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도 요시후미

 

1. 개요
2. 이력
3. 이야깃거리
3.1. 작품 리스트


1. 개요


작화 모음
近藤喜文
1950년 3월 30일 ~ 1998년 1월 21일 (향년 47세)
일본의 애니메이터, 영화 감독, 니가타현 고센시 출신.
현실의 풍경과 사람을 극도로 자세히 관찰해서 실현하는 리얼리즘 지향 작화 스타일로 유명하다. 만화적인 과장된 표현이나 화려한 특수효과를 되도록이면 배제하고, [1] 작품 속의 시간이나 공간을 왜곡하지 않는 편이다. 또한 캐릭터의 표정을 그릴 때 주름을 그려넣어 리얼한 표정을 연출한다. [2] 이런 스타일을 지향하는 후배 안도 마사시는 콘도를 존경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2. 이력


1970년대 중반부터 미야자키 하야오타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에서 작화팀에서 활약했다. 유일한 감독작은 1995년 귀를 기울이면.
196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에 있는 도쿄디자인컬리지라는 학원에 입학한다. 같은 해 10월에 알바개념으로 초청 강사로 강의를 하고있던 오오츠카 야스오에게 소개를 부탁해서 오오츠카 야스오가 소속해서 일하고 있던 직장인 A 프로덕션에 입사. 거인의 별에 동화와 원화를 그리면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A 프로덕션에서 만든 루팡 3세 시리즈에 동화와 원화로 참가하면서 이때 연출을 맡은 미야자키 하야오,타카하타 이사오 콤비와 인연을 맺었다. 오오츠카 야스오는 콘도에 대해 잘 모르면서 추천해줬는데, 나중에 A 프로덕션의 제작팀장이 '어디서 그런 인재를 구했냐? 앞으로도 그런 인재가 있으면 꼭 소개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후, 미래소년 코난, 빨강머리 앤,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명탐정 홈즈에서 원화를 그렸다.
명탐정 홈즈에서 모리아티 교수의 두 명의 부하는 콘도와 그의 동료 토모나가 카즈히데 콤비를 미야자키 하야오가 관찰하고 캐릭터화한 것이다. 그 캐릭터와 비슷하게 수줍음이 많고, 말 수가 없는 성격이었다. 작화면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지원한 오른팔 왼팔 역할을 하는 원투 펀치적 존재였다.
리틀 네모파일럿 필름(1984)을 토모나가 카즈히데와 공동으로 연출했다.
1987년, 스튜디오 지브리로 이적. 반딧불이의 무덤, 마녀 배달부 키키, 추억은 방울방울, 모노노케 히메에서 작화감독을 담당, 다른 작품에서는 원화맨으로 참여했다.
반딧불이의 무덤이웃집 토토로가 동시에 제작 시에, 미야자키와 타카하타는 콘도를 서로 자신의 팀에 데려가기 위해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야자키는 다른 스태프는 괜찮으니 콘도만큼은 데려가야겠다고 우겼다. 아이들의 걸음걸이나 몸짓 등의 리얼한 표현은 자신보다 콘도가 더 잘 그린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타카하타를 위해 양보했다.
1995년 작 귀를 기울이면은 미야자키가 콘도에게 그동안 작화감독으로 오른팔 역할을 하며 도와준 은혜를 갚기 위해, 전부터 연출을 하고 싶다던 콘도에게 감독직을 맡기기로 한 약속을 지킨 작품이었는데, 각본과 그림콘티를 그린 미야자키 특유의 간섭이 심해서 만드는내내 서로 의견 충돌이 잦았다. 귀를 기울이면 원작만화대로 남자 주인공을 화가 지망생으로 그리고 싶어하는 콘도에게 바이올린 제작자를 지망하게 한 것도 미야자키였고, 여주인공이 치마를 감싸며 다소곳이 앉는 장면에도 팬티가 보여도 되니까 확 주저 앉아야한다고 참견을 한 것도 미야자키였다. 훗날 콘도가 사망했을 때, 미야자키는 자신의 지나치게 몰아부치는 태도가 콘도의 죽음을 재촉했다며 자책하기도 했으며, 이후 다른 감독들과 작업할 때에는 가급적이면 심한 간섭은 자제하게 되었다고 한다.
타카하타와 미야자키의 후계자로 촉망받는 인재였으나 1998년, 대동맥 박리로 사망했다. 몸에 무리가 가게 일을 많이 해서 갑자기 숨진 과로사였다. 장례식에서 타카하타의 뒷순서로 조사를 낭독한 미야자키는 "왜 타카하타 작품 따위에 참가했느냐 내 작품에만 참가해야 했다."고 고인을 질책하면서 그를 잃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표했다. 콘도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처럼 지브리에 미야자키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는 상황은 오지 않았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지브리 팬들이 많은데 사실 생년월일을 보면 알겠지만 미야자키와 9살 차이로 후계자는 맞지만 '차세대'라고 하기는 어려운 나이였다. 어쨌든 콘도의 사망으로 인해 미야자키는 어쩔수 없이 모노노케 히메 제작 후 은퇴하겠다고 한 것을 번복하고[3] 복귀했는데 복귀한 후 만든 작품이 바로 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물론 그것과 별개로 콘도같은 출중한 애니메이터가 사망한 것은 당연히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이다.
한국에서는 콘도 요시후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지브리의 후계자 자리가 사라지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쩔 수 없이 다시 감독직으로 복귀했다는 식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전후사정을 따지고 살펴보면, 1997년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체력적인 한계를 느껴서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은퇴선언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감독직은 이제 더 이상 안한다는 거였고, 애니메이션은 계속 만들 생각이었다. 귀를 기울이면처럼 자신이 각본과 그림 콘티를 쓰고 감독직은 따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 감독직으로 염두해 둔 인물이 스튜디오 지브리의 젊은 유망주 31살의 안도 마사시였다. 하지만, 안도 마사시가 감독직을 맡기를 거부해서 [4] 그렇다면 이건 내가 할 수 밖에 없네라고 다시 감독을 하고 만든 것이 센과 치히로였다. 콘도 요시후미의 죽음은 1998년 1월의 일로 그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1997년에 이미 감독직은 안도 마사시에게 맡길 생각을 했고, 안도 마사시가 감독직을 거부해서, 본인이 다시 센과 치히로의 감독을 맡은 거라. 사실관계만 따지자면 콘도 요시후미의 죽음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독직 복귀는 거의 관련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3. 이야깃거리


요네바야시 히로마사가 연수생 시절, 그에게 애니메이션의 기초와 작화를 가르친 것도 콘도였다. 타나카 아츠코도 콘도 요시후미의 제자다.
정치적 성향은 타카하타 이사오처럼 일본공산당 지지자로, 1976년에 입당한 당원이었다. 타카하타 감독과 함께 중국을 무대로 일본의 전쟁책임을 고발하려는 작품을 제작하려고도 했지만 천안문 사건의 여파로 취소되었다고 한다.

3.1. 작품 리스트


나무위키에서 검색하기 쉽게 대표작만 링크한다. 풀 리스트는 일본 작화위키 참조




[1] 반대로 미야자키 작품에서 과장된 연출은 주로 토모나가 카즈히데가 맡았다.[2] 보통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선 개그 만화가 아니고서야 노인도 아닌 캐릭터에게 주름을 그려넣는 건 잘못하면 그림을 망치므로 금기시된다. 이것 때문에 예쁜 그림만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덮어놓고 저평가 당하기도 하는 애니메이터이다.[3] 물론 미야자키가 은퇴하겠다고 한 게 한두번이 아니지만 후계자인 콘도가 살아있었다면 미야자키는 정말로 마음 편하게 은퇴했을 가능성이 높고 복귀하더라도 보조적인 역할이나 소규모 작품을 만드는데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4] 이후 세월이 지나 2021년 사슴의 왕으로 공동 감독으로 데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