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 반도
1. 개요
러시아 북서부, 북극해(바렌츠 해)와 백해 사이에 있는 반도이다. 이 반도 서쪽의 땅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해당하며 러시아와 노르웨이, 핀란드와의 국경이 된다. 러시아를 북유럽보다는 동유럽권으로 분류하는 편이지만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완연한 북유럽으로 볼 수 있다.
탄산음료 콜라와는 전혀 상관 없다. 어원은 사미어로 '생선이 풍부한 땅'.
대한민국(남한 한정)과 면적이 비슷하다. 지도를 보면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보다 훨씬 커 보이지만 메르카토르 도법의 한계 때문.
러시아 행정구역 상으로 무르만스크 주에 속한다.
2. 환경
안 그래도 추운 국가인 러시아의 북쪽 끄트머리에 붙어있어서 혹한의 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옆동네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난류의 영향을 받아서 북극에 가까운 위도를 감안하면 상당히 온화한 편이다. 오히려 반도 남부보다 북극해에 면한 북부가 난류의 은혜로 더 따뜻하다. 물론 워낙 북쪽이라 춥지 않은 건 아니지만 동쪽 시베리아에 비하면 양반. 북극권보다 위도가 높은 반도 북부의 평균 기온은 1월에 약 -10℃, 여름인 7월에는 10℃ 정도를 나타내며, 겨울에도 바다가 잘 얼지 않아 무르만스크, 세베로모르스크[1] 같은 부동항이 개발되었다.
반도 남쪽엔 타이가가 발달하였으며, 북쪽에는 툰드라가 넓게 존재한다.
3. 역사
원래는 핀란드인과 비슷한 계통의 소수민족 사미족의 땅이었지만 농경이 거의 불가능한 북방의 환경 탓에 러시아에 귀속되었다. 노르웨이인들도 진출했지만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힘들다.[2] 무르만스크라는 부동항이 개발되고 대대적으로 러시아인이 이주하면서 21세기 현재 사미족은 전체 인구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구멍을 팠던 곳이기도 하다. Кольская сверхглубокая скважина(콜라 초심층 시추공)이라고 하는 이 프로젝트로 12,262m를 팠다. 이후 2012년 8월 사할린의 Z-44 Chayvo 석유 시추공이 12,376m를 파면서 기록이 경신되었다.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이 곳에서 벌어진 핀란드와 소련 사이의 전쟁에서 핀란드 전쟁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장병이 두 명 탄생하기도 했다. 본인이 이끌던 1개 중대로 소련군 연대 두 개를 아작내버린 아르네 유틸라이넨, 그리고 그의 부하이자 '''세계사 최강의 저격수'''로 명성을 떨친 시모 해위해가 그들이다.
4. 콜라 노르웨이인
1870년 노르웨이 북부에서 일부 노르웨이인들이 어촌 겸 무역 기지를 만들고 정착하였던 역사가 있다. 당시 노르웨이는 빈곤 문제로 많은 인구가 해외로 이주하였는데 일부는 러시아로도 이주한 것.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노르웨이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어부 대부분은 콜라 반도에 잔류하는 것을 택했다 한다. 1917년 기준 대략 1천여 명 전후의 노르웨이인들이 콜라 반도에 거주했다고 한다.
1940년 6월 23일 NKVD의 라브렌티 베리야는 스칸디나비아와 인접한 무르만스크 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소개"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 때문에 콜라 노르웨이인들은 카렐리야 공화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1941년에는 겨울전쟁의 여파로 다시 강제이주가 이루어졌고, 강제 이주한 사람들에게 식사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으면서 많은 콜라 노르웨이인들이 굶어죽었다. 독소전쟁 과정에서는 이들도 상당수가 징집되어 독일군과 싸웠지만 고향 콜라 반도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소련 해체 이후 2백여 명 정도의 콜라 노르웨이인들이 노르웨이로 돌아가고 남아있는 러시아에 남아있는 노르웨이인 인구는2010년 기준 98명에 불과하다. 콜라 노르웨이인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노르웨이어를 배운 적도 없고, 가정에서 몰래 노르웨이어를 썼다가 또 괜히 NKVD 대숙청 시절처럼 잡혀가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이들 상당수는 노르웨이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5. 여담
세계 최북단의 철도와 역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