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폰 노이만

 



<colbgcolor=#333333> '''이름'''
'''John von Neumann'''/존 본노이먼 (영어)
Neumann János Lajos/너이먼 야노시 러요시[1](헝가리어)
Johann Ludwig von Neumann/요한 루트비히 폰노이만 (독일어)
'''거주지'''
미국
'''국적'''
,
''' 출생'''
1903년 12월 28일
''' 출생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 사망'''
1957년 2월 18일(향년 53년 52일)
''' 사망지'''
미국 워싱턴 D.C. 월터 리드 육군 의료병원
''' 종교'''
없음(불가지론) → 가톨릭
''' 연구 분야'''
수학, 물리학, 화학, 컴퓨터 과학,
통계학, 경제학
''' 학력'''
퍼쇼리 김나지움 졸업
부다페스트 대학교[2] 수학과 Ph.D.(박사) (1921-1926년)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ETH Zürich) 화학과 박사 (-1926년)
''' 소속'''
베를린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로스 앨러모스 국립연구소
''' 주요 업적'''
게임 이론
국소 볼록 공간
미니 맥스 원리
에르고딕 정리
폰 노이만 구조
폰 노이만 대수
폰노이만 보편 구축자
폰노이만 세포 자동자
폰노이만 엔트로피
폰노이만 전체
Direct integral
Stone-von Neumann theorem
Von Neumann extractor
Von Neumann regular ring
Von Neumann stability analysis
Von Neumann-Bernays-Gödel set theory
Von Neumann-Morgenstern utility theorem
Von Neumann's inequality
1. 개요
2. 생애
2.1. 초기생애
2.2. 미국 망명 전
2.3. 미국 망명 후
2.3.1. 핵무기
2.4. 사망
3. 사생활과 사상
4. 일화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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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폰 노이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출신의 미국인 수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컴퓨터 과학자로, 그는 양자 역학, 함수 해석학, 집합론, 위상수학, 컴퓨터 공학, 기하학, 수치해석, 경제학, 통계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겼으며 연산자 이론을 양자 역학에 접목시킨 최초의 선구자 중 하나였다. 맨해튼 계획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참여하였고 게임 이론과 셀룰러 오토마타의 개념을 공동 개발하였다. 또한 디지털 컴퓨터의 발달에 관여하는등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일생 동안, 폰노이만은 150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순수 수학 60편, 물리학 20편, 응용 수학 60편이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컴퓨터와 뇌(The Computer and the Brain)는 사망직전 병원에서 집필되었는데 집필 도중 그가 사망하면서 미완성의 원고로 남게 되었고 훗날 책 형태로 출판되었다.

2. 생애



2.1. 초기생애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헝가리식 이름은 성씨가 이름 앞에 오는데, '너이먼[3] 야노시 러요시(Neumann János Lajos)'이며, 독일식으로 쓰면 '요한 루트비히 폰노이만(Johann Ludwig von Neumann)'이다. 1913년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의 아버지였던 너이먼 믹셔(Neumann Miksa, 1873–1928. 귀족 작위 획득 후 막스 폰 노이만)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하면서 이름에 귀족임을 뜻하는 '(von)'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너이먼 믹셔는 자녀교육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 노이만과 형제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개인 가정교사를 들였는데, 수학과 더불어 자식들이 헝가리어 외에도 다른 언어들을 배워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가르쳤고 많은 양의 학문조기교육 시켰다. 8세의 나이에 폰 노이만은 미분적분에 대해 잘 아는 상태가 되었고 고대 그리스어라틴어도 능해졌다. 특히 역사학에도 흥미를 가져 빌헬름 옹켄(Wilhelm Oncken, 1838–1905)의 세계사 시리즈를 많이 읽었다. 아버지는 이런 폰 노이만을 기특하게 여겨 방 하나를 개조해 개인 도서관으로 만들어줄 정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산수, 언어, 암기의 분야에서 강한 능력을 보였다. '''7살 때 여덟 자리 수의 나눗셈을 하였으며, 9살 때 미적분을 마스터하고 12살 때 13살의 유진 위그너[4]에게 정수론을 가르쳐줬다고(...)''' 독해력은 매우 빨랐고 무언가를 암기하고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폰 노이만의 부모는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폰 노이만의 암산 능력을 보여 주며 즐겁게 해 주기도 하였다. 그의 동생이자, 후에 물리학자가 된 너이먼 미하이(Neumann Mihály, 1907–1989)는 형이 당시 인기 있었던 빌헬름 옹켄의 44권짜리 세계사 시리즈에서 그가 읽은 부분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십 년 후 폰 노이만의 동료 한 사람은 폰노이만이 옹켄의 책 중 한 챕터 전체를 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의 가족들, 폰 노이만 본인,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관심 없는 영역에 대한 기억력은 일반인들보다도 좋지 않아 수십년간 거주한 집에서 접시가 담긴 찬장이 어딘지도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고 한다.
8세에 루터회 학교인 퍼쇼리 에벙겔리쿠시 김나지움(Budapest-Fasori Evangélikus Gimnázium)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부다페스트에서 제일 교육수준이 높은 엘리트 학교 중 하나였다. 수업 내용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 예습 없이 수업에 참여해 다른 급우들을 압도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으며 여기서 훗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는 유진 위그너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당시 김나지움의 선생이었던 라츠 라슬로(Rátz László, 1863–1930)는 노이만의 수학적 재능에 대해 주목하여 일반적인 교육 수준에서는 노이만이 자신의 날개를 완전히 펴지 못한 채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고 그의 아버지였던 너이먼 믹셔와 상담을 가졌다. 그의 아버지는 폰 노이만이 정규교육과정을 생략하는 데에는 부정적이었으나 뛰어난 학자를 들이는 데에는 찬성하였고 당대에 유명했던 헝가리의 수학자인 세괴 가보르(Szegő Gábor, 1895–1985)를 교육자로 선택해 고등 미적분학을 접하게 하였다. 세괴와 폰 노이만의 첫 만남 이후 세괴의 아내는 그가 집에 돌아온 뒤 노이만의 수학적 재능에 대해 감명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김나지움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체육 과목 성적은 저조하였고 김나지움 졸업 이후 19세에는 서수(ordinal number)에 대하여 논문을 냈다. 22세에 부다페스트 대학교 수학 주전공에 물리, 화학 부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수학자보다 공학자가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아버지의 생각으로 박사 학위와 동시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Zürich)에서 화학 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2. 미국 망명 전


독일의 교수자격 시험인 하빌리타치온을 최연소(25세)로 통과하였다. 20대에 《양자 역학의 수학적 기초》나 《집합론의 공리화》, 《에르고드 이론의 연구》, 《실내 게임의 이론》 등을 저술해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 명이 되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창립 교수 4명 중 1명(당시 유일하게 20대였다.)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최초로 힐베르트 공간을 양자 역학에 도입한 《양자 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아직까지 판매되고 있다. 현재는 이 네 저작들이 모두 '''분과학문'''이다.
1928년부터 베를린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Privatdozent)로 근무하였다. 1927년 한 해 동안 폰 노이만은 수학에 관한 주요논문 12편을 발표하였고 29년 말까지 주요 논문 36편을 발표했다. 1930년에 그는 미국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 대학교에 가게 된다.
1930년, 27세의 폰 노이만은 마리에트 코베시(Mariette Kövesi)[5]와 결혼하였다. 결혼하기 전 그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는데, 이 시기는 아버지인 막스가 사망한 지 몇 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들은 슬하에 1명의 딸을 두었고 이름을 마리나라고 지었다. 7년 뒤 두 사람은 성격차이로 인해 이혼했고 폰 노이만은 부다페스트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직전에 만난 여성인 클라라 댄[6]과 재혼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정권을 잡고 독재 정부인 나치 독일이 탄생하면서 폰 노이만과 그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당시 폰 노이만은 이름을 미국식 이름인 존(John)으로 개명했으며 독일식 귀족이름인 Von Neumann을 택하게 되었다. 다만 귀족적인 색채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은 각각 Neumann, vonneumann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2.3. 미국 망명 후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있던 중 1943년부터 맨해튼 계획에 참가해서 고폭발성 렌즈를 발명했다. 폭축 렌즈라고도 하는데 이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팻 맨의 발명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었다. 2차대전 중에는 영국 수학자 G.I. 테일러와 함께 폭발파(Blast wave)에 대해 최초로 연구했다. 이후 다른 수학·물리학자들과 함께 이를 출판했으며 아직도 판매 중이다. 또한 유체 역학에 관련해 최초로 인공 점성(artificial viscosity)을 정의했다.
1944년 '''《게임 이론과 경제 행동》'''을 경제학자 오스카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저술했다. 이 역시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는 서적. 이후로 게임 이론의 연구를 통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물이 여러 번 나왔다.
DNA, RNA의 구조를 최초로 예견하였으나 세부 사항을 완성하기 전에 사망하여 빛을 보지 못했다. 컴퓨터 연구에 뛰어든 이후로는 프로그램 내장 방식, 디지털, 이진법이라는 기본적인 골격을 만들었으며 순서도와 서브루틴, 몬테카를로법을 최초로 사용했다. 전산학과라면 배울 '''병합 정렬(merge sort)'''을 1945년에 만들었고, 최초로 컴퓨터 기반의 pseudorandom process를 연구했으며 그 결과로 Middle-square method를 창시했다. 또한 Randomness extractor를 최초로 연구해 Bernoulli sequence를 이용한 Von Neumann extractor를 남겼다. 그리고 기상학과 관련해, 수학을 사용해서 일기 예보를 하려던 노력은 이전부터 있었으나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해 기상 예측'''을 시작한 사람은 폰 노이만이다. 이산 구조 등에서 배우는 ALU(arithmetic logic unit)도 폰 노이만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말년에는 인공 지능과 인공 생명에 관한 초기 연구를 남겼다. 그는 간단한 원칙만으로 스스로 진화하는 복잡한 프로그램을 구상했고 이를 오토마톤이라고 칭했다. 1949년에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에서 오토마톤에 대해 처음으로 강의를 했으며 나중에 Theory of self-reproducing automata를 발표했다. 폰 노이만이 만든 이 자기 복제 컴퓨터 프로그램은 세계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라고 평가받는다.

2.3.1. 핵무기


1937년, 미국 귀화 시민이 되고 나서 그는 당시의 2차세계 대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중위 시험인 미국 육군의 장교 준비 제도 이사회(USAR)의 간부시험에 지원하였다. 그는 쉽게 시험을 통과하지만, 궁극적으로 그의 나이로 인해 거부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노이만은 1937년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나치 독일과의 전쟁은 수치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 육군에 자청하지만, 위에 말했다시피 불채용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폰 노이만은 폭발물 분야에서 수학적 연구의 전문가가 되고, 미국 해군에 대한 컨설팅 작업을 했다. 이 분야에서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큰 폭탄에 의한 피해는 폭탄이 지상에 떨어지기 전에 폭발했을 때 더 커질 것"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폭탄에 이용되었다.
원자 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나가사키에 투하 된 플루토늄형 원자 폭탄 팻 맨을 위한 폭축 렌즈의 개발을 담당했다. 1940년대에 폭발의 파면 구조에 대한 ZND 이론을 확립하였으며 이 이론을 바탕으로 10개월에 걸친 수치 해석을 통해 폭약을 32면체에 배치함으로써 원자 폭탄이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폰 노이만은 미국과의 교전국이던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지점을 선정할 때 문화재가 많은 도시였던 교토에 대해 "일본 국민들에게 교토가 문화적 가치가 많다면 더더욱 그곳을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폰 노이만이 만든 계획은 폭격기에 원자폭탄을 실은 뒤 교토 상공에 직접 투하해 도쿄 대공습과 같이 도시를 완전히 말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교토에 신혼여행을 갔다왔었던 헨리 스팀슨 국방장관이 반대해 대신 히로시마로 정해졌다.

2.4. 사망


1955년 방사선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골수에 전이된 치명적인 췌장암에 걸려서 1957년에 사망했다. 이때 그는 인공 지능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고 《컴퓨터와 뇌》를 저술하고 있었지만 이른 죽음으로 인해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특히 이 책에서 메모리 계층 구조가 필요해질 거라는 예측을 남겼다. 폰 노이만 구조의 컴퓨터 알고리즘은 병목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를 막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이 고안되었는데, 메모리 계층 구조도 1가지 방법 중에 하나이다.
암에 걸린 이후 폰 노이만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엄청난 통증을 겪으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고 이때 로마 가톨릭을 믿게 되었는데, 가톨릭에 귀의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파스칼의 내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파스칼의 내기란 쉽게 말해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다면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기독교 변증론이다.
여담으로 미국의 군사 기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병원에서 면회할 수 있었던 인물은 소수였다고 한다.

3. 사생활과 사상


  • 폰 노이만의 친구인 헤르만 모르겐슈테른과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그가 평소 완전한 불가지론자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기했듯 병에 걸린 후 파스칼의 내기 영향으로 종교를 믿게 되었는데, 이에 모르겐슈테른은 그가 건강했다면 계속해서 종교에 회의적이었을 것이었다고 말했다.
  • 젊은 시절부터 폰 노이만은 IBM, 스탠다드 오일[7], 랜드 연구소(RAND Corp.), 제너럴 일렉트릭과 같은 초거대 집단의 컨설턴트 일을 했고 심지어는 미군CIA도 그를 원했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미국 귀화 후에도 금전적으로 굉장히 부유했으며 그의 집은 프린스턴 시에서도 유명한 큰 집 중 하나였다. 자가용으로 레이싱카인 페라리 500 몬디알을 타고 다녔다.
  • 정치적으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나 좌익으로 몰린 지인들을 보호하려는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그의 동료였던 오펜하이머메카시즘으로 인해 억울하게 공산주의자로 몰렸을 때 폰 노이만이 변호해준 것이 대표적이다. 웃픈건 맨해튼 계획 당시 폰 노이만과 일했던 클라우스 푹스라는 과학자가 있었는데 당시 상관 자리에 있던 노이만은, 잘 알려지지 않았었지만 상당히 똑똑했던 푹스의 지성과 능력에 대해 많은 칭찬을 해줬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사실 그는 소련 스파이였다.(...) 실제 푹스가 뺴돌린 자료들이 소련의 핵개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말도 있다.
  • 보통 뛰어난 수학자의 성격하면 내성적이면서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는 반대로 매우 사교적이었다고 한다. 파티를 자주 즐겨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도 남들과 다르게 자주 파티를 열었다고. 또한 상호 확증 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개념을 제안했는데 이 용어의 약자가 절묘하게 MAD(미친)가 된 이유 역시 그의 유머러스한 성격이 한몫했다. 그가 만든 컴퓨터의 이름에서도 그의 센스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Mathematical Analyzer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 이른바 MANIAC이다.
  • 폰 노이만 본인은 자기 자신의 패션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 고가의 투버튼 정장만 입고 다녔고 이러한 스타일은 박사 시험 당시 감독관이었던 다비트 힐베르트에게서 재단사가 누구냐는 질문을 듣는 등 주변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한편 그의 아내였던 클라라는 식습관과 관련해, 노이만이 칼로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세고 다니는 남자라고 말했다. 그는 조용한 공간보다는 무질서한 소음 속에서 일하는 것을 즐겼으며 축음기로 엄청나게 크게 음악을 틀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이웃주민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이런 희한한 행보에도 불구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인해 이웃들에게 명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일화


폰 노이만의 학문적 업적 그 자체들은 뛰어나다는 것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고, 노이만 본인의 머리가 천재적으로 비상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하기에 서술한 관련된 일화들은 사실이 과장되거나 후대에 와서 지어낸 얘기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이 문단에 쓰여있던 글들인 "트리니티 핵실험 당시 폰 노이만이 폭발 에너지를 암산으로 가장 근접하게 맞추어 엔리코 페르미가 칭찬했다"는 것은 외국의 작가가 만들어낸 소설로 실은 엔리코 페르미가 가장 근접하게 맞혔다.[8] 노이만 뿐 아니라 대체로 많은 위인들이 그들의 업적과 관련된 일화에서 사실무근인 경우가 허다하니 무조건적으로 믿지는 말자.
  • 어릴 때, 부유했던 집에서 파티를 하면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외워서 읽어주는 묘기를 하였다. 또, 파티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이름, 주소, 전화 번호를 물어보고 집에 갈 때 문 앞에서 한 명씩 인사하면서 저 정보를 다 읊어줬다고.
  • 7개의 외국어를 모국어같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발음도 원어민과 흡사하였다.[9] 어릴 때 영어를 배웠지만 미국에 오면서 좀 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통째로 외우기도 했다.
  • 유진 위그너는 노벨상을 받을 때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존 폰 노이만이란 말을 했다. 기자가 위그너에게 “왜 헝가리에는 그렇게 뛰어난 천재가 많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위그너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천재가 많다니요? 천재는 오직 존 폰 노이만 한 사람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10]
  • 김나지움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어느 연구 기관이든 동료들은 그의 압도적인 천재성을 인정했다. 신기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계산력과 암기력이 좋아졌다고 한다.
  • 뛰어난 수학자였던 포여 죄르지는 취리히 대학에 다닐 적 폰 노이만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예전에 그가 있던 클래스에서 강의할 때, 어떤 정리를 소개하고 아직 증명되지 않았으며 아마 꽤 어려울 거라고 이야기했다. 폰 노이만은 5분 후 가만히 손을 들더니 칠판에 나와 증명을 바로 써 내려갔다. 그때부터 나는 폰 노이만을 두려워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비슷한 일화로, 한 교수가 증명되지 않은 정리를 수업에 설명했는데 수업이 끝나고 폰 노이만이 증명한 종이를 들고 찾아왔다는 기록도 있다.

  • 동료가 어릴 때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읽은 《두 도시 이야기》를 암송해보라고 하니까 멈추라고 할 때까지 30분 가량 외웠다.
  • 동료 물리학자인 에이브러햄 파이스[11]맨해튼 계획 후 오펜하이머 사건 때, 존 폰 노이만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2]의 안 좋은 사이를 보며 오펜하이머가 폰 노이만의 재능에 대해 질투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고 서술했다. 냉정하게 보자면, 오펜하이머와 폰 노이만의 갈등은 오펜하이머의 일방적인 질투가 아니라 원자폭탄의 실전 투입에 대한 두 사람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오펜하이머는 원폭의 실전 투입을 반대했고 오히려 폰 노이만이 실전 투입을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과학자 및 수학자들은 모두 반강제로 감금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유일하게 폰 노이만만이 너무나 일이 많아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가 외출을 했다 돌아오는 때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막힌 부분을 들고 찾아갔고, 그러면 폰 노이만은 마치 볼링핀을 쳐 넘어뜨리 듯 문제를 해결하거나 실마리를 찾았다고 한다
  • 괴팅겐에서 다비트 힐베르트의 초청으로 강의를 하게 된다. 양자 역학의 형식주의에 힐베르트 공간을 도입한 인물은 힐베르트가 아니라 폰 노이만이다. 폰 노이만은 수학을 논리학으로 귀속시키려는 버트런드 러셀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시도를 냉소했고, 수학의 한 이론의 무모순성을 증명 체계 속에서 증명하려는 힐베르트의 시도에 역시 회의적이었다. 전자의 시도는 다수의 수학자들에게 별 관심을 끌지 못했고 후자의 시도는 쿠르트 괴델의 등장으로 불가능함이 밝혀졌다. 실은 폰 노이만 역시 괴델의 아이디어를 이미 생각해 본 적이 있었으나 힐베르트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의 시도를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이해한 사람도 노이만 한 사람뿐이었다. 정리 직후 노이만이 한 말은 '다 끝장났군요!'였다. 그야말로 정곡을 찌른 표현.
  • 또, 위의 물리학자가 쓴 일화로, 또 다른 뛰어난 수학자 친구가 며칠 동안 밤을 새서 푼 문제를 갖고 폰 노이만에게 장난을 치려고 문제를 풀었다는 것을 숨긴 채 같이 문제를 풀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폰 노이만이 문제를 순식간에 술술 풀어나가고 동료 수학자가 밤을 새워서 풀었던 가장 어려운 부분만 남겨놓자 화난 수학자가 답을 말하고 나가 버렸다. 1분 후 폰 노이만은 그가 말한 답이 옳다고 말한 뒤 30분 동안 어떻게 자신보다 빨리 풀었는지 고민하다가 물리학자가 사실을 이야기해 주자 그제야 웃으면서 밥 먹으러 갔다는 일화도 있다.
  •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폰 노이만보다 위대한 인물은 만나 봤지만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이는 그의 동료들도 동의했다. 참고로 에이브러햄 파이스는 천재들의 시대에서 유명한 천재란 천재는 다 만나 본 사람이다.
  • 폰 노이만이 자문을 해주었던 군사 협력 업체에서 복잡한 계산이 필요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고민하다가 폰 노이만한테 물어봤는데 그는 '컴퓨터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라며 잠깐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보더니 종이에 몇 줄의 식으로 완벽한 해답을 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제 밥 먹으러 갑시다' 라고 말했다는 훈훈한 일화도 있다.
  • 누군가 “200마일 길이의 철로의 양쪽 끝에 서 있는 두 대의 기차가 시속 50마일의 속도로 서로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부터 두 기차가 서로 충돌할 때까지 파리가 시속 75마일의 속도로 두 기차 사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파리가 이동한 거리는 모두 몇 마일일까요?”라는 질문을 폰 노이만에게 했다. 폰 노이만은 1초의 지체도 없이 150마일이라고 대답했다. 질문을 한 사람은 실망하면서 “역시 당신은 속임수에 걸리지 않는군요. 대개 사람들은 이 문제를 무한급수를 이용해서 풀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매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간단한 논리를 이용해서 파리가 2시간 동안 움직인 거리를 알아내면 금방 풀리죠. 당신은 그렇게 풀어낸 거죠?”[13] 폰 노이만은 대답했다. “아뇨. 무한급수로 풀었는데요.”[14] 이 문제는 고등학교 이과 수학의 등비수열 수준의 문제이나 폰 노이만이 무한급수를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머릿속에서 초항부터 계산해서 전부 더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에 리처드 파인만도 동일한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파인만은 이미 폰 노이만의 일화를 알고 있었기에 쉬운 풀이로 답을 구해놓고 "무한급수로 풀었는데요?"를 시전하는 능청을 부렸다. 참고로 파인만도 대단한 천재였지만 폰 노이만과 같이 살아있는 컴퓨터처럼 암산을 하는 타입의 천재는 아니었다.
  • ICBM(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의 초창기, 개발자들은 완전히 맨땅에서 시작했기에 탄도 미사일이라는 것이 어떤 물건이 될지 개발 과정이 맞는지조차 혼란스러워했다. 이 와중에 누군가 '노이만에게 물어보자 '고 제안했고 개발자들은 몇 개월간 연구한 수천 페이지의 문서를 들고 그에게 찾아갔다. 노이만은 그들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개발자들이 "그럼 얼마 후에 방문하면 될까요?"하고 물어보자 "아, 거기 잠깐만 앉아 보세요."하고 말하며 2시간 동안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종이와 펜을 들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은 완벽했다고 한다.
  • 위의 것과 동일한 미사일의 개발 도중, 한 학자가 수백 장의 보고서를 들고 폰 노이만에게 찾아갔다. 폰 노이만은 보고서를 앞 장을 빠른 속도로 읽고 갑자기 뒤에서부터 대충 몇 장 넘기더니 "이 구상은 너무 허무맹랑한데요, 사람 손으로는 불가능하고, 신이라도 쉽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곧바로 그 이유에 대해 완벽히 설명해 주었으나, 그 학자는 납득하지 못하고 노이만을 이겨보겠다는 욕심에 2달이나 더 매진하고는 그제서야 진짜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 말년에 폰 노이만은 “현대 수학은 매우 복잡합니다. 당신은 과연 현대 수학을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노이만은 이 질문에는 그답지 않게 한참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했다가 “28퍼센트.”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고작 28%?’라고 의문을 품기 전에 잘 생각해 보자. 대개 ‘알면 알수록 자기가 모른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이 학문의 길인데, 학자인 폰 노이만이 ‘나는 안다’고 과신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모른다’고 겸손을 떤 것도 아니라 찬찬히 생각한 뒤에 저렇게 구체적인 비율을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은 나는 수학이라는 학문의 100%가 어느 정도인지 윤곽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대답이다. [15]
  • 이렇게 너무나 놀라운 재능을 가진 그를 두고 주변 사람은 혹시 그가 악마가 아닐까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 의견은 동료 수학자가 단 한마디로 반박해버렸다. “악마가 인간을 연기한 것이라면 그렇게 연기를 못 할 리가 없다.”[16]
  • 엔리코 페르미의 부인은 “요니(노이만의 애칭.Johnny)는 뒤에서 험담을 듣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사교적, 재능적 면에서 흠을 잡기는커녕 완전무결했기 때문.
  • 아내와 영화를 볼 때면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뉴스는 정말 집중해서 봤으나 막상 영화가 시작하면 자 버렸다고 한다. 그 후 나와서 아내가 영화에 대해 물어보면 봤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즉석으로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한다. 매우 흥미로운 스토리였지만 영화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 책 리만 가설을 보면 폰 노이만은 여자와 스포츠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위인이라고 나온다.
  • 비서의 책상 앞부분을 없애놓고 가끔씩 허리를 숙여 비서의 치마 속을 보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것을 눈치챈 비서가 조용히 마분지로 책상 앞을 가려 놓았다고 한다.
  • 폰 노이만의 운전 실력은 좋지 않았다. 그가 차로 나무를 들이받은 뒤 경찰이 오자 "길가의 나무들이 일정한 속도로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무가 내 앞에 나타났다.(...)" 라고 진술했다.
  • 인생의 대부분을 불가지론자 혹은 냉담자로 살았지만, 죽기 직전 암으로 투병 중에 가톨릭에 귀의하여 가톨릭 신자로서 생을 마감했다. 주변 인물들에 따르면 이러한 개종은 평소 건강할 때의 발언이나 태도와는 사뭇 동떨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그의 병자성사를 집전한 신부에 따르면, 그 자신은 개종으로 그다지 큰 위안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미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노이만은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파스칼의 내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 그가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의 동생이 파우스트 독일어 원문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생이 읽다가 잠시 멈췄을 때, 폰 노이만이 다음 구절들을 읊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기억력에 관련된 마지막 일화이다.
  • 기술적 특이점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사람도 폰 노이만이다. 정확히는 동료였던 스타니스와프 울람(Stanisław Marcin Ulam)이 1958년 폰 노이만의 사후에 그에 대해 회고하며 쓴 글에서 언급되었는데 "기술의 항구한 가속적 발전으로 인해 인류 역사에는 필연적으로 특이점이 발생할 것이며, 그 후의 인간사는 지금껏 이어져온 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될 것이다."[17]라고 하였다 한다.
  • 별명 중에 반신(半神, Demigod)이 있다. 두뇌가 인간의 영역이 아니란 소리. 프린스턴 대학에서 떠도는 농담 중 "폰 노이만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하고 완벽히 모방할 수 있는 반신이다."가 있다고 한다. #
  • 노이만은 디지털 컴퓨터의 개발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지만 컴퓨터는 늘 거대해야 하고, 핵무기를 만들고, 기후를 통제하는 데에만 유용하다고 여겼다.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했던 건지 모든 곳에 컴퓨터가 내장될 미래는 예상하지 못했다.[18]
  • 후덕한 몸매 때문에 그의 아내가 "이런 수학천재도 칼로리는 계산하지 못 한다."라고 말했다.

5. 관련 문서



[1] [ˈnɒjmɒn ˈjaːnoʃ ˈlɒjoʃ\][2] 현재는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3] 모음조화가 존재하는 헝가리어의 특성상 '너이먼[ˈnɒjmɒn\]'으로 발음한다.[4] 위그너 또한 13살에 정수론을 배웠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196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다.[5] 1909~1992. 즉 6세 연하다. 부다페스트 대학교에서 경제학과를 졸업했다.[6] 1911–1963. 즉 8세 연하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1931년, 1936년에 결혼을 했다 각각 이혼했고 폰 노이만과 3번째 결혼을 했다.[7] 록펠러가 세운, 현재의 엑슨모빌을 비롯한 여러 거대 석유회사의 전신. 이 회사는 반독점법 위반으로 인해 수십 개 회사로 찢겨지기 전까지 미국 전체 석유 유통량의 95%를 쥐고 있었던 회사였다.[8] 실제 위력은 20~22킬로톤, 페르미는 10킬로톤, 노이만은 5킬로톤. 페르미 추정 항목 참고[9] 폰 노이만의 유일한 육성 녹음을 들어보면 영어 발음이 완벽하지 않다.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10] 사실 기자의 질문은 나름대로 타당하다. 많은 학자들이 헝가리에서 나왔다. 유진 위그너, 에드워드 텔러, 레오 실라르드(실라드), 테오도르 폰 카르만이 있다.[11]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닐스 보어의 전기를 썼다.[12]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로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중 한 명이자 8개 국어로 시와 소설을 쓰고 클래식 작곡도 상당한 수준인 무시무시한 천재다.[13] 쉽게 푸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기차가 서로를 향해 각각 시속 50마일의 속도로 이동하므로 200마일 떨어져 있는 두 기차가 만나는 데에는 2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파리도 경로와 상관없이 2시간을 시속 75마일로 이동했으므로 총 이동 거리는 150마일이 된다.[14] 무한급수로 푸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파리와 같이 출발하는 전차를 A, 반대편 전차는 B라 할 때 파리는 전차보다 1.5배 빠르므로 파리와 B가 만나는 지점은 200마일×(1.5)/(1+1.5)=120마일이며 두 전차간의 거리는 200-80×2=40마일이며 걸린 시간은 120/75=1.6시간이다. 이때 시간이나 파리의 이동 거리 중에 어느 것을 초항으로 잡느냐에 따라 방법이 조금 달라진다. 남은 거리가 40마일이므로 처음 거리의 1/5의 상태가 되며 이를 통해 공비가 0.2가 됨을 알 수 있다. 무한급수의 공비의 절댓값이 1미만일 때 초항/(1-공비)=무한급수의 합이라는 공식을 이용하면 1.6시간/(1-0.2)=2시간 즉 시속75마일×2시간=150마일 또는 120마일/(1-0.2)=150마일이다. 또한 짝수 번째 항이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고려하면 공비는 -0.2가 되는데 무한급수의 합은 총 이동거리가 아닌 파리의 현재 위치로 계산할 수 있다. 120마일/(1-(-0.2))= 100마일이 되며 정확히 중간 지점이 되므로 위의 과정이 맞음을 증명한다. [15] 오늘날 SCI-E로 분류되는 저널에서 1955년 나온 논문을 모두 모으면 83,726편이고, 그중 수학 및 응용 분야의 논문은 1,153편이다. 당시에는 SCI-E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그 정도 수준의 논문들 중 1년에 28%씩 읽는 것은 폰 노이만 같은 대학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195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약 50,000종류의 과학 저널이 있었으며 당시 모든 논문의 총량은 100~300만 편으로 짐작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수학 논문은 200만 편 중 28,000편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28,000편의 28%는 약 7,840편이다. 참고로 2015년에는 약 60,000편의 SCI-E급 수학 논문이 발표되었다.[16] 만약 인간을 초월한 지능을 가진 악마가 자신을 숨기고 인간을 연기한다면, 오히려 (지적으로)뭔가 어설픈 약점을 만들어서 보다 인간미 넘치게 보이게 만들었겠지만, 폰노이만은 인간미가 없다고 할정도로 극도의 지능을 뽐냈기 때문이다.[17] One conversation centered on the ever accelerating progress of technology and changes in the mode of human life, which gives the appearance of approaching some essential singularity in the history of the race beyond which human affairs, as we know them, could not continue.[18] 모두 어디 있지? 50쪽. Stephen Webb 저. 한승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