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기(항공모함)
1. 제원
2. 개요
일본 제국 해군의 정규항공모함 아카기(赤城, 적성).
이름은 군마 현에 있는 아카기 산(赤城山)에서 유래했으며[1] 아카키(赤城, 적성)으로 명명되었다. 본래 아마기급 순양전함의 2번함으로 건조하고 진수되었으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피하기 위해 항공모함으로 개조했다.
3. 함생
3.1. 탄생과 변화
아카기는 본래 일본 해군의 88함대 계획에 따라 16.1인치(410mm) 45구경장 2연장 포탑 5기로 총 10문[2] , 배수량 41,000톤, 속력 30노트 제원의 아마기급 순양전함으로 건조되던 것이었다. 1919년 7월 17일, 아마기급 순양전함의 1번함과 2번함에게 각각 아마기, 아카기라는 함명이 주어지게 되면서 함선으로써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이후 1920년 12월 6일, 구레 해군 공창에서 아카기의 기공 작업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완성 이전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의 조약을 피하기 위해 보조 함선으로써 은폐하였다가 항공모함으로 개장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아카기의 언니이자 아마기급의 네임쉽인 아마기는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개장공사 도중에 용골이 파손되는[3] 큰 피해를 입으면서 수리불가 판정을 받아 결국 스크랩되었다. 아카기의 동생 격인 3번함 타카오와 4번함 아타고는 건조의 진척도가 너무 낮았고, 남아있던 배수량 쿼터도 없었기 때문에 건조하던 도크에서 그대로 해체되었다. 이후 타카오와 아타고라는 이름은 타카오급 중순양함의 1번함과 2번함에 각각 붙게 된다.
이후 1923년 11월 19일, 전함 카가와 순양전함 아카기를 일본 해군 본부가 공식적으로 항공모함 개장을 통지하게 된다. 그리고 1925년 4월 22일, 아카기는 정규 항공모함으로 취역한다.
3.2. '''3단 갑판, 독특한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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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기는 순양 전함으로 설계를 완성했었다. 이러한 선체를 무리하게 항공모함으로 개조했으므로 처음부터 여러가지 문제를 안게 되었다. 3단 갑판이라는 독특한 아이디어는 영국 해군의 커레이저스급 항공모함에서 참고하였는데[4] 문제는 중단 갑판에 20cm 연장포 2기가 배치되면서 함교와 비행 갑판으로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3단 갑판을 통해 하단과 중단은 함재기의 이륙을 목적으로, 상단은 함재기의 착륙을 목적으로 설계하였으나 실상은 안습하게도 상단 갑판만 사용하게 된다.
상단만 사용하게 된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꼽히고 있다. 중단은 아카기의 선수에 설치된 8인치 연장포가 출구를 비좁게 만들었으며 출구로 나가는 도중에도 함교가 길목을 좁게 하고 있어 충분한 여건이 보이지 않았고, 하단 갑판은 중단 갑판처럼 출구가 좁지 않았으나 갑판을 중간 쯤에서 벽으로 막고 함재기 격납고로 사용했는데, 이렇게 되면 하단 갑판은 함재기가 이륙하기에 충분한 거리가 나오지 않아 문제가 되었고 결국 하단 또한 사용되지 않는 처지가 된다. 결국 남은 것은 상단 갑판 밖에 없는데 상단 또한 신형 함재기가 개발되면서 이에 따른 크기와 무게 증가가 아카기의 짧은 활주로가 이착륙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8인치 주포로 무장한 것은 항공모함을 소수의 호위함과 같이 정찰부대식으로 보내서 적을 정찰하다가 적과 충돌할 경우 항공모함도 부족하나마 순양함급 화력을 직접 발휘해야 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 따라 일본의 또 다른 초기 항공모함인 카가 역시 주포로 무장했다. 물론 이런 구상은 항공모함이 장갑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구역이 격납고, 비행갑판 등 많으며, 피격시 대폭발과 큰 화재를 불러오는 함재기와 폭탄을 탑재하므로 직접 적 군함과 함포로 교전하기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사장되었다.
다만 이런 실수를 한 것은 다른 나라도 다르지 않아서 미군의 초기 항공모함인 렉싱턴급 항공모함도 역시 8인치 연장포 4기를 태평양 전쟁이 개전할 때까지 달고 다니다가 5인치 양용포로 교체했다. 뭐 이건 둘 다 원래 출신이 항공모함이 아니라 순양전함이었던 걸 개장해서 항공모함으로 만든 거니 그게 좀 크겠지만.
또한 전간기 일본 항모의 특징인 굴절하강식 연돌도 문제가 되었다. 갑판 위에 무언가가 잔뜩 있으면 함재기의 발/착함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연돌을 하늘이 아닌 바다쪽을 향하도록 한 것인데, 골 때리게도 '''거주구역으로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조라서 창문을 열 수 없을 정도였고 그 여파로 결핵과 이질이 유행해서 아카기의 별명은 '''살인주택 아카기''' 였다.1934년 당시 아카기의 이질 발병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5]
항공모함 아카기에 이질환자 50명[전통시부시 17일발] 가고시마현 시부시 만에서 제 1기 전투 기술 훈련에 참가중인 항공모함 아카기에 50명의 이질 환자가 발생하여 엄중히 소독을 행하는 동시에 환자를 격리시켰으나 아카기는 작년 여름에도 요코스카에서 수십명의 이질 환자를 발생시킨 일도 있었는데 당시의 소독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보균중이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고 한다. 또한 동함 상기 OO기는 카야에서 항행금지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3.3. 근대화 개장
함재기의 발전으로 비행갑판 연장의 필요성을 앞세워 단일 갑판으로 개조하기 위해, 1935년에 대 개장을 실시하게 된다.[6] 먼저 단일 갑판으로 개장한 카가를 참고하여 나가시키 현, 사세보 해군 공창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개장에 의해 배수량이 41,300톤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중단과 하단 갑판이 밀폐식 격납고 형태로 개조되어 함재기 탑재량 또한 66대로 확장됐다. 특이한 것은 함교의 위치가 좌현이라는 것. 이는 함의 우현에 연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의 건조 당시 항구 정박시 배의 좌측을 부두에 갖다대므로 좌측에다 이 굴절하강식 연돌을 달게 되면 부두에 있는 사람들이 매연을 뒤집어쓰게 된다는 이유로 연돌을 오른쪽에 달게 된 것인데, 연돌이 오른쪽에 있는 상황에서 함교를 왼쪽에 세우면 함의 무게 중심이 좌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간단히 밸런스를 잡을 수 있다는 발상이었던 것. 또한 함재기의 발함시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함교의 위치를 최대한 뒤로 끌고 와 함의 중간쯤, 연돌의 바로 맞은편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함교의 배치는 함을 실제로 운용하게 되면서 문제점으로 떠오르게 된다. 좌측의 함교로 인해 생기는 난기류, 우측의 연돌이 뿜어내는 증기로 인한 난기류가 함의 뒤꽁무니쯤에서 서로 만나 회오리치기 시작한 것. 한마디로 착함이 대단히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져버렸다. 여기에 뒤쪽으로 끌어내린 함교의 위치도 착함시 방해가 되었다. 결국 일본군 내에서 아카기의 함교 배치는 실패였던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고, 일본의 본격적인 대형항모로 건조되고 있던 쇼카쿠급 항공모함은 카가의 연돌과 함교 배치를 채택한다. 하지만 쇼카쿠급도 어느 정도 함의 형태가 완성되어 있던 상황에서 건조 도중 무리하게 함교의 위치를 바꿈으로서 결함이 생기게 되었다. 히류 역시 건조 중이었지만 완성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으므로 함교의 위치를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아카기의 우 연돌, 좌 함교 방식을 따르게 된다.
호쇼와 마찬가지로 밀폐식 격납고를 채용했는데, 밀폐식 격납고를 채용했던 건 일본 부근의 바다는 항공모함의 비행 갑판에까지 바닷물이 튀어오를 정도로 파도가 거칠었기 때문. 이로 인해 개방식 격납고는 바닷물이 격납고로 들어갈 위험성이 높았고, 이는 함재기의 컨디션 유지에 치명적이었다.[7] 이 때문에 일본의 항공모함 대부분은 밀폐식 격납고를 채용하게 되었다.[8]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쇼카쿠급 항공모함이 완성되는 대로 일본 해군 기동전대를 통솔하는 제1항공전대의 기함 자리를 쇼카쿠에게 물려줄 예정이었으나, 최신형이었던 쇼카쿠급이 의외로 해군이 원했던 기대치에 2% 부족한 함이라는 결론이 나면서 결국 기함 자리는 지켜내게 된다. 그리고 쇼카쿠 이후로 제 130호급(다이호)와 제 302호급(운류급 항공모함)의 건조계획이 잡히면서 이들이 완성되어 취역하면 현역에서 물러나 연습항모로 사용될 계획이었다.
나치 독일에서 그라프 체펠린급 항공모함을 건조하기 위해 참고 목적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아카기는 개장 당시 일본군에서 가장 비싼 배였다. 몇 차례나 개장을 거듭했으니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었고, 아카기 자체가 일본군에서 가장 거대한 항공모함이라[9] 돈을 그만큼 더 먹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실전에 투입된 일본군 항공모함 중에서는 가장 큰데, 이보다 더 큰 항공모함은 실전에 투입도 못 해 보고 마무리 작업 겸 함재기를 인수하러 가던 도중 단 한 척의 잠수함이 쏜 단 네 발의 어뢰를 맞고 격침당하면서, 인류 역사상 최단명 군함 기록을 경신해 버린 시나노밖에 없다.
3.4. 전쟁 초기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하면서, 아카기는 제 1항공함대(第一航空艦隊)의 기함으로서 카가, 소류, 히류, 쇼카쿠, 즈이카쿠를 데리고 하와이로 떠났다.
어쨌든 아카기는 성공적으로 하와이에 도착했고, 진주만 공습을 성공시켜 미 해군 태평양 함대를 괴멸시킨다. 전함이 전쟁의 주역이고, 항공모함은 어디까지나 2선급 보조전력이라는 상식을 완전히 박살낸 대전과였으며,[10] 아카기는 휘하 항모들을 한 척도 잃지 않고 일본으로 개선했다. 그러나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고,[11] ''' 미국은 엄청나게 분노하며 전력을 다해 일본을 무찌르기로 결의한다.
이후 아카기는 인도양까지 진출해서 실론 해전에서 영국 동양함대를 격파하고 경항공모함 1척과 중순양함 2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진주만에 없었기에 살아남은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고, 둘리틀 특공대가 일본 수도 도쿄를 공습한다. 대낮에 당당히 쳐들어온 미군 폭격기들의 폭격을 당한 일본인들은 "도대체 해군은 뭐하고 있는 거냐?" 고 비난했고, 일본 해군은 미군 항공모함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미드웨이를 공격하기로 결의한다. 공격의 주역은 아카기와 그 휘하 항공모함들이었고, 제 1항공함대는 미드웨이로 진격한다.
3.5. 운명의 5분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한 아카기는 미드웨이를 폭격하고, 반격에 나선 미군기들을 모조리 격추했다. 미군도 미드웨이 비행장에 주둔하던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함재기들을 총동원해서 제1항공함대를 공격했지만, 항모 비행단 간의 연계 전술에 경험이 없었던 탓에 뇌격기와 전투기, 급강하 폭격기 부대가 모두 흩어져 축차로 투입되었다. 가장 먼저 일본 함대를 발견하고 공격에 나선 것은 육군 항공대로 파일럿들의 경험이 일천하여 한 번의 유효타도 내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두 번째로 일본 함대를 발견한 뇌격기 부대는 전투기의 엄호도 없이 뇌격 코스로 돌입한 데다 이미 구식인 TBD 데버스테이터가 대부분이었던 탓에 대부분이 격추되거나 피격당했다. 뇌격기 조종사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제1항공함대에 명중한 항공어뢰는 한 발도 없었다. 일본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제1항공함대는 반격을 준비한다.
그러나 미군 뇌격기들을 요격하기 위해 일본 전투기들은 해면 가까이로 내려왔고, '''제 4구축대의 구축함 아라시'''를 쫓아온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급강하폭격기들이 나타난다! 뇌격기들의 돌입 전부터 제1항공함대의 신경을 긁어대던 미군 나왈급 잠수함 노틸러스를 추적하다가 제1항공함대로 복귀하는 '''제 4구축대의 구축함 아라시'''가 속력을 내면서 크고 아름다운 항적을 남겼는데, 미군이 그걸 보고 따라온 것. 거기다 미군 뇌격기 부대는 직접적인 전공은 거의 없었지만 그들은 몸을 던져 일본군의 요격기와 견시의 시선을 저공으로 묶어두었기 때문에 후속으로 도착한 SBD 돈틀리스들이 제1항공함대 상공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도록 기여한 셈이 되었다. 실제로 일본군 견시들은 급강하폭격기들이 거의 급강하 궤도에 들어간 뒤에나 함교로 보고했다. 본 함대 상공에 도착한 미군은 당연히 편대를 나누어 아카기와 카가 둘 다 공격했어야 했지만, 사인 미스로 모든 급강하폭격기가 가까운 카가를 향해 날아가 버린다. 덕분에 카가는 50발 가까운 폭탄에게 조준당해 미군 공식 5발, 비공식 추산 10여발의 폭탄을 맞고 박살이 났다.
이렇게 아카기는 살아남았습니다...로 이야기가 끝날 수도 있었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리처드 홀시 "딕" 베스트(Richard Halsey "Dick" Best) 대위가 본인 포함 3기의 급강하폭격기를 이끌고 아카기를 덮쳤다. 첫번째 폭격은 빗나갔으나, 다음 폭탄 한 발이 가운데 엘리베이터 근처를 관통하고 상갑판을 박살냈는데, 하필 그 부분이 출격준비된 B5N 뇌격기들의 격납고여서 뇌격기들에 만재된 연료 유폭에 이은 어뢰 유폭으로 대화재가 발생하며 전투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게다가 화재시에 '''방화 커튼을 내려서 화재를 격리해야 할 그 부분이 파괴'''된지라 화재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이 명중탄을 기록한 베스트 대위는 '''자타공인 미 해군 최정예'''였던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폭격기 파일럿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그야말로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파일럿이었다. 결국 미드웨이에서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해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폭탄은 후방 갑판 가장자리를 그대로 관통해 버려서 지근탄이 되었는데 하필이면 이 지근탄이 아카기의 키 근처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아카기는 조함 불능 상태에까지 빠지게 된다.[12]
아카기가 미국 함재기들의 공습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 중 함대 전체의 문제점을 제외하고 아카기라는 개별 함의 문제점만 따지자면 아카기는 대공포 운용을 위해 비행갑판의 너비가 함체의 너비보다 좁을 정도로 나름대로 신경을 쓴 것에 비해 대공포 자체가 상당히 낡고 구식인 대공포로만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 있다.[13] 사격통제시스템은 비교적 신형이이었다고는 하나 대공포의 배치가 워낙 이상했던 탓에 일부 대공포는 함교에 걸려 특정한 각도는 쏠 수 없었다는 문제도 있었다. 결국 아카기의 대공포대는 '''급강하폭격기를 상대할 수 없었다.'''
원래는 순양전함이 될 예정이었던 튼튼한 선체에다가 피해라고 해봐야 갑판에 불길이 솟아오르는 정도였던지라 함 자체가 침몰할 우려는 없었지만, 중순양함 토네의 정찰기가 항공모함 발견 보고를 자꾸 번복하면서 제1항공함대에 대혼란을 일으킨 덕에 격납고 전체에 폭탄과 어뢰가 흩어져 있었고, 이 폭탄들이 베스트 대위의 베스트 샷으로 일제 폭발, 아카기 전체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그 외에도 함 내 대부분의 내장재 및 가구용품이 가연성 소재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문제를 키웠으며 일본군의 낙후된 방재 및 피해복구 시스템도 한 몫 단단히 했다. 같은 전투에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요크타운도 급강하폭격을 당했으나 연료관에 이산화탄소를 채우고 피해복구반이 신속하게 대처하면서 순식간에 전투로 복귀하였으며 일본군의 오판에 기여하게 된다.
즉, 아무리 선체 자체가 온전해서 가라앉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운행이 불가능하고 화재진압도 불가능하니 안에 있는 승무원들은 탈출하지 않으면 죄다 타죽거나 연기에 질색해서 죽을 운명이었다. 말 그대로 '''물에 떠 있는 불타는 관'''이었던 것.
당시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자침조치는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아카기를 수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날, 히류마저 공격으로 전투불능에 빠지자 미군의 추가공격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항해능력과 전투능력을 잃은 함[14] 을 예인하다가는 노획의 우려가 크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아카기에 자침 처분을 내렸고, 일본 최대 최강의 항공모함 아카기는 '''제 4구축대의 구축함 아라시'''와 하기카제, 노와키, 마이카제의 어뢰를 맞고 처분되었다. 아카기가 침몰하고 난 뒤 구축함으로부터 구조된 아카기의 승조원들은 갑판 위에서 "아카기 반자이!"를 외쳤다고 한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가라앉은 4척의 일본 항공모함중 유일하게 함장이 생존한 배이기도 하다. 당시 아카기의 함장이었던 아오키 타이지로는 원래 선원을 모두 퇴함시키고 자신은 자침이 결정된 아카기로 돌아가 죽을 예정이었으나, 아카기 승무원들의 구조와 자침을 담당했던 제4구축대의 사령관 아루가 코사쿠가 육탄전을 벌이며 뜯어말린 끝에 결국 죽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도 구조되었다.
참고로 아루가 코사쿠는 이후 전함 야마토의 함장이 되어 야마토의 최후인 오키나와 특공에 출격하는데, 정작 본인은 퇴함을 거부하고 야마토와 함께 생을 마쳤다. 또한 아오키 타이지로는 ''' '부하들은 죽었는데 지 혼자 살아 돌아왔다는' '''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로 왕따와 함께 예비역으로 좌천됐지만.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각지의 항공대 대장으로 전전하고, 나중에서는 함경남도 원산에 있는 원산해군항공대를 마지막으로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억류되었다가 돌아와 전후까지 생존하는데, 아카기와 함께 죽지 않은 것과 이후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경력 탓에 죽을 때까지 비겁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했다고 한다.
4. 평가
아카기는 카가와 함께 일본 해군에서 가장 오랜시간 활동하였으나 사실 카가가 가장 활약한 시기는 중일전쟁이었고, 아카기는 카가보다도 늦깎이여서 태평양 전쟁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나섰다. 이들은 태평양 전쟁의 초입까지 약 6개월간만 대활약했을 뿐, (아카기의) 미국 항공모함과 '첫 교전'이었던 미드웨이 해전에서 허무하게 침몰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진주만 공습으로 대표되는 일본군의 공세기의 상징이라는 점으로 봐야 할 것이다.[15]
실제로 일본을 제외한 해외에서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 불리한 상황에서도 약 2년간 고군분투했던 쇼카쿠와 즈이카쿠를 더 높게 치며 인지도도 아카기나 카가보다 이들이 훨씬 높다. 실제로 연합군에게 입힌 피해의 총량을 따져보면 쇼카쿠와 즈이카쿠 콤비가 일본 항공모함 중에서는 최고 수훈함이었다.[16]
여담으로 미드웨이 해전 직전 일본군의 워게임에서 9발을 맞고 침몰하는 예상이 나왔는데 우가키 참모장의 억지로 3발만 맞고 되살리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정말 아카기는 3발만 맞았지만 그 3발에 침몰해 버린다.
5. 여담
2019년 10월, 2주 간격으로 카가와 함께 거의 온전한 잔해를 하와이 파파하노모쿠아키아 해양공원 해저에서 발견했다. 3D 소나를 통해서 발견했으며 심해잠수정을 투입하여 육안으로 정체를 확인했다. BBC뉴스 조금 더 자세한 뉴스 1998년 로버트 발라드[17] 에 의해 발견된 요크타운의 잔해와 카가에 이어서 미드웨이 해전 침몰함선의 세번째 발견이 되었다.
6. 미디어에서의 등장
- 아카기와 카가가 가진 삼단식 비행갑판은 이후의 몇몇 미디어에서 오마쥬되었다.
- 용자왕 가오가이가 - 삼단 비행 갑판 항모
-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 -가이페론급 다층식 항주모함
- 네이비필드에서 일본 3.5/4차 항모로 나온다. 3.5차가 3단 갑판 시절이고 4차가 단층 개장 후.
- 월드 오브 워쉽에서는 9티어 항모로 분류되어 있으나 아직 실장 계획은 없는 상태였다가.. 프리미엄 8티어로 카가가 출시했다. 또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컬렉션에서 카가와 함께 3단 갑판으로 등장한다.
- 배틀스테이션 시리즈에서 일본 주력 항공모함으로 등장한다. 역시나 미드웨이 이전까지 1항전으로서 주력 취급을 받았던 걸 반영한 듯.
- 함대 컬렉션에서도 의인화되어 등장. 준수한 능력을 갖춘 정규항공모함임에도 불구하고 초반 퀘스트로 매우 이른 시기에 입수할 수 있어 인기가 좋다. 하지만 정규 항공모함이 다들 그렇듯 유지비가 많이 드는지라, 2차창작에서는 대식가 속성이 붙어버렸다. 분리된 개별 항목은 아카기(함대 컬렉션) 참조.
- 중국의 모바일 게임 전함소녀와 벽람항로에서도 등장한다. 전함소녀에서는 플레이어가 운용할 수 있는 캐릭터이면서 미드웨이 해전이 모티브인 이벤트에서 보스로도 각각 따로 나왔다. 벽람항로에서는 미드웨이 해전을 배경으로한 3해역에서 보스로 등장하며, 3-4해역에서 카가와 함께 드랍되나, 둘다 SSR이라 드랍율이 꽤 낮은편이라 3 4관학교 라고 불리운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엄청난 얀데레로 나온다.
- 워썬더에서 미드웨이, 과달카날, 웨이크 섬 전투맵을 비롯한 해상맵에서 자주 카가, 소류, 히류와 함께 등장한다.[18] 그리고 역사 기반 캠페인에서 진주만 공습에 참여하고 운명의 5분에 의해 격침 당한다.
- 영원의 제로에서는 터져나간다. 당연히 전투명은 미드웨이.
- 영화 도라 도라 도라와 진주만에서는 에식스급 항공모함 CV-16 USS 렉싱턴이 연기했다. 문제는 아카기의 함교위치가 렉싱턴과 달라 촬영 내내 렉싱턴은 후진해야 했지만, 2019년판 미드웨이에서는 CG로 구현되어 고증대로 미 해군 함재기 파일럿 베스트의 일격으로 박살나는 명장면이 충실히 연출되었다.
- 치하탄 학원의 학원함 모델이다.
- 웹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짤방인 역시 일본 해군은 강해의 주인공이다.
- 중국의 모바일 게임 어비스 호라이즌에도 등장한다.
[1] 조모 3산(아카기, 하루나, 묘우기) 중 묘우기만 이 이름을 따온 군함이 없다.[2] 이 16.1인치 포는 대한해협 봉쇄를 위해 대마도의 토요포대와 용호동(부산) 장자등 포대에 설치된 것과 동형인데 일설에 의하면 아카기가 항모로 개조되면서 이 포와 포탑이 쓸모 없어지자 여기로 옮겨져 설치되었다고 추정된다. 혹은 건조 중단된 토사의 것이라는 설도 있다. 카가와 토사의 포탑은 나가토급 전함을 개장하는데 사용되긴 했지만 나가토급 2척의 포탑 수는 총 8기, 카가급 2척의 포탑 수는 총 10기이기 때문에 2기가 남게 되어 이걸 가져다 썼다고 하면 이상할 것은 없다.[3] 용골은 배의 척추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른 부분처럼 파손된다고 해서 갈아끼우거나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4] 당시 커레이저스는 2단 갑판의 항공모함이었다.[5] 더 큰 문제는 이 문제가 이미 다른 함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카가 항목을 참고할 것.[6] 1935년 10월 24일부터 ~ 1938년 8월 31일까지[7] 실제로 제 4함대 사건 당시에는 류죠가 항공기를 격납고 내로 반입할 때 쓰는 쪽문으로 파도가 밀고 들어와서 격납고와 항공기 일부가 파손되기도 했다[8] 참고로 개방식 격납고인 미 해군의 항공모함은 함재기를 격납고 천장에 매다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이것은 항공모함 와스프가 격침당하는 원인이 되며, 후에 날개가 완전히 접히는 F4F-4가 나오면서 해결된다.[9] 또 다른 대형함인 전함까지 포함해서 생각하더라도 규격 외의 괴물인 야마토급 전함이 건조되기 이전까지 아카기는 일본 해군에서 가장 큰 군함이었다.[10] 원래 진주만 공습의 모티브가 된 건 영국 왕립 해군이 이탈리아의 군항인 타란토를 때린 타란토 공습이다. [11] 정확하게는 하긴 했으나, 일본 특유의 관료주의 기타 병크들로 인해 전달이 늦었고, 선전포고문인 '''14 Part Message'''를 갖고 갔을 때는 이미 늦어서 미국 국무장관의 귀에 이미 진주만 피습 소식이 들어간 시점이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동남아를 공격했는데, 유럽에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12] 덤으로 소화용 펌프도 박살났다. 때문에 화재 진압 가능성은 안드로메다로..[13] 위력적인 대공포의 부재는 야마토에 이르기까지 2차대전기 대부분의 일본 군함의 문제였다. 그런데, 미 해군이 주력 대공포로 사용한 오리콘 20mm, 보포스 40mm는 모두 유럽산이며 전쟁 전에 개발되었다. 일본군도 그 회사들과 거래는 있었지만 결국...[14] 주 피해는 갑판에 집중되었지만 유폭 20분 후에는 조함장치에도 손상을 입어서 자력 이동이 불가능했다.[15] 산호해 해전은 아카기가 참여하지 않았기에 논외[16] 특히 즈이카쿠는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윌리엄 홀시 제독이 휘하 함대를 모조리 끌고, 더군다나 상부의 지침마저 어긴 채 죽이러 갈 정도로 증오하던 함선이다.[17] 타이타닉, 비스마르크를 발견해낸 미 해군 중령 출신의 해저탐험가이다[18] 근데 사실상 미드웨이, 웨이크 섬 전투 맵에서는 모두 소류 스킨, 과달카날 에서는 아카기, 카가, 소류 두척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