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네스 트라우트롭트
'''하네스 트라우트롭트(Hannes Trautloft : 1912. 3. 3~1995. 1. 11)'''
출생 : 독일 제국 Groß-Obringen
출격횟수 : 560회
격추수 : 58기
소속 : 콘돌 군단 J/88, JG 77, JG 51, JG 54
최종 계급 : 대령(루프트바페) / 중장(서독 공군)
사망 : 독일 Bad Wiessee
1912년 3월 3일, 튀링겐주의 그로스오브링겐(Großobringen)에서 '''하네스 트라우트롭트'''가 태어났을때 독일 제국의 통치자 빌헬름 2세는 노골적으로 해외 영토를 빼앗아 자신의 제국을 확장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다. 소년이 된 하네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1차 대전에서 패배하고 온 국민들이 비탄에 빠진 채 생활고에 허덕이는 모습이었다. 19세가 되던 해 자원하여 군대에 들어간 그는 볼프강 팔케와 귄터 뤼초 같은 동기들과 비행학교에서 조종 교육을 받았다. 물론 이 시기의 독일은 승전국이 묶어 놓은 조약 때문에 공군을 보유할 수 없었고, 이들 동기 9명은 소련의 리페츠크(Ли́пецк)에 있는 전투조종사 학교에 보내져 그곳에서 비행술을 갈고 닦았다.
1936년 8월 7일에 6명의 조종사들과 함께 공군이 마련한 선편을 타고 스페인의 카디스(Cadis)에 도착한 트라우트롭트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팔랑헤들을 지원했다.
이곳에서 하인켈 He 51 복엽 전투기를 몰면서 동료 크라프트 에버하르트(Kraft Eberhardt : ?~1936 : 7대 격추)와 함께 신생 루프트바페 첫 격추 전과를 거두었다. 그가 8월 25일에 처음 떨군 적기는 정찰 임무중이던 브레게 19(Breguet XIX)였다. 5일 후인 8월 30일 오후 출격에서 그는 포테즈 540 폭격기를 두 번째 제물로 삼았지만, 후방 사수가 격렬하게 반격해대는 통에 자신도 냉각기에 피탄 당해 기체를 버리고 비상 탈출해야만 했다. 공화파들은 이것을 첫 격추 전과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졸지에 하네스 트라우트롭트는 첫 격추와 첫 피격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 셈이다.
12월이 되자 본국으로부터 최신예 Bf 109의 원형기 4대가 보내져왔는데, 물론 이 기체는 최정예 4명만 몰수 있었고 뛰어난 비행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트라우트롭트 중위도 여기에 끼어 있었다. 신예기에 올라타고 날아오른 그는 곧바로 러시아제 투폴레프 SB 폭격기와 I-15, 그리고 단엽전투기인 I-16으로 혼합 편성된 공습 부대를 요격했다. 그는 최첨단의 메서슈밋 전투기로 갈아타고 3대의 적기를 더 격파했고 에이스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사실, 그는 개인적인 무공보다는 베르너 묄더스와 함께 단엽 전투기에 어룰리는 새로운 전술을 연구하고 다듬어내는 공이 더 컸다. 해와 파견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는 스페인 금십자훈장(Spanienkreuz in Gold mit Schwertern)이 주어졌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개최된 국제 비행경기인 드라이어-파트루리제(Dreier-Patrouille)에 특별히 경주용으로 튜닝된 Bf 109를 몰고 참가해 각종 상을 휩쓸었다. 이때 이미 그는 제132전투항공단의 제12중대(12/JG 132)를 이끄는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이 부대는 1938년 11월 1일에 제331전투항공단 제2비행단(II)./JG 331)으로 재편성되었고, 이듬해에 제2차 세계 대전의 개전을 맞게 된다.
폴란드 침공 작전 당시, 트라우트롭트는 제77전투항공단 제2비행단(II/JG 77)에 복무하고 있었다. 개전 첫날 그는 바르타강(Warta) 상공에서 PZL P.23 카라스 급강하폭격기를 격추시켰다. 보름 후인 1939년 9월 19일에 그는 제20전투항공단의 수석 비행단장(I./JG 20)이 되었고 이어진 프랑스 침공 작전에서 2대를 더 떨구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을 앞두고 그의 부대는 제51전투항공단 제 III 비행단(III./JG 51)으로 재편성되었다. 해협 전투를 하면서 2대의 영국 공군기를 더 격파한 그는 드디어 독일 공군이 인정하는 에이스(Ass) 자격을 갖추고 대위로 승진했다.
독일 공군은 개전을 맞아 새롭게 전투기 부대를 창설했는데 그 중심에는 "녹색 심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제54전투항공단이 우쭉 서 있었고, 트라우트롭트가 그 지휘봉을 잡게 된다. 헤르만 괴링이 영국 공략을 하는 동안 그는 해협 상공에 120회나 출격을 반복하면서 부하들을 직접 이끌었다. 영국 전역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그는 격전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격추수를 13대까지 끌어올렸다.
JG 54는 발칸 반도 침공 작전에 이어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정식으로 소령이 된 그는 1941년 7월 27일에 20대 격추의 무공을 치하받기 위해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고 해가 저물기 전에 26대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42년 동안 16대를 추가로 격추시켰고, 1943년 2월 15일에는 50번째 전과를 거두게 된다. 7월 6일부로 그는 일선 지휘관 보직에서 물러나 아돌프 갈란트가 있는 전투기대 총감(General der Jagflieger)의 사무실에서 지상 근무를 하게 된다. 그나마 그가 맡은 임무는 검열관이어서 각 부대를 바삐 도느라 베를린의 제국항공성에 머물고 있을 시간을 별로 없었다.
트라우트롭트는 전쟁 말기에 일어난 "전투기 조종사의 반란(Mutiny of the Fighter Pilots)" 사건에 주동자 중 하나였다. 하네스 소령은 분노한 괴링에 의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sburg)에 있는 제4비행학교(4 Flieger-Schul Division)라는 한직으로 쫓겨났다. 독일이 항복했을 때 되베리츠(Döberitz)에 머물러 있던 그는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강제 예편되었다. 이때까지 그의 출격횟수는 560회에 달했고 58번의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전장을 떠돌며 군인으로 지냈던 그는 좀체로 민간인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서독이 공군을 다시 일으키자 1957년 10월 1일에 서독 공군의 장교로 재입대했다. 1960년대 동안 그는 과거 맡았던 공군 검열관 보직을 유지했는데, 아마도 그가 전쟁 당시 보여준 꼼꼼한 행정 능력이 인정받은 결과일 것이다. 1970년 7월 30일에 중장으로 예편한 그는 이번에는 진짜로 민간인으로 돌아갔다. 2차 대전 관련 협회에서 중요 직함들을 겸임한 그는 각종 행사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베테랑 중 하나였다. 1995년 1월 11일 겨울 아침에 뮌헨 부근의 바트비제(Bad Wiessee)에서 노환으로 사망했을 때, 하네스 트라우트롭트의 나이는 82세였다.
2급 철십자 훈장
1급 철십자 훈장
공군 명예컵
기사철십자 훈장
독일 황금십자장
1. 소개
출생 : 독일 제국 Groß-Obringen
출격횟수 : 560회
격추수 : 58기
소속 : 콘돌 군단 J/88, JG 77, JG 51, JG 54
최종 계급 : 대령(루프트바페) / 중장(서독 공군)
사망 : 독일 Bad Wiessee
2. 유년과 청년 시절
1912년 3월 3일, 튀링겐주의 그로스오브링겐(Großobringen)에서 '''하네스 트라우트롭트'''가 태어났을때 독일 제국의 통치자 빌헬름 2세는 노골적으로 해외 영토를 빼앗아 자신의 제국을 확장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다. 소년이 된 하네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1차 대전에서 패배하고 온 국민들이 비탄에 빠진 채 생활고에 허덕이는 모습이었다. 19세가 되던 해 자원하여 군대에 들어간 그는 볼프강 팔케와 귄터 뤼초 같은 동기들과 비행학교에서 조종 교육을 받았다. 물론 이 시기의 독일은 승전국이 묶어 놓은 조약 때문에 공군을 보유할 수 없었고, 이들 동기 9명은 소련의 리페츠크(Ли́пецк)에 있는 전투조종사 학교에 보내져 그곳에서 비행술을 갈고 닦았다.
3. 스페인 파견
1936년 8월 7일에 6명의 조종사들과 함께 공군이 마련한 선편을 타고 스페인의 카디스(Cadis)에 도착한 트라우트롭트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팔랑헤들을 지원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세빌랴 비행장 근처에서 공화파 항공기들을 목격했다. 우린 8월 9일부터 하인켈기를 조립하는 작업을 도왔는데 지상 정비사들과 환상적인 팀웍을 보이며 6대의 전투기를 출격시킬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스페인 대원들은 조용히 곧 닥칠 전투를 기다리는듯 했지만 우리는 당장이라도 전투기에 올라타 싸우고 싶은 열정이 들끓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하인켈 He 51 복엽 전투기를 몰면서 동료 크라프트 에버하르트(Kraft Eberhardt : ?~1936 : 7대 격추)와 함께 신생 루프트바페 첫 격추 전과를 거두었다. 그가 8월 25일에 처음 떨군 적기는 정찰 임무중이던 브레게 19(Breguet XIX)였다. 5일 후인 8월 30일 오후 출격에서 그는 포테즈 540 폭격기를 두 번째 제물로 삼았지만, 후방 사수가 격렬하게 반격해대는 통에 자신도 냉각기에 피탄 당해 기체를 버리고 비상 탈출해야만 했다. 공화파들은 이것을 첫 격추 전과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졸지에 하네스 트라우트롭트는 첫 격추와 첫 피격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 셈이다.
12월이 되자 본국으로부터 최신예 Bf 109의 원형기 4대가 보내져왔는데, 물론 이 기체는 최정예 4명만 몰수 있었고 뛰어난 비행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트라우트롭트 중위도 여기에 끼어 있었다. 신예기에 올라타고 날아오른 그는 곧바로 러시아제 투폴레프 SB 폭격기와 I-15, 그리고 단엽전투기인 I-16으로 혼합 편성된 공습 부대를 요격했다. 그는 최첨단의 메서슈밋 전투기로 갈아타고 3대의 적기를 더 격파했고 에이스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사실, 그는 개인적인 무공보다는 베르너 묄더스와 함께 단엽 전투기에 어룰리는 새로운 전술을 연구하고 다듬어내는 공이 더 컸다. 해와 파견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는 스페인 금십자훈장(Spanienkreuz in Gold mit Schwertern)이 주어졌다.
4. 폴란드와 영국에서
독일로 돌아온 그는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개최된 국제 비행경기인 드라이어-파트루리제(Dreier-Patrouille)에 특별히 경주용으로 튜닝된 Bf 109를 몰고 참가해 각종 상을 휩쓸었다. 이때 이미 그는 제132전투항공단의 제12중대(12/JG 132)를 이끄는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이 부대는 1938년 11월 1일에 제331전투항공단 제2비행단(II)./JG 331)으로 재편성되었고, 이듬해에 제2차 세계 대전의 개전을 맞게 된다.
폴란드 침공 작전 당시, 트라우트롭트는 제77전투항공단 제2비행단(II/JG 77)에 복무하고 있었다. 개전 첫날 그는 바르타강(Warta) 상공에서 PZL P.23 카라스 급강하폭격기를 격추시켰다. 보름 후인 1939년 9월 19일에 그는 제20전투항공단의 수석 비행단장(I./JG 20)이 되었고 이어진 프랑스 침공 작전에서 2대를 더 떨구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을 앞두고 그의 부대는 제51전투항공단 제 III 비행단(III./JG 51)으로 재편성되었다. 해협 전투를 하면서 2대의 영국 공군기를 더 격파한 그는 드디어 독일 공군이 인정하는 에이스(Ass) 자격을 갖추고 대위로 승진했다.
5. 항공단장이 되다
독일 공군은 개전을 맞아 새롭게 전투기 부대를 창설했는데 그 중심에는 "녹색 심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제54전투항공단이 우쭉 서 있었고, 트라우트롭트가 그 지휘봉을 잡게 된다. 헤르만 괴링이 영국 공략을 하는 동안 그는 해협 상공에 120회나 출격을 반복하면서 부하들을 직접 이끌었다. 영국 전역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그는 격전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격추수를 13대까지 끌어올렸다.
6. 검열관 생활
JG 54는 발칸 반도 침공 작전에 이어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하게 된다. 정식으로 소령이 된 그는 1941년 7월 27일에 20대 격추의 무공을 치하받기 위해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았고 해가 저물기 전에 26대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42년 동안 16대를 추가로 격추시켰고, 1943년 2월 15일에는 50번째 전과를 거두게 된다. 7월 6일부로 그는 일선 지휘관 보직에서 물러나 아돌프 갈란트가 있는 전투기대 총감(General der Jagflieger)의 사무실에서 지상 근무를 하게 된다. 그나마 그가 맡은 임무는 검열관이어서 각 부대를 바삐 도느라 베를린의 제국항공성에 머물고 있을 시간을 별로 없었다.
7. 전투조종사의 반란
트라우트롭트는 전쟁 말기에 일어난 "전투기 조종사의 반란(Mutiny of the Fighter Pilots)" 사건에 주동자 중 하나였다. 하네스 소령은 분노한 괴링에 의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sburg)에 있는 제4비행학교(4 Flieger-Schul Division)라는 한직으로 쫓겨났다. 독일이 항복했을 때 되베리츠(Döberitz)에 머물러 있던 그는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강제 예편되었다. 이때까지 그의 출격횟수는 560회에 달했고 58번의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8. 종전 후의 삶
오랜 시간 동안 전장을 떠돌며 군인으로 지냈던 그는 좀체로 민간인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서독이 공군을 다시 일으키자 1957년 10월 1일에 서독 공군의 장교로 재입대했다. 1960년대 동안 그는 과거 맡았던 공군 검열관 보직을 유지했는데, 아마도 그가 전쟁 당시 보여준 꼼꼼한 행정 능력이 인정받은 결과일 것이다. 1970년 7월 30일에 중장으로 예편한 그는 이번에는 진짜로 민간인으로 돌아갔다. 2차 대전 관련 협회에서 중요 직함들을 겸임한 그는 각종 행사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베테랑 중 하나였다. 1995년 1월 11일 겨울 아침에 뮌헨 부근의 바트비제(Bad Wiessee)에서 노환으로 사망했을 때, 하네스 트라우트롭트의 나이는 82세였다.
9. 서훈
2급 철십자 훈장
1급 철십자 훈장
공군 명예컵
기사철십자 훈장
독일 황금십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