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웨이트/역사
1. 고대 ~ 쿠웨이트의 성립까지
쿠웨이트는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꼽히는 수메르부터 시작해서 고대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신 바빌로니아를 거쳐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 파르티아, 사산 왕조를 거쳐 이슬람 제국시대인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를 맞이한다. 따라서 현대의 국가들 중 쿠웨이트 지역을 지배했던 가장 오래된 국가를 굳이 꼽자면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인 이란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는 엄청나게 많은 나라들을 거쳤다고 여겨지지만 별 의미가 없는게, 쿠웨이트는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곳이라 정주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쿠웨이트는 전국토가 거의 사막이나 다름없어 농사를 짓는게 거의 불가능해 정주민이 거의 없었다. 의외로 비슷한 사막지대라 생각하기 쉬운 이라크 같은 경우는 경작 가능 면적이 800만 헥타르가 넘으며[1] , 지금도 500만 헥타르에서 농사가 지어지고 있어 충분한 인구를 지탱해온 것과 비교된다. 다만 쿠웨이트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긴 한지라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던 곳은 아니었던듯 하다.
아무튼 쿠웨이트가 과거에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의 지배를 받은 건 맞긴 하지만, 8세기에서 13세기까지에 불과하고 이후 몽골,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된다. 하지만 당시 역사가 명확하지 않은 점을 볼 때 정식으로 이라크의 영토라고 할 수는 없고, 느슨한 종속관계 정도였던 듯하다. 어차피 이 당시 쿠웨이트에 살던 사람들은 제대로 된 정착민이 아니라 사막의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쿠웨이트 민족은 17세기 이후에 이주해온 아니자족(عنزة, `Anizzah)[2] 이 중심으로 사실상 주인없는 땅에 정착한 것과 같다(당시 이 지방의 지배자였던 오스만 제국이 이들의 정착을 인정했다). 원래 이들은 고대 로마 제국 시절부터 향신료 등을 거래하며 동서교역에 종사하는걸로 먹고살았는데, 아시다시피 17세기에 이르면 대항해시대가 열려 아시아-유럽간에 직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자 중간상인이었던 이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유목만으로 먹고살자니 아라비아 반도가 몽골같은 초원지대도 아니었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정착하려하니 이미 좋은 땅은 다른 민족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남은건 쓸모없는 사막지대 뿐이었다. 다만 쿠웨이트 지역은 물고기는 많이 잡혔는지라[3] 여기에 정착했고 그래서 초기 정착된 쿠웨이트 마을은 가난한 어촌이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중반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를 사실상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중동-인도간에 교역량이 크게 늘었는데 이 때 쿠웨이트인들도 원래 장기를 살려 교역에 적극 나섰고 그래서 18세기 쿠웨이트는 중동의 교역 중심지로 변화하였다.[4]
지금의 정착된 쿠웨이트 지방은 이 아니자족이 발전시킨 것으로 그 전까지는 떠돌이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던 지역에 불과했다. 때문에 이라크와는 민족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이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애당초 쿠웨이트인은 이라크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어차피 이라크도 이 때는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였으니까. 그래서 쿠웨이트인은 이라크인과는 전혀 민족적, 문화적 동질감을 갖지 않는다. 현재 쿠웨이트의 사바흐 왕조(آل صباح)는 이 아니자족의 지도자 가문 출신이다. 1752년 쿠웨이트시의 지도자 였던 사바흐 1세가 바스라를 다스리던 오스만 제국의 총독에게 찾아가 오스만 제국 술탄에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정당한 지배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현재 쿠웨이트 정부에서는 이 때부터 독립국이었다고 주장하나 물론 오스만 제국에서는(그리고 현대 학자들도) 자치령 중 하나로 보았다.
2. 쿠웨이트의 독립 ~ 현대
이렇게 쿠웨이트는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이 되었는데 19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이 행정구역을 현대적으로 정비하면서 행정구획을 에얄레트(Eyalet)에서 빌라예트(Vilayet)로 바꾸면서 쿠웨이트도 바스라 빌라예트에 속하게 된다. 빌라예트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오스만 제국 문서 참고. 다만, 이것도 행정구획 상으로만 설정된 것뿐 실제로는 여전히 자치령으로 오스만 제국의 관리는 쿠웨이트에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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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한 쿠웨이트의 초대 국왕 무바라크 알 사바흐)
그런데 비록 속령이었지만 자기네들끼리 살아온 쿠웨이트인들이 바스라령에 속하게 되니 당연히 불만이 없을리 없었는데, 이 때 등장한 것이 오늘날 쿠웨이트 사람들로부터 '''대왕이자 국부로 불리는 무바라크 알 사바흐'''(الشيخ مبارك بن صباح الصباح)였다. 무바라크는 쿠웨이트의 유력 부족인 사바흐 가문 출신으로 통치자가 되기 전에는 오스만 제국의 기병장교로 공도 세워 작위도 받고 훈장도 받았다. 그러다가 1896년 계승 과정에서 이복형을 죽이고 쿠웨이트의 통치자가 된다.
무바라크는 1899년 이란에 주재하던 영국 대령에게 찾아가 영국의 보호령이 될 테니 독립을 보장해 달라고 했다.[5] 구체적으로는 영국 정부의 승인 없이 외국의 대표자를 받아들이거나 영토를 매도하지 않겠다고 했다. 영국은 원래 쿠웨이트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6] 제 발로 보호령이 되겠다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는지라 콜.
이 협정은 원래 비밀 협정이었으나 쿠웨이트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높아지자 오스만 제국에서도 이 사실을 알아차렸고 괘씸해 했지만, 20세기 초의 오스만 제국에는 골치아픈 문제거리가 한 두가지가 아니라 그깟 변방의 조그만 속령 따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1913년 오스만 제국 - 영국 - 무바라크 3자간에 회담이 이루어졌는데 무바라크를 오스만 제국의 총독(kaymakam)으로 인정하고 쿠웨이트를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보나 실질적으로 독립적인 지역으로 인정해주고 1899년 협정도 인정해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협정으로 오스만 제국과 쿠웨이트의 영역이 획정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이라크-쿠웨이트간의 국경이 된다.[7]
1914년 오스만 제국이 독일의 동맹국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오스만 제국과 싸워라! 그럼 독립시켜줄께."하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아랍인들의 반란을 유도했다. 무바라크도 여기에 적극 참여해 먼저 쿠웨이트의 국기부터 갈아치우고는[8] 바스라 속주를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을 쫓아냈다. 이 공로로 영국으로부터 '영국 보호하의 독립국'(Independent government under British protection)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게 중요한건 쿠웨이트는 영국의 우호국 대접을 받아서 영국 보호령이면서도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오히려 무기등을 지원 받는다. 영국이 전쟁때 이라크의 독립을 약속했으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질질끌다가 1932년 독립시켜주고 나서도, 이것저것 간섭하다 이라크인들의 반감이 높아져서 2차 세계대전 때 이라크가 추축국으로 참전한 것과 비교된다.
1920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당시 네지드 토후국)가 쿠웨이트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한 차례 전쟁을 치룬바 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쿠웨이트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경계한다. 원래 사우디아라비아[9] 도 쿠웨이트도 영국의 보호령이었으니 처음에는 영국도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쿠웨이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격을 받는 입장이었으니 직접 영국군을 보내는 대신 많은 무기를 쿠웨이트에 지원했다.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군사력보다 크게 열세인 쿠웨이트가 대등히 싸울 수 있었고, 나중에는 영국이 전투기와 군함 세 척까지 보내자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도 공격을 중단했다. 이후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1922년 영국의 중재로 전쟁이 종결된다. 참고로 당시 네지드 토후국의 수장인 압둘 아지즈는 쿠웨이트와의 분쟁이 끝난 뒤에도 적극적으로 영토확장을 하려고 1924년 트란스요르단(현 요르단 왕국)[10] 을 침공했다가 마침내 열받은 영국이 공군을 투입해 압둘 아지즈의 기병대가 박살났고 이후는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1961년 영국이 쿠웨이트를 완전히 독립시켜 주면서 현대의 쿠웨이트가 탄생한다. 다음해, 쿠웨이트의 독립은 아랍연맹과 UN의 인정을 받아 국제법적으로도 합법적으로 독립했다. 한편 쿠웨이트가 독립하자 이라크에서는 쿠웨이트가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며 군대를 보내려 했다. 이에 쿠웨이트는 영국에 도움을 요청해 영국이 항공모함까지 보내자 결국 이라크도 물러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자기네 영토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걸프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1990년에 이라크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실패로 막대한 국가 부채가 쌓여 있었다. 사담 후세인은 풍부한 석유자원을 갖춘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병합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걸프 전쟁을 일으킨다. 소국인 쿠웨이트는 그 간의 전쟁으로 실전경험이 풍부하게 쌓인 이라크 군에 순식간에 점령되고, 이라크에 병합되어 "쿠웨이트 주"로 편입되었으며, 당시 국왕이었던 자베르 3세와 쿠웨이트 왕가는 사우디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미국이 주도한 UN 다국적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이후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아랍 국가중에 유일하게 미국을 지지하면서 미국의 對이라크 공격의 전진기지로 활용되었다. 다만, 쿠웨이트도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후세인 정권이 무너질때까지는 미국을 지원하고 지지했지만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발을 빼고 이라크의 정치적 안정화를 지지했다.
[1] 바그다드 북부 쿠르디스탄 지역에 거대한 경작지가 있다. 비교를 위해 한국의 총 경작지는 약 200만 헥타르가 좀 넘었으나 계속 감소추세라 21세기에는 170만 헥타르 이하. 참고로 이라크 북부가 바로 세계적인 곡창지로 유명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이다. 이 막대한 농업 생산량을 바탕으로 인류 초기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전하게 된다. 즉, 이라크 민족은 원래부터가 농경민족이었다.[2] 일종의 유목부족 연합체로 크게 시리아를 중심으로 살던 아니자족과 사우디 아라비아 반도 중앙 나지드(نجد)라 불리는 곳에 살던 아니자족이 있다. 이들이 18세기 쯤 동쪽으로 이주하면서 다시 갈라져 하나는 쿠웨이트에 정착한 바니 칼리드(بني خالد)족이고, 다른 하나는 바레인에 정착한 바니 우트비(بني عتبة, 우툽이라고도 한다)족이다. 현 바레인의 왕조인 할리파 왕가도 여기 지도자 가문 출신이다. 반면에 이라크 민족은 고대 바빌론, 크테시폰부터 이슬람 이후 바그다드와 바스라를 중심으로 정착해 살던 정주민들로 문화도 관습도 많이 다르다.[3]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이 양분이 풍부한 토사를 쿠웨이트 앞바다에 흘려보내 플랑크톤이 번성했고, 이를 먹고사는 어패류도 크게 번성해 어업이 발달했다. 지금도 쿠웨이트 식단에는 해산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특히 새우가 엄청나게 잡히는지라 새우요리를 많이 먹는다. 참고로 '이슬람교는 비늘 없는 생선 못먹는다던데?'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하나피파 이야기고 쿠웨이트의 주류를 차지하는 말리키파는 대부분의 어패류를 식용으로 허용한다.[4] 인천이 서울의 교역항으로 발전한 것처럼, 바그다드, 바스라, 알레포로 들어가는 인도산 물품이 대부분 쿠웨이트를 거쳐 지나가게 된다.[5] 지금은 석유로 먹고 사는걸로 유명하지만 쿠웨이트인들은 원래 유목민족이라 쿠웨이트에 정착하기 전부터 동서 교역로를 잇는 상업의 전통이 있어서, 18세기부터 이미 아라비아 반도의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영국의 동인도회사와도 거래를 많이해 동인도회사의 인도-동아프리카-쿠웨이트의 삼각 무역거점이 되었다. 물론, 사막인 쿠웨이트에 뭐 털어먹을게 없었는지라 동인도회사도 나쁜짓 안하고 순수하게 교역만했다. 이렇게 쿠웨이트인에게 영국은 아주 먼나라는 아니었기 때문에 찾아갔을 것이다.[6] 쿠웨이트에서 석유가 발견된건 1937년의 일이다.[7] 단 이 때 정해진 국경선이 정식으로 쿠웨이트의 영역으로 획정되는 것은 1923년이며, 최종적으로 확정되는것은 독립한 이라크가 국제연맹에 가입하면서 이 국경선을 기준으로 이라크의 영토를 책정한 1932년이다.[8] 이때까지 쿠웨이트의 국기에는 커다랗게 터키 상징이 있고 옆에 아랍어로 조그많게 쿠웨이트라 적혀있었는데, 1915년부터 터키 상징을 지우고 아랍어로 크게 쿠웨이트라고만 써놨다. 이걸 계속 쓰다가 너무 밋밋했던 모양인지 1961년 완전 독립하면서 지금의 국기로 바꾼다.[9] 이 때는 아직 네지드 토후국이었다. 1921년 네지드 술탄국이 되었고, 1925년에 네지드-헤자즈 왕국이 되었다가 1932년 최종적으로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된다. 1915년 다린조약에 의해 사우드 가문은 영국의 보호를 받고 영토를 확정했다. 그대신 영국보호령을 침범하지 않고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영국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10] 이 때 아랍은 오스만 제국이 1차세계대전의 패배로 물러나고 영국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로 불리던 시절이라 요르단도 영국이 관할하는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