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팡 3세(1기 TV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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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팡 3세의 기념비적인 첫 영상물.'''[1] 1971년 10월 24일부터 1972년 3월 26일까지 요미우리 TV에서 일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8시까지 방영한 루팡 3세의 1기 TV시리즈. 전 23회.
루팡의 자켓 색깔은 '''녹색'''. 이시카와 고에몽이 처음부터 레귤러로 등장하지 않거나 일부 캐릭터의 성우가 현재와 다르거나 루팡 일당의 활동 지역이 상당히 차이나거나, 배경 음악이 전반적인 블루스 락 위주[2] 인 등 지금의 시리즈와는 약간 다른 면이 있다.
중간에 노선 변경으로 1쿨 분량과 2쿨 분량의 내용과 연출 성향이 극도로 다르다. 1쿨 분량은 중학생 이상을 대상으로 한 성인 취향 하드보일드 액션물이었으나 시청률 저하로 감독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3화를 끝으로 그만두면서 [3] 난리가 났고 작화감독이던 오오츠카 야스오는 급거 자신의 지인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를 후임 감독으로 불러들여 어떻게든 작품을 살리기로 한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범죄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며 시큰둥했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작품이 마음에 든다며 매우 의욕이 있어 대부분 미야자키 주도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오오스미 마사아키는 몇 개의 미방영 분 콘티 및 기획을 남기고 갔고 일부 에피소드는 이미 작화가 발주된 상태였다고 한다. 이것을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가 고쳐가며 만들게 되는데 일부 에피소드는 이들 취향을 반영해서 크게 변형했고, 일부 에피소드는 작화 작업이 이미 진행되어 고칠 수가 없던 것도 있었다고 한다. 스태프롤에도 정확히 표기되지 않으므로 [4] 이 작품이 어디가 오오스미가 한 것이고 어디를 미야자키가 한 것인지에 대해서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보통 1~3화와 6, 9화는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만든 것으로 여긴다. 1쿨 분량 중 10화 '위조지폐범을 노려라!'는 나중에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유사한 이야기가 나오며 11화 '7번째 다리가 내려갈 때'는 미야자키 하야오 스타일의 소녀 캐릭터가 나와 미야자키와 타카하타가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발주했던 14개의 각본은 영상화되지 않았다.
2쿨 분량인 14화부터는 확실하게 타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도로 연출이 이루어지며 저연령층을 겨냥한 연출을 한다. 이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면 2기 분량이 욕먹을 법도 한데 양쪽 다 퀄이 굉장히 높아서 웬만한 팬들은 둘 다 인정한다. [5] 이후 극과 극을 왔다갔다하는 루팡 3세 특유의 작풍에 영향을 준다.
그러다 방영 당시에는 크게 인기를 끌지 못하고 23화로 종영했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주시청자층이 저학년의 어린이였고, 당연히 애니메이션은 애들이나 보는 거라는 인식이 있던 시절이었다. 첫 방송 시청률은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맡은 1화는 6%, 3화는 3%. 타카하타와 미야자키가 맡은 후도 9% 정도였다. 그렇게 그냥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으나 이후 4년후부터 방영권이 싸다는 이유로 다른 방송국에서도 재방송되었는데, 이번에는 중고등학생 시청자가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어떤 방송국에서는 20%라는 높은 시청률을 올리는 인기를 얻어 재평가되고 연이어 재방송하는 인기 시리즈가 된다. 이는 루팡 3세 최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루팡 3세(2기 TV시리즈) 제작의 초석이 된다.
2. 제작 비화
도쿄 무비의 사장이었던 후지오카 유타카에게 스탭 중의 한 명이 몽키 펀치의 루팡 3세의 첫번째 단행본을 이거 굉장히 재미있다고 보여주면서 루팡 3세의 애니메이션 기획은 시작됐다. 스기이 기사부로도 이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사장에게 직접 말했다고 한다. 원작이 마음에 든 후지오카 사장은 즉시 <주간 만화액션> 편집부를 찾아가[6] 담판에 들어가서 다음날 애니메이션화할 권리를 갖는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후지오카 사장은 나중에 세계 시장을 겨낭한 리틀 네모를 프로듀스하기도 했듯이 진취적인 기상의 소유자로, 당시의 청년문화에 주목하고 어린애들이나 보는 거라는 인식의 애니메이션의 시청자 연령층을 높여서 청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도 만들고자 했다.
연출로 배정된 오오스미 마사아키는[7] 인형극 연출가 출신이라 작화를 잘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작화감독으로 토에이 동화에 있던 베테랑 오오츠카 야스오를 A 프로덕션[8] 으로 모셔온다.
당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으로 움직이지 않는 그림이 주류였던 지라, 루팡 3세를 애니메이션화해도 만화책처럼 생생하게 날뛰는 루팡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원작 만화 인기가 떨어질 거라는 주변의 만류로 난색을 표했던 원작자 몽키 펀치도 파일럿 필름을 본 후 입장을 바꾸었다.
파일럿 필름에서의 루팡 3세 성우는 1969년 제작한 극장판용 시네마 스코프 사이즈 버전을 노자와 나치가, 1971년 제작한 TV판용 표준 크기 버전을 히로카와 타이치로가 맡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 스케줄 사정상 출연이 어려워 어쩔수 없이 새 성우를 뽑게 되며, 오오스미 마사아키는 많은 연극 무대를 살펴본 후, 야마다 야스오를 지목해 그에게 루팡 3세의 성우를 맡아줄 것을 제안한다.
1971년 10월부터 오사카의 소재한 요미우리 TV에서 TV 애니메이션화되어 방송되나, 시청률에서 참패했다(역대 그 시간대 최저 시청률 기록!). 이 시기의 애니메이션들은 어느 정도 시청률이 보장되는 편(거인의 별은 최고 시청률 30%)이었으나 첫회가 6%를 기록하고 3회가 3%로 시청률이 떨어지면서 조기종영도 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3화의 시청률이 나왔을 때 요미우리 TV와 스폰서는 후지오카 유타카와 오오스미 마사아키를 급히 호출해 그들에게 열렬히 따졌다. 이에 오오스미 마사아키는 항변했고, 후지오카 유타카는 스폰서 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현재의 상황을 개선해보리라고 답했다.
후지오카 사장은 오오스미 감독에게 작품을 어린이 시청자층을 겨냥한 연출을 하면 어떨까란 제안하나, 오오스미는 그렇다고 시청률이 오를 확증은 있냐고 답하고 그날로 스튜디오를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오랫동안 취재를 거절하기도 했다. 훗날 NHK 루팡 3세 특집에서 긴 인터뷰를 하면서 속사정을 밝히기는 했다.
혼란스런 상황에서 후지오카는 토에이 동화에서 A 프로덕션으로 이적해 온 타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연출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이들은 토에이에서 쫓겨나다시피 퇴직하고, 먼저 이적한 오오츠카 선배가 있는 A 프로덕션으로 옮겨서 말괄량이 삐삐의 애니메이션을 만들려고 추진하고 스웨덴까지 찾아가서 부탁했는데도 원작자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뭔 이런 바보같은 작품을 만들어야하는지 내켜하지 않았지만, 삐삐 기획이 엎어지고 할 일이 없어서 연출을 받아들였다.[9]
A 프로덕션 연출 그룹(크레딧에 타카하타와 미야자키의 이름이 안 나온다.)은 성인, 청년 대상의 원작을 순화하여 어린이 시청자들도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방향전환을 했다. 그들이 맡으면서 시청률은 9%로 초반보다 소폭 증가했으나, 끝내 23화로 조기종영했다. 약 5년 후, 다시 신작 애니메이션(2기)이 제작된다.
여기 써 있는 내용의 출처는 BS 애니메 야화 루팡 3세 편이다.
3. 평가와 특징
대중적인 인기는 2기 시리즈에 비해 떨어졌지만 하드한 애니메이션 팬들, 작화 덕후, 애니메이터들에겐 통과 의례와 기초 교양과 같은 작품. '''오오츠카 야스오,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가 참여한 작품이다.''' 그 외에도 오오츠카 야스오의 수제자들이 모조리 투입되었다. 거기다 오오츠카 야스오는 이거 이후로는 나이 때문에 업무량을 줄이면서 이거만큼 많이 참여한 애니가 없다. 천재들이 모여서 만든 탓에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거나 지금도 보기 힘든 작화와 연출이 넘쳐난다.
이 시리즈 최고의 특징이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이 루팡하면 떠올리는 성인취향의 하드보일드함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보아도 그 하드보일드함은 손을 내저을 정도.
역대 루팡 3세 관련 작품들 중에서도 이 작품의 전기 에피소드들만큼 성인 취향의 작품은 드물다. '''첫 화'''부터 미네 후지코의 옷을 대놓고 찢지 않나... 카우보이 비밥의 감독인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비밥을 만들며 유일하게 영향받은 작품으로 꼽는 것이 바로 이 루팡 3세 1기 TV판. 덕분의 루팡 골수 덕후들 중에서는 2기 TV판 이후의 작품들은 물론이고 이 시리즈의 13화까지만 진정한 루팡 3세로 인정하는 케이스도 가끔 있다.
그렇다고 후기 분량이 욕먹느냐면 그것도 아니고 이건 또 미야자키 하야오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타카하타는 루팡 같은 왁자지껄한 모험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대부분을 맡겼다고 하며 미야자키는 이런 작품을 좋아해서 신나서 작업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루팡은 소녀와 후지코를 배려하는 댄디한 청년으로 나오며 훔치는 행위만 즐기지 물질에 집착이 없어 훔친 물건을 방해가 되면 스스럼없이 버리며 물질주의 사회를 풍자한다. 마지막화에선 유메노시마를 배경으로 환경오염 문제 풍자까지 한다. 딱 미야자키 애니라서 호평받으며 미야자키 팬들은 웬만해선 챙겨본다.
결론은 루팡 3세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 손가락에 꼽히는 명작이다. 이거 안 보고 루팡 3세 팬을 자청하는 사람들은 골수팬들에게 무시당하는 수준이다. 훗날 나온 루팡 3세 EPISODE 0:퍼스트 콘텍트, 원작자가 감독을 맡은 루팡 3세 루팡은 지금도 불타고 있는가?의 등장인물과 전개도 이 시리즈의 전반부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4. 등장인물
5. 수상
6. 주제가
- 오프닝 테마 ルパン三世主題歌I (1화~3화, 9화)
- 작사: 도쿄 무비 기획부(東京ムービー企画部)
- 작곡, 편곡: 야마시타 타케오(山下毅雄)
- 노래: 찰리 코세이(チャーリー・コーセイ)
- 오프닝 테마 2 AFRO "LUPIN '68" (4화~8화, 10화~15화)
- 작곡, 편곡: 야마시타 타케오
- 노래: 찰리 코세이
- 나레이션: 야마다 야스오
- 오프닝 테마 3 ルパン三世主題歌3 (16화~23화)
- 작곡, 편곡: 야마시타 타케오(山下毅雄)
- 노래: 요시로 히로이시(よしろう・広石)
- 나레이션: 나야 고로 (16화)
- 엔딩 테마 ルパン三世主題歌II
- 작사: 도쿄 무비 기획부
- 작곡, 편곡: 야마시타 타케오
- 노래: 찰리 코세이
7. 회차 목록
8. 기타
감독을 맡은 오오스미 마사아키는 연출방침으로 첫째는 '소도구 실증주의'. 007 영화에서 영향을 받아서 본드카처럼 루팡이 타는 자동차는 이것, 제임스 본드하면 떠올리는 총이 있듯이 지겐이라면 총잡이니까 자동권총보다는 리볼버라는 식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자동차와 총, 시계는 모두 현실에 실재하는 물건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작화감독을 맡은 오오츠카 야스오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기차, 자동차, 군용차를 그렸던 것이 이 업계로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될 만큼 자동차와 밀리터리에 일가견이 있고(한때는 애니메이터를 그만두고 프라모델 회사의 군용차 시리즈의 디자이너로 일을 할 정도), 이 작품에 참가한 이유도 자신이 좋아하는 자동차와 총기류를 제대로 그릴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를 자동차답게 그리고자 했다"라고 밝혔던 만큼 시리즈 첫 화부터가 레이싱 카들이 등장하고 희귀한 자동차들도 볼 수 있다. 실사영화같은 자동차의 리얼한 묘사에 주목해서 보는 것도 감상의 포인트다.
둘째는 사회의 시대성을 반영하는 것. 70년대는 안보투쟁이 끝나고 시라케 세대라고 해서 젊은이들은 우울하고 허무주의적 사고방식과 세상일에 무심하고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오오스미 감독이 연출한 루팡은 당시의 이런 젊은이의 모습을 그렸다. 오오츠카 야스오는 '루팡의 무책임함이 마음에 들었다' 라고 밝히기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훗날 밝히기를, 극장판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1기에서 한 작업의 총정리였다. 1기에 대해서는 우리들은 '헝그리' 정신으로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과 에너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방영 중에 노선이 변경돼서 제작 현장에서는 혼란이 발생해 작품의 완성도가 낮고 기술적으로도 별 볼일없는 작품이다고 평가했다. 재방송에서 인기를 얻은 이유에 대해선 1쿨의 복잡한 디자인에 비싼 벤츠 SSK를 타는 루팡과 귀여운 디자인에 대중적인 피아트 500타는 2쿨의 미야자키 루팡이 경쟁하며, 결과적으로 프로그램에 활력을 가져왔을 것이라고, 미야자키는 노선의 변화에 대해 권태감를 달래기 위해 도둑질을 하는 부유한 프랑스 귀족의 후예에서 뭔가 한탕을 해보자고 눈알을 번득이는 이탈리아계의 서민 도둑으로의 변화라고 말했다.
미네 후지코의 성우는 처음부터 최장기 전담을 맡아온 마스야마 에이코로 내정되어 있었다.[13] 이는 후대에 OVA로 공개된 파일럿 필름에서 확인 가능하다. 허나 본편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니카이도 유키코로 교체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
단역 캐릭터 중 파이칼과 마모 쿄스케는 이후 제작된 OVA 루팡 3세 살아있었던 마술사, TV스페셜 루팡 3세 안개의 일루시브에 각각 재등장했으며, 이후 시리즈 내에서도 간간히 언급된다.
여담이지만 루팡 3세 시리즈 중 유일하게 제니가타 코이치가 '''ICPO 소속이 아니다.''' 여기서는 아직 일본 경찰 소속으로 나오며, 5년 후 2기 시리즈가 시작할 때 ICPO에 추천을 받아 소속되었다고 언급한다.
우리나라에선 1996년에 투니버스로 방영된 적이 있다. 하지만 현재는 흔적 정도만 남아있고 이젠 더빙을 볼 수 없게 되었다.
1980년 3월 tv 오리지널 bgm 컬렉션으로 사운드트랙이 발매되었으나 본편과는 곡조가 다른 브금이 많은데, 이는 방영 당시 사용된 음원이 실종되어 작곡가인 야마시타 타케오와 주제가를 부른 찰리 코세이를 불러 재녹음했기 때문이란 후문이 있다.[14] 훗날 1999년과 2003년 발매된 루팡 71` me tracks와 루팡 3세 더 퍼스트 시리즈 앤솔로지 앨범으로 원본에 가깝게 복원하긴 했다.[15]
방영 시기가 연도(1971년)이다보니 지금으로선 지상파에 나올 수 없는 비속어가 튀어나오는 것도 특징.[16]
[1] 정확히 따지면 파일럿 필름이 제일 먼저 나왔지만 이것은 말그대로 시험용으로 나온 것이기에 제외. 파일럿 항목 참조.[2] 2기부턴 오노 유지를 바탕으로 한 퓨전 재즈, 펑크, 디스코 음악으로 변경된다.[3] 그냥 그만둔 것도 아니고 거의 일을 팽개치고 사라졌다는 모양.[4] 감독이 도망간 것을 시청자에게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제대로 표기하지 않았다. 일단 스태프롤에는 1~4화, 6화, 9화, 12화가 오오스미 마사아키 담당으로 표기되어 있다.[5] 하드보일드를 좋아하는 팬층은 2기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훗날의 인지도와 대중성을 생각하면 2기까지 완전 부정하는 사람들은 소수다.[6] 후일담으로 이 소식은 어떻게 소문이 들어갔는지 그 날 3시간 후에 토에이 동화에서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다고 후타바사로 찾아왔다고 한다.[7] 일본 위키피디아에선 처음 루팡 3세의 연출 제의를 받은 사람이 시바야마 츠토무였으나, 그가 천재 바카본의 제작에 참여한 관계로, 파일럿 필름의 제작에만 그쳐 대신 오오스미 마사아키한테 연출을 요청했다고 나와있다.[8] 당시에는 도쿄 무비의 하청업체로 실질적인 제작 담당. 나중에 신에이 동화로 독립.[9]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기서도 남들 10배로 일해서, 남들이 안보는 동안에도 하루종일 일하고 작화감독이 해야할 원화, 동화 체크까지 다 하고 수정 작업까지 해서 오오츠카 야스오는 미야자키가 손댄 것은 자신은 안 봐도 되니 편하게 일했다면서 좋아했다.[10] 각 항목의 소개문은 루팡 3세(1기 TV시리즈) 오프닝에서 루팡이 각각의 등장인물을 소개할 때 했던 대사 중 일부.[11] 요시카와 소지의 필명[12]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 공동 감독의 필명[13] 대신 본작의 14화에서 캐서린이란 단역 캐릭터로 출연하게 된다.[14] 상상하기 어렵지만 1960년대 후기 당시 일본에서 방영된 TV 애니들 중 토에이 애니메이션을 제외하면 관리 부실, 필름 변조 등으로 부분적이거나 전반적으로 에피소드가 유실된 작품들도 있었다. 특히 TMS 엔터테인먼트의 첫 작품 빅 X는 59화 분량 중 반에도 못 미치는 22화 분량만이 남아있는 상황이다.[15] 전자는 me 테이프(레코딩 시작 전에 음원에 효과음을 덧입힌 음악 테이프)에서 음원을 복원해 발매했기 때문에 완전한 복원이라고 보기 어렵다.[16] 대표적으로 키치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