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튜링

 




'''이름'''
'''앨런 매시슨 튜링'''
(Alan Mathison Turing)
'''출생'''
1912년 6월 23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런던
'''사망'''
1954년 6월 7일 (41세)
영국 체셔
'''국적'''
영국 [image]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주요 분야'''
수학, 암호학, 컴퓨터과학
'''주요 업적'''
'''에니그마 암호 해독
튜링 기계
튜링 테스트 '''
'''수상'''
스미스상, 대영제국 훈장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유년 및 청년 시절
2.2. 대학 및 학자 시절
2.3. 최후 그리고 복권
2.4. 성격
2.5. 어록
3. 여담
4. 대중문화
5. 관련 항목


1. 개요


앨런 매시슨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년 6월 23일 ~ 1954년 6월 7일)은 영국수학자, 암호학자, 컴퓨터과학자다. 케임브리지 종합대학의 킹스칼리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의 교수직을 맡았다. '''컴퓨터과학의 아버지'''이자 '''현대 컴퓨터과학을 정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부의 요청에 따라 나치 독일군에니그마 암호 해독을 맡아 '''연합군 승리에 기여, 세계대전 기간 단축 및 대략 1400만 명을 구제'''했다. 종전 후 군에서 복귀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으나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어 화학적 거세를 당하는 핍박을 당한, 성소수자로서 큰 차별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954년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1] 생을 마감한 이후에도 반공주의자호모포비아 진영에서 여성혐오자[2]나 공산주의자[3]였다는 가짜뉴스를 퍼트리며 루머가 확산되기도 했다. 이후 시대가 바뀌며 성소수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이 바뀌기 시작하며 튜링에 대한 사면복권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2013년 12월 24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법무부 장관의 말을 받아, 결국 여왕 특별 사면령으로 사면을 받았고, '동성애 처벌이 위헌적'이라는 위헌적 처벌조항에 의한 처벌의 무죄 판결로 복권되었다. 사후 59년만이었다.

2. 생애



2.1. 유년 및 청년 시절


어릴 적 3주 만에 읽기를 배우고, 미적분을 배우지 않고도 자력으로 미적분 심화 문제를 푸는 등 명석한 두뇌를 자랑했다.[4] 그러나 이러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중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좋은 점수를 받진 못했다고 한다. 또, 기초는 안 다지고 어려운 문제만 주야장천 붙잡고 있는 앨런을 안 좋게 본 선생님이 많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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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의 앨런
16세 때 크리스토퍼 모컴(Christopher Morcom)[6]이라는 친구를 만났으며 모컴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모컴도 수학에 상당히 뛰어난 재능[7]을 가졌고 둘이 같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1930년에 소결핵균으로 모컴이 요절하자[8][9][10] 모컴의 뇌에 있던 지능을 저장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다 결국 계산 이론을 창안하게 된다.

2.2. 대학 및 학자 시절


영국의 명문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했다.[11]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 재학 중에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1936)이란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튜링 머신 이론과 노이만형 컴퓨터에 있어서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튜링 머신은 컴퓨터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 명제의 증명 가능성에 대한 연구에서 처음 이용된 개념이다. 튜링은 러셀의 역설이나 불완전성 정리처럼 '나는 유한 번의 논리처리로는 증명 안 됨'이라는 명제를 증명하였는데, 중간에 튜링은 칸이 나눠진 긴 종이 띠와 이 위의 데이터를 읽고 바꿔쓰는 기계가 읽은 데이터에 대해서 바꿔쓰는 결과를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면, 이것이 수학적 증명과 인간의 지능과 동일하다는 걸 증명한다. 전후에 튜링은 이 '만능 기계'를 완전히 실현하려다 실패하고 약간 변형된 형태가 폰 노이만에 의해 실현되어 지금의 컴퓨터가 된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고, 이때 교수 존 폰 노이만과 친분을 다졌다. 노이만은 튜링의 성적 지향을 알았지만 계속 친구 관계를 유지했으며, 동성애가 범죄로 분류되는 영국으로 귀국하기보다는 미국에 남기를 충고했다. 노이만은 튜링에게 자신의 조교직을 제안하였으나, 애국심에 불타던 젊은 튜링은 조국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조교직을 거절하고 영국으로의 귀국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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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대학교 재학 당시 (오른쪽)
귀국 후 튜링은 1939년 영국의 암호 해독 기관 GC&CS[12]에 참여해 나치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세션 Hut 8의 책임자를 맡았다. 책임자로 전임하는 동안 튜링 봄브(Turing Bombe)를 개발했고[13][14] 그 악명 높은 에니그마를 해독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종전 후 튜링은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초기 디지털 컴퓨터인 맨체스터 마크1의 개발에 참여했고, 영국 최초로 폰 노이만형 컴퓨터인 프로그램 내장형 컴퓨터 구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1950년엔 인공지능에 대한 논문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 계산 기계와 지능>'''을 발표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란 단어가 생기기도 전에 인공지능[15]을 고안하고, 이의 광범위한 사용을 예측[16]한 것으로 유명하다. 논문 속에서 앨런은 현재 튜링 테스트라 불리는 인공지능 실험을 제안한다.[17] 저명한 철학 학술지 마인드(Mind)에 기고된 해당 논문은 튜링 기계 개념과 결합하여 현대 심리철학 가운데 '기능주의' 조류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미국 철학자 존 설이 1980년에 제시한 '중국어 방(Chinese Room)' 논증이 유명하다.
튜링은 전산학의 기초가 되는 논문들뿐만 아니라 형태형성의 화학적인 토대(The Chemical Basis of Morphogenesis)라는 논문을 저작하기도 하였다.[18] 이 논문에서 튜링은 생물의 발생에서 새로운 형태가 생겨나는 과정인 '형태형성'을 모의 실험하였고, 지금은 당연한 유전자에서 태아가 발생하는 부분을 이 시기에 귀납적으로 예측했다. 또한 이 논문은 카오스 이론에서 중요한 '대칭 붕괴'와 '분기 붕괴'란 현대적 개념을 미리 파악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튜링은 생물학을 자신의 장기인 수학과 물리학, 화학을 통해 설명하였고, 이로부터 비롯된 카오스 이론의 주요 영역을 예측할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천재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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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영국 보스엄에서

2.3. 최후 그리고 복권


튜링의 업적과 비범한 능력과 달리 말년은 좋지 않았다. 전쟁을 치르고 본래 학자의 생활로 복귀한 튜링은 아널드 머리(Arnold Murray)라는 남자와 우연한 기회로 만나 사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앨런의 집이 도둑이 들었고[19] 아널드가 이 사건에 연루돼 있었단 게 밝혀진다. 상당한 배신감을 느낀 튜링은 경찰에 신고했고, 동료 과학자들에게 자신의 성적 지향을 말하고 다녔던 것처럼 경찰에게도 아널드와 자신의 관계를 진술했다. 그러나 앨런이 한가지 간과한 것이, 그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는 불법이었고 동성애자였던 튜링은 결국 법을 어긴 중범죄자로 전락하고 만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자신의 성적 지향보다는 능력과 인간성을 중요시하던 동료들로부터 차별 없는 대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것이 튜링에게는 되려 치명적인 비수로 돌아왔던 것이다. 튜링의 업적과 평소 행실과는 상관없이 당시 영국의 동성애 금지법에 의하여 앨런 튜링은 '''명백히 사회를 교란하는 범죄자'''로 낙인이 찍혔고, 대중과 사법부로부터 파렴치한 악인 취급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당시 서방의 자본주의 국가에 만연했던 매카시즘 열풍에 의해 소련측의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슬픈 누명까지도 쓰게 되었다. 튜링은 평소 체스나 보드게임을 매우 즐겼는데[20], 케임브리지 재학 중 튜링의 게임 파트너에 훗날 KGB의 거물 간첩이 되는 킴 필비를 비롯한 케임브리지 5인조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1급 전산학자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영국 정보부의 감시를 받아 일상이 자유롭지 못했는데, 이런 참사까지 겹치게 되며 튜링의 사회적 지위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결국 법원에서 동성애 혐의에 대해 위법 판결이 내려져 수감형 혹은 여성 호르몬 투여에 의한 화학적 거세형 중 하나를 택하도록 요구받는다. 뼛속까지 학자였던 튜링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수감을 거부하고 거세를 택하나, 그 영향으로 신체의 여성화가 진행됐다.
결국 튜링은 1954년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21][22]을 택하고 만다. 유서는 없었다. 튜링이 청산가리가 주사된 사과를 깨물어먹고 사망했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실제 사망 현장에 반쯤 깨문 사과가 있긴 했으나, 사과를 반만 먹는 건 앨런의 평소 습관이었으며 그 사과에 청산가리가 주입되어 있었단 명백한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23]
일각에서는 앨런의 사망이 자살이 아닌 사고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전문가 Jack Copeland에 따르면, 튜링은 사과를 다 먹지 않고 반쯤 남겨둘 때가 많았고, 사망 전 책상에 쪽지를 남기긴 했으나 이는 유서가 아닌 Bank Holiday라는 휴일이 끝난 후 할 일을 적어놓은 메모였다. 심지어 앨런은 사건 발생 4일 전 티 파티를 열었고, 앨런이 아주 무난해 보였다는 앨런의 친구(로빈 갠디)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검시관은 '제대로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에서의(while the balance of his mind was disturbed) 자살'이라며 제멋대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따라서 앨런은 초기 앨런의 어머니의 주장대로 # 자신의 연구실에서 화학 물질 관련 실험[24]을 진행하던 도중 사고로 사이안화수소를 흡입해 사망한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25] # 하지만 이 또한 유력한 가설 중 하나일 뿐, 앨런의 자세한 사인은 지금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26]
튜링의 부고 소식은 단지 영국의 신문지에 조그마하게 '천재 과학자의 비참한 죽음'이라고 기사 하나 난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세계에서 손꼽히는 석학이었던 은사의 제안을 거부하고 조국으로 돌아와, '''세계대전의 종전을 2년이나 앞당기고, 1400만 명의 목숨을 구해내고, 컴퓨터의 개념을 창시한 젊은 천재'''의 삶은 초라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안타깝게도 사망한 이후에도 튜링에 대한 대우는 오랫동안 처참한 수준이었다. 생전 수많은 장병의 목숨을 지켜내고 조국을 수호하는데 일조한 전쟁영웅이자 뛰어난 학자였던 튜링의 업적은, 20세기의 영국인들에겐 그의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동성애 행각에 비하면 휴짓조각만도 못한 것이었다.[27]
이렇게 허무하다면 허무한 죽음과 함께 그의 존재는 서서히 잊히는가 싶었으나, 2000년대성소수자 인권 신장 운동과 함께 튜링에 대한 사죄 청원 운동이 시작됐고 잊혀 가는 튜링에 대한 억울한 과거 영국의 부당 처벌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노동당이 집권했던 2009년에 고든 브라운 총리는 '''튜링이 받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정식으로 사죄'''하였다. 영국 우체국은 2012년 2월에 발행할 우표에 담을 '위대한 영국인 10명' 가운데 앨런 튜링을 포함했다. # 성문법상 범죄자였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또 그의 위대한 업적에 좀 더 비중을 두면서 반세기 만에 명예를 회복한 것이다.
한편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을 튜링의 해로 만들려는 캠페인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 하원은 이런 움직임에 찬물을 제대로 부어버렸는데, 2월 6일 영국 하원에 상정된 앨런 튜링에 대한 국가적 사죄와 사면 결의안이 부결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보수당을 중심으로 한 데이비드 캐머런 내각 입장에서는 튜링에 대한 사면이 동성애에 대한 용인으로 비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튜링에 대한 사면을 거부하는 게 아니냐라는 해석이 나왔다.[28]
하지만 2013년 12월 23일, 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수만 명의 식자층의 튜링 복권 청원이 접수되면서 결국 여왕 특별 사면령으로 '''튜링이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 사후 59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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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링 메모리얼의 모습. 프라이드 플래그로 장식되어 있다.

2.4. 성격


기행을 자주 일삼는 성격이었다. 한 예로 2차 대전 당시 정보부에서 근무할 때, 동료들이 자신의 머그컵을 자꾸 사용하는 것에 짜증이 났는지 머그컵을 쇠사슬로 라디에이터 같은 곳에 묶어놓았다. # 또, 봄철이면 꽃가루를 조심해야 한다며 방독면을 쓰고 자전거로 출근하거나, 시골길을 마구 뛰어다니는 등 종종 괴짜같은 행동을 많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성적(Introverted)인 반면에 집돌이는 아니었어서[29] 나이에 비해 젊은 육체를 지니고 항상 운동을 하는 스포츠맨이었다. 특히 마라톤에 엄청난 소질이 있었고, 한 번은 차 기다리는 게 귀찮아 '''50킬로미터(!!!)'''를 뛰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학과 과학 쪽으로 빠지지 않았다면 마라톤 선수가 됐을 거란 의견도 있다. 또,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대중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굉장히 위트있고, 재미있고, 심지어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에니그마 해독 당시 팀 멤버였던 올리브 베일리는 "앨런은 좋은 유머 감각을 가진 사람이자, 나와 잘 지낸 동료였다."고 회상했다. # 또 다른 앨런의 동료 도널드 미치에의 딸 수잔은 "내 아버지(도널드)는 단 한 번도 앨런이 거만하다거나, 비호감이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항상 앨런에 대해 긍정적인 말만 하셨다."고 피력했다. # 결론적으로 '''실제 앨런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 나온 자아도취형 꼴불견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2.5. 어록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 밖에 내다보지 못하지만, 그동안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건 안다.''' [원문]

— 앨런 튜링,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 계산 기계와 지능> (1950)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이 미래에 쓰일까봐 두렵다네.'''

'''튜링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튜링은 남자와 잤다.'''

'''그러므로, 기계는 생각할 수 없다.'''[30]

'''고통을 담아(Yours in distress),[31]

'''

'''앨런이.'''

— 동성애 혐의의 유죄 판결이 나기 직전, 친구 수학자 노먼 로틀레지에게 보낸 편지 중[32]

'''나는 이번 세기의 말 즈음에는 사람들의 말과 인식이 확연히 바뀌어, 기계라는 것을 평가할 때 기계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여담


  • 루머가 정말 많다. 대표적으로는 앨런이 극단적인 여성혐오자였다는 루머가 있는데, 사실무근이다. 당시 게이에 대한 편견으로 퍼진 잘못된 이야기이며 스톤월 항쟁 이후 여성운동과 퀴어운동이 노선이 동화될려고 하자, 호모포비아 진영에서 게이는 여성혐오자라는 가짜뉴스를 대대적으로 퍼트렸던 1970년대 즈음에 지어진 얘기다.
  • 한때 튜링이 베어 문 사과 모양에서 애플의 사과 로고가 만들어졌다는 속설도 있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애플社는 물론이고 애플 로고의 디자이너도 앨런 튜링과 애플의 로고는 전혀 관계없다고 밝혔다.[33] 스티브 잡스 전기의 저자인 월터 아이작슨은 딸에게 이 속설을 듣고 직접 잡스에게 디자인의 유래에 대해 물어봤다는데, 잡스가 "그런 것까지 고려하였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애플社 명칭의 유래와 로고 디자인의 계기는 그의 전기에 모두 서술되어 있으니 궁금하면 읽고 참고해 보자.
  • 1942년 에니그마 해독으로 씨름할 당시 앨런이 사용한 공책이 경매에 올랐고, 한화 약 10억 원이라는 어마무시한 금액에 낙찰됐다. #
  • 동료 수학자이자 암호학자였던 조안 클라크(Joan Clarke)와 결혼했다. 하지만 앨런의 성적 지향 때문에 얼마 못 가 파혼했다.
  • 튜링의 업적을 기려 컴퓨터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튜링상(A. M. Turing Award)이 1966년부터 수여 되고 있다. 또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을 구현한 자에게 수여 되는 뢰브너상(Loebner Prize)도 있다.
  • 푸른지식 그래픽 평전 시리즈로 "앨런 튜링: 생각하는 기계, 인공지능을 처음 생각한 남자"라는 그래픽 노블이 번역돼 있고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평전이 번역돼 있다. 또한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 앨런 튜링과 컴퓨터의 발명"이라는 책도 나와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읽어볼 것.
  • 50파운드(한화 약 8만 원)에 새겨질 인물로 선정되었다. #
  • 영국의 신스팝 그룹 Pet Shop Boys은 He dreamed of machines.를 발매해 앨런 튜링에게 바쳤다. #
  • 2012년 6월 23일, 앨런 튜링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구글에서는 기념 로고를 제작했다. 튜링 머신을 흉내 낸 일종의 게임이다. #

4. 대중문화


비범한 재능과 외골수 같은 성격, 컴퓨터과학의 아버지라는 명성, 군부 출신, 평생토록 모국에 헌신했으나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버림받은 것 등 온갖 특이한 이력들로 인해 앨런 튜링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창작자들에 사랑받아 재창작 되는 인물이 되었다.
  • WoD: 메이지 디 어센션에서는 트레디션 분파 버추얼 어뎁트의 일원이며, 최초의 전산망을 만들기도 한 버추얼 어뎁트에서 존경받았던 사람이다. 테크노크라시의 압박에 의하여 자살하자 그의 죽음을 계기로 원래 이터레이션 X의 분파였던 VA는 결국 반기를 들어서 트레디션으로 전향했으며, 본인은 비록 육신은 죽었을지라도 정신은 살아남아서 Digital Web에서 신과 같은 오라클로 승천하게 된다.
  • 유비소프트의 액션 게임인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도 등장. 성전기사단의 일원이었으나, 시대를 너무 앞서간 발명품인 로봇을 만들어내려다가 로봇에 의한 실업을 우려한 기사단 상부의 저지를 받았다. 하지만 튜링은 상부의 지령을 무시하고 연구를 계속했고, 결국 성전기사단은 자살로 위장하여 튜링을 살해한다.
  • 메탈기어 솔리드 피스 워커에서도 언급된다.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와 인연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스트레인지러브는 극도의 남성혐오자임에도 불구하고, 튜링은 보통 남자들과 달랐다며 튜링의 천재성을 존경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실제 튜링의 성격으로 보면 그녀와 사이가 좋았을 리는 없을 듯하다. 허나, 위 에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 이름을 열거할 정도라면 성별을 떠나서 재능에 대한 점에서는 선입견이나 자기 고집은 과감히 접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적으로는 몰라도 공적인 인연은 상당히 강했을 것이다.
  •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에서는 영국의 테크진으로 등장한다. 높은 기술 등급과 핵, 미사일, 수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서 유니크 테크진 중 하나의 속한다.
  • 아웃라스트에서는 베르니케 박사와 함께 월라이더 개발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 바이오쇼크 2DLC인 미네르바의 동굴의 초반부 진행 시 찰스 밀턴 포터의 사무실에 들어가보면 튜링이 포터에게 나치를 막기 위한 협조를 요청한 문서가 놓여져 있다.
  • 할리우드에서 앨런 튜링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이 제작되었다. 2014년 초 크랭크인하여 영국에서는 11월, 한국에서는 2015년 2월 말 개봉하였다. 주인공 튜링 역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했으며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본작이 각색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앨런에 대한 왜곡과 날조가 심해 상당한 비판을 받은 작품이다.

5. 관련 항목



[1] 사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다른 이론들이 있다[2] 메카시즘의 광풍이 막 지난 1970년대, 스톤월 항쟁 이후 퀴어 운동과 여성 운동 진영이 힘을 모으기 시작하자, 호모포비아나 기득권 층에서는 이에 대해 우려하며 여성 내 게이혐오나 게이는 여성혐오자라는 일반화를 퍼트리곤 했다. 튜링 외에도 당시에 피해자들이 꽤나 있었다.[3] 튜링이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공산주의를 천명한 적은 없고, 설령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그것이 차별의 이유가 될 순 없다.[4] 16살 때 학교 수학 선생님이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으니 알아서 스스로 공부하라고 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선생님이 앨런의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5] 애초에 학교와 선생님이 존재하는 이유도 가르치기 위함인데, 학자도 아닌 것이 학교에 와서 기존 공식은 내팽개친 채 새로운 풀이법을 고안하고 있으니..[6] 앨런의 첫사랑이었다. 초상화 이미지[7] 일찍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을 것이다. 모컴 또한 얼마나 똑똑한 친구였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8] 모컴의 사망 소식은 앨런에게 굉장히 큰 비애감을 안겨줬다고 한다.[9] 앨런은 모컴의 어머니 프랜시그 모컴에게 위로의 편지를 전했으며, 공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만큼 뛰어나고 매력적인데 겸손하기까지 한 친구는 또 없을 겁니다. 전 (그 친구가 소개해 준) 천문학과 같은 것들, 그 친구와 함께 공부한 것들에 흥미를 느꼈으며, 그 과정에서 그 친구도 조금은 저와 같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생략)"[10] 또 다른 편지에서는 이런 말과 함께 안타까움을 전했다. "저와 모컴은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겁니다.. (중략) 모컴이 아닌 다른 친구를 사귀기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모컴은 다른 애들을 너무나도 ''평범하게(ordinary)'' 만들었거든요." #[11] 첫 입학 시험에서 바로 케임브리지 대학에 합격. 하지만 장학금을 타지 못했기에 재시험을 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12] 블레칠리 파크로도 불린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때 앨런과 앨런의 동료들이 사용했던 작업실이 생생하게 재구성 돼 있다. 예약하면 방문도 가능한데, 입장료는 성인 기준 약 3만 원이다. 자세한 정보[13] 폴란드 정보부가 개발한 에니그마 해독기인 봄비(Bomby) 해독기에서 따온 이름으로, '봄비'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암호를 해독할 수 있도록 개량했다.[14] 이후 개발된 프로그래밍 가능 전자 컴퓨터 콜로서스의 기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15] 앨런은 논문에서 인공지능 대신 기계 지능이란 단어를 썼다.[16] 체스, 언어 학습, 암호학 등의 분야에 사용될 것이라 예언했다. 암호학은 제2차 세계 대전 시절 에니그마를 해독하며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예측한 것으로 보인다.[17] 이 논문에서 최초의 프로그래머였던 에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의 이름을 여러 번 언급했다. 물론 다 해석 기관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서였지만.[18] 사실 앨런은 생물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앨런이 발표한 암호학 논문과 생물학 논문의 수가 같을 정도였다.[19] 앨런의 편지 내용에 따르면, 도둑 맞은 물건 중 특별히 귀중한 물건은 없었다고 한다.[20] 이 때문인지 Turochamp란 체스 알고리즘을 데이비드 챔퍼나운과 함께 짜기도 했다. 하지만 알고리즘이 너무 복잡하여(..) 컴퓨터 상에선 실행이 불가능했다. 앨런은 그 대신 동료를 앉혀 놓고 직접 알고리즘을 따라 게임을 진행했는데, 모든 동작을 고려해야 했기에 한 번 말을 놓는 데까지 약 30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도도 결국 알고리즘을 사용하지 않은 동료에게 승자의 자리를 내주며 끝이 났다(..).[21] 검시관이 남긴 기록을 제외하고는 자살설을 뒷받침해 줄 증거가 없기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 검시관이 기록한 증거도 옳다고 볼 수는 없는데,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글 참고.[22] 많이들 앨런이 여성화되어가는 본인의 몸에 좌절감을 느껴 자살을 택했을 것이라 추측하지만 이는 사실이라 볼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앨런은 오히려 재밌는 농담을 치며 호르몬 투여 시기를 꿋꿋하게 잘 넘겼다고 한다. 또, 말도 안 되는 처벌과 공판이라며 주변인들에게 마구 재판 결과를 까고(...) 다녔으며, 법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노르웨이로 몰래 여행을 가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했을 때, 차라리 반항심을 느끼면 느꼈지 본인을 자살로 몰고 갈 정도의 좌절감을 느꼈다고 보긴 어렵다. #[23] Hodges, Andrew의 책 Alan Turing : the enigma (1983) 448쪽[24] 청산가리를 이용해 금을 녹이는 실험을 진행한 것으로 추정. 평소 앨런이 자주 하던 실험이었다.[25] 실제 사망 현장을 방문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연구실에서 청산가리 냄새가 아주 강하게 났다고 한다.[26] 가족들은 사고사라고 하지만, 튜링의 해외 탈출을 두려워한 당시 영국 정보부가 암살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도 종종 나돈다.[27] 다만 튜링의 체포 당시에는 아직 튜링의 업적 대부분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튜링의 작업내용 상당수가 아직 국가기밀이었던 것도 있고, '컴퓨터'라는 물건의 존재 자체가 생소했던 시기였던 만큼 튜링의 업적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뿐이었고, 결국 튜링의 체포는 당시 대중들에게는 그저 '명문대 어느 교수가 일으킨 스캔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28] 그런데 웃기게도 튜링에 대한 사죄와 사면 결의안을 부결시킨 영국 하원이 2013년 2월에 동성결혼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동성애 지지로 인해 표심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그냥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거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29] 사실 내향적, 내성적인 것과 운동과는 별 관련이 없다. 예를 들어 내성적이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단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운동 분야에 엄청난 단련을 해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사람들은 널렸기 때문. 조용하고 내향적이면 운동도 안 좋아할 것이다는 생각은, 확률적으로는 더 그럴 수 있어도 실제와는 맞지 않는 잘못된 편견이다.[원문] We can only see a short distance ahead, but we can see plenty that needs to be done.[30] '튜링이 남자와 잤다'를 영어로 Turing lies with men으로 쓰는데, 여기서 lies를 자다와 거짓말하다의 중의적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언어유희.[31] 영어 편지에서 마칠 때 쓰이는 "Yours truly", "Yours sincerely" 등의 맺음말을 비튼 것.[32]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 앨런 튜링 역으로 출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낭송한 편지 전문이 있다.[33] 초기 애플의 로고는 오히려 아이작 뉴턴의 사과를 연상케 하는 그림이었다. 애플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