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새넌 맥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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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한국 이름
윤산온(尹山溫)
생몰
1873년 12월 15일 ~ 1941년 12월 4일
출생지
미국 펜실베이니아
사망지
미국 시카고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한국 선교 이전의 경력
2.2. 한국에서의 활동
2.3. 이후의 행적


1. 개요


미국장로회 선교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한국 선교 이전의 경력


조지 새넌 맥큔은 1873년 12월 15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이 일찍 죽은 뒤 피츠버그에서 은행 보조 점원으로 일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파크 주니어 하이스쿨에 입학해 장로회 신앙교육을 받은 뒤 1897년에 졸업했다. 이후 파크 칼리지에 진학하여 1901년 졸업했고, 1903년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아이오와주 코에대학에서 교육심리학 교수로 부임했으며, 대학 부속고등학교 교장을 겸했다. 또한 1902년부터 1905년까지 미북장로회 아이오와 대회(the Iowa Synod)의 목회자 연수과정을 거쳐 1905년 5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2.2. 한국에서의 활동


1904년 파크 대학교 설립자 존 암스트롱 맥아피(John Armstrong McAfee)의 딸 헬렌 베일리 맥아피(Helen Bailey McAfee)와 결혼한 맥큔은 같은 해 미북장로회 해외선교사에 임명되어 1905년 9월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그는 평양선교지부에 배치되어 한국어를 배우면서 숭실학교(崇實學校)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907년 평양 대부흥을 경험한 뒤 A. J. 브라운 총무에게 이에 대한 감상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이때 그는 추신으로 자신의 한국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저는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실질적으로 대학 사역을 시작하는 계획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미국에서 여러해 동안 쌓은 경험으로, 교과과정을 세부적으로 계획하는 것을 보조하는 일뿐만 아니라 이 상급학교 단계를 위한 모든 계획과 선교사들의 회의에서 여러모로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대학 건물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 전혀 없습니다. 학생들이 남자 사랑방에 혼잡하게 몰려있으며, 한 학급에 약 100명의 학생이 있어서 수학이나 대수학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올 봄에는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내년 가을에는 800명의 학생들이 입학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을 어디에 수용해야 합니까? 지금은 한국 교회를 위한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1909년 9월 평안북도 선천선교지부로 전임한 맥큔은 중학교 과정인 신성학교 교장을 맡았다. 그는 미국의 독지가 휴 오닐(Hugh O’Neill) 부인으로부터 거금을 기부받아 학교 시설을 확충하였다. 또한 학비가 없는 학생들도 학비를 벌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근로사업부를 설치하여 철공장, 목공소, 목장, 양잠실을 설치 운영하였다. 또한 백낙준이 그를 찾아가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기꺼이 백낙준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시에 일할 수 있도록 해줬다.
1911년 105인 사건이 발발했을 때, 백낙준은 체포를 모면하고 중국으로 피신했다. 이후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갈 때, 맥큔은 백낙준에게 자신의 모교인 파크 대학교를 추천했다. 이에 따라 백낙준은 파크 대학교의 부속중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가 파크 대학교까지 졸업했다. 한편 맥큔은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무고하다고 판단하고 이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활동했다. 1913년 3월 하순경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전에 교수로 재직했던 코에 대학으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14년 11월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선천 선교지부에 복귀한 그는 설교, 부흥회 등에서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설교를 했다가 1915년 1월 평안북도 경찰부장에게 불려가 훈계를 들어야 했다. 1918년 8월 장로회 평북노회 노회장에 선임된 뒤 같은 해 10월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19년 초 다시 한국으로 가던 맥큔은 일본 도쿄에서 하숙하던 이광수의 하숙집에 들렀다. 마침 이광수는 2.8 독립선언서를 번역해주고 이를 교정해줄 이를 찾고 있었다. 이광수가 자신에게 이를 부탁하자, 맥큔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이 선생, 나는 이 글을 안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지금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이니까. 그러나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랜디스 박사, 그는 일간 미국으로 떠나갑니다. 내가 이 선생을 랜디스 박사께 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명함을 이광수에게 건넨 뒤 임지인 선천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들른 그는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자 서울에서 발발한 3.1 운동 주동자 중 한 사람인 김원벽과 만나 내외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았다. 이때 맥큔은 "자신의 일은 자신이 개척해야 한다"고 조언했고, 김원벽은 이에 따라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이후 1919년 3월 8일 선천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일본군일본 경찰의 탄압이 일어나자, 맥큔은 목격 상황을 친필로 기록하여 일제의 우편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캐나다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맡겨 캐나다에서 미국 시카고에 있던 『컨티넨트(The Continent)』 잡지사로 보내 게재하게 하였다. 컨티넨트 잡지에 실린 1919년 4월 10일호의 글의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다.

"불쌍한 한국! 능히 한국을 도와줄 수가 없는가? 현금(現今) 정형은 참으로 견딜 수 없도다. 이 산골(선천군을 가리킴)에서 한인들이 3월 8일에 대(隊)를 이어 평양으로 모여 들어가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평양성 안에 사는 인민의 애국정신을 고취하여 일본이 한국을 그네들에게 돌려줄 때까지 싸움하자 결심하였는데, 이 아래 기록한 사실은 나(尹山溫)와 다른 선교사들이 3월 8일부터 10일까지 목견(目見)한 것이라."

1920년 9월 1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가 체포된 신성학교 학생 박치의(朴致毅)를 변호하기로 한 맥큔은 "온량한 학생으로 결코 폭탄을 던질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관헌들의 고문에 마지 못해 자백했을 것"이라며 고문설을 유포시켰다. 이에 총독부는 그를 '극단적인 배일자'로 간주하고 강한 압박을 가했다. 이 때문에 맥큔은 신성학교장 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형사들의 감시도 받아야 했다. 그러다 19212년 2월 22일 장남의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고, 이후에는 언론과의 인터뷰와 강연을 통해 한국과 한국교회의 상황을 설명하고 일제의 전횡을 폭로했다.
1921년 8월 사우스 다코타 주 휴론대학 학장에 취임하여 7년간 학장을 맡던 맥큔은 1928년 5월 다시 내한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숭실학교 교장을 겸임했다. 그러던 1932년 9월 18일 만주사변 1주년 전몰자 위령제가 평양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평안남도 지사가 학생들에게 참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그는 학생들에게 이를 묵살할 것을 권고했다. 그 후 총독부 학무국은 1935년 10월 24일부터 3일간 각도의 학무과장과 사범학교장을 포함한 시학관들을 중앙으로 불러 회의를 갖고 "국가관념의 함양에 관한 건, 경신숭조에 관한 건, 국어사용의 보급 철저에 관한 건, 사립학교 지도 감독에 관한 건, 심전개발에 관한 건, 교화사업에 관한 건" 등을 지시하였다.
평안남도 지사는 1935년 11월 그 지역 공사립 초등학교장 회의와 중등학교장 회의를 잇달아 소집하여 이러한 상부의 지시를 전달하고 실행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인 학교장들이 빠져나가 참배하지 않자, 1935년 11월 14일 평남 중등학교장 회의를 연 평안남도 지사는 "먼저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나서 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맥큔은 숭의여학교 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 M. Lee, 李希滿)와 함께 "이는 전례가 없을 뿐더러, 기독교 교리상 지시에 따를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에 평안남도 지사 야스타케 다다오(安武直夫)는 맥큔을 도청으로 불러 최후 통첩을 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교장 인가를 취소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와 양심상 할 수 없을뿐더러,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시킬 수 없다"고 1936년 1월 18일 서면 답변했다. 결국 그의 교장 자격이 박탈되었고, 1936년 3월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당시 맥큔의 최종 답장의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정부 선언들은 신사에 참배하는 행위에 대한 나의 양심적인 거부감을 제거하거나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드릴 필요가 있게 됨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① 현재 봉재하고 행하는 신사의식들은 나에게는 분명히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②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실제로 거기서 신령들을 예배한다고 믿기 때문에 ③ 기독교인들은 효도와 구분하여 조상숭배는 하나님께 대한 죄라고 믿기 때문에 그리고 ④ 나도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의해 기독교인들에게 그같은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학교 교장으로서의 나에게 요구한 행위를 한 개인으로서 양심적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개인으로서 신사에 참배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학생들에게도 그것을 하도록 할 수 없음도 알려드리게 됨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2.3. 이후의 행적


맥큔은 한국에서 추방된 뒤 1936년 4월 초순경 하와이 호놀룰루에 들러 한국인들의 환영을 받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비판했고, 귀국해서도 비판 강연과 기고를 계속했다. 그는 그해 재미 유학생 단체인 북미대한인학생회(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North America) 자문위원을 맡았고,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미국 시카고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1938년 1월 호 <프레스비테리안 트리뷴>에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목으로 신사참배 절대불가론을 게재해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학교 유지를 위해 '신사참배 순응'을 주장하던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H. H. Underwood)[1]와 논쟁하였다.
1941년 12월 4일, 맥큔은 시카고 장로회 교회에서 병으로 소천했다. 그의 유해는 미국 미주리주 파크빌에 있는 월넛 그로브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조지 새넌 맥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