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지방 언어 문제

 

1. 개요
2. 역사
3. 배경
4. 논쟁
5. 기타
6. 같이 보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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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언어 분포 지도[1]
프랑스에서는 지방 언어들이 많다.
우리가 흔히 프랑스어라고 일겉는 것은 파리의 오일어를 규범화한 것이고 프랑스 북부 지역의 언어들은 오일어 계통의 언어(방언)을 사용하여 계통상 표준 프랑스어와 가까워서 의사소통이 비교적 잘 되는 편이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오일어 계통의 언어(방언) 뿐만 아니라 표준 프랑스어와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언어도 존재한다. 스페인과 가까운 지역에서는 바스크어카탈루냐어가 쓰이며 벨기에와 가까운 지역에서는 네덜란드어 방언이 쓰이고, 브르타뉴 지역에서는 켈트어파 언어인 브르타뉴어가 쓰이고, 독일과 인접한 알자스 지역에서 독일어 방언이라 할 수 있는 알자스어가 쓰이며 코르시카 지역에서는 이탈리아어와 가까운 언어인 코르시카어가 쓰이고 프랑스 중남부 지역에서는 오크어가 쓰였고, 프랑스 동남부 일부 지역에서 프랑코-프로방스어라는 언어도 쓰였다.
유럽에서도 영국처럼 반강제적인 표준어를 제정하지 않고 언어활동을 민간의 자율에 맡겨 자유롭게 풀어두는 나라도 있는 반면,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중앙집권이 강했고 언어통제도 강한 편이다.[2] 프랑스 정부에서 프랑스의 통일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지방 언어의 사용을 규제하려 했기 때문에 지방 언어를 쓰는 지방 주민들 간의 마찰이 있는 편이다.

2. 역사


프랑스 북쪽의 프랑크족이 통일 왕조를 존속시키던 시기에 남 프랑스에서는 조그만 영주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그 국가의 주민들이 주로 쓰는 언어가 오크어였다.
그러나 1200년대 초에 벌어진 카타리파 문제로 촉발된 온갖 내전(알비 십자군)으로 인해 남부의 영주국가들은 북쪽의 프랑크족 왕국에 굴복했고, 프랑크족 측에서는 남부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소수 언어의 사용을 제한하기 시작하면서 1539년 8월 10일에 프랑수아 1세와 그 막료들에 의해 제정된 빌레르-코트레 칙령(L'ordonnance de Villers-Cotterêts)[3] 제110조·111조에서 공적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프랑스어만을 쓰도록 강제했다. 그 예외도 있었는데 교회에서 주로 쓰이는 라틴어같은 경우가 있었다.
1626년에는 프랑스의 언어의 용법·어휘·문법을 정비하는 정부 기관인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가 창설, 주로 프랑스어 사전을 출간하거나 프랑스어 내에 섞인 타 언어의 흔적을 말소하는 업무를 맡았다.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서는 혁명정부에서 언어의 자유를 주창했지만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위해 지방의 소수 언어를 탄압하고 언어의 자유에 관련된 법도 철회하는 모순을 보인다. 당시 자코뱅 파의 일원인 앙리 그레고와르는 "2500만명의 프랑스인 중,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프랑스인은 300만명 밖에 없다"고 한탄했을 정도로 이 시기의 프랑스의 지방에서는 지방 언어의 사용이 많았다. 1880년대에서는 정부의 강력한 방침과 노력으로 지방 주민의 초등교육 보급으로 인한 문맹 퇴치율이 점차 상승하기 시작했고, 공용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 대한 불이익이 생겨나자 지방 언어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참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언어 관련 법 개정으로 인해 지방 언어는 서서히 부흥하지만 그 반발도 높아졌기 때문에 결국 1992년 프랑스 정부는 공화국 헌법의 언어 관련 법규를 「공화국의 언어는 프랑스어이다」라고 멋대로 개정하고 말았다(…). 1994년 「Loi Toubon」[4]이라는 법 제정으로 인해 프랑스 국내의 소수 지방 언어의 지양과 탄압을 가속화하는 중이다.
사실 이 법안의 경우 지방 언어의 사용을 제한하려는 목적보다는 프랑스 대중매체에서 영어를 비롯한 외래어의 남발을 막기 위한 목적이 주였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영어에서 유래한 어휘들이 널리 사용되면서 프랑스어의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얘기가 많이 나돌았고 이 법안도 영어 어휘들을 프랑스어 어휘로 순화하려는 목적에서 제정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대중들의 반응은 언어의 사용을 강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면서 비웃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이로 인해 별 탈 없이 쓰이던 Pipeline(송유관. 프랑스식으로는 '피플린' 정도로 발음)은 oléoduc이 되었으며, 제트기(Jet airpolane)은 avion à réaction(동력 비행기)이 되었다. 햄버거(hamburger)는 steak haché(다진 고기), 은 pâte à mâcher(씹는 반죽)으로 강제 순화되었다. 그러자 르몽드 지는 그럼 샌드위치(Sandwich)는 'deux morceaux de pain avec quelque chose au milieu(가운데에 뭔가 들어 있는 두 쪽)'가 되냐며 빈정거렸다.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이를 Sandwich라고 쓰며, 상드위치/상드위시 정도로 발음한다.

3. 배경


독일어권에서는 표준 독일어를 강요하지 않아도 대개 표준어를 따라올 수밖에 없는데, 이는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5] 여러 어휘들을 새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상황이 다르다. 오일어는 프랑크 왕국 시대의 지배층인 게르만 계통의 언어가 모국어였던 프랑크족과 피지배층 갈리아인의 상호의사소통을 위하여 형성된 일종의 라틴 피진어에서 출발한 반면,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방은 갈리아 내에서도 로마의 지배를 먼저 받아[6] 라틴어를 이전부터 사용해왔다. 즉 지방어가 표준어보다 역사가 더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표준어를 끌어오지 않아도 표현을 하는 데 문제가 없었으며, 실제로도 남 프랑스에서는 트루바두르를 비롯해 일드프랑스 지역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언어와 문학이 발달했다.

4. 논쟁


1999년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유럽 각국이 참가하고 있던 유럽 지방 언어·소수 언어 헌장(ECRML)에 참여하였으나 프랑스 국내의 강경파가 반발했고 프랑스 헌법위원회도 지방 언어의 보호는 헌법위반이라고 단정하는 바람에 비준을 단념한 사건이 있었다.
지방 언어의 사용 확대를 반대하는 자들의 의견으로는 지방 언어를 인정하면 프랑스의 발칸 반도화, 즉 '''프랑스의 국가적 분열'''을 낳는다며 반발했고 지방 언어의 사용 확대를 기대하고 찬성하는 자들의 의견으로는 지금 당장 (지방 언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의 고령화로 인해 얼마 못가 사멸해가는 데다가 지방 언어의 역사를 통해 현대 공용 프랑스어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
최종적으로 이 논쟁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개입으로 중지되었으며, 시라크 대통령은 조직화한 지방 커뮤니티에서는 지방 언어의 사용에 대한 권한을 약속하는 한편, 비준 자체는 프랑스의 정신적 통일을 저해한다며 반대했다. 2019년 현재 EU 가맹국 중에서 유럽 지방 언어·소수 언어 헌장(ECRML)을 비준하지 않는 나라는 프랑스이탈리아뿐이다.

5. 기타


2010년대에도 프랑스 헌법에 지방 언어를 탄압하는 법규는 남아 있기 때문에 프랑스 내 좌·우익 가리지 않고 해당 법규를 비판하고 있고, 일부 지방주의자들은 2개 국어 도로 표식지의 프랑스 표준어 부분을 반달하는 등 프랑스 당국의 지방 언어의 탄압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프랑스의 문화(언어·문화예술)에 대한 국가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개입과 통제는 프랑스가 다른 국가들보다 더 앞서서 강력하고 단일한 힘을 갖추고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발판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억압의 부작용이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6. 같이 보기



[1] 브르타뉴 지방·알자스 지방을 제외한 노란색과 녹색 그리고 노르만어권 지역이 오일어 지역, 카탈루냐어·바스크어 사용지역을 제외한 붉은색 지역이 오크어 지역이다.[2] 한국과는 양상이 꽤 다르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수도권으로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이 상당히 강해졌지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지방자치가 잘 돌아가고 있었으며, 조선시대가 돼서도 조선의 지리가 대체로 산맥 등 험준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지방만의 자존심도 많이 존재했고, 그 중에서도 평양은 전국의 돈을 빨아들인다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 점을 바탕으로 조선 제일의 상업도시로 자리잡았다.[3] 총 192조로 이루어진 칙령으로 주요 내용은 행정·사법 용어로 라틴어를 금하고 프랑스어를 쓸 것과, 정확한 인구 통계를 낼 목적으로 모든 국민은 각 교구의 교회에 출생·결혼·사망 신고를 의무적으로 할 것, 직공 연합이나 노동 조합 형성을 금한다는 것 등이었다.[4] 프랑스 미디어 내에서 공용 프랑스어의 사용을 강제하는 법.[5] 이는 일본이 근대학문을 번역해 올 때 새 한자어를 만든 것과 같다.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가 없는 것.[6] Gallia Narbonensis(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영어 위키백과)를 보면 현 프랑스의 지중해변 남해안과 그 인근 지역이 BC 121년에 속주로 편입되었다고 하니, 갈리아 전쟁보다 약 70년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