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급 중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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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에 찍힌 1번함 포틀랜드(CA-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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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찍힌 2번함 인디애나폴리스(CA-35)
1. 제원
2.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한 미 해군의 중순양함. 1932년에 건조되었으며 1번함 포틀랜드(CA-33)와 2번함 인디애나폴리스(CA-35) 총 2척이 건조되었다. 2번함 인디애나폴리스는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으로 유명하며, 1번함 포틀랜드는 전후생존함이다.
3. 설계
노스햄프턴급 중순양함의 후계함으로서 건조되었으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벗어나지 못한 시점이라 배수량은 10,000톤에 묶여있었다. 그러나 조약 제한보다 거의 1,000톤 가까이 가벼운 노스햄프턴급 중순양함과는 달리 거의 1만톤을 꽉 채워서 건조된 중순양함인 만큼 이전에 건조된 중순양함들보다 훨씬 두터운 장갑을 두르고 있었다. 미 해군이 처음 주문할때는 경순양함으로 분류되었으나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을 준수하기 위하여 중순양함으로 재분류 되었다. 최초 건조시에는 본래 1인치의 갑판장갑을 가지고 있었으나 별안간 장갑이 증설되었다. 탄약고 인근은 5인치의 장갑판을 두르고 비중요 구획은 3.25인치의 장갑을 두름으로써 집중방어구조를 달성했다.
미군이 이전에 건조한 다른 중순양함들처럼 8인치 55구경장 3연장 주포로 무장하였으나 세장비가 보다 긴 유선형 포탄을 발사할 수 있도록 개선되어 더 긴 사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함대의 기함으로 쓰일 것을 고려하여 건조되었기 때문에 제독과 참모진이 작전을 수행할 공간이 따로 주어졌으며 그 이외에도 기존 미군 중순양함들이 가지고 있던 각종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보다 우수한 설계를 가진 뉴올리언스급[2] 의 설계가 완료되었기에 포틀랜드급 대신 뉴올리언스급으로 건조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3척(뉴올리언스, 아스토리아, 미니애폴리스)는 뉴올리언스급으로 변경되고 남은 2척만이 포틀랜드급으로 완성되게 된다.[3] 배수량이 증가해서 기존의 중순양함들의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었으나 조약의 제약으로 다소 빡빡하게 만들다보니 거주성에서는 그리 좋은 소리는 못들었다.
4. 실전
4.1. 포틀랜드(CA-33)
산호해 해전에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요크타운의 호위함으로 참여하여 침몰한 렉싱턴급 항공모함 렉싱턴의 생존자 722명을 구출하였다.
미드웨이 해전에도 요크타운의 호위함으로서 참여하였다.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폭격대가 카가, 아카기, 소류를 불바다로 만드는 동안 습격해온 히류의 공격대를 다른 중순양함 빈센스, 펜사콜라와 저지했으나 결국 요크타운은 피격되었다. 이후에도 요크타운이 포기될 때까지 곁을 지키다가 구축함 5척이 구출해온 요크타운의 생존자 2,046명을 수용하고 하와이로 돌아가 잠수모함[4] 풀턴에게 넘겼다.
동부 솔로몬 해전, 산타크루즈 해전에도 참여하였다. 산타크루즈 해전에는 엔터프라이즈의 호위함으로 참가하였으며 일본의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 3발을 맞았지만 모두 불발이라는 기적같은 상황에도 직면한 적이 있었다. 이는 어뢰를 너무 가까이서 쏜 탓에 어뢰가 기폭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과달카날 전역에서는 미 해병대의 상륙지원을 한 것 외에도 과달카날 해전에 참여하여 활약했다. 초기에 일본의 구축함 이나즈마 혹은 이카즈치의 어뢰를 맞고 프로펠러가 손상되어 계속 우현으로 돌기 시작하였고 3번 포탑도 무력화 되었다. 그러나 계속 선회하는 와중에도 1, 2번 포탑으로 히에이를 포격하여 화재를 발생시켰고, 이는 결국 히에이의 명운을 갈랐다.[5]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지만 선회를 계속한 덕분에 히에이의 반격탄은 전부 빗나갔다고 한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선회는 멈추지 않았고 계속 돌면서 버려진 유다치를 6회의 일제사로 격침시켰다. 전투가 끝나고는 기어코 문제를 해결하여 자력으로 귀항하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키스카섬 공습에도 참여하여 포격을 실행하였고 길버트, 마셜 군도 전역, 뉴기니아 전역, 펠렐리우 전역에도 참여하였다.
레이테 만 해전에 제4순양함전대에 소속되어 참여하였다.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 투입되었다. 포틀랜드는 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에게 명중탄을 여럿 내면서 피해를 주었다.
이후에도 필리핀 탈환전 , 오키나와 전투 등 거의 모든 전투에 참여한 엄청난 수훈함이다. 전후까지 생존하여 1959년까지 예비전력으로 보존되었다가 정식으로 완전히 퇴역하여 해체되었다.
유키카제나 엔터프라이즈가 행운함으로 유명하지만, 전황이 완전 꼬이지 않는 이상 호위함들과 함께 교전거리 외에 있는 항공모함, 공격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구축함과 달리 실제 펀치를 주고받는 역할인 동시에 중요 전술목표이기도 한 중순양함이면서 유명한 격전에 다 참전하고도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들에 못지않는 행운함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4.2. 인디애나폴리스(CA-35)
인디애나폴리스도 포틀랜드 못지 않게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태평양 해전의 중요한 분수령에서는 한번도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4.2.1. 전간기
1932년 11월 15일에 취역하고 나서 반년이 조금 넘게 지난 1933년 7월 1일, 기함으로 설계된 인디애나폴리스가 처음으로 맞이한 지휘관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였다. 루즈벨트는 1살때부터 매년, 아버지가 지었던 캐나다 캄포벨로(Campobello) 섬의 저택에서 여름을 보냈는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여름 휴가를 보내는 별장으로 사용했다. 인디애나폴리스는 처음으로 맞이한 사령관을 메인 주에서 섬까지 태워다주게 된다.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 해군 함선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함생을 보냈던 배의 비범한 시작이었다.
그해 9월 6일에는 클라우드 스완슨(Claude A.Swanson)[6] 이 해군 장관직에 임명된 직후, 태평양 함대를 처음으로 점검하러 가는 여정을 함께 한다.
그리고 나서 11월 1일이 되자,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 주둔하는 제 1 정찰함대(Scouting Force 1)의 기함을 맡아 평범한 기함으로 돌아가나 했으나...
다음해가 되자, 파나마 운하를 건너 1934년 4월 9일에 뉴욕에 도착했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해군 관함식에서 사열을 진행하기 위해 승함하는 배가 된다.
1936년 11월 18일에 세번째로 루즈벨트를 태워서 남아메리카 순방을 함께 하며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를 방문한다. 11월 26일에 루즈벨트와 함께 적도제 행사를 지내기도 했다. 미국에는 12월 15일에 복귀한다.
전간기의 인디애나폴리스는 '''Navy One'''이었고, 주요 열강국의 히에이, 리나운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위상을 가진 배였다.
4.2.2. 진주만 공습 이후
전쟁이 시작되자, 캘리포니아에 주둔했던 인디애나폴리스는 피해를 입지 않은 중순양함이었고, 즉시 하와이로 전진 배치되어 렉싱턴의 호위함이 된다. 렉싱턴은 산호해 해전 이전까지 요크타운와 함께 뉴 기니 인근에서 일본 해군에게 미미한 피해를 입히는 항공작전을 진행했다.
인디애나폴리스는 작전 이후 샌 프란시스코로 와서 개장을 받고, 호주로 가는 호송선단을 호위한다. 그러나 그 동안 렉싱턴은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되고 만다. 지킬 주력함이 없어진 인디애나폴리스는 알류샨 열도 전역으로 재배치되고, 1942년 8월 7일에 키스카 섬을 포격한 것을 시작으로 다음해 8월 22일 애투섬을 탈환하면서 전역이 종료되는 1년간 북태평양에서 작전하게 된다. 그래서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역에서도 싸우지 않았다.
4.2.3. 5함대 기함
인디애나폴리스는 알류샨 열도에서 샌 프란시스코로 돌아와서 다시 개장을 받고, 1943년 8월에 태평양 중부 함대의 지휘관이 된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으로부터 함대 '''총기함'''으로 지명받는다. 같은 시기, 고속전함과 항공모함[7] , 지휘함[8] 을 기함으로 사용하던 다른 제독과는 달리, 스프루언스 제독은 중순양함을 기함으로 삼는 기행을 벌였는데, 인디애나폴리스로 고른 이유는 '''거기가 자기 고향이었다'''는 아주 당황스러운 것이었다.[9] 배는 하와이로 돌아오자마자 제독을 태웠고, 1943년 11월 10일에 진주만을 출항한다. 그 직후 타라와에 전개되어 있던 다른 배들과 랑데뷰하며 기함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고, 타라와 전투를 수행하며 지상 포격 임무의 주축이 된다.
다음해인 1944년 4월 29일이 되자, 태평양 중부 함대는 '''제 5함대'''로 재편되었고, 인디애나폴리스는 '''5함대의 초대 기함'''이 되어 사이판 전투, 필리핀 해 해전, 제2차 괌 전투에 참전하였다. 기함이었지만, 사이판과 필리핀 해에서는 다른 배들과 함께 대공 관제를 받으며 대공 전투를 수행했다. 수복한 괌에서는 오르테 반도의 미해병대 기지 국기 계양식에 스프루언스 제독이 참석하기 위해 아프라 항구에 입항했는데, 괌 수복 이후 처음으로 아프라 항구에 닻을 내린 미국 국적 배라는 기록을 남겼다. 반면 헤일스톤 작전처럼 마크 미처 제독이 지휘하는 5함대 예하 임무부대가 참여한 작전은 수행하지 않게 된다.
괌 전투 이후 스프루언스 제독은 안식년을 가지며 함대를 홀시제독에게 넘기고 진주만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 동안 인디애나폴리스는 중순양함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제독을 하와이로 태워다 준 다음,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개장을 받는다. 그래서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싸우지 않았다. 그 이후 복귀하여 펠렐리우 전투에서는 지상 포격 임무를 수행했고,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마크 미처 제독의 임무부대에 소속되어 항공모함을 호위한다.
이후 오키나와 전투를 위해 스프루언스 제독이 복귀하자, 다시 5함대 지휘관의 깃발을 올리고 기함이 되어 1945년 3월 24일부터 오키나와에서 상륙 준비 포격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인디애나폴리스는 카미카제에 당하고 만다. 3월 31일, Ki-43 하야부사 전투기 한 대가 급강하 폭격 코스로 내려 꽂혔다. 하야부사는 코스를 잘못잡아서 인디애나폴리스의 좌현 뒤쪽 바다에 쳐박혔으나, 장착하고 있던 폭탄을 적절하게 해제하였고, 폭탄은 연료탱크를 뚫고 들어가서 함체 바닥에서 폭발한다. 배는 좌현 뒤쪽으로 기울고, 스크류와 연결된 샤프트에도 손상을 입었다. 다행히 연료탱크의 구멍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 해군은 카미카제로 손상된 배를 다 고칠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았고, 인디애나폴리스는 수리를 위해 자력으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야 했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내려 '''구형 전함''' 뉴멕시코에 깃발을 올린다. 그러나 5월 12일, 뉴멕시코는 카미카제를 한번에 2연타를 맞고 화재가 발생했다.[10] 스프루언스 제독은 또 다시 기함을 옮겨야했다. 이제는 제 아무리 기함을 고르는 것이 제독의 특권이라 하더라도 참모들을 배려해서 기함을 골라야 했고, 결국 홀시처럼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를 기함으로 삼는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인디애나폴리스에 대하여 구형이고 비좁아서 별로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서도 츤츤대며 탔는데, 뉴저지는 사령관과 참모들을 위한 널찍한 방을 2개나 배정해주고 있어서, 참모들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4.2.4. 격침
더 이상 기함 임무를 수행하지 않게 된 인디애나폴리스였으나, 기함 임무를 수행하며 충분히 태평양 함대의 정예부대가 되어 있었다. 인디애나폴리스는 단독으로 극비 임무를 명받게 된다. 그것은 맨해튼 계획을 통해 개발된 원자폭탄 2발 중 우라늄-포신형 폭탄인 'The Little Boy'의 우라늄 내장재를 샌프란시스코로부터 티니안 섬까지 호위없이 전속력으로 순항하여 전달하는 임무였다.
여담으로 인디애나폴리스의 함장 찰스 B. 맥베이 3세 대령에게 화물 운송 명령을 전달한 사람은 바로 맨해튼 계획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윌리엄 파슨스 대령이었다. 파슨스 대령은 이때 멕베이 함장에게 1) 티니안 섬까지 최고속도로 멈추지 말고 항해할 것 2) 화물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말 것 3) 배가 침몰해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화물부터 구할 것[11] 4) 당신이 항해 일자를 단축할수록 이 전쟁도 단축됨 (...) 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맥베이 대령은 툴툴거리면서도 이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여 항해 신기록을 세우면서 최단시간에 티니안까지 가서 화물을 내려놓았다.
이후 인디애나폴리스는 다시 또 호위없이 극비리에 괌으로 갔고, 거기서 마침내 태평양 전쟁 내내 고생하다가 전역을 명받은 베테랑 승조원들을 대거 내리고 신병들을 태운다.
이제 인디애나폴리스는 세번째로 또 다시 호위없이 극비리에 오키나와에서 작전중인 올덴도르프 제독의 95 임무부대로 가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활동해야했으나, 일본 잠수함 이-58에게 발각되고 만다. 인디애나폴리스를 뉴멕시코급 전함 아이다호로 오인한 함장 하시모토 모치츠라는 즉각 어뢰 공격을 개시해서 명중시켰고, 인디애나폴리스는 12분만에 침몰되고 말았다. 자세한 내용은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 참조.
그 결과, 인디애나폴리스는 미해군의 역사를 통틀어 작전 중에 1척의 배에서 가장 많은 승조원이 전사한 배로 기록을 남긴다.[12] 일리노이주의 미국해군신병훈련사령부의 '''수영장'''에는 USS 인디애나폴리스의 이름이 붙어있다.
또한 미 해군의 역사를 통틀어서, 적함에 의한 격침을 이유로 함장이 군사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유일한 배라는 수치스러운 기록의 주인공이 된다.
4.2.5. 복권
1985년 8월 2일,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와 전몰자를 위로하는 기념물이 인디애나폴리스 시에 건설된다. 작은 기념 사업이었지만, 이로 인해 40년전에 격침된 수백척의 배중 하나에 불과했던 인디애나폴리스와 관련된 내용이 가십기사로 신문과 잡지에 간략하게 소개된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1996년이 되자 그 기사를 읽은 한 초등학생에 의해 미국 전역의 여론을 뒤흔드는 초대형 스캔들로 번진다.
이후, 맥베이 함장이 무죄임을 확인하는(exonerated) 법안이 2000년 10월 상원에서 통과되었고,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한다. 미 해군은 선임자들의의 결정이라는 이유로 형식적인 반발을 하나, 해군장관이 2001년 7월에 맥베이 함장의 불명예 기록을 모두 삭제하라고 명령하면서 인디애나폴리스와 맥베이 함장의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모두 사라졌다. 매년 전우회를 열던 인디애나폴리스의 승조원들은 이 조치를 환영했고, 인디애나폴리스의 파란만장한 함생도 진정한 의미로 막을 내렸다
복권된 이후, 2007년 격침된 인디애나폴리스를 추모하는 기념관이 인디애나폴리스 시에 건설되었고, 2011년에는 고속도로 중 하나의 명칭이 'USS 인디애나폴리스 메모리얼 하이웨이'[13] 가 되었다. 복권된 직후인 2001년부터 미해군에 의해 인디애나폴리스의 침몰한 선체를 찾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민간인인 억만장자 폴 앨런의 요트에 의해 2017년 8월 18일 발견되었다. 인디애나폴리스의 잔해는 심해 5500미터에 가라앉아 있었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아서 배의 이름이 적힌 것이 여전히 남아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미 해군은 인디애나폴리스의 잔해가 중국 영해 근처에 있어서 부자들이나 악의를 가진 군 잠수함, 혹은 정밀기기를 만들기 위해 도굴하는 기업에게 훼손될 것을 우려했고, 폴 앨런과 합의하여 인디애나폴리스의 침몰 좌표를 극비에 부치게 된다.[14]
5. 매체에서의 등장
- 네이비필드에서 미국 2차 중순양함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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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함소녀에 의인화 되어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포틀랜드(전함소녀), 인디애나폴리스(전함소녀) 항목 참조.
- 월드 오브 워쉽에서 미국의 7티어 프리미엄 순양함으로 인디애나폴리스가 등장. 동티어 정규순양함인 펜사콜라급에 비해 전타시간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동등 이상의 성능을 보였으나 펜사콜라가 버프를 받아서 쓸만해진 이후에는 평이 바닥을 찍었다. 이때문에 워게이밍에서도 꾸준히 버프를 해주고 있기는 한데 좋은 소리는 못듣는 중. 그래도 이후 미 순양함의 운용법과는 비슷한 편이라 미 순양함에 익숙하다면 쓸 만하다. 펜사콜라의 운용이 상당히 이질적이었던 것.
콘솔 버전인 월드 오브 워쉽 레전드에서도 인디애나폴리스가 6티어 프리미엄 순양함으로 나온다. 레이더를 제외하면 6티어 정규순양함인 뉴올리언스와 큰 차이가 없어서 인기는 없는 편이다.
- 벽람항로에서도 포틀랜드와 인디애나폴리스가 등장한다. 포틀랜드는 2호기인 인디애나폴리스를 끔찍히도 아끼는 시스콘 캐릭터로 나오며,[15] 인디애나폴리스는 역사상에서 일본에 떨굴 핵을 운반했던 걸로 알려져서인지 핵탄두를 타고 나온다. 일본 서버에서 수정된 팻 맨 가구와는 달리 일러스트의 핵탄두가 그대로 나오는 게 특징이었으나 2017년 11월 16일부로 수정되어 핵폭탄 마크가 고양이 마크로 변경되었다. 참고로 레어도는 포틀랜드 쪽이 레어로 등장하여 레어도는 동생보다 더 낮지만 포틀랜드와 인디애나폴리스 둘 다 성능이 준수하여 키울만 한 함선이기는 하지만 포틀랜드가 개장하면 SR 등급에 올라서면서 굉장히 훌륭한 성능이 되고, 벽람항로에서 전열에 중순양함을 두 척 배치하는 건 비효율적이라서 웬만하면 포틀랜드를 쓰는 것이 좋다.
- 어비스 호라이즌에도 포틀랜드와 인디애나폴리스가 중순양함으로 등장한다.
- 함명인 USS INDIANAPOLIS를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한 영화가 제작되었다. 2016년 개봉. 주연은 니콜라스 케이지.
- 워 썬더에서 1번함 포틀랜드가 등장한다
[1] 메트릭톤 기준, 숏톤으로는 9,950톤, 롱톤으로는 9,800톤[2] 당시에는 터스칼루사급으로 예정됨[3] 덕분에 뉴올리언스급과 포틀랜드급의 헐넘버가 교대로 나온다.[4] Submarine tender. 잠수함에게 보급을 실행하는 함으로 꽤 크다.[5] 히에이에서 화재가 발생했기 때문에 시야가 불량한 야간전의 특성 상 좋은 타겟이 되었다. 히에이는 결국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미군 함선들의 집중사격으로 큰 손상을 입어 포기되었다.[6] 1933년에 장관직을 맡아, 1939년에 죽을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7] 홀시는 항공모함(CV-6 엔터프라이즈. 2차대전 미 항공모함의 상징과도같은 그 항공모함이다.)과 아이오와급을 기함으로 삼았다.[8] 토마스 킨케이드는 지휘함인 AGC-9 와사치(wasatch)에서 지휘했다. 한편 여기엔 킨케이드의 눈물겨운 사연이 담겨 있다. 당시 킨케이드의 7함대는 오늘날의 7함대와 아주 다르게 약소한 육군 지원용 함대였다. 그래서 구성도 전함과 순양함, 구축함 위주로 되어있었고 상륙 준비를 위한 포격이 주 임무다 보니 대부분이 구형이었고 그나마도 다른 함대로 수시로 전출을 갔다. 능력이 있네 없네 수시로 닦달하며 비위 맞추기 힘든 맥아더 밑에서 구형 전함을 하나라도 지키기 위해 노력한 킨케이드는 애시당초 넉넉한 시설을 갖춘 신형 고속전함이나 항모를 기함으로 선정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9] 스프루언스는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으나, 유년기와 학창시절은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보냈다. [10] 참모들이 제독이 무사한지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수병들과 함께 소방호스를 들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11] 함장을 포함해 전 승무원의 생명보다 화물이 우선이라는 얘기를 했다는 설도 있다.[12] 정박중인 배를 포함하면, 진주만 공습 당시의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애리조나가 가장 많이 전사하였다.[13] 인디애나폴리스의 순환도로인 주간고속도로 제465호선에 붙었다.[14] 실제로 중국은 이런 짓으로 악명이 높은데 심지어 인도네시아까지 가서 자바 해전에서 격침된 연합군 군함들까지 털어갔다.[15] 일러스트에서부터 인디애나폴리스가 표지인 책을 들고 나오며 대사 또한 귀여운 인디쨩이라고 닉네임을 붙여서 말하는 등 전형적인 시스콘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리고 대사에 따르면 저 책은 얇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