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대학교/역사

 



1. 개요
2. 설립 및 정착기
2.1. 설립
2.2. 정착
2.2.1. 충남대학교와 민주화
2.3. 충북대학교와의 통합과 분리, 국립 충남대학교
2.4. 학교 현황
3. 발전 및 확장기
3.1. 발전기
3.2. 충남대학교와 두번째 민주화 운동
3.3. 확장기
4. 90년대 ~ 현재
4.1. 1990년대
4.2. 2000년대
5. 역대 총장
6. 관련 문헌

* 본 문서는 충남대학교 60년사에서 가져와 알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 첨부된 사진 자료는 사진으로 보는 충남대학교 60년사에서 가져왔습니다.


1. 개요


충남대학교의 역사(설립 ~ 현재)를 설명하는 문서이다.

2. 설립 및 정착기


'''1952. 5. 25 ~ 1963. 12. 31'''

2.1.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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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학은 6・25전쟁 중이던 1952년 5월 도립대학[1]으로 창립되었다. 대학 설립의 계기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에 피난 온 민태식 교수와 한학자 김순동 등이 전시연합대학의 설립을 계획하면서 비롯되었다. 이들에 의해 전시연합대학 설립을 위한 운영위원회가 조직되어 당시 대덕군 출신 제헌국회의원 송진백이 운영위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51년 5월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1951년 9월 문리과・법과・경상과 등 3개 학과의 전시연합대학이 발족되기에 이르렀다. 민태식 교수가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충남 출신 교수와 학자들이 강의를 맡았다. '''이 전시연합대학충남대학교 설립의 모태가 되었다.'''
1951년 11월부터 충남지역의 유지들은 충남의 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11월 23일 충청남도의 시장・군수・경찰서장 회의에서 충남대설립기성회를 조직하고 다음 해 1월까지 10억원을 모으기로 하였다. 회장에는 이영진 충남지사, 부회장에 충남도 문교사회국장과 민간인 1명을 위촉하고, 시, 군에는 시장과 군수를 각기 기성회의 지부 회장을, 경찰서장은 이사를 위촉 하였다. 대전시의 경우는 손영도 시장이 지부 회장을 송진백・김용성 등이 이사를 맡았다. 기성회의 모금 운동은 凡 도민적으로 전개되었다. 시, 군별로 주민들에게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홍보 하고 기부를 호소했다. 도민들은 돈이 없으면 쌀을 내는 등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탰다. 충남석유 조합연합회는 5백만원을 기탁했으며, 대전고등학교 호국단에서는 20만원을 냈다. 서산 지역의 김두환・유승노・최병운・윤수권과 당진의 최한영・홍사철, 대전의 문갑동 등이 거액을 쾌척했다.
이와같은 기성회의 활동이 결실을 보아 1952년 4월 10일 문교부 중앙교육위원회에서 충남대학의 설립 인가를 결의하였으며, 5월 25일 정식으로 설립을 인가하였다. 공식적으로 설립 인가가 이루어지자 진헌식 충청남도 지사가 총장서리에, 전시연합대학 학장이던 민태식 교수가 초대학장 서리로 취임하였다. 충남대학은 도립대학으로 발족한 만큼 타 시/도의 국립 종합대학교와 같이 전임 총장을 임명하지 않고, 설립자인 충청남도 도지사로 하여금 겸임하게 하였다. 전시체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학생 모집을 진행하고 비록 교사(校舍)와 교수진이 부족한 형편에서도 대학은 자리를 잡아갔다. 개교 당시에는 문리과대학과 농과대학・공과대학의 3개 단과대학에 7개 학과의 총 1,800명의 학생 정원을 인가받았다. 그러나 공과대학은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개교하지 못하도록 되었으며, 농과대학은 개교에 필요한 준비가 완성될 때까지 입학생 모집이 보류되었다. 결국 문리과대학의 문학과・이학과・법학과 등 3개 학과(정원 220명)의 제1회 신입생을 모집하여 1952년 6월 7일 대전시공관에서 역사적인 개강식을 개최하였다.

2.2. 정착


진헌식 총장 서리가 8월 내무부장관으로 전출해감에 따라 후임으로 부임한 성낙서 지사가 1952년 9월 9일자로 총장 서리로 취임하였다. 성낙서 총장서리는 재단법인으로 충남대학교 후원재단을 설립하고 사무소는 대학의 사무국 내에 두었다. 기본 재산은 설립기성회에서 기부한 국채권과 현금 10억 원이었다. 재단은 설립 후에 사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산시 고북면의 해안 90여 정보에 대한 공유수면 매립 면허를 얻어 염전의 조성에 착공한 바 있으나, 재정조달이 용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러 해의 극심한 해랑으로 시공한 시설이 누차 유실되어 사업이 좌초됨에 따라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성낙서 총장 서리가 1954년 9월 27일 지사직을 사임함에 따라, 본교의 총장 서리도 자동 사임하게 되었다. 그 후 약 2개월간 공석 중이었다가 같은 해 12월 2일자로 문리과대학 민태식 학장이 총장 서리를 겸무하였다.
1955년 6월 30일 조교수 이상으로 구성된 전교 교수회에서 민태식 총장 서리를 총장으로 선출하였고, 같은 해 8월 29일자로 민태식 교수가 제1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동안 지사겸직 총장 서리가 개교 이래 대학 행정을 맡아 오다가 비로소 민태식 교수가 전임 총장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민태식 총장은 1954년 12월부터 1960년에 이르는 만 5년이 넘는 총장 재임 시기에 교지 확장・교사 증축・대학원 인가・도서관 신설・실험실 확장・실습 공장 신설・교원 충원 등의 일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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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창립 초기에 학교 부지와 교사(校舍)의 확보가 당면한 최대 과제였다. 초창기 대학에서는 충남도에서 제공한 대사동과 문화동 일대의 국유지와 도비로 매입한 토지 총 349,314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교사는 인근의 공공건물을 대여 받아 강의를 시작하였다. 문리과대학은 1952년 6월 개강 시에는 전시연합대학에서 사용하던 대흥초등학교[2]의 교실과 법원의 일부 건물을 대여받았으며, 그해 7월에는 충남 도청 서남쪽에 위치한 목조 창고를 교실로 개수하여 강의하였다. 1954년 12월 비로소 대사동 부지에 제2본관 와옥 321평을 준공하고 1955년 4월에 교사를 이전 하였다. 화학물리학 실험실을 비롯하여 특수과학관이 설치되었다. 1959년 12월말에는 총 1,626평의 교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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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과대학은 문교부에서 요구하는 미비 조건을 보완하여 1952년 6월 입학시험을 치러 7월 개 강하였다. 그러나 교실이 없어 지금의 동산중학교 자리[3]에 있던 충남농업기술원을 대여 받아 강의하였다. 초대 학장에는 강진형교수가 임명되었다. 1954년 4월에 제1실험실을 준공하고 농업 기술원 가교사로부터 이전하고 이후 제1본관의 완공으로 1959년 12월말 총 1,324평의 건물과 부속 농장・부속 동물사육장도 확보하게 되었다. 대학의 연습림으로 보문산 178,920평을 대여 받아 실험 농장으로 운영하였다. 그간 보류되었던 공과대학은 1954년 4월 15일 개교가 승인되었다. 개교 승인 직후에 건축공학과와 섬유공학과 학생을 모집한 공과대학은 처음에는 농과대학 실험실 일부를 교실로 사용하였다. 1955년 9월에 문화동에 교사 일부가 완공되어 이전하여 수업하였다. 1959년 1월 화학공학과가 증설되었다. 1959년 12월 공과대학에서 소유한 건평은 제1본관・제1실험실・가교사・부속 공장 등 총 952평에 달했다.
교직원 현황은 1952년 개교 당시에는 교수 정원 32명에 현원 12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959년 12월말 정원이 116명으로 증원되었으며, 현원도 74명으로 증원되었다. 직원도 1952년 12월말 현원 14명에 불과하던 것이 1960년 9월에는 30명으로 증가되었다. 도서관은 처음에는 문리과대 학내에 설치하고 논산 김용훈과 공주 이세찬,대천 안모의 한서각 5백여권과 옥천 송재덕의 한서 1천여 권, 서울 김상용의 영문 서적, 경성대학교 교수였던 일인 모씨의 동양 철학서 200여 권, 그리고 사학자 황의돈의 장서 1,200여 권을 매입하거나 기증을 받아서 개관하였다. 1956년 12월 대흥동에 도서관을 건립하고 1957년 4월 도서를 이전하면서 비로소 충남대학교 부속 도서관이 발족되었다. 이 건물은 연와조의 2층 건물로, 총 공사비는 4,590만 환이었는데 이는 도민의 성금으로 이루어졌다. 이 무렵에 도서관의 장서 현황을 살펴보면 1957년 10월 31일 당시 31,639권이었다.
한편 직장을 가진 이나 혹은 면학 희망자를 위한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하여 1958년 9월 18일 2부(야간부)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1959년 7월에는 충청남도의 지역적 특성을 감안하여 백제연구회를 설립하고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민태식 총장은 자신이 백제연구회 이사장과 회장을 맡았으며, 연구위원으로 김순동, 김선기 문교부차관, 이병도, 김상기, 이홍직, 노도양, 김형기, 유원동, 황수영, 홍사준 등을 선임하였다. 또한 대학신문사를 설치하여 충남대학교 학보를 창간 발행하고, 교수논문집 제1집을 1959년 12월 3일 창간하였다.당시 금산군부여군 등이 인삼 재배의 적지임을 감안하여 농과대학에서 인삼 특수 재배와 연구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다. 당시는 본교가 도립 대학으로서 충청남도의 재정만으로는 소기의 사업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실정이었으므로 내무부의 재정 보조를 적극 교섭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국립대학은 문교부 예산에 의존하지만 도립 대학은 내무부와 도 예산에 의존하게 되어 있었다. 민태식 총장은 중앙의 내무부에 적극 교섭하여 많은 예산을 교부 받아서 넓은 교지를 매입하고 또 교사 증축에 힘썼다.

2.2.1. 충남대학교와 민주화


1960년대 대학 교육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 한국 사회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 났다. 1960년의 '''4・19혁명'''과 그 다음해의 '''5월 16일에 일어난 군사쿠데타'''가 그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이래 이승만 정권은 광복을 계기로 축적된 민족의 역량을 집결시키는데 실패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3・15 부정선거에 이르러 정권 획득을 위하여 마침내 민주주의를 파괴하였다. 이에 민주주의의 깃발아래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자 1960년 4월 19일 이 땅의 대학인은 총궐기하였다. 이 4・19혁명은 또 한편으로는 학원의 자율과 민주화를 추동하였다. 1960년 4・19혁명 이후 학생들은 학원 민주화를 위해 총장을 비롯한 전 보직자들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당시 학생들은 학원의 민주화라는 이유를 내세워 정부의 임명 제도에 의하여 취임한 현직 총학장의 사퇴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대한 찬반 양론이 거세게 논의되는 가운데 4・19혁명 이후 학원 내외에서 총장 퇴임 문제는 계속 제기되었다. 이에 1960년 6월 7일자로 문리과대학 김순동 학장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민태식 총장도 사표를 제출하여 7월 16일자로 수리되었다.
민태식 총장의 퇴임으로 비어 있던 총장직에 철학과 이정호 교수가 1960년 7월 16일자로 정부 발령에 따라 총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정식 총장으로 임명하지 않고 서리 발령을 낸 것은 문교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문교부는 본교 교수회에 후임 총장 서리의 선출을 일임하였다. 대학에서는 전체 교수회의를 열고 이정호 총장 서리를 선출하였으며, 그 후에 이병도 문교부 장관 임석 하에 총장 선출 투표를 한 결과 이정호 교수가 압도적인 다수표를 획득하였다. 8월 29일에 이정호 교수가 총장직에 취임하게 되었는데, 선거에 의한 민선 총장이라는 관점에서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환영했다. 4・19혁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감각으로 학교 운영을 해야 한다는 여론에 의하여 신임 총장에 거는 기대는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 이정호 총장은 취임사에서 난국에 처한 대학인의 새 각오를 촉구하였다. 학사 개편에 따라 학과가 변경되었으며, 이부대학이 문리과대학에 흡수되었다. 1960년 12월에는 고전번역연구회에서 조선후기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상, 하)을 완역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충남대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반계수록 번역을 시작한 것은 국학 진흥과 민족주체사상 고취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2.3. 충북대학교와의 통합과 분리, 국립 충남대학교


1961년 5・16군사쿠데타는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사회의 교권과 학생자치의 문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5・16 군사정부는 학원의 질서 확립을 특히 강조하였다. 5월 19일 제9회 개교기념일을 전후하여 ROTC 1기생의 입단식이 있었으며, 6월 12일에는 교모가 제정되었다. 11월 3일에는 학생단합 총궐기대회 및 재건학 생회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1961년 9월 1일자로 고등교육정책에 하나의 획기적 의미를 지녔던 학사자격고시령이 공포되었다. 이 방침에 따라서 1962년 1월 22일 전국 대학 졸업예정자의 학사고시가 실시되어 180명에 대한 수료장 수여가 있었다.
한편 군사정부는 1961년 8월 대학 정비 방안으로서 대학개편에 착수하였다. 단위 지역 내에 설치되어 있는 국공립 대학의 단과대학과 동일 또는 유사한 국공립 대학이 있을 때는 이를 폐지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군사정부는 12월 4일 개편안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충남대학교충북대학과 병합하여 국립충청대학교로 개편하고 공주사범대학은 교육대학으로 승격시켜 충청대학에 예속시킨다는 방안이었다. 위 방안에 따라 1962년 3월 1일자로 충남대학은 충북대학과 합쳐 충청대학교로 발족하고 국립대학설치개정령에 의해 도립에서 국립으로 전환되었다. 총장에 이정호 총장을 임명하고 공과대학에 건축공학・섬유공학・화학공학의 3개 학과, 문리과대학에 국어국문학・영어영문학・사학・철학・물리학・화학・수학・법학・경영학의 9개 학과를 확충하였다. 종전의 2부대학은 문리과대학에 흡수하고, 농과대학은 폐지되었다. 충북대학교는 수학과가 폐과되었다. 그러나 캠퍼스의 분리 운영 등으로 여러 불편이 잇따르자 군사정부는 대학 정비 재조정안을 발표함에 따라 1963년 3월에 '''국립 충남대학교'''로 재분리시켰다. 이에 따라 농과대학을 부활시켜 농학・축산학・ 농업토목학・농산제조학의 4개 학과를 설치하였다. 대학원에 박사 학위 과정을 신설하여 농학・ 축산학・철학과 등 3개 학과를 설치하고, 석사학위과정도 영어영문학・사학・법학・수학・물리학・농 업토목학・농산제조학・건축공학과 등 13개 학과를 신설하였다.
1963년 3월 농과대학장 강진형 교수가 신임총장에 취임하였다. 강진형 총장은 “미래의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이성과 창의력의 개발”을 촉구하였다. 본부 청사의 준공에 이어 오랜 숙원이던 도서관이 개관되었으며, 법경대학의 분립 설치를 비롯한 갖가지 시설의 확충을 추진하였다. 의과대학과 종합운동장 건설의 설립을 추진하였으며, 공과대학의 신축 공사가 완공되어 대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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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군사정부는 한일협정의 체결을 강행하고자 하였다. 야당을 비롯한 각계의 대표들이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였으며, 대일 굴욕외교를 규탄하는 전국적 규모의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충남대학에서는 3월 26일 문리과대학과 농과 대학, 공과대학 학생 7백여 명이 2교시가 끝난 후 ‘平和線을 死守하자’[4] , ‘屈辱外交를 반대한다’[5] 등의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6월 3일 전국적인 시위가 폭발하였는데, 충남대학에서는 2일부터 궐기대회가 일어났다. 농과대학 학생 4백여 명은 교정에서 정부 성토대회를 열고 ‘무력한 황소, 농민은 통곡한다’ 등의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하였다. 학생의 시위가 날로 확대되자 급기야 6월 5일 임시휴교령이 내려졌으며, 7월 5일부터 조기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한일협정 반대운동은 이듬해인 1965년 8월까지 지속되었다.
2월 새학기부터는 교양학부가 신설되었으며, 대학원에 박사과정을 신설하여 학문연구의 전당으로서 대학의 본분을 다하고자 하였다. '''창의・탐구・개발'''[6]의 3대 교시를 정하고 교육 방침을 제정하는 등 대학의 이념을 확정하여 대학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으며, 구체적인 교육방침으로 ‘인격도야・연구투철・생산교육’을 정하였다. 대학의 지성과 정념의 상징인 '''교가'''도 제정되었다.
1967년 6월 8일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공개투표, 대리투표, 올빼미표 등 신조어를 남기면서 치러진 부정선거였다. 충남대학 학생들은 6월 15일 6・8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가졌다. 오전 10시 문리대 운동장에 5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 하고 교문을 나와 ‘민주주의는 통곡한다’는 구호를 달고 병무청과 도청, 대흥동 로타리를 거쳐 대전역에 집결하여 성토대회를 가졌다. 학생들은 7월 3일 임시휴교를 마치고 개강하자 다시 시위에 들어갔으며 기한부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2.4. 학교 현황



2.4.1. 학부


1952년 개교 당시에는 문리과대학과 농과대학만이 학생을 모집􏰁개강하였다. 공과대학은 같은 해에 설치 인가되었지만 1954년에 개강하였다. 1952년도 문리과대학 정원은 문학과 480명, 이 학과 360명, 법학과 320명으로 완성 연도 정원이 계 1,160명이었다. 농과대학의 정원은 농학과 160명, 농업토목학과 160명으로 완성 연도 정원이 계 320명이었 으며, 1952년 학생수는 농학과 청강생 2명을 포함하여 40명, 농업토목학과 청강생 4명을 포함 하여 41명으로 총 81명이었다. 공과대학의 정원은 건축공학과 160명, 섬유공학과 160명으로 완성 연도 정원이 계 320명이었고 1952년에 개강하지 않고 1954년에 개강하였다.

2.4.2. 대학원


1957년 4월 6일자로 충남대학교 대학원 설치인가를 얻었고, 같은 해 4월 1일자로 시행된 대 학원 학칙 제2조에 의하면 석사학위를 수여하기 위한 과정(석사학위 과정)과 박사학위를 수여 하기 위한 과정(박사학위 과정)을 개설하기로 하였으나 박사학위 과정은 당분간 개설하지 않기로 하였다. 당시의 학생 현원에 관하여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963년 2월 20일자로 농학과, 축산학과, 철학과에 박사과정을 최초로 신설하였다. 또한 영어 영문학과, 사학과, 법학과, 수학과, 물리과, 농업토목과, 농산제조학과, 건축공학과까지 석사과 정이 대폭 증설되었다. 1964년 2월 6일에는 섬유공학과와 화학공학과 석사과정이 신설됨으로써 본교 대학원은 박사과정 3개 학과, 석사과정 15개 학과로 증대되었다. 그 후 1966년 3월 1일에는 농업토목학과 및 농산제조학과에 박사과정이 신설되었다.

3. 발전 및 확장기


'''1968. 1. 1 ~ 1989. 3. 21'''

3.1. 발전기


1968년 1월 강진형 총장의 후임으로 대학원장인 김영묵 박사가 총장에 취임하였다. 김영묵 총장은 취임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역사적인 요청에 충분히 보답할 대학인이 되어 학문 연구에 있어서 성실성과 윤리성과 사명을 다할 것”을 역설하였다. 1968년 3월에는 처음으로 의예과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1968년 4월 24일에는 그동안 숙원 사업이던 박물관도서관 내에 설립하고 신라 토기와 중국제 근대 자기, 각종 회화 등을 전시하였다. 신설된 의과대학의 업무는 차질없이 진척되어 1969년 4월에는 충남의료원 대여문제가 일단락되고 9월에는 교사의 신축 기공을 보게 되었다. 1969년 12월 신설된 교양과정부는 1970년 3월부터 교양과정부로 법제화되어 독립된 단과대학으로 운영되었으며, 경영대학원도 개원하였다. 본교의 상징인 교표가 새로이 만들어진 것도 이 시기이다. 뒤에 이루어지게 되는 교목・교화 및 교수(校獸, 백마) 등의 제정과 함께 백제문화의 옛 터전에 세워진 충남대학의 영원한 상징들이 충대인 모두 의 가슴 속에 새겨지게 하였다. 김영묵 총장이 1972년 1월 제5대 총장으로 연임되었다. 취임 후 유성의 덕명리로 캠퍼스를 이전할 것을 최대 과업으로 추진하였다. 이전 사업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면학풍토 조성과 대학의 전통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충남대학교의 면모쇄신을 위하여 오랜 심의와 연구 끝에 교시를 '''창의・개발・봉사'''[7]로 수정 제정하였다. 교시를 수정하면서 “저마다 타고난 창의력을 유감없이 개발하고 발휘하여 그것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 여 공헌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배우며, 탐구하고 실천한다는 것을 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사명인 동시에 가장 중대한 교육의 지표”라고 하여 교시의 정신을 밝혔다.
한편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전국적인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정부에서는 대학에 대하여 임시휴교 조치를 내렸다. 전국 대학에서 교련 반대 시위가 일어나자 정부에서는 마침내 학원 질서 확립을 위한다며 위수령을 공포하고, 1972년 10월 유신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5・16이후 위축된 교권과 학원 자율성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정부에서는 1973년 2월 문교부 차관을 역임한 전 서울대 박희범 교수를 충남대학의 총장으로 파견하였다. 박 총장은 취임사에서 근대화의 도정에서 우리들이 직면한 도전에 대응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사회질서의 창조를 강조하였다. 이는 유신체제하의 질서 유지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 된다. 박 총장은 학생의 민주화운동을 철저히 금지하여 오원진을 비롯한 6명을 제적시키는 등 강경하게 대처했다. 이에 대응하여 학생들은 11월 29일부터 도서관을 점거하고 박총장의 사퇴를 최후 통첩하였다. 학교 측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학생들은 도서관 출입문을 차단하고 1주일에 걸쳐 단식투쟁을 전개하면서 총장 퇴진과 제적 학생의 구제 등을 요구하였다.
이 시기 학사개편을 단행하고 새로운 대학발전계획이 추진된 바도 있다. 그중에 중추를 이룬 사업은 1973년 정부의 연구학원도시 계획에 따른 대덕연구단지로의 대학 이전 계획이었다. 이 외에도 직업기술교육연구소의 부설, 각종 부설연구소의 법제화, 의대 교사의 준공, 중앙도서관 신설, 영자신문사의 출범 등이 이루어졌다. 1974년부터는 실험대학으로 지정되어 능력별 졸업제가 도입되어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1975년 3월 교육대학원이 신설되어 대학원 정원이 증원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대학 밖의 정치 상황이 학원에 밀어닥쳐 국민윤리 교과를 신설하도록 하였으며, 국적 있는 교육의 신장 등을 내세워 대학 교육을 변질시켰다. 1976년에는 교수 재임용제가 실시되어 적지 않은 교수들이 본교를 떠나기도 하였다.
1977년 제8대 총장으로 서명원 총장이 부임하면서 대덕캠퍼스로의 이전 및 정비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서명원 총장은 서울대학교 부총장 재직시 서울대학교의 관악 캠퍼스 이전 사업에 관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본교의 대덕캠퍼스 이전 사업을 추진하였다. 1977년 6월 전체 교직원과 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종합캠퍼스의 건설공사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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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기슭 대덕 연구단지 내에 있는 약 100만평의 부지 위에 6만 7천여 평의 교육 시설을 건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78년 8월 공업교육대학의 이전을 시작으로 1979년에는 문리과대학이 이전하였다.

3.2. 충남대학교와 두번째 민주화 운동


1979년에는 10・26사태가 일어나고 이어서 12・12사태마저 일어나 군부가 정권을 잡은 5・16이후 일찍이 없었던 충격적인 사건들이 잇따랐다. '''1980년 5월 1일 총학생회를 주축으로 한 충남대학교사상 최대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대운동장에 모인 5천여 명의 학생들은 ‘계엄령 해제’, ‘언론자유 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대전역으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학생 시위대는 출동한 경찰대의 최루탄에 투석으로 맞섰다. 잠시 후퇴한 시위대는 4진으로 나누어 각각 대전역에 집결하였다. 대전역에서 결의문을 낭독한 후 문화동 캠퍼스까지 약 2km의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의 시위는 7일까지 철야농성과 연좌시위로 이어졌다. 학생회에서는 5월 1일과 5월 6일의 2차에 걸쳐 시국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교수협의회에서도 5월 6일 ‘정의에 입각한 민주화작업이 조속히 성취되기를 희망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8]

3.3. 확장기


충남대학은 정치적인 혼란의 와중에도 대덕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하였다. 캠퍼스 이전 사업은 대학의 시대적 사명과 지방 국립대학의 육성이라는 국가 시책에 따라 계획・추진된 프로젝트였다. 서명원 총장은 1981년 3월 제9대 총장으로 연임되면서 대학 이전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1981년에는 대학 본부와 법경대학이 대덕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이듬해인 1982년은 농과대학이 마지막으로 이전하였고, 대학의 중추 시설인 중앙도서관이 신축 개관되었다. 초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도서관은 지하 1층에 지상 5층으로 된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대덕캠퍼스의 중앙에 위치하였다. 이전이 완료된 이후에도 체육관・기숙사・실험실습실・공장동 등과 같은 부속 시설이 계속 신축 개관되어 대학의 시설 및 기능이 대폭 확장되었다. 보운캠퍼스에는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신축하였다. 1984년 10월 개원한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대지 26,128평, 연건평 1,270평, 지하 1층, 지상 7층, 옥탑 2층에 499개의 병상과 각종 현대 특수설비를 갖추어 중부권 최대의 메디컬 센터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로서 대학의 규모는 1985년 당시 40만평의 대지 위에 4만 5천여 평 규모의 강의실・교수연구실・공장동・실험실 습실・중앙도서관 등을 구비하여 전국 어느 대학 캠퍼스보다 훌륭한 시설과 환경을 갖추게 되었다. 거기에 1978년에는 전자계산소・어학연구소・공업교육연구소, 1979년에는 화학분광학연구소가 설치되는 등 연구하는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한층 더 새로이 하게 되었다. 특히 1979년도에는 문리대가 문과대와 이과대로, 법경대가 법과대와 경상대로 분리되었다. 1979년에는 종합의료기관 설립의 추진도 특기할 만하다. 대덕캠퍼스의 성립과 함께 때를 맞추어 학생정원이 대폭적으로 증가되었으며, 그에 따른 교수 정원도 대대적으로 증가하여 명실공히 명문대학으로 도약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대덕캠퍼스로의 이전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캠퍼스의 조경 사업과 교목・교화 선정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1982년 5월 23일 학교의 상징물인 백마상의 준공도 이루어졌다. 곳곳에 연결된 가로의 이름 짓기 사업도 학교 신문사 주관으로 전개되었다. 대학 캠퍼스 조경 사업의 기본 목표는 자연 경관과 건축 공간을 기본적으로 연결시켜 대학인에게 쾌적한 활동을 제공하고, 시각적으로도 조화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1984년 11월 14일에는 보운캠퍼스에 의대 부속병원이 개원하여 지역 사회의 보건 향상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1985년 3월 제10대 총장으로 건축공학과 이창갑 교수가 취임하였다. 이창갑 총장은 ‘명문 충남대학교’ 건설을 목표로 본교의 양적 발전과 질적 향상을 위해 공헌하였다. 이창갑 총장은 재임 기간 동안 대덕캠퍼스의 정비 및 시설 확충에 주력하였다. 캠퍼스 이전은 완료되었지만, 교내 제반 부속 시설 및 편의 시설들, 학교 주변 환경 등이 완전히 정비되지 않아 많은 불편과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종합운동장을 건설하였으며 기초과학관・생명공학과・미술관・음악관・전자계산소・기숙사 제2동・가축병원 등과 같은 새로운 건물들을 신축 개관하였다. 농과대학의 실습지가 확정되어 대덕캠퍼스의 교지가 45만평으로 확장되었고 , 본교의 숙원 사업이었던 정문 건립을 시작하였으며, 교육과정의 내실화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1970년대 기초 과학 분야 중점 육성 대학으로 지정된 후 1987년 2차 연도에는 생물공학 분야의 육성에 힘을 기울여 교육과 연구에 내실화를 기하였다. 또한 종합발전계획 제6차 5개년 계획(1987~1991)을 수립하여 체계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신설되는 시설을 수용하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던 당시 교지 면적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추가 교지를 확보하였고 , 기초 과학 특성화 계획에 따라 기초과학관을 따로 건립하였다. 또한 새로운 학과를 신설, 분리하여 1991년도 13개 단과대학, 92개학과, 5개 대학원으로 확대・발전시키고, 학교 행정을 개선하여 질적 발전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교육과 행정면에서도 변화와 발전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교육 내용의 개선은 물론, 입시 제도의 변화와 졸업 정원제의 실시, 그리고 교수 임용 제도 등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78년까지 본교는 교무처・학생처・사무국・건설 본부 등의 2처 1국 1본부의 직제였다. 1978년 8월 건설 본부의 직제가 축소되었고 기획담당관도 폐지되었다. 의과대학 부속병원 이전 사업을 위해 1980년에 건설본부장 산하에 행정・건축・토목・전기 담당관제를 설치 운영하여 오다가, 1981년 2월 28일 국립학교 설치령 개정에 따라 사무국에 시설과가 공식 기구로 설치됨으로써 학교 이전 사업을 총괄하였던 건설 본부는 해체되었다. 따라서 교학 기구는 2처 1국의 직제를 갖게 되었다.
1980년 4월 개정 학칙에 의하여 학생 자치 활동이 학도호국단에서 학생회로 이양됨에 따라 그 동안 학도호국단을 관장하고 학생 상담을 지도하여 왔던 상담지도실이 폐지되었다. 1980년 5월 학생 수가 대폭 증가되고 내외의 장학금 지원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이를 관리 지도하기 위한 기구로 장학담당관이 학생처에 설치되었다. 1984년에는 지방 학생들의 쾌적한 학습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학생 기숙사가 건립되었으며, 1985년에는 국제 교류를 증진하기 위해서 국제교류부가 설치되었다.
교수의 학술연구와 권익보호 및 상호간의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1971년 교수협의회가 창설되었다. 교수협의회에서는 신년교례회와 답사 등의 친목도모를 위한 활동을 하였으며, 학칙개정안에 대한 의견 제시 등 학교 운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80년 전국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교수협의회에서는 임시총회를 개최하는 등 대응방안을 협의했으나, 이 일로 많은 교수들이 신 군부의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한편 1980년대 초 유신 체제의 종말과 광주민주화운동, 제5공화국의 수립과 폭거 등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반전이 심했다. 이에 따라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격해졌고, 군사 정권의 몰상식적 정국 주도 역시 강하게 표출되었다. 계엄과 긴급조치 등으로 정권을 연장하던 박정희 정권의 몰락으로 민주화의 봄을 열망하던 시민과 학생들은 또 다시 군사 정권의 출현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민주정부의 탄생은 다음 시기를 기다려야 했다. 본교 학생들을 비롯하여 전국의 학생들은 몸으로 군사 정권의 탄생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 시기 학도호국단이 폐지되었고, 총학생회가 부활되었다. 그리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발족하면서 학생들의 소리를 대변했고, 학생 운동의 방향도 새롭게 정비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도 학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사회적으로 민주화의 요구가 높아지고, 이에 따라 민주화 운동이 크게 발전되어 결국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이 기간은 학내적으로도 대학 자율화와 학원 민주화를 위한 목소리가 높았다. 본교에서도 1987년 체육교육학과 사건・1988년의 미술학과의 총장실 점거 사건・사회과학대학 문제 등 많은 진통을 겪었다. 특히 1987년과 1988년에 걸쳐 법과대학・문과대학・경상대학 일부 관련 학과에서 줄기차게 제기되어온 사회과학대학 신설요청이 부결되면서 관련 학과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여 농성을 벌이게 되었고, 결국 1988년 11월 8일 이창갑 총장이 사의를 표명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4. 90년대 ~ 현재


1989년부터 총장 직선제 선거가 시행되어 제11대 오덕균 총장(1989. 3~1993. 3)을 비롯하여, 제12대 정덕기 총장(1993. 3~1997. 3), 제13대 윤형원 총장(1997. 3~2001. 2), 제14대 이광진 총장(2001. 3~2005. 2), 제15대 양현수 총장(2005. 3~2007. 8)[9], 김지환 총장 직무대리(2007. 7~2008. 1), 제16대 송용호 총장(2008. 1~2012. 1) 그리고 제17대 정상철 총장(2012. 2~현재)까지 교수의 직접 선거에 의한 총장의 선출이 이루어졌다.

4.1. 1990년대


1994년에는 국책지원 대학으로 선정되어 산・학・연 협동체제의 구축, 고급 기술인력 양성, 학생들의 현장 적응력 제고, 중소기업의 기술 경쟁력 제고의 현지역산업체의 애로 사항의 해결 등 실질적이고도 산업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협동사업 을 통하여 지역 경제의 활성화에 이바지하였다. 공과대학 신소재 분야 특성화 사업으로 250억 원의 정부지원금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대학의 질적 향상을 도모했을뿐만 아니라 대학종합 평가에서 전국 3위의 우수대학으로 인정받는 영예를 얻었다. 농과대학이 특성화 대학으로 선정되고 의과대학과 자연과학대학이 학과 평가에서 각각 우수평가를 받는 동시에 전국대학교육 개혁평가에서 서울대학교와 나란히 우수평가를 받았다. 아울러 국제화 시대에 대비하여 영국옥스퍼드대학, 미국버클리 대학, 프랑스의 몽뺄리에대학, 중국북경대학, 일본쓰쿠바대학 등 세계의 명문 대학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교수 및 학생 교류를 활성화함으로써 국제 경쟁력을 제고하였다. 또한 정부 당국과 교섭하는 동시에 민간 자본을 유치하여 산학 공동연구 관 신축을 비롯하여 수의과대학 동물병원, 정심화국제문화회관, 공동실습관, 박물관, 제4공학관, 기초의학동물생태연구동 등의 시설예산을 확보하여 교육시설 증축에 주력하였다.

4.2. 2000년대


2000년 12월 치러진 제14대 총장임명 후보자 선출선거에서 의과대학 정형외과 이광진 교수가 당선되었다. 이 총장은 취임사에서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생명력이 넘치는 대학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데 최선을 다 하겠으며 세계의 명문대학으로 만들어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 총장은 디지털 시대에 부응할 교육 여건의 개선에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학사 행정과 교육 환경의 전산화를 위한 종합정보시스템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학생・교직원 등 이용자와 각 부서의 업무 분장에 따라 나누어져 있던 각종 행정 서비스도 단일체제로 전환하여 한 장소에서 보다 빠르고 편리하게 처리하여 이용자에게 효율성을 제공하는 열린 공간 체제가 마련되었다. 또한 해외 학술 DB 검색망 및 컴퓨터 통신망이 개통되었고, 공동실험실습관 및 산학연 교육연구관 등이 개관되었다. 이러한 연구 편의 시설의 준공으로 학술 정보의 이용과 연구 소재 및 인력 정보의 교류가 원활해졌고, 분야별 공동 연구는 물론, 산학연 공동 연구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공동실험실습관의 개관으로 연구 활동의 활성화에 기여하였으며, 20여 년간 학술교류를 실시한 주변 연구소들과도 교류의 폭을 넓혀, 석・박사 과정을 공동으로 지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2000년 특허법무대학원을 개설하여 특허업무를 연구・담당하는 특성화 대학원으로의 발전을 목표로 하였으며, 2002년에는 형질전환복제돼지연구센타를 설립하여 돼지복제의 센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2005년에는 인문대학에 부설 통역번역원과 한국어교육원, 언어임상연구원을 설립하였다. 2006년에는 자연과학대학에 수리과학연구소와 자연과학연구소가 신설되었다. 또한 2단계 BK21 사업의 과학기술분야에서 5개 사업단(메카트로닉스 고급인력양성사업단・대덕특구연계 에너지환 경소재 혁신인력양성사업단・산학연네트워크첨단지능부품소재인력양성사업단・차세대통신인력양성사업단・차세대정보기술SW인력양성사업단)과 2개 핵심사업팀이 선정되었으며, 지방대학혁신 역량강화사업(NURI사업)의 주관대학으로 ‘지능로봇산업 활성화를 위한 메카트로닉스인력양성사업단’이 선정되었다
2007년 5월에 수용인원 4,600여명의 학생생활관 건축이 민자를 유치하여 착공되었다.[10] 그러나 공사가 시작되어 학내가 어수선한 가운데, 양현수 총장이 연구비 관련 논란의 책임을 지고 총장직의 사퇴를 표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양 총장은 검찰의 조사와 기소에 의해 8월 17일 대전지방법원으로부터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따라 양현수 총장은 해직되었으며, 교무처장 김지환 교수가 총장직무대리로 총장 업무를 대행하였다. 교수회에서는 2007년 11월 14일 총장 선거를 실시하였으며, 건축학부 송용호 교수가 당선되었다. 2008년에는 법학전문대학원이 예비 인가대학으로 선정됨에 법학전문대학원을 설치하였다. 이 외에도 의학전문대학원과 분석과학기술대학원을 신설하였으며, 간호대학과 생명시스템과학대학,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였다.
2012년 2월 1일 정상철 경영학과 교수가 제17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정 총장은 취임사에서 ‘소통과 내실화로 우뚝 선 강한 충남대’를 목표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No.1의 국립대학’ 과 ‘세종시와 국제과학비지니스벨트를 선도하는 대학’의 건립을 비젼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대학 경영에 3S(Smart, Stable, Sustainable University) 철학을 바탕으로 첨단 디지털 시대에 맞는 충남대학교를 재창조하여 소통과 내실화로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으로 도약해 나갈 것을 선언하였다. 2016년 오덕성 총장이 선출 되었다. 헌데 선출과정에서 교육부의 입김이 거세게 작용하여서 대학 내부적으로 말이 많았다.

5. 역대 총장


  • 진헌식 직무대리 (1952)
  • 성낙서 직무대리 (1952~1954)
  • 민태식 (1955~1960)
  • 이정호 (1960~1963)
  • 강진형 (1963~1967)
  • 김영묵 (1968~1973)
  • 박희범 (1973~1977)
  • 조성옥 (1977)
  • 서명원 (1977~1985)
  • 이창갑 (1985~1989)
  • 오덕균 (1989~1993)
  • 정덕기 (1993~1997)
  • 윤형원 (1997~2001)
  • 이광진 (2001~2005)
  • 양현수 (2005~2007)
  • 김지환 직무대리 (2007~2008)
  • 송용호 (2008~2012)
  • 정상철 (2012~2016)
  • 오덕성 (2016~2020)
  • 이진숙 (2020~ )

6. 관련 문헌



[1] 지금은 국립이고 충남도립대학은 따로 존재한다.[2] 아직도 있다. 대전광역시 중구에 위치[3]충남대학교 보운캠퍼스(충남대학교병원)와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4] 평화선을 사수하자[5] 굴욕외교를 반대한다[6] 현재의 3대 교시는 '''창의 개발 봉사'''로 탐구가 빠지고 봉사가 들어갔다.[7]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8] 당시 학생운동을 하셨던 모 교수님에 의하면 현재의 중앙도서관 앞 계단 위에서 경찰버스를 세우고 밀어버리려 했는데 버스 옆에서 미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한다. [9] 정심화 국제문화회관과 관련해 사건이 하나 있었다 자세한건 충남대학교 사건 및 사고 참조[10] B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