복층이라 단층 막사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곳은... 그냥 부대 전체가 단층 건물들로 이루어져있다. 7~80년대에 지은 기존 단층막사에 샌드위치판넬을 사용하여 이곳저곳 확장한 형태다. 2015년 말 이등병생활관이 각 포대별로 신설되었다. 물론 정식건물이 아니라 컨테이너다. 그래도 에어컨, 전기온돌은 있다.
특이하게도 부대 내에 포병종합훈련장이 있다. 70포병대대는 비가오거나 눈이오거나 대대전술훈련은 여기서 진행한다. 이 훈련장이 참 별로인게 여름에는 덥고 습하고, 겨울에는 그냥 무조건 춥다. (남한강 바람이 시원할거라고 생각하는건 경기도 오산이다) 2006년도에 C포대에서 휴가자 미복귀 및 자살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다. 당시 소문에는 군 부적응자라서 사고가 났다며, 일명 '관심병사'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70포병대대 근처에는 7군단 1000대대가 있다.
포병여단은 예하 대대의 지역이 넓게 퍼져있어 대대마다 외출가능 지역이 다르다. 포병여단 본부는 다른 여단본부들과 다르게 주둔지에 대대를 예하에 두지 않고, 독립중대 형태로 위치하고 있는데 문제는 주둔지 사이즈가 다른 대대들과 비슷하다! 사람은 오지게 없는데 땅만 큰 격. 여단본부 행정병을 제외하고는 사시사철 작업에 시달린다 보면 된다. 눈오는 날은 제설작업 비오는 날은 배수로 까는 작업, 해뜬 날은 제초 및 나무가지 정리 등. 영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 밖에도 정리한다. 여단장 관사 및 군인아파트가 부대 뒤에 위치하기 때문. 게다가 사람이 없는 만큼 근무도 많다.
20사단의 다른 여단들은 정훈병과가 지휘부 소속인 데 비해, 포병여단은 작전과 소속이다. 영내 야근 및 외박(...)을 자주 할 수 있게 된다.
여단 본부를 신막사로 건설하던 중 건축사가 도산해서 여단 본부 인원들이 오랫동안 컨테이너에서 지내야 했다.
5. 출신 인물
5.1. 사단장
육군사관학교 32기. 소장 시절 사단장을 역임. 그 당시 직속상관인 제7기동군단 군단장이 육군사관학교 2년 선배인 김근태였다. 천안함 침몰원인 규명 시 북한군 어뢰 추진체를 발견하여 대장 진급 후 전역.
소장 시절 사단장을 거침.
학군 17기. 2014년 2작사 부사령관직을 끝으로 중장 전역하였다. 소장 시절 사단장을 역임했다. 2009년 7월 예하부대를 순시중 양평군 흑천에서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노인을 발견하자 사단장이 직접(!) 하천으로 뛰어들어 구한 일이 유명해지기도 했다. 기사 전문 학군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가장 대장 진급이 유력한 인사였으나, 소위 시절 특전사에서 부중대장을 지낸 이력이 발목이 되어 소대장 보직이 없어서 중장으로 예편해야만 했다. 대장이 되려면 소대장부터 군단장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하며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육군3사관학교 16기 출신으로 임국선 2작사 부사령관 후임으로 2010년~2012년까지 소장시절 사단장을 역임했다. 사단장 있던 시절 병영생활 부조리 개선에 많이 신경썼다.# 이후, 육군기계화 학교 교장을 거쳐 3스타로 제3군단 군단장 지냈으며, 현재 육군 교육사령관을 끝으로 예편.
육군사관학교 44기. 2018년까지 사단장을 역임했다. 중령 시절 7군단 작전처 작전계획과장을 역임했다.[33] 키가 황기철 前 해군참모총장 뺨치게 크다. 작전계획과장 시절 이름이 비슷한 강인철 당시 중사[34] 가 7군단 강습대대 3중대 3소대 부소대장으로 있었는데 간혹 그 둘의 이름을 헷갈리는 사람도 있었다.
5.2. 장교/부사관
- 유효일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62연대 3대대장 역임. 이후 보병 제25사단장, 육군대학 총장, 국방부 동원국장,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분과위원, 비상기획위원회 사무처장 등을 거쳐 참여정부 때인 2004년에 국방부차관으로 임명됐으나, 후술할 논란으로 인해 2005년 사임함.
現 제51보병사단장. 중령시절 107기보대대장을 역임함.
M-1고지 전투 당시 60연대장이었다.
5.3. 병
예하 모 전차대대 행정병 출신. 진짜사나이 동반입대 특집에서 밝힌 바 있다.
61여단 예하대대 운전병으로 병장 만기전역.
래퍼 자메즈. 62여단 109기보대대 병장 만기전역.
신교대를 본 사단에서 수료했다. 자대는 불명.
6. 기타
6.1. 훈련
'''빵사단과 더불어 훈련량은 전군에서 톱으로 뽑힐 만큼 토나오게 많다.'''
기계화부대이다보니 기동훈련이 중심이다. 중대 ATT, 대대 ATT, 여단 BCT, 군단 FTX를 전부 전차/장갑차 몰고 나가서 뛰어야 하고, 종종 전차와 기계화보병간의 상호배속훈련, 수기사 훈련에 대항군으로 동원되는데 이건 정규 훈련일정에 없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전차/장갑차 숙달훈련/탄약 적제 훈련을 실시하고 기동 연습을 하는데 역시 훈련 일정에 없다. 그리고 어쨌든 '보병사단'이므로 가외의 일정을 잡아 행군도 시킨다. 게다가 K-21로 인해 부사관이 소대마다 무식하게 많이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근처의 특전부대 침투 훈련에도 비정기적으로 참가하여 밤새 차단선을 펼쳐 훈련을 도와주기도 하고 역으로 사단의 경계근무 검열을 위해 각 대대로 침투하기도 한다.
장갑차 숙달 훈련의 경우 비 주기적으로 도로주행 훈련을 실시하여 조종수, 부 조종수의 기량을 평가하기도 한다.[35] 이때는 대대 자체 훈련[36] 이라 중대마다 수십 명씩 호출하여 주요 사거리등에 배치[37] 하여 교통 통제 등을 하게 된다.
주된 일과는 기동장비 정비 및 교육훈련. 장갑차, 전차는 보유수가 제법 되는지라 정비계획 잘못 짜면 심히 곤란하다. 1개 소대에 단차가 넷 붙는데, 단차 하나에 K6 중기관총과 M60 기관총[38] 이 각각 1정씩 있어 전투지휘검열 때 단차와 총기를 기름목욕시켜주다보면 24시간도 모자란다. 탄약은 많이 나오는데 정비 위주로 시간을 잡아먹다보니 막상 사격을 나갈 시간이 부족하여 최소 4박 5일의 일정을 잡아 종훈장으로 가서 왕창 갈겨버리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종훈장 야산은 불도 잘 난다.(...) 게다가 종훈장은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비온후 훈련장으로 가는 건 조종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종훈장 부근에는 대대와 사단 예하 직할대대가 포진하여 기간병들은 매일 포성소리를 들을 수 있다. 국방부에서는 전차/장갑차/자주포 다루는 부대라 좀 있어보이는 사진을 많이 뿌리지만 실제는 기름과 흙먼지에 쩔어 산다고 보면 된다.K-21이 배치된 대대는 장비교육도 받아야 하고 이것저것 테스트 하는 입장인지라 더욱 골치아프다.
전차대대의 경우엔 부족한 인원+많은 경계소초 때문에 GOP만큼은 아니지만 평소엔 근무지옥을 맛볼 수 있다. 한 중대에 병사가 15~20명 남짓인데 이 인원으로 초소 2개를 복초로 24시간 돌리니 상상이 갈 것이다. 불쌍하게도 훈련만 되면 전차 위에서 취침한다. 시동을 끈 상태에서도 전차엔진의 열기는 한겨울에도 매우 오래간다. 혹한기 훈련때에도 방수포를 덮개로 쓰고 침낭에 들어가면 핫팩도 필요없고, 덥다고 난리친다. 단, 여름에 대대, 여단, 사단전술훈련 시 쪄죽는 거 아니냐 우려할 수도 있지만 이때는 짱박아놓은 더블백에 텐트를 싸간다(...) 편제상 텐트가 있긴 하나 군장에 들어가지 않는 고로 여름을 제외하곤 대부분 안 가져간다.
2012년 전후로 훈련난이도가 이전보다 엄청나게 빡세졌다. 후술할 사단장의 주기행군 완전부활과 실전기동훈련, 무식한 양의 국지도발 예행훈련이 추가된데다 훈련 시 위장마스크 착용이 금지, 안면위장 크림은 기본이고, 심지어 방탄, 전투조끼까지 최대한 위장 등...
6.1.1. 유격
유격 훈련장[39] 은 용문산 용문사 관광지 바로 옆에 있는데 유격장으로 통하는 길목에는 식당과 펜션들이 늘어서 있어 유격행군 시 민간인이 구경하기도 한다.[40] 야간 유격장 입구에서 근무를 서게되면 정면에서 벌어지는 바베큐 파티를 관람해야 하는 고문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막타워는 안전 문제로 2009년 이후로 폐쇄되었고 용문산 산악등반으로 대체하고 있다.
요새는 대대에서 전역자들에게 회수한 전투복을 돌려입는지라 예전처럼 파병부대가 입었던 사막위장 패턴 전투복이나 해병대 전투복은 나오지 않으며,[41] 계급 역전현상 또한 막기 위해 위장테이프로 전부 가리거나, 오바로크를 뜯으라 지시한다. 용문산은 국립공원이 아닌 관광지인 지라 길이 잘 닦여 있으며 놀이기구도 있어 소풍 온 기분을 만끽할 수도 있다. 그 뒤론 본격 산악등반. 바위산이고 높이도 높은지라 만만하게 보면 큰코 다친다. 장애물 코스에 있는 샛길을 통해 관광지로 들어가는데 주변에 경고표지판이 있긴 하지만 통로가 개방되어 있어 실수로 유격장으로 들어오는 민간인들도 있다. 취사장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연병장이 보이고, 연병장 좌측으로는 기다란 언덕을 통해 숙영지로 올라갈 수 있다. 예전에는 유격 훈련전 작업인원들이 두돈반을 타고 올라가 일일이 24인용 텐트를 각 대대 병사들이 치고 철수하였으나, 2010년경 사단장의 명령으로 숙영지 터마다 공구리를 치고 24인용 텐트는 항시 설치가 되어 기갑수색대대에서 관리, 감독한다. 참고로 유격장 주제에 샤워장(!)도 있지만 시설이 워낙 좋지않고[42] 온수는 매우 부족하여 훈련소 시절처럼 유격 조교와 교관들의 통제하에 30초 물 묻히기, 30초 거품내기 등의 흠좀무한 통제 샤워시간이 존재한다. 그래도 유격장에서 매일 샤워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간부들과 친하면 취사장 옆에 일명 선녀탕이라 불리우는 계곡이 있어서 홀딱 벗고 씻기도 한다. 이 외에도 유격장 내에는 폐창고, 간이 땅굴 등이 있어 야간훈련이랍시고 담력테스트를 실시해 이등병들의 혼을 쏙 빼놓기도 한다.[43]
이후 2010년 사단장 교체 이후인 2012년, 유격조교 선발기준이 바뀌었는데 유격대장이 각 대대에서 인원을 선발해서 뽑아갔다. 즉슨, 유격파견으로 포상은 포상대로 먹고, 유격조교질을 약 8개월 가까이하다가 다시 해당 대대에 들어가서 군생활을 한다. 하지만 대다수가 자대배치를 받은 이등병에 최고선임이 갓 상병을 단 상물이라 유격받을 때 말년병장이나 고참급들까지 이젠 이등병한테 신나게 굴러야한다며 뒷담을 까기도. 하지만 2012년 5월 초, 예하 포병대대 중 한 곳이 명령을 무시하고 유격조교 인원을 파견했다가 유격훈련 중인 모 대대를 방문한 사단장에게 걸려 개박살나고 유격조교훈련을 받은 인원들은 강제로 연대복귀한 전설이 있다.
2015년 유격장 내 샤워장이 공사 중에 있었으며, 2016년 완공되어 훈련 후 '''따뜻한''' 샤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제한시간 3분.
1987년 이전까지는 유격훈련과 더블어 공수훈련도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전반기 훈련이 공수훈련이면 후반기엔 유격훈련, 그리고 그 다음 해 유격훈련 - 공수훈련으로 바뀌었다. 이 훈련은 87년까지 진행되었으며 현재 신병교육대 대강당 자리가 있는 곳이 공수교장이었다. 당시 사단 수색대에서 차출된 병사가 공수교육 위탁으로 교육받고 사단공수 교장에서 공수 조교로 활동했으며 평상 시에는 논산군번 내부반장으로 업무수행(1980년대 당시 논산군번은 4주 교육 후 20사단 배치 시 자대로가기 않고 여기 신병교육대에서 2주 동안 군기 교육을 받았다.) 후 자대로 배치받았다.
공수훈련 일주일 교육 후 100킬로 행군(받으러 갈 때도 행군으로 갔다.)으로 부대복귀를 했고, 추가로 1985년도 이전까지는 1년에 2번 200킬로 행군 진행했으며 100킬로 행군은 1년에 최소 3, 4회 이상 진행했다. 1983, 84년 군번들은 전역 때까지 2,000킬로~1,500킬로 행군 후 전역했으며, 200킬로 행군은 1986년부터 유야무야 폐지되었다. 참고로 이것은 포병기준이니 보병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외 훈련은 매년 9월 유격 훈련을 기점으로 그 다음 해 3월 말까지 훈련을 하여, 부대 내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덧붙여 지금의 20사단 훈련은 그때와 비교하면 유치원 수준이라고...
6.1.2. 행군
행군의 경우에는 주기적으로 실시하다가 2009년 사단장 왈 "기계화부대인데 왜 행군일정이 이리 빡빡하냐, 조정해라" 이 말 한마디에 행군을 몇 달에 한 번, 심한 곳은 아예 실시하지도 않았으나 2010년 말(호국훈련 끝나자마자 새로부임), 새 사단장이 부임하고 1년 후부터 신년맞이 행군을 하더니 부활시켜 버렸다. 사단장 왈 "장갑차 퍼지면 니들은 행군 안 하냐??" 사단 본부에서 행군량을 한 번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110대대가 '''압도적으로''' 1위했다고 한다... 정찰대도 110대대를 따라 잡지 못했다.[44]
6.2. 부대 영상
6.3. 사단가
1절
보아라 우리는 무적의 용사다
겨레와 나라 위해 일어선 우리
물이나 불이나 거칠 것이 있으랴
돌진하는 우리 앞에 승리 뿐이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사여
빛나라 영원히 이십 사단
2절
나간다 우리는 용맹을 떨친다
삼천리 아름다운 내조국 위해
선봉은 내가선다 당할자가 누구냐
다하리라 이생명 승리의 날까지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용사여
빛나라 영원히 이십 사단
-20사단가
7. 사건사고
7.1. 흑역사
본래 20사단은 경기도 연천에 있었던 부대로 최전방 부대였다. 그런데 1977년, 연천 전곡리에 예하부대 62연대 1대대 대대장 유운학 중령이 무전병과 함께 '''월북'''하는 대형사고[45] 가 발생 후 사단 전체가 후방으로 이동 (경기도 연천 → 강원도 춘천 → 경기도 양평군) 했고, 20사단이 이동한 자리에 주둔하고 있던 5사단이 20사단 담당구역을 맡게 되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주도 신군부의 정권장악 주력부대였다. 당시 하나회 주력멤버 중 하나였던 소장 박준병이 20사단장에 있었다. 만약 쿠데타군 측 주요부대와(1, 3, 5공수여단 및 9사단, 30경비단) 진압군 측 장태완 소장의 수경사(現 수방사) 병력, 9공수여단 병력이 본격적으로 격돌할 경우 곧장 서울로 추가투입 되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장태완 소장의 결단으로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서울 시내 국군 간 대규모 유혈참사는 피할 수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현재 기보사단으로 전환된 사단 중 상당수가 12.12사태 때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부대들이다. 예를 들어 30사단은 쿠데타군의 선봉이었던 1공수여단의 서울진입을 방조하였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으로 미국으로부터 병력이동을 승인받고 포병여단을 제외한 예하 연대(현재는 여단) 병력 전부와 포병 1개 대대가 투입되기도 했다. 다른 5.18 당시 광주의 공수부대와 마찬가지로 이 당시 20사단 군인들도 정상인들이 아니었는데, 이들은 "병원에 빨갱이가 있다는 소문"만 듣고 '''피아 확인도 없이 민간 병원 창문에 민간인들이 맞거나 말거나 총질을 해댔다.''' 가히 '''정규군 보병사단이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 오합지졸 반군이나 보일 만한''' 추태.
때문에 관련 역사를 알거나 집안에 5.18 관련자가 있는 병사들은 20사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2010년경에도 광주, 전남 출신 20사단 장병들은 휴가갈 때 사단마크를 떼고 내려갔으며 한 소위는 20사단 마크가 붙은 전투복을 입고 휴가를 갔다가 광주에서 택시기사가 승차거부를 한 적도 있다. 비슷하게 진압군으로 투입되어서 무차별 학살을 벌인 특전사(특히 직접 학살을 벌인 3, 7, 11공수)는 사복을 입고 휴가를 갔다는 풍문이 있다. 현재도 사단 사령부 1층 중앙 통로에 당시 전두환에게 수여받은 훈장이 다른 훈장들과 함께 여전히 남아있다. 2005년 참여정부 때 5.18 당시 예하부대 62연대 3대대장이던 유효일이 국방부차관으로 임명됐는데, 재직 당시 그가 지휘했던 부대는 시민들과 충돌하진 않았으나 과거 이력이 이력인지라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장을 맡은 데에 대한 도덕적 논란이 빚어졌고, 녹화사업 관여 논란까지 빚어지자 결국 사퇴했다.
원 링크는 삭제되어서 블로그 링크로 대체
20사단이 기계화보병이 된 이유는 5.18 광주 때 진압 공로설과 수기사 견제설이 있으나, 실상은 전략예비대로 지리적으로 한강 이남에 위치하였고 수기사 단독으로는 북한의 전차러쉬를 막을수 없었기에 개편한 것. 다만 기계화개편 이후에도 군사정권을 수호하는 충정부대로서 임무는 여전하였는데 군사정부시절 역대 사단장을 보면 민병돈 중장(육시교장 때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를 비판하다 전역됨) [46] 을 제외하곤 전원이 4성장군은 물론 국방부장관, 참모총장까지 지냈다.
충정부대의 흔적으로 목봉이 창고에 최근까지도 남아있었으나 2008년에 폐기했다. 1993년 이후 충정훈련을 아예 안 하긴 했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각종 진압장비를 보관하고 있었고, 탄약고에는 CS 수류탄이 있었다.
박근혜가 탄핵되기 전에 만약 탄핵선고 이후 시위대(촛불 혹은 태극기)의 양상이 과격화되어 경찰력으로 통제가 불가능하게되면 서울로 진입해서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광화문 등에 배치되어 진압작전을 수행할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물론 20사단이 직접 계획한 작전은 아니다.
20사단과 11사단이 통폐합될때 기계화사단의 역사가 더 긴 20사단 쪽이 해체되는데는 이런 흑역사(대대장의 월북 사건 + 쿠데타의 주요 병력으로 동원)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47]
신인균 국방평론가에 의하면 사실 20사단이 11사단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통폐합될 예정이었으나 20사단 때문에 지역발전이 더디다고 여긴 양평 주민의 님비와 함께 11사단이 없으면 지역경제가 파탄날 것으로 여긴 홍천 주민의 핌피가 크게 작용하여 11사단으로 통폐합되었다고 한다. 정작 20사단 사령부 자리에 2사단 창설준비단이 들어가버린게 아이러니하다.
2014년 화력시범행사에서 '''실미도(영화)ost를 틀고 화력시범을 했다(....)'''[48]
8. 여담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라이벌 관계다. 서로가 더 잘났네 하면서 투닥거리는 곳이 훈련이 널널할 수 없다. 양개사단의 여단은 전술훈련평가시 쌍방훈련이 진행되는데 사이가 사이인 만큼 전차 세워놓고 주먹다짐하거나, 기계화보병들은 판정관 무시하고 길가에 단체로 드러누워 육탄저지했다며 우기고, 아예 전차나 장갑차 세워놓고 길막아버리고 도주를 하는 등 치열한 경쟁심이 많았다. 업무 협조조차 상대 사단을 방문이라도 하면 위병소부터 냉랭한 취급을 당하기도. 그리고 결국 수기사는 남고 20사단이 해체 결정되면서 이 라이벌 관계도 끝나게 되었다....
2000년 1월 3일에 혹한기훈련을 실시하면서 2000년대 들어 전군 최초의 훈련이라 매스컴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혹한기 훈련의 특성상 조종수들은 추위와 귀찬음에 짬밥을 개밥처럼 몽땅 섞어 따뜻한 조종석에 앉아 먹곤했는데 행보관이 매스컴에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카메라를 피해 숨어다니며 먹었던 웃지못할 사연도 있다. 저녁에 방영되는 생활정보 프로그램이나 뉴스등에서 훈련장면과 인터뷰 등이 소개 되었다한다.
육군의 핵심전력이기 때문에 K1A1, K21 보병전투차등 신형장비가 최우선적으로 배치되어왔다. 2009년 12월에는 K21의 도하훈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때 공기흡입구에 물이 들어가 단차 한 대가 침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 침수사고는 도하훈련 이전에 벌어진 일.
사단 본부대 입구에는 M48 패튼이 자리잡고 있다.
DC에 20사단 갤러리가 있는데 글리젠은 느린 편이다. 거의 정전갤 수준. 2000년 이전 복무했던 사람들이 간혹 들락거리는 편이다.
대부분의 예하부대가 위수지역이 양평인 관계로 외출 외박은 양평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때 서울까지 위수지역으로 잡혀있어서 서울이 집인 사람들은 서울로 갔다고 하나 변경되었다. 그래도 점프를 하려는 사병들은 꽤나 있다. 지금은 지하철도 다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경향이 있는 편. 이때 붙은 별명이 양평 카츄사. 여주 지역 부대의 경우 위수지역이 양평과 더불어 이천시까지 넓게 지정되어 있는데 여주시 자체가 외박을 나가서 놀 만한 장소가 마땅히 없기 때문인 듯 하다.
사단훈련소가 1980년대에 삼청교육대로 쓰였다고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조교들이 하기도 한다. 막사 뒤쪽에 있는 경계초소가 이때 귀신들이 나와서 경계근무 중이던 조교와 훈련병이 그걸 보고 기절했고, 이 때문에 경계초소가 폐쇄됐다는 도시전설급 이야기도 덧붙여서 말이다. 막타워나 위병소도 귀신이 종종 나타나는 장소라고 한다. 삼청교육대 끌려간 아들 얼굴 보려고 막사에 돌 던지던 할머니가 죽어 귀신이 된 이후로 초소에 돌 던지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면 아무도 없다든가, 막사 지붕위를 휙휙 뛰어다니는 뭔가가 보인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신병 훈련소에 무속인들도 가끔 왔었다. 그리고 사단훈련소 근처에 연못이 있는데 무속인들 모두 그 연못에 귀신이 모여 있다고 말했고 후에 그곳에서 TNT폭발 사건이 일어 났다. 일종의 군대 괴담.
[1] 수기사 쪽에서도 이 명칭을 그다지 반기지는 않는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양기사라는 말이 수기사 측에서 20사단을 비하할 목적으로 지어낸 멸칭이다. 306보충대→20사단 신병교육대 트리를 탄 사병은 제대할 때까지 듣지 못할 수도 있는 명칭이다. 수기사 간부들은 20사단을 양기사로 부르지만….[2] 다만 이런 호오 문제는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99년에는 신교대 교관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부대를 양기사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수기사랑 우리 양기사는 전쟁 터져도 전선에 안 나가고 일단 후방에 있다가 반격할 때 기동군단을 편성해서 북진 선봉에 선다!"하면서.[3] 농담이 아니라 칠이 전부 벗겨진 궤도까지 검은 칠을 했을 정도(...)[4] 하지만 그 수기사도 K-21이 들어오는 판이다...[5] K21처럼 초도 보급 후 성능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20사단의 K-2전차는 단 한 대도 배치되어 있지 않다. 그저 종훈장을 빌려주고 테스트를 할 뿐.[6] 해당 인터뷰에서는 박정이 예비역 육군 대장이라고만 소개하고 있으나 그가 자유한국당 소속에 전 20기계화보병사단장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립적인 인터뷰라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제11기계화보병사단'''을 일반 보병사단으로 둔갑시키는(...) 등 기본적인 사실관계도 틀려있는 건 덤.[7] 해당 부지에 아파트를 짓는 등 이런저런 시설물을 건설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8] 참고로 이 부대 마크는 워낙에 전차를 많이 운영하였기에 유튜브의 전차 사격 영상을 보면 거의 항상 보게되는 마크이다.[9] 다만 훈련소 특유의 고질적인 온수부족으로 조교 두 명이서 50명이 넘는 벌거벗은 인원을 통제한다. 30초 적시고, 비누칠하고 1분 동안 비눗물제거(...)[10] 하필이면 이름이 샘물교회다. [11] 99년에는 소보루빵 하나에 칠성사이다 1캔.[12] 보통은 초코파이와 커피를, 행사가 있다면 빵이나 햄버거(!) 등을 뭉탱이로 퍼준다. 참고로 반야심경을 모두 외워 정독하면 초코파이를 1상자를 준다.[13] 사실 2006년 즈음 8사단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전환한다고 장갑차를 8사단으로 보내서 임시적으로 군용트럭을 사용하던 것.[14] 신병교육대 코 옆이다.[15] 사격장관리병은 수색대 출신으로 뽑는다.[16] 곧 홍천으로 흡수개편되어 이전한다.[17] 곧 이전할부대라 건물도 새로 지어주지 않아서 컨테이너 20여 개 정도가 들어와 3중대 생활관, 행정반, 문화시설 등을 꾸리고있다.[18] 진지 상태에서는 휴가를 못쓰기 때문에 부대에 복귀 후 휴가 몰빵 해버리므로 또 근무를 설 인원이 없어진다.[19] 1명당 하루 주간1번, 야간1번 근무는 기본이고 더 설 때도 있다.[20] 2018년 2층 1중대로 가는 한쪽계단 천장이 살짝 무너질 거 같아 불안해서 폐쇄하였다. 그래서 중앙계단으로 다녔다.[21] 원래 이름은 '독사 대대'였다. 짬밥, 나이 지긋한 이 부대의 상사, 원사들은 지금 네이밍이 맘에 안 드는지 독사를 지칭한다. 간혹 상급 부대장이나 그 사모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경우 부대의 상징으로 쓰이는 뱀이 사탄의 상징이라서 마음에 안 든다고 부대명이나 상징물을 자의적으로 바꿔 버리는 경우가 있다. 한편 부대 별칭이 바뀌면서 예하의 모 중대 또한 독거미에서 별칭이 바뀌었다.[22] [image] (당시 부대 마크)[23] 그래서 62여단 예하대대는 일과진행 중 대대에서 처리가 불가능한 환자가 발생하면 바로 여단으로 간다. 물론 예약된 검진인원은 아침에 출발하여 사단의무대 또는 국군청평병원으로 가서 꿀빨다 온다. 더 심각하면 국군수도병원행.[24] 진지공사 등의 작업이 있어도 무조건 짬을 내 주특기, 승무원 훈련등을 실시한다. FM대로라면 이게 맞긴하지만 하급자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작업 때문에 하루종일 굴렀는데 교육까지 구르라니 욕이 안 나올 수밖에 없다.[25] BTL 신막사 건축 사업으로 '공조기'를 최초로 시범설치하였다. 흔히 생각하는 에어컨이 아니라 자그마한 통풍구처럼 생겼다. 하지만 야심차게 가동한 결과 공조기가 냉방은 기대도 못하고 선풍기만도 못한 바람 때문에 가동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생활관마다 선풍기를 지급해놓았다.[26] 이외에도 배수로를 파야된다니 사단 공병대를 파견한다든지...[27] 하나회. 12.12 군사 반란 가담자. 5.18 민주화운동 당시 20사단의 병력을 광주로 이동시켜 시위대를 학살할 당시 사단장.[28] 하나회. 12.12 군사 반란 가담자.[29] 하나회.[30] 하나회.[31] 원광대학교 [32] 마지막 사단장.[33] 육군사관학교 내에서조차 엄청난 엘리트로 동기들이 잘해야 이제 갓 중령에 진급해서 대대장을 하고 있을 그 시기에 강인순은 이미 1차 대대장 보직을 완료하고 군단참모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소위로 임관한 이래 이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단 한번도 진급누락된 적이 없었으나 중장 진급에서 2번이나 누락되었다. 현재는 육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을 거쳐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보직중이다.[34] 현재는 상사로 동 부대 화기중대 행정보급관이다.[35] 기보대대의 영내는 매우 넓은 편이라 평소 주특기 훈련 시에는 영내를 주행한다.[36] 일단 장비가 영외로 나가는 것이니 여단장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한다.[37] 사거리, 사고다발지역 등은 부사관급의 간부를 같이 배치하기도 한다.[38] K200 한정. K-21에는 공축기관총(M60)이 1정 배치되어 있고 기다 박격포 소대나 구난차에는 K6 기관총(혹은 MG-50)이 비치되어 있다.[39] 사단본부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60여단 경우, 유격훈련 시 칠봉산에 가서 한다.[40] 유격장 행군코스 중 특히 뱀술, 생사탕을 파는 곳이 많이 보인다. 참고로 뱀 수렵은 불법이다.[41] 가끔씩 유격조교 훈련 인원에게 지급할 때 나온다.[42] 지하수를 끌어와 물탱크에 저장한 물을 보일러를 이용해 데우는 방식.[43] 물론 조교들이 귀신담당.[44] 당시 대대장이 행군을 좋아해서 한 달에 1번씩, 훈련 때문에 행군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으면 2주 건너 한 달에 두 번도 했다. 사단, 여단에서 행군 자제 지침이 내려와도 직접 전화로 담판을 짓고 행군을 했다. 대대원들의 불평 불만이 많았으나, 대대장이 솔선수범하여 행군을 완주하는 관계로 투정에만 그쳤고, 그 덕에 대대통신병과 관리병만 죽어났다.[45] 여담으로 이 사건을 처음에는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납북이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월북임이 밝혀지고 박정희 대통령이 분노했다. 이로 인하여 중앙정보부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의 정보처가 폐지되는 등 국군보안사령부의 위세가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1979년 소장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정보처가 부활되는 등 예전의 위세를 되찾았다.[46] 하나회 전두환 직계임에도 오히려 이분이 사단장 부임하고 암흑기를 끝장냈다. 뭔말이냐면 85년 총선 때 부정선거를 거부하다가 청와대에서 29만 원에게 폭행당하고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좌천당했다고(...)[47] 11사단은 부대 역사성도 역사성이지만, 동부전선의 유일한 기갑부대라는 점과, 20사단이 해편되어도 수기사와 같은 기갑전력이 있어서 사단 해체에 따른 안보 부담이 덜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48] 감이 잘 안온다면 '''항공자위대가 귀향(영화)ost를 틀고 행사를 한 수준'''이라고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