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탕족
1. 개요
몽골 흐브스글 아이막에 거주하는 몽골화된 튀르크계 순록 유목민이다.[2] 러시아에 위치한 투바인, 토파, 소요트족과 관련이 있으며, 그만큼 생활풍속도 이들과 유사한 편이다.
주로 흐브스글 아이막의 "올랑올(Улаан-уул)", "차강노르(Цагааннуур)", "렌칭룸베(Рэнчинлхүмбэ)", "바양주르흐(Баянзүрх)", "한흐(Ханх)" 등의 솜(сум)에 거주하고 있다.
2010년 몽골 인구조사 결과로는 282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3]
2. 역사
1764년 만주 올리아스테의 영사에 기록된 문서에서 차탕족에 대한 첫 기록이 적혀 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원래 이들은 오늘날의 투바 지역에 살고 있었고, 1921년 투바 인민 공화국이 몽골로부터 분리된 이후에도 투바와 몽골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다르하드 부족으로 보이는 오르츠(Урц)에 사는 수렵민 22명, 순록 192마리가 있다.
그러나 1944년 소련이 투바를 합병한 이후로 국경이 폐쇄되자 차탕족은 지금의 몽골 북부로 도망치듯이 이주하였다.[4]
처음 몽골 인민 공화국은 북몽골로 이주해온 차탕족들을 투바로 다시 추방하는 것으로 대처하였으나, 1956년 정부는 마침내 그들에게 몽골 시민권을 주고 시시그트 강 인근에 위치한 차강누르 호수 지역에 이들을 정착시켰다.
3.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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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몽골화되었으나 다른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차탕족 전통가옥 "오르츠(Orts)"의 외형은 몽골의 게르보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티피나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이동식 가옥 "춤(чум)"에 가깝다.[5]
이들이 사는 곳은 샤머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강력히 살아있으며, 마을로 가는 중간의 신목이나 샤먼들이 신에게 마을과 주민의 무사안녕을 빌었던 장소에는 하닥[6] 이 걸려있다고 한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1년에 5~10번씩 이동하며, 순록들은 따로 먹는 이끼가 있다고 한다.
4. 위기
자연개발 및 환경변화로 인해 먹고살길이 없어지면서 순록 목축을 포기하거나 순록을 잡아먹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순록의 뿔이나 성기를 팔기까지 하면서 순록 개체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또한 여행사들은 타이가 여행상품을 팔면서 돈을 벌었지만, 차탕족에겐 그 이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기껏해야 순록뿔로 만든 수공예품, 약초를 팔거나 관광객과 같이 사진을 찍어서 벌어들인 돈 정도..
게다가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들과 대화하는 대신에 사진 촬영에만 급급하며 심지어 쓰레기만 버리고 가서 이들의 생활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한다.[7] 동시에 외부인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젋은 차탕족들 사이에서 도시에 정착하고 취직하는 이들이 늘어가면서 순수 차탕족들은 현재진행형으로 줄어드는 중이다.
또한 타부족을 피해 족내혼을 해왔던 탓에 유전병도 심하다고 한다.
[1] 순록을 가지고 있는 자들. 해당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36년부터이다.[2] 정확히는 투바인의 분파인 투바 토지네츠인 계통에 속해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본래 민족명도 투바와 비슷한 '''두카'''.[3] 현재 남아있는 튀르크족 중 제일 적은 인구수다.[4] 이주한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국경지대는 곧 이들의 영역이고, 이곳 스텝 지역에 살던 몽골인들과도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당시 소련은 식량난에 빠져 차탕족의 가축들을 징발해갔으며, 이때 하필 전염병의 확산으로 많은 수의 학생들이 사망하였다. 또한 소련의 집단화 정책으로 가축을 잃어버릴 두려움 탓도 있었다.[5] 그러나 전통복식은 외몽골의 할하인에 가깝다.[6] хадаг/Khadag, 몽골이나 티베트 지역에서 상서로움과 극진한 정성을 표시할 때 신에게 바치거나 상대방에게 선사하는 가늘고 긴 비단천을 말한다.[7] 결국 2012년 차탕족 마을을 방문한 대통령이 노인과 어린이가 많은 차탕족 가족에게 정부가 따로 급료를 지급할 것이라고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