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권법/실전
1. 주의사항
중국무술은 왜 실전에 약한가
들어가기에 앞서서 다음 내용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 전통 중국무술과 현대무술은 제대로 된 비교대상이 아니다. 쉬샤오둥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아마추어 MMA 격투가가 내로라 하는 중국 권법의 장문인, 고수들을 레슬링과 그라운드를 제외한 킥복싱만으로 순식간에 압살하는 수준이다. 중국무술은 그저 일본 고무술마냥 전근대 과거의 전통유산이다. 일단 무규칙 맨손으로 사람 때려잡기에는 현대 격투기가 압도적인 데다 급소가격 역시 현대식으로 훈련받은 격투가들이 훨씬 더 잘한다. 무기술에서도 자세한 기록과 거대한 인프라를 가진 유럽 검술과 일본 검도에 비해 중국 무술은 그런 것이 없거나 실전되었다.
- 과거 전통무술들은 자유대련을 하지 않고 투로 위주로 훈련했다. 자유대련 중에 부상을 입거나 중상을 입을경우 의학의 한계로 부상을 치료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라테에는 카타(形)라고 하는 투로 위주 훈련이 남아있고,[1] 유도에도 원래는 본(本)이라고 하여 그 흔적이 남아있다. 투로 위주 훈련은 중국무술만의 특징은 아니다. 사람끼리 마주보는 대인훈련이 있기는 하지만 안면 타격을 배제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 복싱ㆍ브라질리안 주짓수ㆍ무에타이 등 과거에 개발되었으나, 현대에 와서 실전성을 인정받은 무술들은 한번씩 대격변을 겪었다. 스포츠과학, 안면타격을 가능케 하는 훈련도구[2] , 다른 무술과의 교류 등을 겪고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존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통중국무술은 그렇지 않다.
2. 전통 무술의 변화
중국무술이 비실전적 자세를 취하는 이유를 알려면 무술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
우선, 과거에는 맨손 무술을 배우고 발전시킬 필요가 없었다. 21세기 현대에는 일상적으로 무기를 소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일상적으로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무기를 든 상대에게 맨손으로 덤벼드는 것은 자살행위이니 맨손무술을 배울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권법을 비롯한 전통무술들은 타격기와 유술기를 병행하는 특징이 있다. 즉, 상대를 바닥에 엎어놓고 창, 칼로 찔러죽이거나, 격투기에서의 클린치처럼 간합 내에서 서로 꼬였을 때 내 창,칼을 제대로 써서 상대를 이기는 법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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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맨손 무술에서는 안면 타격이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이는 맨손의 특성상 얼굴, 특히 이마나 눈 주변을 타격하다 자기 손만 다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3] 그렇기에 맨손 무술에선 '앞 손'을 내밀어 가까이 오는 것을 견제하거나 잡아 넘어뜨리는기에 집중하는데,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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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의 전신인 베어너클은 여러 가지로 중국권법과 비슷했다. 앞 손을 내밀어 견제한 것도 비슷했고 붙으면 던지는 것도 비슷하다. 그래플링을 대비해 자세는 낮게 잡았고 얼굴을 때릴 땐 종권을 쓰는 등 여러 가지로 남권과 비슷했다. 하지만 규칙의 도입과 글러브의 발명으로 서로의 명암은 갈라졌다. 앞 손을 치고 막는 데 급급했던 중국권법과 달리 권투는 좀 더 빨리, 그리고 많이 때리는 데 집중하였다. 그래플링은 반칙이었으므로 얼마든지 클린치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자세는 점점 높아졌고 스텝은 빨라졌다. 즉, 변수의 제한이 기술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또 유술기와 타격기가 병행되면서 거리는 유술과 타격기가 가능한 애매한 거리, 중거리를 유지하게 했다. 이런 맨손의 특징을 이해하지 않으면 중국권법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전통무술에서 상대방을 향해 길게 내민 앞 손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상대방이 다가오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이다. 상대가 나에게 무작정 다가오면 내 앞 손이 상대를 밀어대고 억지로 들어온다고 해도 대기하던 뒤 손이 날라온다. 즉, 앞 손은 상대방을 더 이상 다가오지 않게 하는 견제기이자 방어기인 셈이다. 이런 중-근대 무술의 배경 속에서 중국무술은 해결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팔극대타
태극권 추수
그 방법은 바로 추수. 상대방이 내민 손을 타고 들어가 손을 묶고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원래는 중국의 무기술에서 서로의 검을 맞대 상대의 검을 봉쇄하고 움직임을 예측하는 방법이었다. 손이 떨어진 상태에서도 마치 손이 묶인 것처럼 가정하고 내 가드를 올리고, 상대 가드를 치우고 타격하는 법들을 연구했으며, 이렇게 무기술의 이론을 바탕으로 격투기를 고안했기 때문에 중국권법의 훈련법들이 이렇게 되었다. 힘의 강약을 읽는 청경, 힘을 부드럽게 받아치는 화경 등 중국에서 말하는 개념들이 바로 추수 속에서 생긴 것이다.
영춘권의 치사오
추수의 발전에 따라 당랑권의 눈 찌르기, 영춘권의 치사오, 오키나와 테의 토리테까지 수많은 파생기술들이 나왔으며, 그 방법 또한 다양해졌다. 우리가 비실전이라 느끼는 스탠딩 유술이나 영화에서나 쓴다던 패리 또한 추수 중 타격을 염두에 둔 기술(아래 영상 참조)이다. 원론적으로는 실전에(손에 도구를 쥔 상황에서) 쓰라고 있는 기술들인 것이다. 현대인들이 중국권법과 중세-근대 권법에 쓸데없는 동작이 많다고 느끼는 이유는 글러브 없는 맨손끼리 하는 싸움 기법에 덜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팔/무기를 맞댄 상태에서 힘의 강약을 읽고 받아치는 개념 등은 동양의 무기술뿐만 아니라 서양의 무기술에도 존재한다. 롱소드 검술에서 '푈른'에 대한 내용을 참조.
공수도의 초창기에는 중국무술처럼 투로(카타)에 얽매여 실질적인 격투훈련은 자제되었다. 현대에도 전통 공수도 계열은 슨도메, 즉 상대방에게 직접적인 데미지를 입히지 않는 자유대련을 채택했다. 그리고 극진공수도를 위시한 개혁의 바람이 불면서 현대식 세련된 격투기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리고 극진공수도 역시 맨손을 고수하기 때문에 수기 안면타격을 금지하는 풀컨택트룰을 채택했다.
극진공수도처럼 중세-근대 권법은 안전한 도구와 규칙의 도입으로 인해 변화했다. 복싱은 권투 글러브를 통해 안면타격이 주는 위협성을 절실히 느꼈고, 레슬링은 보다 효율적인 그래플링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이런 변화는 기술 전개를 바꾸었다. 중국권법 같은 손을 얽는 추수는 먼 거리에서 주먹을 휘둘르거나(복싱) 아니면 완전히 몸을 밀착시킨 채 던지는(레슬링)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일본의 유술 역시 유도로 대표되는 현대식 무술로 탈바꿈되면서 타격기가 삭제되었다. 이렇게 기술을 한정시키자 각 스포츠는 각자의 규칙 내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발전시켰고, 실전과 대인 타격 역량을 쉽게 키워주는 쪽으로 발달했다. 그런데 중국권법이 이 흐름에 다소 늦게 편승해서 지금처럼 괴리가 생긴 것이다.
사실 중국무술 역시 옛날에는 빠른 시간 내에 실전성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때문에 맨손격투라 하더라도 간단하면서도 살상력 있는 기술에 중점을 두기는 마찬가지였다. 현대 중국무술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오랜 기간 공력을 닦아야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발상은 근현대에 와서 중국의 내전이 끝나고 무술이 군사적 의미를 잃으면서 발생한 것이다. 중국 무술이 실전성을 상실한 데에는 이런 영향이 지대했다.
3. 중국권법의 특징과 개념들
3.1. 권병일치(拳兵一致)
'''중국무술의 본질은 사실 맨손무술이 아니라 권병일치, 즉 무기술이다.''' 중국권법을 포함한 모든 전근대무술의 투로는 병기를 익히기 위한 '''기초체조용'''이다. 물론 모든 권법들이 다 이런 것은 아니나, 우리가 흔히 아는 유명한 권법들은 권병일치에 입각한 것들이 많고, 이는 맨손격투보다 그 문파의 무기술을 익히기 위한 것이다.
궁보충권
창술의 찌르기
중국무술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궁보충권(弓步衝拳) 동작을 보자. 넓은 보폭에 낮은 자세로 길게 뻗는 이 동작을 맨손무술에서는 결코 쓸 수가 없다. 복싱의 텔레폰 펀치처럼 동작이 너무 커서 보고 대처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을 쓴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창으로 찌를 때 복싱의 스트레이트처럼 높은 자세에서 앞발에 체중을 실어서 창을 찌르면 몸은 창의 무게 때문에 자세가 무너져 앞으로 쏠려버릴 것이다. 따라서 창을 쓸 때는 자세를 낮추고 보폭을 넓혀야 안정적으로 창을 찌르고 회수할 수 있다.
중국무술의 기초동작이 과하게 크다고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팔극권에선 육합대창이라는 무거운 긴 창을 주로 쓰는데, 육합대창을 잘 휘두를 수 있는 몸을 만들려고 권법을 수련한다. 무거운 창을 쓰려면 보폭을 넓히고 자세를 낮추어 땅에 뿌리를 내린 듯이 굳건하게 서는 훈련이 너무나 중요하다. 팔극권의 투로가 익숙해지면 육합대창은 손쉽게 익힐 수 있는데, 이미 권법의 투로를 배우는 과정에서 창술에 필요한 보폭과 체중이동을 익혔기 때문이다. 영춘권에서는 팔참도를 주요 병기로 쓰는데, 짧은 단검을 사용하는 특성상 자세가 높고 보폭이 좁으며 재빨리 상대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을 중요시한다. 이 때문에 영춘권의 투로 역시 높은 자세와 짧은 보폭으로 움직이는 동작들로 구성하였다.
개문팔극권 소가1로 (오련지 노사 표연)
팔극권 육합대창
영춘권 투로 '심교'
영춘권 팔참도
육합대창의 대련모습이다. 긴 창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다리를 넓게 벌리고 땅을 힘차게 밟고 서야 한다. 복싱과 같은 경쾌한 스텝은 창을 들었을 때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나마 쓸 수 있는 맨몸 기술은, 서로가 창이 엇갈려 서로의 몸이 가까이 붙었을 때 상대방의 앞 손을 제압하고 재빨리 파고들어 몸통박치기나 팔꿈치를 쳐 넣는 것 정도였다.
팔극대타(八極對打)라는 투로를 보자. 현대 격투기의 관점에서 보면 기마식으로 옆으로 선 상태에서 두 사람이 공방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면 우스꽝스럽지만, 창과 창이 서로 대결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거리가 붙어서 서로가 맞닿은 상황에서 급하게 싸워야 한다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창을 들고 싸우던 중이었으므로 자세는 넓은 기마식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서로가 상대의 창을 잡은 앞손을 제압하고 공격을 성공시키려는 상태라면 충분히 타당성 있는 동작이다.
이처럼 팔극권에서 창술에서 응용된 권법기술을 고안했고, 그 권법은 창술이면서 또한 창술을 익히기 위한 기초체조였다. 팔극권뿐만 아니라 영춘권이든 벽괘장이든 중국무술 대부분은 권병일치란 개념이 있고, 권법은 병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중국권법이 왜 실제 맨손격투에는 쓰이지 않는 낮은 자세나 과도한 동작을 취하는지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다. 맨손격투가 아니라 그 문파에서 주로 쓰는 무기술을 익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중국권법의 투로를 죽어라 수련한다고 해서 복서를 상대로 이기거나 격투가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오히려 중국권법을 오래 수련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맨손격투에서보다는 무기술에서 발휘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게끔 진화한데다 당시에는 현대처럼 맨손으로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스포츠 문화가 자리잡지 않았다. 또 지금처럼 치안이 발달하지 않아 흉기소지에 대한 규제가 미미했던 탓에 무력분규가 벌어지면 전쟁에서든, 전쟁이 아니든 도구나 흉기를 들고 싸우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당대의 무술가들에게 무기술과 별도로 맨손격투술을 개발한다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행위였고, 그렇기에 무기술과 맨손을 별도로 구분 및 특화하여 따로 훈련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의 격투스포츠에서 전통중국무술은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다. 무기를 이용하지 않는 무술을 원하는 현대의 요구에 맞추려면, 그에 맞춰 현대적인 보호구와 수련방법, 규칙과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이러한 필요 때문에 현대화된 중국권법 산타가 나타났다.
단, 이상의 내용이 중국 무술이 무기술의 측면에서 중국 무술이 최고라 생각하거나 다른 서구의 무기술을 압도한다거나 충분히 훌륭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전사들은 레슬링을 기본적으로 훈련했으며 또한 각각의 무기에 따라 다른 체술들이 병행되었다. 단지 중국무술이라는 것이 당시의 그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그 기묘한 신체언어를 토대로 신비성을 획득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3.2. 단전, 기, 내공
개인의 무술과 기량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시대에는, 전투력을 기르는 비기를 외부에 노출하기를 매우 꺼렸다. 전국시대 일본의 고류무술도 그러한 시절을 거쳤으며, 중국 무술계에는 요즘도 그러한 면이 있다. 때문에 기 등의 형이상학적 표현을 통해 핵심을 돌려 말하거나, 몇몇 제자들에게만 전수하는 일도 있었다. 비기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초보자 입장에서[4] 실천하기가 조금 어려울 뿐, 지극히 당연하고 이해하기 쉬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태권도에서 돌려차기를 할 때 엉덩이가 뒤로 빠지지 않게 조심하라거나, 소총 사격을 할 때 개머리판을 어깨에 똑바로 대라고 하는 등의 소소한 팁들도 문외불출의 비밀로 삼으면 그게 곧 돌려차기의 비기, 소총 사격술의 비기가 된다.
참장공이 기를 증진하기 위한 수련법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연히 뻥 섞인 비유다.
참장공은 힘을 운용하는 감각을 기르기 위한 것으로, 몸을 더 쉽게 컨트롤할 수 있게 올바르게 서는 감각도 익히고 척추도 펴고 코어 근육도 단련하는 신체 컨디셔닝이다. 이걸 전근대인들의 상식에 맞게 기감이라고 표현한 것이며, 실제 수련하는 사람 중 근육과 힘줄에 드는 느낌을 신비로운 기의 감각이라고 느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서울 휄든크라이스 교육원에서 한 수련생이 팔괘장 수행자로 기의 움직임에 대한 것을 느꼈다고 말한 것이 그런 예이다. 그런 걸 안 믿으면 그만이다.
다소 모호하게 일컬어졌던 단전의 개념을 서양 체육계에서는 코어 머슬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일본에서도 코어 운동을 정립화하는 신체이론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른바 아운카이(阿吽会, Aunkai)이다. 아운카이는 야쿠자와 미노루(阿久澤稔)가 만들어낸 운동으로 가라테와 중국무술 산타를 연마하던 야쿠자와가 고류 무술인에게 패배한 후 그에게서 배운 신체 운용법을 재정립한 것을 의미한다. 골반의 이완과 신체의 정립을 주장하는 그의 신체 운용법은 중국무술의 신체운용을 간소화했다는 평을 들으며 국내외 많은 무술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의 동작을 보면 마보를 취하는 등 참장 수련과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코어를 꼬았다가 푸는 모습은 흔히들 중국에서 말하는 발경에 가까우며, 그는 이를 통해 전근대 무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7jxip1cpPLg#t=66
과거에 내공이라 불렀던 것도 몸 만드는 기본, 양생공을 통해 길러진 코어 근육, 균형감각, 근력 등을 총체적으로 칭하는 말이지, 뭐 별다른 초자연적인 게 아니다. 이걸 초자연적인 것인마냥 약 판 사람들이 문제다.
전근대적인 비유를 다 떠나더라도, 현대 격투기에서도 맞으면 바로 KO를 당하는 신체 중심선 상의 급소는 가드로 가리고, 끊임없는 풋워크와 회피기동으로 조금씩 피해서 정통으로 맞지 않게 지킨다. 또한 효율적으로 잽, 스트레이트를 칠 땐 내 중심선은 유지하면서 상대 중심선을 쥐어박는다. 심지어 대테러 기동사격술에서도 효율적으로 여러 발 쏘는 반동을 제어하고 표적 획득을 빨리 하기 위해 신체 코어의 단련과 운용을 중시한다. 이 정도로 보편적인 원리를 괜히 단전이니 내공이니 하는 표현에 집착하는 구닥다리 무술가들이 오염시킨 셈이다(...). 이소룡도 이런 사람들에 대해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면 안 된다고 디스했다.
3.3. 신체 단련
과거 중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는 세부적이고 보다 과학적인 신체단련법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체를 단련하는 방법이 꽤 투박한 편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푸대자루에 물건을 담아다 들어올리거나, 휘두르는 식으로 운동을 하는 삽화가 발견되는가 하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올림픽에 출전하던 레슬러 밀론(Milo of corton, Μίλων)이 살아있는 소를 들고 움직이며 신체단련을 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외 다른 지역에서는 무거운 돌이나 바위를 들고 움직이거나, 던지는 식으로 운동을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그러한 것이 발전하여 10~20 kg짜리 돌을 던지고 받는 석쇄공이란 운동이 있었다.
오키나와 테 항목 참고.
http://v.youku.com/v_show/id_XMTE4Njg4NTky.html
중국의 석쇄공은 단순히 근력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시력과 반사신경이나 판단력, 감각과 체력 등 신체능력 전반을 다 쓸 수 있는 운동이었는데, 중국에서는 이 외에도 소림72예나 참장 등의 여러가지 신체단련법이 발전해왔다.
문제는 서유럽에서 1860년대부터 오이겐 산도프의 등장으로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 방법이 보급되는 것을 시작으로, 과학적인 각종 신체단련법과 건강관리를 보조해주는 의학과 영양학등이 등장 및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중국의 신체단련법도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발전하였으나,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한 신체단련법에 비해서는 비효율적이었고, 이 때문에 근래에 들면서 문제점이 부각되었다.
예컨데, 현대에는 신체를 단련하고자 하는 개인에게 부족한 부분과, 더 보강하고 싶은 목적에 맞추어 분야별로 세분화된 체력단련법을 제시해줄 수 있다. 몸에서 어느 부위의 근육량이 부족하여 더 많이 다친다거나, 지구력이나 체력, 유연성등의 이유로 더 많은 운동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런 점을 체계적으로 진단하고, 그에 따라 보강계획을 지도하여 종합적으로 신체단련을 해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중국권법의 전통적인 신체단련방법과 개념을 살펴 보면, 이렇게 세밀하게 사람의 신체를 파악하여 수련을 하는 개념은 비교적 잘 정립되지 않았다. 게다가 몇몇 수련은 몸을 강하게 해주기는커녕 만성적인 부상이나 질환을 유발하기 쉬웠다. 가령 소림 칠십이예의 '일지금강법(一指金剛法)'은 손가락으로 나무나 벽을 힘껏 찌르는 수련법이다. 정말로 손가락 강화효과가 있는지는 불명확한데 부상위험은 너무나 명백하다. 자칫하면 손가락이 골절되고, 손가락 관절이 영구히 손상될 수 있다.
물론 이런 기괴한 훈련방법들을 다 제외한다면, 신체전반의 균형감각이나 직접적인 운동능력, 판단력 등을 종합적으로 단련시킬 수 있는 좋은 단련법도 많이 있다. 하지만 전신운동을 포함하면서도 분야별로 집중시켜 단련을 시키는 현대적인 체력훈련법에 비해 덜 체계화되었고, 특히 운동 이후에 신체를 회복하고 영양을 보충해주는 개념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3.4.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시스템
고대 이후 중세의 서양세계는 상당 기간 동안 무인들이 주도하던 시대였던 만큼 군사학 및 병기술에 대한 논의가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서양 무술의 진화과정은 상세하게 추적이 가능하다. 맨손무술은 물론 군용무술인 병기술과 마상무예, 군대의 포진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자료는 무려 고대부터 발견된다. '4천 년 역사' 운운하는 중국 무술은 과거 자료가 거의 없는 반면, 서양 무술은 실제로 족히 2천 년 전 고전기 그리스, 로마시대까지 자료가 있기 때문.
반면, 중국의 전통무술은 모두 하나같이 이전 기록[5] 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19세기 동안 약 100년 전후 기간 내에 일제히 역사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곧 청나라 말에 해당된다.
청나라 말로 접어들어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향촌질서와 경제가 붕괴하는 등 사회적 문제는 지방 호족이나 향리 등 신분으로 큰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사회계층, 계급의 수입 및 생활이 불안정해지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는데, 소위 '무술가'들이 죄다 그 계층이었다.
이렇게 수입이 끊긴 무술가들은 달리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없다보니, 기존에는 엄격한 일자전승의 원칙 아래 비밀리에 '가문의 비전'으로 전해오던 것을 밑천 삼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 대가로 교습비나 재물을 받았다. 살길 막막해진 무술인들이 일제히 도장을 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가 들어오면서 평화가 찾아오자 먹고 살길 막막해진 사무라이들이 검술도장을 일제히 개업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즉, 기존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무술들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이면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당시의 도장/문파 시스템은 오늘날처럼 '돈을 주고 배운다.'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어느 문파의 일원이 되면 사실상 도제관계로 그 문파 아래 완전히 종속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장문인, 도장주 및 사범들은 교습만을 하는 전업 무술인이었으고 그 아래 학생들은 생업과 무술단련을 겸하였다. 이런 연유로 무술은 말 그대로 '''밥줄'''이었다. 이전까지는 혈연 가족들 사이에서만 폐쇄적으로 전승하던 무술은 이 시대에 이르러 일종의 상업적 도제관계로 변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소위 '''전설적 고수들'''이 한꺼번에 출몰하는 것이다.
팔극권의 이서문, 형의권의 곽운심과 상운상, 홍가권의 황비홍, 연청권의 곽원갑, 태극권의 양로선, 팔괘장의 동해천, 영춘권의 엽문 등등등... 오늘날 알려진 유명한 유파들은 전부 다 적어도 한 명 정도는 '''고수의 전설'''이 존재한다. 이러한 고수들이 실제로 강했는지와는 전혀 별개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떠한 경로든 무술을 익힌 후에 먹고 살길을 찾아 자기 두 주먹만 갖고 세상에 나와 떠돌며 이런저런 일화를 남기며 출세를 꿈꿨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즉, 먹고 살길 막막해진 혼란한 중국의 사회상에서 무술인들은 무술교습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고, 그렇게 무술을 배운 사람들은 사회 각지로 퍼져나가 그 무술을 내세워 출세를 꿈꿨다. 일반적으로 유명세를 타면 부유한 신흥계급에게 고용되어 후원을 받으며 개인 교습자가 되거나, 야심찬 군벌들에게 고용되어 훈련교관이 되거나, 특출한 재주를 높이 사서 황궁의 관리가 되는 등 출세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한 문파의 도장을 세우든 부유한 후원자를 얻든, 일단 유명해지면 제자들이 모여 곧 주된 수입원이 된다. 이 상황에서 최악의 상황은 ''''다른 무술가와 대결하고 지는 것''''이다. 즉, 이때의 도장 깨기는 무술가가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길이었고, 반대로 이미 그러한 것을 얻은 무술가들에게는 패망의 길이기도 했다. 얼핏 생각하면, 19세기 전후로 일제히 출몰했으니 그만큼 상호교류의 기회가 늘어 중국무술의 실전성이 오히려 강화되었을 법도 한데 그렇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생계의 수단으로 도장/문파 시스템 아래 놓이게 된 만큼 기존보다 대량의 인원을 상대로 교습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정예에게 철저하게 가르치던 시스템이 불가피하게 열화되었다. 투로와 형에만 집중하는 교습법은 여러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 오랫동안 가르칠수록 수입이 오래 동안 보장되는 셈이니, 기술들을 매우 천천히 가르치는 교습자들도 등장하였다. 오랜 전수 기간을 합리화하기 위해 정신수양을 들먹임은 덤.[6]
- 세상에 등장하는 무술이 많아질수록 세상에 먼저 나와 자리잡은 각 문파는 기득권이 되었으므로 새로 등장하는 문파를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일종의 조폭 나와바리 싸움을 생각하면 된다. 소위 이게 중국 영화 등에서 묘사되는 문파간 갈등의 실제 모습이었다. 결국 대형 문파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위상이 깎이면서 이로 인해 수입이 줄어들 우려가 있는 공개적인 교류, 시합, 대련 등을 철저하게 금하고 내적으로 폐쇄적으로 변했고, 소규모 문파들은 이런 추세에 맞춰 '시장을 분할한' 안정상태에 순응하였다.
- 전통무술이라고 해도 무술의 목적은 당연히 상대와 싸워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무술가끼리 싸우면 승패에 따라 해당 문파의 체면이 크게 좌우되고, 곧 생계곤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공개적인 대결을 금지했다. 대결을 피할 수 없다면 철저하게 비공개 합의로 행했고, 혹시나 체면이 손상되거나 악소문이 퍼진다면 대상에게 철저한 보복을 가하는 등, 그야말로 조폭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 이런 상황에서 신비주의와 허풍이 한 가지 마케팅 전략이 되었다. 이 때문에 자기 문파 권사들의 활약을 저마다 크게 부풀려 소문을 내었다. 그리하여 동시대에 수많은 고수들 이야기가 나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고수들은 서로 우열을 가린 사례가 한 번도 없다. 전설적 권사들이 대결한 사례는 극히 드물고, 전하는 이야기들도 '서로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자기들끼리 우열을 가린 후 헤어졌다.'는 식이다. 소위 '전설적인 권사'들이 직접 맞붙은 거의 유일한 사례가 바로 태극권 양로선과 팔괘장 동해천이 한 결투인데, 그 전말은 알려진 바 없다. '며칠을 싸워도 승부를 내지 못했다.'고만 알려졌을 뿐이다.
또 비밀이 누설된다는 것은 곧 밥줄이 사라짐을 의미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술들은 자유경쟁을 하지 않았고[8] 검증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야규신음류의 비전은 발바닥에 삼각형을 그려 발중심에 중심을 싣는 방식이었다. 허무한가? 하지만 원래 비전은 이런 식이다. 만화나 무협지에서는 뭔가 엄청나게 강력하고 화려한 필살기로 묘사되지만 실제 무술에서 비전은 간단하면서 효과적이라 실전성이 높거나 몸다루기에 매우 중요한 원칙 등 '숨은 요령'인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예시를 더 든다면...
- '사나운 호랑이가 산을 할퀸다.'는 멋진 이름 덕분에 엄청나게 유명해진 팔극권의 절초 맹호경파산(猛虎硬爬山)도 실제로는 유파마다 모습이 다 다르며, 매우 간단한 타격동작으로 이루어진 콤보다
- 근대 일본 유도의 걸물이며 카노 지고로의 제자로 유명한 사이고 시로의 전설적인 메치기, 야마아라시(山嵐, 산에서 부는 돌풍)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보통 업어치기와 뭐가 다른지 구분이 안 된다. 상대를 메치는 도중 발을 사용하여 상대를 특이하게 후리는 발동작이 들어갔다는 설명을 미리 듣고 봐야만 알아채는 정도
- 이연걸의 영화 <황비홍> 시리즈와 함께 화려한 고속발차기로 유명한 비전의 무영각(武影脚)도 남권 계통 연구자들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는 쿵후교본 같은 곳에서도 기본기로 종종 나오는, 낮게 냅다 걷어차는 부인각 비슷한 로우킥이다(...). 근거리 펀치위주 공방이 많고 발차기를 비교적 덜 쓰는 남권에서 서로 집중력이 상체에 쏠렸을 때 재빠르게 하반신을 걷어차서 주의를 분산시키거나 몸의 균형을 잃게 만드는 견제기다. 게임의 백열각처럼 존내 빨리 차서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낮게 갑자기 쪼인트를 까는 발차기라 안 보인다는 것. (....) 어이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야말로 실제 의미에서 '비전'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고 유용하면서도 실전적인 요령
- 소림 72예를 보면 뭔가 굉장히 아크로배틱한 소림권법의 진수라는 상상과는 달리, 실상은 현대의 체력/근력 트레이닝과 비슷한 게 많다.
결국 무술의 비급이라는 것은 대부분 어느 측면에서는 스포츠과학 등이 접목되어 오늘날 무술 수련자들은 기본적으로 다 해주는 기초적 기법, 훈련법, 몸관리나 몸 다루기의 요령이었다. 이런 것들이 체계적 교육시스템이 없던 과거에는 '비밀리에 전해지는 기술', 즉 '''비전(秘傳)'''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이런 게 곧 밥줄이었다. 당장 현대인만 해도 현대 문물인 인터넷까지 갈 것도 없이 전근대 문물인 출판물이라도 없었다면 그 흔한 팔굽혀펴기라도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고대 단련법 중에 달리기나 무거운 것 들어올리기의 비중이 높았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아무런 설명 없이도 직접 해보면 그냥 힘들고 딱 보기에도 뭔가 힘든 것을 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3.5. 형(形)과 투로(套路)
투로는 쉽게 말해 태권도의 품새처럼, 수련자가 각 동작의 플로우를 익힐 수 있게 여러 기술들을 쭉 이어놓은 세트이다.
중국권법 중에서도 투로를 최대한 간소화하거나 아예 없앤 문파들이 세계적으로 그나마 인정받는다. 투로가 3개로 간소화된 영춘권, 억지로 투로 할 시간에 개별 기본기와 대인타격 훈련을 꾸준히 하는 대성권(의권), 아예 현대 스포츠과학으로 재편을 시도한 이소룡의 절권도가 이에 해당한다.
일단 각 문파 고유의 투로나 형은 하나의 기초훈련이었다. 실전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화려하고 비실용적인 자세 및 기법이 많은데, 몸을 만들고 동작의 흐름을 익히려고 일부러 큰 동작부터 기계적으로 반복했었다. 큰 동작부터 시작해서 작은 동작으로 나아가라는 말은 형의권을 제외하면 중국무술 전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각종 시연이나 표연에 등장하는 형과 투로가 실전에서는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둘 사이 차이점과 역할을 알 수 있겠지만, 이를 위해 어떤 교육이 이루어졌는지는 근, 현대에 죄다 실전되어서 알기 힘들다. 중국에서도 권법으로 실전을 하는 시대는 지났고, 문화대혁명같은 근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과거에 대한 기록은 죄다 날아가서 현대에 와서야 일종의 마케팅 상품으로 재편된 것들이 전통 컨셉을 잡는 무술 문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묘한 보법을 취한 자세에서 추수등으로 상대의 이쪽 손을 어떻게 붙잡고 저쪽 손은 이렇게 붙잡아 무슨 방향으로 기를 흘려넣으며 메친다고 하지만, 현재는 종합격투기를 비롯한 격투 스포츠의 등장으로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 지 오래다. 오늘날 실전지향 무술 대부분은 스탠딩 유술을 퇴출하였다. 선 채로 하는 몸싸움은 간단하고, 직관적인 태클이나 테이크다운, 클린치에서 되도록 타격 거리로 돌아가거나, 아예 상대를 그라운드로 끌고 가는 데 집중한다. 이는 심지어 중세, 근세 고전 무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실전용법'''을 보여주겠다는 중국무술의 시연회나 영상에서는 여전히 '''별로 실전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기술을 보여준다. 실전기법이라면서 상대의 주먹이 날아오면 턱! 하니 막고 몸을 싹! 하고 돌리며 다리를 팟! 하고 움직여 멋드러지게 얍! 하고 상대를 쳐내는 식인데... 피지컬, 반사신경, 숙련도 차이가 조금만 나도 정해진 합처럼 동작을 해낼 수 없다는 건 누구나 한다. 타이슨도 “누구에게나 쳐맞기 전까지는 계획이 있다”고 했드.
그런데 과거 중국과 현재가 다르다고 해도, 사람이 주먹을 휘두르는 속도는 그 나물에 그 밥일 텐데 ,이리저리 공격하고 피하기 위해서 투로나 형에서나 쓰는 '''신체단련용'''으로 하체에 부담을 크게 주는 자세의 보법을 쓰는 것은 말도 안되고, 보고 반응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주먹과 발이 난무하는데 그걸 잡아내어 이리 꺾고 저리 젖히는 식의 스탠딩 유술이 말도 안 되는 줄 과연 중국의 옛 무술가들은 '''몰랐을까?'''[9]
각종 일화에서 실제로도 매우 강했다고 일컬어지는 각 문파의 고수들은 정말로 만화나 게임에서 볼 수 있는 기기묘묘한 투로나 형의 동작을 그대로 사용하며 무술을 했을까 , 아니면 실제로 싸울 때에는 요즘 우슈, 산타가 보이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자세를 좀 더 높게 잡고 움직이며 싸웠을까? 당랑권의 고수는 실제로 땅바닥에 붙을만큼 낮은 허보를 취하며 당랑수를 취하여 싸웠을까?
투로와 형은 그 무술이 지향하는 이상의 표현 및 신체단련의 방법에 불과하긴 하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형을 수련할 때는 중심선 유지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중국무술 비슷하게 허보 궁보 마보 다 취하는 가라테만 해도 서로 대련을 할 때는 스텝을 밟으며 자세도 달리 잡는다. 태평양 전쟁 전후로 찍은 오키나와 테, 가라테 흑백 영상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실제 대련에서 취하는 이런 자세들은 가드가 좀 낮다는 점을 빼면 현대의 입식 타격기와 큰 차이가 없다. 중국무술이라고 이런 경우가 아예 없었으리라 보긴 힘들다. 교습 과정에서 익힐 수 있는 자세는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수련자 개개인이 융통성 있게 중심을 올리고 스텝도 좀 밟고 가드도 올리고 할 수 있기 때문.
적어도 현재로서는 이에 대해 명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금은 없는 무술잡지 <마르스>에 한병기가 ''''중국무술 고유의 간합''''에 대해서 글을 투고한 적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중국무술은 중거리를 유지하는 타격기+유술기 하이브리드라고 한다. 하지만 역시 근거가 없는 추정일 뿐이다. 청나라 말기에 각 무술이 역사에 등장하고, 나름의 일화를 남긴 이후에는 그 '''전승의 과정에서 실전이 누락되어 소실된 듯하다.''' 당장 중국 근대사의 흐름만 봐도 청나라 말기 여러번의 난, 열강의 침략, 중일전쟁, 국공내전, 공산당 독재, 문화대혁명 등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중국무술 중 해외에도 널리 퍼진 몇몇 문파가 있는 이유는, 이런 시기에 무술가들이 해외로 망명을 많이 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훈련방법은 잘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실전 및 이를 위한 연습은 망실(忘失)되어 남아있는 게 없다. 같은 시기에 있던 복싱은 계속해서 공개시합을 통해 검증을 해왔고, 그것을 토대로 버려질 이론은 버려지고, 더욱 갈고 닦을 이론을 갈고 닦아서 오늘날에도 확실하게 실전성을 인정받아, 종합격투기에서도 주력으로 배워둬야 하는 기본기가 되었다.
결국,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중국무술에도 '신체단련'과 '단련된 신체를 바탕으로 실제로 '''싸우는 방법''''이 둘 다 존재했으나, 그 중에서 후자는 전혀 전래되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부상에 민감하고 문파 간 자존심 때문에 치고받는 걸 자제한 청조 말기쯤 되면 아예 패러다임을 깨는 새로운 철학을 제창하지 않는 이상, 과거에 있었던 실전성도 망실하고 컨셉질로 회귀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본래 무술은 어디까지나 상대를 효율적으로 쓰러뜨리는 기술과 훈련법이 주가 된다. 중국무술이라고 해서 흔히 투로나 연무에서 드러나는 화려한 것들의 전부라고 믿으면 안 되겠지만, 교류 없이 고이고 신비주의 마케팅을 내세우다 보니 일부 중국 무술가들 스스로가 보여주기용 차력쇼를 무술이라고 착각하고 떠벌리다가 제대로 수련한 격투가들에게 얻어맞는 추태를 보여준 바 있다.
4. 현대의 중국무술
4.1. 도장 등록 가격
도장에서 수련하는 데에는 당연히 돈이 든다.
예전에 한국 무술계는 온갖 사기꾼들과 별종들로 가득했다. 전통이 있는 것이라곤 택견 정도밖에 없었고 이마저도 전통을 세우기엔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창작무술을 전통무술이라고 우기거나 다른 무술을 배워 자기가 만들었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중국무술도 별반 다른게 아니라서 온갖 권법들이 판치던 세상이었다. 특히, 중국권법의 신비감을 이용해서 자신이 특별하다며 사기를 치곤 했고, 이는 사이비 무술가가 우후죽순 나오는 이유가 되었다. 한 번에 몇십만 원을 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사기가 통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옛말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술의 기틀을 잡기 위해 많은 무술인들이 노력했고 이제는 이런 것도 거의 사라졌다. 해외로 나가 직접 중국무술을 배우는 한편 해외에 사범들을 초청해 무술을 시사받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사이비 무술 대부분은 없어지는 상황이다.
국내에서 수강료는 한 달 기준으로 대부분 십만 원에서 이십만 원 정도다. 물론 싸다고는 할 수 없는 가격이지만 왠만한 격투기 도장도 10만 원에서 15만 원 대임을 감안하면 적당한 수치다. 영 비싸게 느껴지면 문화센터를 알아보자. 4-5만 원 정도다.
비싸게 받는 곳은 삼가는 게 좋다. 그만한 실력이 있어서 받는다면 다행이지만, 그저 장삿속 때문일 공산이 크다. 사이비일 가능성이 높으니 제대로 점검해 보고 여기저기 알아본 다음 결정하거나, 성인반을 운영하는 타 무술 도장에 다니는 것도 괜찮다. 타 무술 도장 역시 사이비도 존재하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월 10~20만원의 수강료를 받는 것과 별도로 1회 참가비만 십 수만원에서 심하게는 수십만원의 '특강'을 여는 도장도 있다. 이 경우 타 무술[10] 에 이미 조예가 깊은 사람을 대상으로 중국권법의 요체를 압축해서 알려주는 경우도 있으나, 사이비 도장의 경우엔 "월 10만원짜리 수련을 아무리 해봤자 이 '비법'을 못들으면 헛수고"라는 식으로 사실상 돈 뜯어먹으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4.2. 형태
위에서도 서술된 바와 같이, 낡은 패러다임과 한정된 상황만 상정된 전통무술은 새로이 등장하고 발전한 종합격투기를 비롯한 현대무술과 비교조차 안된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전통무술'이 정확히 어떠한 형태로 싸웠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찜찜함이 남는다. 물론 이런 관점은 중국무술을 옹호하기 위한 전가의 보도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알 수 있는 것만으로만 미루어 보면 중국무술은 상당히 실전적으로 뒤떨어졌다. 중국무술의 입장으로 전술했던 무기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역시 그러하다.
앞서 서술된 바와 같이, 19세기 즈음에 들어와 수많은 중국 전통무술이 세상에 등장했고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 카더라 통신, 필담, 무용담 식으로만 전해졌다. 막상 기록영상이 등장하기 시작한 20세기 초중반이 되면 이미 '''무술의 시대'''가 종식되고 문화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중국 문화의 오랜 암흑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측면에서는 이 점이야말로 전통무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난점이다. 괜히 전통권 관련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일본이나 서양ㆍ홍콩ㆍ대만ㆍ러시아 등지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현대 무술의 진화와 발전사는 정말로 연구하기가 편하다. 복싱과 레슬링만 해도 서구 문명과 함께 보편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았으므로 적잖이 기록영상들이 남겨져있고, 그 이후로는 프로격투스포츠로 이종격투와 종합격투가 등장했기 때문에 공개적인 연구와 검증이 가능하다. 이는 전통에 근거는 두지만 현대화를 거친 무술들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현대화 이후의 시합, 훈련 경향이나 계보를 따져볼 수는 있다.
반면, 중국무술은 일제히 세상에 나와 고수들이 각지에서 활약하며 전설적 일화를 남기던 시절은 기록영상매체가 등장하기 직전 시점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손을 맞대고 시작하는 중국식 대련'이 아니라, 실제로 치루었다는 숱한 실전이 어떠하였는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이러다 보니 '전설적 고수들의 시대'가 저물고 한두 세대가 지나면 벌써 20세기 초이다. 이 시점에 겨우 기록영상이 등장했는데, 이런 영상들에 남겨진 실전 모습은 보통 상상하는 '중국무술의 실전'과 매우 다르다.
그나마 있는 것이 백학문의 진극부와 오가태극권의 오공이 행한 자선 목적 무술대결이 있는데, 한국에서도 '''애들처럼 막 싸운다'''는 조롱을 받으며 꽤 유명해진 영상이다.
아무 사전지식이 없으면 막싸움으로 여겨질 만한 싸움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 다 유명한 문파의 고수지만 딱 보니 막싸움이고 그렇기에 중국 무술이 문제라고 단적으로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11] 현대 격투기에서 이루어지는 간결한 공방 대신,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거나 찍으려 드는, 난투나 백병전에선 쓰일 여지가 있지만 격투기 시합 차원에서는 사장된 기법들이 많이 쓰이고 있다. 또, 아주 막싸움이라기에는 두 무술가 각자가 자기 문파가 특기로 삼는다는 수기나 이론을 간간히 시도하는 모습이 있다.
이 동영상에서 시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중국무술이라는 것도 실전 형태로 나타난다면 영화 등의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기술과 뭔가 기기묘묘한 자세에서 발휘되는 현란한 연속기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실력차가 많이 나거나 몇 판 싸우는 정도라면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영화배우 황정리가 홍콩에서 싸울 때 알고 보니 쿵푸였던 묘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과 싸웠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저런 유명한 문파의 고수들 역시 이종격투기 시합에서는 문파의 흔적이 언뜻언뜻 드러날 뿐인 난투전 스타일로 거칠게 싸우는 것을 볼 때 유명한 무술가들이 많이 나타나던 청말 시대나 다른 혼란기에는 중국무술가들이 영화처럼 현란하게 싸웠을 가능성이 많지 않다고 추측된다.
중국무술이 대중적으로 퍼지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사회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무력을 사용한 실전이 발생할 여지가 극도로 줄어들었기에 실전감각이 쇠퇴한 것이다. 있더라도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배우는 입장에서도 딱히 필요가 없다고 여기면 그러한 훈련을 자주 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12] 실전성과 전통을 동시에 갖추었다고 알려진 가라데도 실전성 및 풀컨택트를 주장한 오야마 마쓰다쓰(최배달)를 중심으로 실전가라데 움직임이 일어났을 때 처음에는 최배달 일파를 '또라이'들로 간주했음을 생각해보자.
어찌됐던 '''과거, 실전을 벌였다는 중국무술가들이 출몰했던 그 시대에, 그 무술가들은 어떻게 싸웠는지'''는 앞서 말한 대로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의문점은 과거 무술 관련자료가 발굴되고 연구하고 검증하지 않는 한 명쾌하게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위 영상은 쉬샤오둥과 중국 영춘권 고수의 대결 영상이다. [13] 영춘권 고수가 초반에는 영춘권 특유의 자세로 대결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영춘권 자세를 버리고 실전에 효율적인 복싱에 가까운 자세를 취한다. 복싱을 배워 본 적이 없는 중국권법가지만 실전에서 시간이 지나며 본능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중국 cctv4 채널 <진짜 무술을 찾아간다>에 출연하기도 했던, 중국 10대 무림고수 중 하나이자 태극권의 대가라 불리는 웨이레이가 중국무술의 강함을 입증한다며 쉬샤오둥과 맞대결을 벌인 영상이다. 그러나 쉬샤오둥에게 20초 만에 KO당하고 말았다. 시합 전 웨이레이는 가랑이차기, 눈찌르기 등 어떠한 기술에도 제한을 두지 말고[14] 싸우자고 쉬샤오둥에게 제안했고, 쉬샤오둥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경기가 열리기 전 쉬샤오둥은 웨이레이가 그래도 태극권의 대가인데 자신을 몇 대라도 때리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경기에선 한 대도 때리지 못한 채 쉬샤오둥의 펀치에 KO당했다. 물론 웨이레이가 엉터리 태극권사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위 영춘권 수련자를 보면 전통권 수련자가 MMA 수련자를 이기긴 어렵다. 더구나 웨이레이 같이 멋대로 창시한 태극권 유파가 아닌 태극권의 정식 유파로 인정받는 무식 태극권을 대표하는 천융도 쉬사오둥과 맞붙었다가 단 10초만에 패했기에 이제는 엉터리 태극권사여서 그랬다는 합리화도 안통하는 상황이 되었다.
4.2.1. 응용 사례
그래도 시야를 조금만 넓혀보면 중국무술을 포함한 이른바 전통 무술을 깊이 수련했으면서도 실전성을 인정받거나, 무술가로서 존경받는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무술인으로 이름난 이소룡, 최배달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실전 철학이 담긴 체계를 몸소 개척했고, 군용 CQC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페어번은 상하이에서 동양 전통권들을 접하면서 이를 특수부대나 공작원을 위한 제압술ㆍ단검술ㆍ사격술 등에 응용하는 시도를 했다. 케틀벨의 전설로 알려진 파벨 차졸린은 전통 가라데에서 전해지는 호흡법과 신체 운용법을 바탕으로 군인들을 위한 컨디셔닝 코스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들이 중국무술 전체를 포용하고 받아들여 보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무술을 수련하며 알게 된 몇몇 요령들을 자신이 잘 하는 분야에 접목하여 보완했을 뿐이다. 이소룡은 절권도를 재정립하면서 전통적인 중국무술은 거의 폐기처분하고 복싱과 레슬링을 중심으로 현대적인 무술을 만들고자 했다. 이런 태도는 최영의 역시 마찬가지라 현대적인 웨이트 트레이닝 시스템을 도입하고 무에타이와 교류하는 등 전통적인 무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4.3. 중국권법의 정체성이라는 허상
한 때 무술평론가나 연구가, 심지어는 전통권사들이 대부분 ''''현실을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중국무술을 공개하고 대련, 시합 등에 참가하면서 발전시키면 된다.''''는 발전적 견해에 극도로 부정적이었던 적이 있었다.
당장 중국무술과 인연이 있더라도, 이른바 대중들이 생각하는 중국무술의 컨셉이나 전통 따위에 ‘’’집착하지 않는’’’ 무술가나 유파들이 현대에는 무술로서 더 큰 가치를 인정받는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따라갈 수 없다”며 현대적 트레이닝과 개방성을 중시한 이소룡, 참장공으로 몸을 만들면서도 기존 내가권에 대해선 쌍욕을 박고 투로 대신 기본기와 서로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추수를 하는 의권(대성권), 중국무술의 영향을 받은 가라테에서 출발했지만 무지막지한 피지컬 단련과 상호 타격대련으로 유명해진 극진가라데 등, 전통 무술의 컨셉이니 정체성이니 하는 걸 벗어던진 사람들이 더 크게 성공했다. 중국인 격투가이면서도 MMA로 어설픈 전통권사들 패고 정부 돈이나 타먹는 부패한 무술계를 고발한 쉬샤오둥, 해외에 도장들이 하도 많다보니 사기꾼도 많지만 발전적 교류도 꾸준히 이루지는 영춘권 등에 대해선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편견에서 벗어나, 중국무술 특유의 개성이나 컨셉 같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현대적인 트레이닝 방법론과 타 스포츠, 무술과의 상호 교류를 활발히 하면 활로가 보일 것이다. 제일 좋은 건 격투기로서도 혁신을 거듭해 인정받는 것이고, 하다 못해 실전 격투기로서 답이 없다는 회생불가 판정을 받더라도 컨디셔닝 및 재활운동으로 재평가받아서라도 살아남는 게 중국무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덜 찜찜할 것이다.
당장 고대 그리스 판크라티온에도 격투와 그래플링을 병행한다는 특성상 현대 종합격투기와 유사한 면모가 있고, 한손 칼을 다루는 검술은 일본 고류 와키자시술부터 서양 세이버 검술까지 유사한 점이 있었으며, 양손 칼을 다루는 검술은 서양 롱소드와 일본 고류 카타나술 사이에 유사한 점이 있었다. 사람 신체구조가 같고 쓰는 도구도 어느 정도 같으니, 비슷한 형태로 수렴하는 건 정체성의 상실 같은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절차다.
무엇보다도 무술로 실전이 벌어졌던 임진왜란, 일본 전국시대, 중국 왕조 교체기 등의 고전 무술들은 중국 고유의 무술, 조선 고유의 무술 같은 걸 따지지 않고, 이민족 전투술 중에 위협적인 게 있으면 그걸 분석, 역설계하고 받아들였다. 명나라 무술체계 내에도 묘족의 검술이라 해서 묘도, 일본식 검술이라 해서 왜도, 이런 식으로 섞어들인 게 많으며, 조선 역시 일본 검술, 조총, 중국 한손검술, 진법 등등은 받아들였다. 전국시대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조선 사람들이 명나라 창술, 일본 검술을 받아들이며 조선 검술의 정체성이 사라질까봐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조선은 활을 잘 쏘고 중국은 창을 잘 쓰고 일본은 칼을 잘 쓰니까 이 모두를 혼합하면 보병들이 더 강해질 거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화약 무기가 들어오자 화약 무기 운용 전술을 추가한 것도 마찬가지다. 총통, 조총 때문에 무예가 밀려난다고 쓸데없이 징징대는 대신, 총통, 조총을 더 잘 쓰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들은 '중국무술이 현대무술들과 교류하면서 계속 진화하고 발전하면 어디로 나아갈까?' 하는 질문에 ''''결국에는 종합격투로 수렴된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다. 이종격투의 시대에 비밀주의 뒤에 숨지 않고 양지로 나와 자존심을 걸고 대결을 했던 무술가들과 그들이 대표한 무술은 결국 무수한 대결 속에서 각자 무술의 단점, 허황된 이론 등을 포기하고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기술들을 받아들이였다. 즉, 생물학적 진화와 다를 바 없이 '격투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한 결과, 역시 생물학적 진화와 마찬가지로 '''수렴진화'''에 비유할 만한 현상이 발생한 것.
그 결과, 백그라운드에 전통무술의 비중이 상당히 많은 성공적인 무술가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실제 링에서 사용하는 기술을 보면서 당장 그것이 어느 전통무술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기는 힘들다. 상당히 특이한 방식으로 자신의 전통 가라데 배경을 종합격투에 반영했다고 평가받는 료토 마치다의 경기를 보아도, 격투기나 무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봐도 현대 종합격투랑 뭐가 다른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중국권법 배경이 있으면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 쿵 리의 경기 역시 일반인은 두 눈 부릅뜨고 열심히 관찰해도 '저기의 어디에 중국권법 스타일이 섞였다는 거냐.'는 생각밖에 안 든다.
즉, 외형적으로는 사실상 '전통적' 분위기는 남은 바가 전혀 없고, 기술적으로도 일부 기법의 성향, 용법, 자세나 무게중심 등에서 일반적 MMA 스타일과 조금 차이가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러한 특이성도 근본적인 전제는 MMA에서 통용될 수 있는 효율성을 전제하고, 전체적인 비율로 따지면 '전통권법의 성향이 짙은' 격투가들 중에서 성공적인 사람들은 매우 적다.
어지간하면 현대 종합격투에서 파이터들은 자신의 격투스타일을 어느 '유파'로 규정하지 않고 대개는 소속된 단체나 도장으로 기록한다. 즉, 이미 특정한 유파를 논하기에는 어폐가 생길 정도로 격투기법은 보편화되었고, 대개는 격투의 사상이나 성향 등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도장, 단체로 구분해야 하는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중국권법의 권사들과 장문인들이 허황된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시합에 나오고 교류를 해나가며 실전성을 갖추는 방향으로 자기 무슬을 발전시킨다면, 그 과정에서 통용되지 않는 허구적인 사상과 기술들이 버려지고, 확실히 효과적인 타무술의 기법들을 받아들이고 반영하는 현상이 일어남은 필연이다.
세대를 거치면서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며 진화가 반복되어 실전적으로 발전한 중국권법의 모습은 과연 지금 존재하는 종합격투기의 모습과 다를까?
어느 측면에서, 현대 종합격투기는 SF 만화나 영화 등에서 '끔찍하게 강하고 위험한 것'으로 종종 묘사되는 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공상과학에서 서로 다른 생물의 유전적 특질을 합치고 짬뽕해가면서 원본이 거의 남지 않고 모든 '강한' 면모만 합쳐진, 무지막지하게 강해진 혼종 생물병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실전을 기준으로 편견 없이 바라본다면 강한 특질을 결합시켜 만들어진 무술이 매우 실전적임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런 방향으로 발전하면 원본의 '전통적' 모습은 거의 남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중국권법뿐만 아니라 '전통무술'을 내세우는 어느 나라의 어느 무술가라도 공유하는 매우 심각한 딜레마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딜레마는 중국권법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 '전통'을 강조하는 무예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당면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1. 원래 무술은 싸우기 위한 기술이므로, 당연히 싸워서 이기는 강한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2. 무술은 지역적, 시대적 차이로 인하여 서로 다른 곳, 다른 시대에서 각자 특징과 차이를 갖고 별도로 발전하였다. '''(물론, 싸워서 이기기 위한 기술이라는 것이 전제임은 변함이 없다)'''
3. 그렇게 별개의 무술로 분화하고 성장하면서 점차 고유의 이상, 사상, 관념 등이 자리잡으며 '싸움의 기술'인 동시에 각 지역의 문화적 차이를 반영하는 형태로 자리잡았다.
4. 그러나, 현대로 들어와 세계화가 이루어지면서 그 어떤 무술이라 해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나 겨룰 수 있게 되었으니, 시공의 한계가 극복되었고, 그 결과 벌어진 실전대결에서 '''무술 본연의 전제'''인 武의 측면에서 세계 각지의 전통무술의 허실이 무자비하게 드러났다.
5. 이 현실을 인정하여, 다시금 武를 강조하며 적응하고 발전하며 진화한다면, '''2와 3의 과정을 거치면서 성립된 문화적 특질, 전통성은 붕괴된다.''' '더 이상 전통무술은 없다.'는 결론이 나올 뿐이다.
6. 그러나, 전통무술의 문화성,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싶다면 결국 武의 측면에서는 더 이상 의미없는 도태된 기술과 체계를, '''쓸모가 없음을 알면서도''' 유지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7. 결국 武라는 본연의 전제를 한 수 접고 文의 가치를 유지하게 된다는 점에서 '전통'을 남기고 '무술'을 포기한다는 소리이기에, 사실상 전통무술을 '무술이 아니라 춤이나 무용'이라고 까는 비판론을 그대로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 더 이상 전통'''무술'''이 아니라, 전통'''예술''', 전통'''문화'''라는 것이다.
그나마 택견 같은 일부 무술은 상황이 낫다. 택견은 처음부터 '잊힌 문화를 재발굴하고 복원해냈다.'는 명분을 들었기 때문에 조선의 무술인 동시에 '놀이'로서 택견의 지위를 강조하면서 그러한 압박에서 상당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전통과 비전의 강함'을 내세운 무술일수록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고, 그야말로 전통무술은 강하다.는 신비주의 마케팅에 '''올인을 해온''' 중국권법은 총체적 난국이다.
결국, 그에 대응하는 대부분 중국권법들은 '''지금까지 해온 대로''' 종합격투의 존재를 무시하고, 공개시합과 교류를 금지하는 방침을 고수한다.
중국 권법을 세계에 알린 것으로 유명한 이소룡 역시도 전통 무술에 부정적이었고 위와 견해가 비슷했다고 한다.
4.4. 새로운 시대에서의 가능성
4.4.1. 맨손
맨손만으로 싸울 때 전통적인 중국무술은 현대의 종합격투기에 비해서는 상당히 떨어진다. 맨손격투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무술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는 한계이지만, 그래도 중국무술을 수련한 누군가가 종합격투기 무대에 뛰어들어서 선수로서 뛰어난 성적을 내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동영상이 약간의 영감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권법의 기술이 격투기에 사용된 사례들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 무술이 전혀 사용되지도 않고, 중국 무술과 관련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 유도가인 추성훈, 주짓떼로인 베우둠, 레슬러인 존 존스등의 동작을 중국무술의 동작이라고 우기는 영상들이다. 실제로 이런 영상들은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태권도 채널에서는 UFC에서 사용된 태권도, 가라테는 가라테 기타등등 자기의 기술이라고 우기는 영상 들이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 하자면 이것은 곳 '''실전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기술이 각종 무술에 숨어있음'''을 뜻한다. 당장 MMA의 "각 무술의 '''장점'''을 합쳐 만들었다"는 특성 자체가 "'''실제로 쓸모가 있었기에 전통무술에서 MMA의 기반 무술로 발전하는 동안에도 버려지지 않고 이어진 기술들'''을 모았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어쨌든 종합격투기에서 갈수록 여러 가지 기술들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중국무술 기술도 꾸준히 발굴되고 사용되기는 할 것이다. 단지 그것이 중국무술에서 기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밖에 현대적인 스파링을 도입하고 현대 격투기의 전술에 적응하면서 전통적인 권법의 기술을 개선시키고, 더불어 세계적인 대회를 열어 발전하는 중국무술로 산타가 있고, 1990년대부터 국제대회등으로 크게 대두되면서 인기를 끌고있다. 단, 현대화를 거부하고 전통방식을 고집하는 관계자가 아직 많으며, 또한 일각에서는 도복과 옷을 입지 않고, 손가락을 봉쇄하는 복싱글러브 등을 사용하여, 옷깃을 활용하는 소매잡기를 비롯 전통 중국 씨름인 솔각이나 다른 여느 권법의 기술들을 쓰지 못하여 중국권법만의 개성과 색채를 잘 살리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최근 영춘권과 팔극권에서는 현대적인 보호구와 규칙을 도입하여 자유대련을 실시하는데, 아직 어설프지만 초창기이고, 종합격투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귀추가 주목된다.
장 룽이라는 영춘권사가 MMA와 렛웨이, 킥복싱 등에서 활동하며 주목받았다. 다만 주목에 비해 좋은 성적은 내지 못하고 있는 중. 또한 천즈황이란 대만의 종합격투기 선수가 영춘권을 베이스로 하고 있는데, 그라운드 기술이 안 좋아서 실적이 좋지는 않다.
4.4.2. 무기술
아예 격투, 냉병기를 떠나 총기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특수부대원이나 전술사격 전문가 중 개인 취향에 따라 태극권, 영춘권 등 중국무술 베이스로 신체 단련, 컨디셔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이른바 전통적인 중국 무술의 틀에서 벗어나, 그냥 현대적인 웨이트 트레이닝, 기본기 숙달, 섀도우복싱, 스파링을 본인들이 아는 무술 베이스와 섞어서 짬짬이 하는 것이며, 무술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몸 쓰는 감각을 익혀서 단검술, 기동사격술, 부상자 도수운반(...) 등등에 유용하게 쓰는 사람들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본래 중국무술은 무기술의 일부로 만들어졌다. 가령 송태조32세장권은 병기를 수련하기 이전에 병사들의 기초체조의 용도로 실시하던 것이었다. 이것의 영향을 받아 수 많은 중국권법이 탄생되었는데, 병기를 익히기 위한 기초체조이자 제한적인 상황에서의 간단한 맨손무술이었다. 게다가 산타나 종합격투기라는 장르가 나온 이상, 그와는 다른 중국무술만의 차별적인 마케팅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 중에는 전통 중국무술이 추구했던 무기술을 발전시키는 것도 있다.
특히,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권법은 본래 무기술'이라는 주장이 일종의 '변명'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중국무술의 무기술 또한 권법과 마찬가지로 혼자하는 투로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해 정말 실전성이 있는지 검증받지 못했다.[15] 그래서 그저 무기간의 대결은 맨손격투에 비해 위험성 때문에 대결이 잘 성사되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해 자기만족을 한다는 소지도 있다. 적어도 보호구도 없고 의학도 발달하지 않은 전근대에는 서양도 이런 이유로 적극적인 상호 타격 대련을 못 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안전하면서도 공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훈련용 무기와 보호구, 응급처치 기술이 모두 발달했기 때문에 서양, 일본 고전 무술 연구회조차도 대련과 대인훈련을 적극적으로 한다.
때문에 그렇다면 정말로 중국권법이 무기술로서 실전성이 있는지 검증해보아야할 것이다. 2020년을 기준으로 세계적으로 각국의 고유 무기술을 복원하여 타 문화권의 무기술과의 대련을 통해 실전성을 갖추었는지 검증[16] 하고 있는 추세이기에, 무기술을 자처하는 중국권법 역시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할 것이다. 가령 팔극권의 창술, 벽괘장의 묘도, 영춘권의 팔참도 역시 이러한 대련을 시도해볼 수 있고, 서로 다른 문파의 병기끼리 대련하여 서로 함께 연구하고, 또한 일종의 레저 스포츠로서 팬싱이나 검도처럼 여러 사람들이 관람이나 교육 등으로 참여할 수 있다. 국제교류로 연구 및 발전시켜 실전역량을 강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당장 전통무술의 흔적도 남아있지만 현대에 와서 재발견되고 무기술로 유명한 동남아시아 각지의 칼리 아르니스, 실라트 등의 무술들은 이런 식으로 상호 교류 및 수련자, 교육자들의 해외 연수도 상당이 잦다. 그리고 수련할 때 단봉 및 수련용 모형칼로 살벌하게 약속대련 및 자유대련을 하는 과정도 들어간다. 현대에는 합성수지, 플라스틱, 고무로 만든 훈련용 단봉, 단검도 많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도 탄성있는 라탄 목제 봉으로 사람 패기도 했다. 등나무가 오동나무같이 사람 딱 죽일 정도로 단단한 나무가 아니라서 가능한 방법이었다. 적당히 짧고 가벼운 무기를 이용하는 방법은 경찰, 헌병, 경호원 및 총기나 흉기를 쓰지 않는 호신술을 원하는 민간인들에게 꾸준한 수요가 있어 실전지향 연구가 많이 되는 분야다. 동남아 무술들은 이러한 틈새시장을 노리고 군, 경찰용 전투무술로 많이 진출했다. 해당국 정부 및 군대가 한국의 전투태권도처럼 마케팅과 국위선양을 겸해 밀어주는 면도 있다.
간혹 중국의 검술과 일본의 검도가 호구를 착용한 상태에서 대결하기도 한다. 이러면 중국무술 하면 떠오르는 한 손 대도, 연검술이 아닌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들어치는 검도와 유사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당장 검도 룰 내에서도 이도, 사슬낫(...) 등을 사용하는 수련자들이 일도 수련자와 대련할 때 무기를 놓치는 경우도 있고, 중국은 명나라 때도 왜구랑 부딪혀보니 일본식 검술이 위협적이라며 왜도술을 들여왔었다. 조선 역시 임진왜란 이후 전통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항왜의 자문을 받고 왜검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검법을 들여왔었다. 진짜 칼로 실전을 벌이던 시대에는 전통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거 따지지 않고 효율적인 기술이 있으면 들여오고 교류를 했었는데, 전통과 컨셉에 집중하는 근, 현대의 일부 무술가들의 고집과 비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