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연송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장연송'''
'''張連松'''

[image]
[1]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하리야마 레마스(張山連松)
'''출생'''
1901년[2] 12월 12일[3]
함경북도 길주군 길성면 홍수동[4]
(현 함경북도 길주군 유천리)#
'''사망'''
1956년 10월 30일
'''상훈'''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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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발명가, 정치인이다.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연송은 1901년 함경북도 길주군 길성면 홍수동(현 함경북도 길주군 유천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로 이주하여 수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에 원적지를 두었으며, 일본으로 유학하여 니혼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에는 경성부 동숭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누하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과 제기정(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등지에 거주했다.
니혼대학 재학 중이던 1930년 2월에는 다년간의 연구 끝에 자유장(自由杖:지팡이)[5]을 완성하여 일본·영국·미국·프랑스·독일 등 5개국에 특허원을 제출하기도 했다.# 1935년 1월에는 재봉틀의 이중봉침(二重縫針)과 공중회전팽이를 고안하여 특허국에 제출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20여 년간 무연료 원동력 항동기(恒動機) 연구, 발명에 힘을 쏟았으며, 친구 이상린(李相麟)[6]으로부터 자금 700원을 제공받기도 했다.# 그는 이 발명을 통해 조선독립 및 전 세계에 물자를 풍부하게 함으로써 투쟁이 없는 지극히 평화로운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고 1939년에 특허국에 제출하여 특허를 받았다.[7]
한편, 1931년「선(善)과 도(盗)」, 1939년 「사우(飼牛)가 시문(詩文)을 쓴다」등의 논문을 통해 자유주의 실현과 타 인종, 민족과의 전쟁은 양립할 수 없으므로 인류는 공존공영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살아가면서 평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는 사회를 배격하고 자유 평등한 이상사회를 갈망하는 심사와 일본에 국토를 유린당한 후의 착취와 압박을 노래한 시를 몇 편 짓기도 하였다.#
1940년 겨울부터는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이상린의 장남 이중섭(李重燮)[8]·임호연(林豪淵)[9] 등과 회합하여 "1919년 손병희 등의 조선독립운동은 소위 맹목적이고 등의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동방의 정서, 즉 단군 사상을 표방해 민족독립운동에 매진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 하였으며, 동방의 정서에 대한 진리 및 그 선전 보급 방법이 어떠한지, 현재의 교육은 왜인의 생활 상태를 배우는 것인데 옳지 않다, 일제는 각 도 · 부 · 町에 인재를 선발하여 조선인들에게 정서 교육을 선전하고 있다는 등의 일제의 식민 통치 비판을 비롯한 여러 사상운동상의 토론을 하기도 했다.#
[image]
1942년 10월 19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당시 촬영된 사진
그는 위 저작들 및 활동으로 인해 1942년 3월 17일 용산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43년 3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그 해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출옥하였다.
8.15 광복 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연합군 환영준비회 선전부 실행위원에 취임하였으며#, 한국민주당 중앙위원, 남조선과도정부입법의원 의원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민주당 이영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이승만 국회의장대한민국 국회 대통령 간선제대통령에 선출되자 재보궐선거가 치러졌는데, 한국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민주당 홍성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국민당 이영준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6.25 전쟁으로 납북되었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서울 제5선거구(동대문 을))
무소속
11,006표 (27.86%)
낙선 (2위)

1948
재보궐선거 (서울 제4선거구(동대문 갑) 국회의원)
한국민주당
-
낙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제5선거구(동대문구))
무소속
'''15,074표 (36.41%)'''
'''당선'''


[1] 1930년 2월 7일, 일본 니혼대학 유학 시절 사진이다.[2] 제헌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1900년생으로 출마하였다.[3] 1942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2년 12월 2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4] 1914년 홍수동의 일부가 영북면 유촌동으로 개편됨.[5] 겉보기에는 그냥 길이가 짧은 지팡이 같지만, 안에 그물의자와 양산, 척후봉 등을 넣을 수 있다고 한다.[6] 일본식 성명 : 星山相麟[7] 당시 특허신청 대리인이 신태악이다.[8] 일본식 성명 : 星山重燮[9] 일본식 성명 : 林淵次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