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염

 


崔琰
(? ~ 216년)
1. 개요
2. 정사
2.1. 초기 생애
2.2. 조조 휘하에서
2.3. 뛰어난 풍채
2.4. 뛰어난 인물 식견
2.5. 죽음
3. 평가
4. 연의
5.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계규(季珪). 청하군 동무성현 사람. 조카딸 최씨조식의 아내.
조조가 죽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어려서는 소박하고 어눌했으며, 검술을 좋아하고 무예를 숭상하였다. 스물세 살 때, 향(鄕: 현 아래의 행정단위)으로부터 추천되어 정졸(졸병)에 임명되었으며, 처음에는 발분하여 논어(論語)와 한시(韓詩)를 읽었다. 나이 스물아홉이 되어서는 공손방등과 사귀어 함께 정현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학업을 받았다.
학업을 시작한 지 1년도 안되어 서주의 황건적이 북해군을 공격하여 무너뜨렸으므로, 정현은 문인들과 불기산으로 피난 갔다. 그 당시 불기현에는 팔 수 있는 식량이 매우 적었으므로, 정현은 모든 학생들의 교육을 중단하고 흩어지게 했고 최염도 이미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받았으나, 도적들이 가득 차서 서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청주서주연주예주 외곽 지역을 두루 다니다가 동쪽으로 수춘까지 내려와 남쪽으로 장강과 대호(大湖)를 구경하였다. 집을 떠난 지 4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서 비파를 뜯고,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즐겼다.
대장군 원소가 최염에 관해 듣고 초빙 하였다. 그 당시 원소의 사졸들은 극도로 교만하고 난폭하였으며, 분묘를 파헤쳤으므로, 최염이 원소에게 간언하였다.

옛날에 순자가 말하기를, ‘병사들이 평상시 가르침을 받지 않고, 무기를 날카롭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은(殷)의 탕왕이나 주무왕 같은 성왕이라고 할지라도 그들로써 이길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길에는 시체를 거두어주는 사람이 없어 유골이 드러나 있고, 백성들은 은덕을 입지 못하고 있으니, 응당 군현에 칙령을 내려 유골과 썩은 시체를 묻게 하여 측은하고도 애통해하는 당신의 인자한 마음을 나타내시고, 주문왕과 같은 인정을 따르십시오.”

원소는 최염을 기도위(騎都尉)로 삼았다. 후에 원소는 여양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켜 연진에 주둔시켰는데, 이에 대해 최염은 또 간언했다.
“천자께서는 허도에 있고, 백성들은 천자를 돕고 순종하기를 희망하고 있으니, 변방지역을 지키면서 직무를 보고함으로써 구현(區縣)의 안정을 구하는 것만 못합니다.”
원소는 최염의 간언을 듣지 않았으므로, 관도대전에서 패했다. 원소가 죽자 그의 두 아들은 서로 다투었고, 최염을 얻으려고 경쟁했다. 최염은 질병을 칭하여 간곡히 사양하였는데, 이로부터 죄를 받아 감옥에 갇혔지만 음기(陰夔)와 진림의 구원에 의하여 사면되었다.

2.2. 조조 휘하에서


업을 함락한 조조가 기주목에 오른 뒤, 최염을 불러들여 별가종사로 삼았는데, 조조는, "내가 기주 백성의 호적을 살펴보니 넉넉히 30만 병사를 모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소. 이렇기 때문에 기주가 큰 땅이라 불리는 것이구려."라고 말했다. 그러자 최염은 "지금 천하는 나뉘어 무너졌고, 구주(九州)는 갈기갈기 찢겨졌으며, 두 원씨 형제는 골육끼리 서로 다투고 있고, 기주의 백성들은 백골을 황야에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저는 명공이 인솔하는 천자의 군대가 인의의 소리로써 앞장서서 진군하여 그곳의 풍속을 물어 도탄에 빠진 그들을 구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으며, 오히려 병사들의 수를 조사하고, 오직 이 일만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으니 이 어찌 벽지에 위치한 주(州)의 백성들이 명공에게 바라는 것이겠습니까!"라고 되물어서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는데, 조조는 실언했다며 진지하게 사과했다.
조조가 북상해 병주 토벌에 나섰을 때는 업에 남아 조비를 보좌했으며, 사냥을 즐기는 조비에게 엄중히 폐단을 간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놀이와 사냥에 정신을 잃는 것을 상서에서 경계한 바 있고, 노은공이 물고기를 보고 끌리는 것을 춘추에서 비난했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주공공자의 격언이며 상서와 춘추 두 경전에서 명확히 밝힌 진리인 것입니다.

은 하후씨(夏后氏)로써 귀감을 삼았고, 시경에서는 먼 시대의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은의 주왕과 하의 걸왕이 죽은 갑자일(甲子日)과 을묘일(乙卯日)은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는데, 예기(禮記)에서도 이 날을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기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또한 근세의 득실의 귀감이 되므로 깊이 고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씨 일족은 부강하고 자제들은 방종하며, 수렵에 빠지고 사치가 점차 심하여 도의의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철인과 군자는 잠시 이것에 불편한 심기를 노출하였고, 용맹한 무사는 다른 나라를 집어삼키는 도구로 타락했습니다. 비록 한낱 백 만 무리를 끌어안고 하북 일대를 넘더라도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는 까닭입니다. 지금 국가는 쇠약해지고, 은혜와 안락한 생활은 천하에 보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자건 여자건 간에 바라고 그리는 것은 덕(德)입니다. 하물며, 공은 친히 전마를 통솔하여 위와 아래의 관병들은 매우 고달픕니다.

응당 정도(正道)를 존중하여 따르고 행위를 삼가며 단정하게 하고, 항상 국가를 다스릴 높은 책략을 생각하고, 안으로는 근세의 혼란스런 정치를 교훈으로 하고, 밖으로는 원대한 절개와 의리를 드날리며, 당신이 신자군(信者君)의 중요한 지위가 되었음을 깊이 생각하여 몸을 귀중하게 여겨야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냥꾼이나 병졸들의 천한 의복을 입고, 갑자기 말을 달려 험난한 곳을 뛰어넘고, 꿩이나 토기를 잡는 작은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하고 국가의 중요한 일을 잊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식자들이 마음을 측은해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오직 수렵용품을 불살라 버리고, 말을 탈 때 입는 옷을 버려서 모든 사람의 희망을 만족시켜 주어 늙은 신하로 하여금 하늘에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조비가 대답하여 말했다.

전날에 나는 당신의 좋은 충고를 받았고, 여러 차례 나에게 고매한 이치를 나타내어 나로 하여금 수렵용품을 파괴하게 했고, 말 탈 때 입는 옷도 버리게 만들었소. 지금 이후로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면 다시 당신의 충고를 받겠소.

스스로 승상이 된 조조는 최염이 청렴하고 강직하다며 최염에게 동조와 서조의 속관을 거쳐 정사를 맡게 하였다. 그대는 청렴한 백이(伯夷)의 풍격이 있고 사어(史魚)의 강직함이 있으며, 탐부(貪夫)는 그대의 명성을 사모하여 청렴하게 되었고, 장사(壯士)는 그대의 명예를 숭상하여 떨쳐 일어났으니, 이는 시대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동조(東曹)의 관직을 제수하니, 그 직책을 이행하도록 하라. -
조조가 위공에 올랐을 때 최염은 상서(尚書)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는 세자를 세우지 않았었고, 임치후 조식이 재능이 있었으므로 조조의 총애를 받았다. 조비와 조식 두 아들 중 누구를 후계자로 삼을지 고민하던 조조가 신료들에게 글을 봉하여 의견을 내도록 했다. 최염은 조카딸 최씨를 조식에게 시집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글을 봉하지 않은 채

제가 듣건대 춘추의 뜻에 의하면, 세자를 세울 경우에는 맏아들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오관장(五官將 : 조비)은 애정이 깊고 효성스러우며 총명하므로 대통을 이어야만 합니다. 저 최염은 죽음을 각오하고 이것을 지키겠습니다.

이치를 따져 맏아들인 조비가 뒤를 이어야 옳다는 의견을 냈고, 조조는 그에게 새삼 경의를 표하며 그를 중위로 삼았다.

2.3. 뛰어난 풍채


최염전에 따르면 최염은 음성과 자태에 기품이 있었고 눈썹은 시원스럽게 퍼져 있었으며, 두 눈은 맑았고 수염의 길이가 넉 자나 되어 더욱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평소 조정의 대신들은 그를 앙모하였고, 조조조차도 그를 존경하며 두려워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조가 흉노의 사자를 접견하게 되었는데, 조조는 자신의 용모가 뛰어나지 못하여 사자를 제압할 위엄이 없다고 여겼다. 자신은 칼을 찬 신하로 위장하고 대신 최염을 왕좌에 세워 왕 노릇을 하게 하여 흉노의 사신을 접대하게 했다. 접견이 끝난 뒤 조조는 첩자를 보내 흉노의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게 하였다. "보기에 위왕의 인물됨이 어떠하던가요?"이 물음에 흉노의 사자는, "위왕의 용모는 위엄이 있었지만, 용상 옆에 칼을 차고 있던 사람이야말로 영웅이었소."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조조는 즉각 사람을 보내 흉노의 사자를 처치해 버렸다. 물론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지만 그만큼 최염의 풍채가 뛰어났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2.4. 뛰어난 인물 식견


선현행장에 따르면 .최염은 맑고 충직했으며, 높고 명석했다. 그는 원대한 경륜과 아름다운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반듯하고 곧게 처신했다. 조정에서는 항상 정색을 하고 바른 말을 했다. 위씨가 처음 정권을 새웠을 때 그는 모개와 더불어 인재를 평가하는 일을 했는데, 공평하고 깨끗하게 일을 처리했으므로 10년 동안이나 그 일을 계속했다. 문무를 겸비한 수많은 인재들을 제대로 선발하자 조정은 다시 위엄을 갖추게 되었고, 그는 공평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염은 사마랑과 친한 사이였는데, 그의 동생 사마의의 재능을 일찍이 높게 평가했다. 사마랑은 최염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최염은 매번 이 의론을 견지했다. 나아가 최염은 사촌인 최림의 자질을 간파하여, "그는 대기만성형의 사람이니, 결국에는 심원한 데까지 이를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모르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유명한 사자성어 대기만성의 유래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손례노육이 처음 군부(軍府)에서 일을 시작할 때, 최염은 그들은 삼공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라고 품평했는데, 나중에 정말로 최림, 손례, 노육은 모두 삼공의 관직까지 올랐다.
한편, 최염과 모개가 검약한 삶을 인재 등용의 중요한 척도로 강조하자, 화흡은 과도한 청빈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관리들이 억지로 검소한 사람 행세를 하는 풍조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화흡의 조언은 최염과 모개가 청렴한 인재를 선발하려 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2.5. 죽음


조조가 위왕에 오르니, 전에 최염이 추천했던 양훈(楊訓)이라는 사람이 비록 재기는 부족하지만 청렴하고 성실하여 도의를 지켰으므로 조조는 예의로써 그를 초빙했다. 조조가 위왕이 되자 그는 조조의 공적과 정벌의 노고를 칭송하고, 성덕(盛德)을 찬양하였다, 당시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양훈을 조소하면서 최염을 추천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최염은 양훈에게서 표의 초고를 받아 보고, 양훈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의 상주문을 살펴보았소. 위왕의 사적이 우수할 뿐이오. 시대여! 시대여! 응당 변혁해야만 되는 시대요.

최염의 본의는 의론하는 자들이 견책하기만을 좋아할 뿐 객관적으로 정리(情理)를 살피지 않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조조에게 최염의 편지가 그 시대를 무시하고 조조를 원망하고 비방한 것이라고 말하였으므로, 조조는 화가 나서 말했다.

속담에 ‘여자를 낳을 뿐(生女耳)’이라는 말이 있는데, ‘뿐(耳)’이라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오. ‘응당 변혁해야만 되는 시대요(會當有變時)’라는 것이 가리키는 의미도 겸손하지 못하다.

그래서 최염을 처벌하여 역소에서 잡일 하는 노예로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보도록 했는데, 그의 말과 얼굴에는 굴복의 기색이 없었다. 태조가 명령을 내렸다.

최염은 비록 형벌을 받았는데도, 집에 빈객들을 통하게 하여 문 앞은 장사하는 사람의 집과 같다. 그는 빈객들을 규룡과 같은 수염을 기르고 얼굴을 직시하니, 마치 노여워하는 것 같다.

그래서 최염에게 죽음을 명했다.
《위략》에는 최염의 죽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최염의 글을 얻었다. 그는 그것을 상자에 넣어 두건으로 싸고 행차를 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 당시에 최염과 오랫동안 불편하게 지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길을 가다가 최염의 이름이 적힌 궤짝을 가지고 가는 사람을 보고 뒤를 따라가 자세히 살핀 다음 그 사실을 고발했다. 조조는 최염이 속으로 자신을 비방하고 있다고 하여 그를 잡아서 곤형(髡刑)에 처한 다음 유배시켰다. 전에 최염을 고발했던 사람이 다시 이렇게 고발했다.

최염이 유배된 후에 다시 수염을 기른 것은 마음속에 불평을 품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조공은 그의 말이 옳다고 하여 곧 죽이려고 했다. 청공대리(淸公大吏)를 시켜서 최염에 대한 것을 조사하게 하고 이렇게 지시했다.

3일 이내에 자세히 보고하도록 하라.

그러나 최염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며칠 후에 관리가 최염은 평안하다고 보고했다. 조공은 화를 내며 최염이 분명히 홀로 칼을 갈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리가 그 사실을 최염에게 알리자 그는 관리에게 감사하며 이렇게 말하고 자살했다.

내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공의 뜻이 그렇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진수는 그를 평하여 조조는 기피하는 감정이 강한 성격으로 공융, 허유, 누규는 모두 옛날의 관계에 의지하여 불손한 태도로 대했다가 처형되었지만 최염은 조조가 지시하여 처형되도록 한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억울하게 죽었으며, "사관입장에서 보아 그는 어떠한 죄도 없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적었다. 위진정통론 입장에서 쓰여진 정사의 저자조차 이렇게 말할 정도면 최염을 죽인 조조가 얼마나 많은 비판을 받았는지 짐작 가능하다.[1]

3. 평가


홍승현 교수는 최염과 모개의 죽음을 순욱의 죽음과 동일선상에 놓고 분석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이들의 죽음은 단순히 간신의 모함에 의한 불운이 아니라 조조의 권력 획득 과정에서 방해물로 인식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배제당한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뜻밖이랄까, 이는 조조에 대해 호의적인 학자인 장야신마저 같은 논지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최염과 모개의 최후에 대해 그는 "한나라를 손에 넣는 데 방해가 되거나 또는 이에 불만을 표한다면, 조조는 여태까지 아무리 큰 신임을 받고 많은 공을 세운 자라고 해도 일말의 여지없이 엄격한 벌을 가했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즉, 그가 생각하기에 최염과 모개가 죽은 결정적인 이유는 모함이 아닌 정치적인 문제였다는 것이다. 헌데 그에 관하여 '한나라를 손에 넣는 데 방해가 되거나 이에 불만을 표한다'는 전제가 눈에 띈다. 그렇다면 최염과 모개는 순욱과 마찬가지로 한나라의 복권에 관하여 은밀하게 노력을 하였고, 그것이 조조에게 발각되어 내침을 당한 것일까? 이는 사실상 일부 학자들이 앞뒤의 정황을 따져 도출해낸 추측이라고 여기는 것이 옳다.
그러나 하필 위의 사건이 조조가 위왕의 작위를 하사받으며 한실의 권위를 다시 한번 크게 침범한 직후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물론 반대로 우연히 시기가 그렇게 맞아 떨어졌기에 최염과 모개가 한나라와 일부 연관을 가졌다는 추측이 성립됐다고 여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어찌되었든 간에 한 가지는 확실해진 셈이다. 조조에게 있어 찬탈로 가는 계단에 어떤 형태로든 장애물이 되는 자는 그가 아무리 공이 많고 명성이 높은 인물이라 해도 철저히 제거당할 것을 각오해야 했다는 사실. 협력 내지는 최소한 침묵이라도 지켜야만 그의 아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었을 거라고, 조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그는 문무 대신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게한 것이다.
여담으로 이 사람의 증손자 최비동진의 평주자사를 역임하고 영가의 난 이후 요동 지역에서 할거했으나 뒷날 고구려로 망명했다.

4.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에게 발탁될 때 백성을 먼저 생각하라고 일갈하는 모습은 정사와 비슷하다. 조조가 승상이 되자 승상부에 들어가고 조조가 위공이 되자 상서에 임명된다.
그런데 최후는 갑자기 위왕 즉위를 반대하면서 조조를 한실의 역적이라고 욕하다가 몽둥이 찜질로 처형당하는 걸로 각색되었다. 한나라의 복권에 대한 의혹을 정설로 확실시하여 한조의 충신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당시의 명망과 더불어 억울한 죽음을 맞은 그의 최후에 기인한 것이라 추측된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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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7,8,9,10
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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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3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주로 정치력에 특화된 B+급 문관형 인재인데, 젊어서 무예에 심취했다는 기록 때문인지 무력도 50대 중반 정도를 부여받아 문관치고는 그리 약하지 않다. 물론 통솔력은 기대할 수 없다. 초창기 삼국지에선 염소 같은 얼굴(...)에 해맑게 웃는 표정이었지만 삼국지 11부터 이런 묘사는 사라졌다. 삼국지 6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3/무력 59/지력 68/정치력 87. 매도와 고무를 가지고 있으며 모략계 병법은 없다. 내정용 문관. 재야 시절엔 평원에 있어서 관우, 장비말고는 인재가 없는 190년 반동탁연합 시나리오의 유비에게 소중한 자산이 된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21/무력 56/지력 70/정치력 79/매력 76에 무난한 문관. 특기는 상업, 지리, 명사, 항변, 반박으로 5개인데 딱 기본만 넣어줬다는 느낌이다. 일단 상업 특기가 있고 정치력이 79이니 상업 담당으로 쓰기엔 부족함이 없다. 참고로 삼국지 10까지의 일러스트는 사서의 기록대로 수염이 강조되면서 크게 웃는 표정이라 자못 인상이 강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8/무력 55/지력 70/정치력 83/매력 75에 특기는 안력. 특기에 대한 고증은 잘 되었지만, 워낙 효율이 낮은 특기라서 능력치에 비하면 좀 안타까운 편. 일러스트는 수염도 짧아지고 다소 평범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삼국지 12에는 등장하지 않았다가 삼국지 13에서 재등장했는데 능력치는 매력만 빠진 상태로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공성 1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공성이고 전법은 궁속강화. 내정 관련 특기가 없어서 아쉽지만 감릉에서 재야로 등장하기 때문에 인재가 부족한 유대군으로 플레이 한다면 등용해서 전투용으로 써주자. 일러스트는 가슴에 손을 올리면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는 모습이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8, 무력 55, 지력 70, 정치 83, 매력 76이며 개성은 동지, 명성, 안목, 주의는 예교, 정책은 호적정비 Lv 4, 진형은 학익, 투석, 전법은 대갈, 치료, 친애무장은 노육, 사마랑, 손례, 최림, 혐오무장은 없다.
삼국전투기에는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최훈 본인의 오너캐로 등장한다. 처음 등장한 신야 전투 (3)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다.
신야 전투 편에서는 조조가 유비 쪽에 새 인재가 영입됐다는 순유의 보고를 받고 새로운 인재를 원한다고 하자 조조에게 중달을 추천했다.
동관 전투 편에서는 동작대의 설계를 맡았던 것으로 묘사된다. 다만 조조는 완성된 동작대를 보고 주작을 올리랬지 누가 참새를 올리랬냐며 면박을 줬다.
창천항로에는 사서대로 멋진 수염을 달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조비를 후계자로 추천하지만 조조의 구현령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제거된다. 그런데 위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최염이 양훈의 조조 칭송을 비판했다가 조조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자기 칭송이나 하는 그런 쓸모없는 인재를 추천했다는 정반대의 이유로 조조의 심기를 거스르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 걸로 나온다. 조조 신격화를 위한 역사 왜곡의 희생양.

[1] 진수가 정사에서 조조에 대해 비판적인 표현을 한 사례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다. 하나는 최염 숙청, 다른 하나는 서주 대학살이다. 위진정통론자 입장일 수밖에 없는 진수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비(非)조조 세력 및 후대에서 이 두 가지 병크를 저지른 조조에 대해 어떻게 봤을지 뻔한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