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의 남정
1. 개요
이릉대전 이후 위나라의 황제 조비의 오나라에 대한 공세. 모두 세 번의 원정이 있었고, 세 번 다 실패함에 따라 삼국의 정세가 고착화 되었다.
2. 첫 번째 원정(222년~223년)
오나라가 촉한의 공격을 물리쳤을 무렵, 위나라의 황제 조비는 신비와 환계를 오나라에 보내 오왕 손권의 세자인 손등#s-2을 인질로 보내라고 최후 통첩을 했지만 애초부터 진심으로 항복한 손권이 아니었는만큼 깔끔하게 거부한다.
손권은 이미 이전부터 사실상 독립 세력이었고, 조비에게 신종을 한 것도 촉한의 공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오나라가 단독으로 이릉대전에서 촉한을 물리쳤으니 조비는 거의 도움이 안 됐다. 이런 상황에서 조비가 볼모를 보내라니 거절할 만도 하다.
이에 조비는 222년 9월 조휴, 장패, 장료에게 동구로 나아가게 하고 조인에게는 유수로 서황, 장합, 문빙, 조진, 하후상에게는 강릉으로 진격을 명한다. 손권은 조비군이 남하하자 여범 등에게 다섯 군대를 인솔하여 수군을 이용해 조휴 등을 막도록 하고, 제갈근, 반장, 양찬에게는 남군을 구하도록 했으며, 주환을 유수의 도독으로 임명하여 조인을 막도록 했다.
사실 손권 역시도 유비와의 싸움으로 병사들은 지쳐있었고 당시 양, 월 땅의 이민족의 대다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이민족은 또 다시 때는 이때다 하면서 날 뛰던 상황으로 내부적으로 환난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였다. 때문에 손권은 매우 겸허한 인사로 엄살을 피면서 조비에게 편지를 올려 스스로 잘못을 고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비는 또 "삼공이 그대의 과실을 보고했는데, 모두 근거가 있었다."며 살살 달래고 대신들에게 탓을 넘기면서도 손등을 볼모로 보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비는 답정너식으로 "유비 물리친 것도 잘했고 네가 보낸 공물도 잘 썼는데 닥치고 네 아들이나 보내 임마"라는 답변을 한 것이다."만일 저의 죄악이 사면되지 못한다면, 응당 토지와 백성들을 봉환하고 교주#s-3에 몸을 의탁하고 여생을 끝마치기를 원합니다."
물론 손권이 그 말을 또 들을 리가 없다. 손권은 바로 좆까를 외치고 아예 스스로 연호까지 정하며 사실상 독립 선포를 한 다음 대치 상황을 계속했다.[1] 사실 이 시기 손권이 수비측이라고 해도 마냥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앞서 말한 엄살도 사실 실제하는 내부적 문제라는 점에서 마냥 엄살만은 아닌 데다가 손권은 장강 주요 물길만 장악한 상태고 위가 유수구를 강하게 압박하면 수군 전력을 죄다 유수구로 집결시켜야만 수비가 가능했는데, 그래서 유수구에서 도하 협박하면서 형주 주요 거점들을 죄다 공격하니까 조비 본대의 유수구 도하를 막는 대가로 형주 거점들을 죄다 공성당하게 방치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2]"아침에 손등을 직접 수도에 도착하도록 하라. 그러면 저녁에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오도록 할 것이다. 이 말의 진실은 드넓은 장강(大江)과 같도다!"
어쨌거나 손권은 이런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장강에서 적이 된 조비를 맞아 싸운다. 이때 조휴 등이 여범을 상대로는 호투했으나 계속된 대치를 뚫지 못하고[3] 강릉에서 주연이 고립된 채로 6개월 동안 전염병에 시달리면서 분투하였으며 유수구에서는 대사마 조인이 주환에게 깨지고 하제 등의 원군이 도착하자 결국 실패하고 만다. (222년)
10월, 손권은 유비가 백제성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위와 싸우고 있는 마당에 유비가 계속해서 백제성에서 기회를 노리는 듯하니 그로서는 두려워할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손권은 먼저 화친을 청한다는 식으로 굽히고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4]
11월 여범의 군사는 태풍을 만나는 등 고생하지만 서성과 전종의 활약, 그리고 하제의 돈지랄을 보고 겁먹은 조휴군은 결국 퇴각한다. 강릉과 유수에서는 계속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12월, 손권은 유비에게 화친을 청한 이후 유비가 보낸 편지를 보고 정천을 보내 유비와의 우호를 회복하지만, 조비와도 의연하게 편지를 왕래하는 능구렁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강표전>에 따르면 이때 유비의 편지를 받아보고 손권이 말하길,
다음해(223년) 정월에도 위나라의 강릉에 대한 적의 공격은 계속됐고 조비군이 강릉의 모래톱을 점거했으나, 손권이 강하산에 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3월 달에는 주환이 조인, 왕쌍, 상조 등을 격파. 강릉 쪽도 주연의 신출난 활약으로 적을 물리친다. 상조와 조태(조인의 아들)는 주환에게 격파되었다. 결국 3월 8일 조비는 완성에서 궁으로 돌아왔다. 그 달 19일, (작년 11월에 대사마로 승진한) 조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달 역병이 크게 유행했다는 기사를 보아 역시 장강 유역의 전염병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근자에 현덕의 글을 얻어 읽었는데, 대단히 깊이 있고 자신의 잘못을 탓하며, 예전의 좋았던 사이로 되돌리기를 바란다. 전에 서쪽에서 촉(蜀)이라고 하던 것은 한(漢)나라 황제가 아직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 한나라가 이미 폐하였으니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라 할 만하구나."
4월, 손권은 주위 사람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한다. 한편, 촉한에서는 소열제 유비가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풍희를 보내 이를 위로한다.
2.1. 관련 기록
손권이 백성들을 해치니 짐은 도적들의 기세가 늘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고로 맹장에게 3갈래 길로 나누어 더불어 정벌하도록 명령한다. 지금 동쪽을 정벌하는 여러 군대와 손권의 무리인 여범(呂範)등이 수전을 치러 4만 명의 머리를 베고 1만 척의 배를 노획하였다. 대사마가 유수(濡須)에 머물러 지키면서 그 노획한 바도 또한 만으로 헤아린다. 중군, 정남이 강릉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좌장군 장합(張郃) 등이 수군을 이끌고 직접 강을 건너 남저(南渚)를 공격하니 적중에 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이 수 천 명이었다. 또한 지하도를 만들어 성을 공격해 성중에서는 참새나 쥐조차 바깥에 나갈 수 없도록 하였으니 이는 상 위의 고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적중에 전염병이 퍼져 강안을 휩쓸었으므로 전염되는 것이 두려웠다.(전염병으로 인해 우리가 봐줬다는 핑계.)
문제기(조비전)
문제가 손권을 정벌할 때(222년) 조휴를 정동대장군 가황월에 임명해 장료 등과 여러 주,군의 2십여 군軍을 이끌게 했는데, 손권의 대장(大將) 여범(呂範) 등을 동포(洞浦)에서 공격해 무찔렀다. 양주목(揚州牧)에 임명되었다.
조휴전
황무 원년(222), 위나라에서 태사마 조인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이 유수로 향했다. 조인은 주를 취하기 위해 우선 위나라가 동쪽으로 선계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거짓으로 알리려고 했다. 주환은 병사를 나누어 선계로 가도록 했다. 대우가 이미 출발한 후, 주환은 갑자기 조인이 유수로 진군하려고 하며 70리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주환은 사자를 파견해 선계로 향해 가는 병사들을 좇아 돌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선계의 병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조인이 신속하게 도착했다. 그 당시 주환 수하의 병사와 그가 통솔하는 부대로 남아있는 자는 5천 명이었다.
(중략)
주환은 그래서 깃발을 쓰러트리고 북을 울리지 않은 채 외부에 허약함을 나타내 조인을 유인하여 이르도록 했다. 조인은 과연 그의 아들 조태를 파견해 유수성을 공격하도록 했으며, 장군 상조를 나누어 파견하여 제갈건과 왕쌍 등을 지휘하여 유선을 타고 따로 중주를 습격하도록 했다. 중주는 부대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조인 자신은 1만 명을 인솔해 탁고에 머물렀고, 진태 등은 후방에서 막도록 했다. 주환 부대의 병사들은 유선을 공격하여 취했고, 때로는 별도로 상조 등을 공격했다. 주환 등은 직접 진태에게 항거해 조태의 군영을 불태워 퇴각하도록 했다. 그래서 상조를 죽이고 왕쌍을 사로잡아 무창으로 보냈다. 이 싸움에서 머리를 베이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는 1천여 명이나 됐다. 손권은 주환의 공로를 칭찬하고, 가흥후로 봉했으며, 분무장군으로 승진시키고 팽성의 상을 겸임하도록 했다
주환전
가을 9월, 위나라는 곧 조휴, 장료, 장패에게 동구까지 나가도록 명령하고, 조인에게는 유수까지 병사를 출동하도록 했으며,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에게는 남군을 포위하도록 했다.
손권은 여범 등에게 다섯 군대를 인솔하여 수군을 이용해 조휴 등을 막도록 하고, 제갈근, 반장, 양찬에게는 남군을 구하도록 했으며, 주환을 유수의 도독으로 임명하여 조인을 막도록 했다.
(중략)
겨울 11월, 큰 바람이 불었고, 여범 등의 병사 수천 명이 익사하여, 남은 군사는 장강 남쪽으로 돌아왔다. 조휴가 장패에게 날랜 배 5백 척과 죽음을 각오한 병사 1만 명을 주어 서릉을 습격하도록 하여 성의 수레를 불태우고 수천 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았다. 장군 전종, 서성은 위나라 장수 윤로를 추격하여 목을 베고 수백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중략)
2년(223년) 봄 정월, 조진은 군대를 나누어 강릉 중앙의 사주를 점거했다. 이 달, 손권은 강하산에 성을 쌓았다.
(중략)
3월, 조인은 장군 상조 등을 파견하여 병사 5천을 이끌고 유선을 타고, 새벽에 유수 중앙의 사주를 건너도록 했다. 조인의 아들 조태는 군사를 이끌고 급히 주환을 공격했다. 주환은 병사로 방어하면서 장군 엄규 등을 파견하여 상조 등을 격파시키도록 했다. 이 달, 위나라 군대는 모두 퇴각했다.
오주전(손권전)
장합과 조진에 명해 궁으로 와서 조알하게 하고 남쪽으로 보내 하후상(夏侯尙)과 함께 강릉(江陵-형주 남군 강릉현)을 공격하게 했다. 장합은 별도로 제군을 지휘해 장강을 건너며 섬 위의 둔오(屯塢-방어진지)들을 점령했다.
장합전
황초 3년(222), 거가(車駕)가 완(宛)으로 행차하여, 하후상을 보내 조진과 함께 제군(諸軍)을 이끌고 강릉을 포위하게 했다.
강(江 -장강)을 사이에 두고 손권의 장수 제갈근(諸葛瑾)과 대치했는데, 제갈근이 강으로 들어가 강 가운데 섬을 점령하고 강 가운데서 수군을 나누었다. 하후상은 밤에 많은 유선(油船-기름을 실은 배)으로 보기(步騎) 1만 여 명을 이끌고 하류에서 몰래 강을 건너 제갈근의 제군(諸軍)을 공격했다. 강을 끼고 양쪽에서 적군의 싸움배를 불사르고 물과 육지에서 함께 공격해 깨뜨렸다.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 전염병이 돌자 조칙(詔敕)을 내려 군을 이끌고 철군하도록 했다.
하후상전
오록에 이르길 조진과 하후상 등이 강릉에서 주연을 포위하고, 주중(州中)을 나누어 점거하니, 제갈근이 대병을 이끌고 구원했다. 제갈근이 성품이 넒고 급하지 않아, 도리를 미루어 보고 계획을 맡기니, 끝내 기복 화복(禍福)이 생길한만한 술책은 내지 않고, 병사들이 오랫동안 해이해지지 않으니, 손권이 이것을 존경하였다. 봄물이 날 때쯤에 반장 등이 상류 물가에 성을 쌓고 제갈근은 부교를 띄워 진공하니, 조진 등은 퇴각해 패주하였다. 비록 큰 공훈은 없었지만, 또한 군대와 경내를 보전한 것을 공으로 삼았다.
제갈근전
위의 장수 하후상 등이 남군을 포위하고, 선봉의 3만명을 나눠 부교를 만들어 백리주(百里洲)를 건너오자, 제갈근과 양찬(楊粲)이 아울러 병사를 모아 구원하러 갔으나,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랐고, 위나라 병사들은 날마다 건너오면서 끊이지 않았다. 반장이 말하길 “위의 세력이 비로써 성한데다,강물 또한 얕으니, 더불어 싸울 수 없습니다”라 하고, 바로 통솔하던 자들을 거느리고, 위의 진영 상류 50리쪽에도착하여, 갈대 수백만 묶음을 베어 이를 묶어 큰 뗏목을 만들어, 강물을따라 오며 불을 질러 적의 부교를 불태우고 부수고자 하였다. 뗏목을 만드는 일이 끝나자,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려 막 내려가려 할 때, 하후상이 바로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반장은 아래로 내려가 육구(陸口)를 수비했다.
반장전
2.2. 결과
위나라는 동포 방면의 20개 군, 유수방면 조인의 군이 보기를 합쳐 수만, 조진의 강릉방면 군은 선봉만 3만을 동원해 공격해 왔으나 전염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위나라는 오군이 수군 4만명 전사, 1만여척의 배 노획, 유수에서의 만여명 노획, 서릉[5] 에서 잡히거나 죽은 사람 수천명에 큰 피해를 입었다고 발표한다. 다만 이것도 뻥튀기가 있을수 있다. 이 기사를 종합해 보면 오나라는 거의 6만여명 이상의 대 피해를 입은 셈인데 이 정도면 거의 이릉대전 촉한만큼의 피해이다. 이후에도 두번의 위나라 공세를 잘 막아내는 것을 보면 이 피해는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조비는 자신이 내려준 오왕 손권을 이기지 못해 위신에 손상을 입은 반면 손권은 명색이 황제국들인 이릉대전의 촉, 조비가 친히 남정한 위를 연속으로 막아내서 그 권위가 높아졌다. 이는 황제국 오나라로 가는 첫 걸음이었다.
3. 두 번째 원정(224년)
224년 7월, 손권이 위와의 교류를 끊자 조비는 손권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이때 신비는 조비에게 "님 아버지도 못한 일인데다가 그때보다 군사는 더 적어졌는데 어떻게 이기려고? 열심히 개간이나 해."라는 말에 조비는 저 호로 같은 놈들을 자손들에게 남겨주어야 되냐고 답문하는데 신비는 문왕이 주나라를 무왕에게 넘겼음을 상기시키지만 조비는 듣지 않고 8월에 수군을 만들게 하지만 어좌선을 건조하는 와중에 제갈탄은 죽을 뻔하고 두기가 어좌선을 건조하다가 죽는 등. 조짐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비는 사마의를 남겨 허창을 지키게 하고 서선, 유엽, 조휴, 조엄, 위진 등을 이끌고 채하, 영수를 거쳐서 회하에 배를 띄워 수춘까지 간 다음 9월달에 광릉에 도착한다.
하지만 조비가 도착해서 본 광경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곳에는 울타리가 있는데 성벽은 수백 리나 뻗쳐져 있고, 배로 장강의 물이 가득 차 있으니 위가 비록 무장한 기병을 일천 군을 갖고 있다고 하여도 쓸데가 없어보였다. 조비는 대강을 바라보며 "저곳은 인물이 있으므로 도모할 수가 없겠구나."며 탄식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서성의 계략이었는데, 그는 예전부터 계획을 세워 건업을 따라 울타리를 쌓고, 부락을 지으며, 울타리 위에는 임시 누각을 설치하며, 강에는 배를 띄워놓았다. 즉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놓은 것.''' 여러 장수들이 소용 없는 일이라고 했고 건강실록에 따르면 심지어 손권도 그렇게 여겼지만 서성은 듣지 않고 완고하게 세웠는데 효과가 있었던 것. 사실 웃기거나 멍청한 짓은 아니고 위성계(僞城計)라고 엄연히 있는 병법으로, 실행해서 성공까지 한 건 서성이 뛰어났던 거다. 간보의 진기에 따르면 조비가 광릉에 있으니 오나라 사람들이 크게 놀라 마침내 강을 임하여 가짜 성을 만들었는데 석두에서 강승에 이르기까지 수레를 나무기둥으로 삼고 옷가지를 삿자리로 삼고서 채식을 가하니 하루저녁에 완성되었다. 위나라 사람들이 강의 서쪽에서 바라보고 심히 두려워하니 마침내 퇴군하였다.[6]
그후 조비는 용주에 탔으나 이번에는 폭풍을 만나서 표류하다가 거의 전복되어 물에 빠질 뻔하고 서선은 이곳에서 파도를 타며 앞으로 나아가는 기행까지 보여준다. 이게 정말 위험했던게 포훈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는 조비가 탄 배가 표류하다가 오나라 쪽 물가에 떨어졌다는 얘기로 자칫하면 대 위나라의 황제가 자기가 폐한 오왕 손권의 포로가 될 뻔했던 것이다. 포훈의 표현대로 정말 위나라 종묘사직이 날아갈 뻔했다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은 셈이다.황초 6년(225) 가을에 문제는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크게 논의하도록 했는데, 포훈이 정면을 향하고 간언했다.
왕의 군대가 자주 정벌하러 나갔지만 승리하지 못한 것은 모두 오와 촉 두나라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자하고 있고, 산과 물의 험난함에 기대어 있어 공격하여 얻기 어려운 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오를 정벌한 때 용주가 표류하여 오나라 군사가 있는 남쪽 해안에 떨어져 있었으며, 폐하의 옥체는 위험에 처했고, 신하들은 간담이 부서질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종묘는 거의 기울어 엎어지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백대의 교훈이 될 것입니다.
포훈전
그럼에도 조비는 뜻을 굽히지 않고 사구에서 형주, 양주의 군사로 진격하게 하며 신하들을 불러 손권이 항복하러 오지 않겠냐며 설레발을 치는데 이때 주위에 유엽을 제외한 신하들은 당연히 예스맨 중, 물론 손권은 오지 않았다. 이에 조비는 유엽의 계책이 맞았다면서 내가 촉, 오을 멸망시킬 수 있도록 염두에 두었다면, 단지 그들의 사정을 아는 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때 조휴가 항복한 적을 잡아 손권이 이미 유수구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며 보고한다. 여기서는 위진이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과연 이 내용은 지키는 장수가 지어낸 것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온 10월, 조비는 장강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도모할 수 없겠다는 탄식을 하며 조엄을 정동군사로 남기고 쓸쓸히 퇴각한다.
여기서 손권이 한 일은? 서성의 위성계와 장강을 믿고 궁 안에서 편히 지내고 있던 것. 그리고 이 계책은 성공해서 조비는 3개월 만에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군사를 되돌린다.
4. 세 번째 원정(225년)
225년 윤3월 24일, 조비는 지난해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오나라를 칠 계획을 세운다. 이때는 포훈이라는 자가 반대하지만[7] 포훈은 이미 여러모로 조비에게 미움을 산 사람이라 곧바로 좌천된다. 8월 달에 수군을 가지고 초에서부터 내려와서 와수를 돌아 회하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장제는 표문을 올려 물길이 통행하기 어렵다고 말했고, 또 삼주론을 올려 조비를 풍자했지만 조비는 듣지 않고 출병한다.
10월달이 되어서야 또 다시 광릉에 도착한 조비는 그곳에서 관병을 하는데 무장한 병력은 10여만 명이었고 정기도 수백 리에 이어졌기에 장강을 건너기로 뜻을 굳히지만 오나라 병사들은 강을 굳게 지키고 있었고 '''강변은 얼어붙은 상황이었다.''' 그것 때문에 아예 강에 배를 띄우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강 중앙에서는 파도까지 심하니 조비는 하늘이 남북을 갈라놨다며 탄식하며 돌아오려고 하나 이때 손소가 보낸 고수가 500명을 이끌고 조비를 요격한다. 크게 놀란 조비는 도망치고 고수는 부차와 우개를 빼앗아 돌아온다.
조비는 퇴각하려고 했으나 과연 장제의 말대로 강의 사정으로 인해 수량 때문에 제대로 된 퇴각도 못하고 군용 배 수천 척이 모두 멈춰 나가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군사들을 모두 남겨 둔전을 하게 하지만 장제가 이것이 위험하다고 하니 황제는 이번에는 장제의 말을 따라 퇴각한다. 중간에 물이 없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자 배를 한데 모아두고 호수의 물을 막았다가 터트리는 방법으로 조비는 겨우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위왕 승계 직후의 열병까지 생각하면 거의 매년마다 원정에 실패했던 것이다. 기주의 기근 등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진행했던 마지막 원정에서도 실패하여 돌아온 조비는 226년 정월 허창에 도착하려 할 때 허창성의 남문이 이유없이 무너지자 불길하게 여기고 낙양으로 들어갔다.
5. 조비의 남방 정벌의 평가와 영향
조비는 즉위 이래 5년간 일관되게 남방 정벌 사업을 벌였으나 되려 성과는 없었다. 진공 루트는 일관되게 오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릉의 패전과 유비 사후 촉은 큰 타격을 입어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 상태였고, 촉으로 들어가기는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문제기〉를 보면 초반의 내정 수습책을 제외하고는 계속 남방 정벌 이야기만 나오는데, 세세한 기록이 없을 뿐이지 한마디로 패전의 연속이다.
어떻게 보면 성격적 문제에 비해 가장 알려지지 않은 조비의 실패점이다. 이는 대부분의 기전체 사서가 그렇다시피 기록이 세세하게 분할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리기가 쉽지 않고, 영토를 주고받지 않다보니 세력 판도에도 큰 변화가 없었던 데다가 적벽대전, 이릉대전처럼 한 번에 왕창 말아먹은게 아니라 몇년에 걸쳐서 꾸준히 말아먹었기 때문에 '대참패'라는 이미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의 매년 전쟁하러 나갔다가 지고 돌아왔으니 패배의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패인은 장강을 넘어 작전하기가 몹시 까다롭다는 것인데, 공성전에서 방어측이 대놓고 뻗대면 버티기 외엔 별 수가 없는데 전염병 닥치기 너무 쉬운것이 패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조비의 무리한 원정은 '손권 좋은 일'만 시켜줬다고 볼 수 있다. 소위 '위나라 황제'라는 조비가 '신하의 반대도 무시하고 자신이 손수 책봉한 오왕'이었던 손권을 몇번이나 공격하고도 제대로 이기지도 못하고 매년 패배만 거듭했으니, 후한의 정통성을 계승한 위 황제의 위엄이 떨어지는 결과는 당연하고, 오나라에서는 지역의 군사적 수호자로서 손권의 정치적 입지가 급상승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게다가 손권은 이전부터 조비가 사치하고 부도덕 하다고 비판하고 자신의 도덕적 명성을 올리는 프로파간다 작업을 하고 있었다. 결국 조비 사후 몇년 뒤에는 손권이 마침내 황제에 등극했으니, 조비의 무리한 원정이 떡밥처럼 작용해서 '손권의 명성'만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손권 입장에서도 독자세력으로서의 오나라를 완성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이릉대전과 조비의 1차 남정을 연이어 치룬다고 3년간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2차, 3차 원정도 큰 피해가 없어 그렇지 대규모의 원정이었다. 그래서 형주 뒷치기와 위나라로의 신종을 실수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잘 막아서 다행이지만 꽤 아슬아슬하기도 했고 여기서 강릉 먹혔으면 형주서 그간 있던 일들이, 적벽대전이 다 공염불 되다시피 하는건데 잘 버텼다. 진짜 촉한과 위의 공격 중 한번이라도 뚫렸다면 삼국지 끝날뻔 했다. 한 마디로 이릉대전과 함께 적벽 이후 손권 인생에서 가장 위험, 중요한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228년 석정 전투의 대승과 촉한과의 동맹으로 위신을 더욱 올린 오나라는 황제국의 위치까지 오른다.
이 남방 정벌은 큰 나비효과가 되는데 조비가 오를 치느라 국력을 낭비하는 사이 촉한은 제갈량이 노력한 결과로 익주 지방의 경제력을 활성화시켰고, 이를 통해서 금새 예전의 국력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남만 정벌로 내부를 안정시키고 이후 제갈량이 북벌을 단행할 수 있을 정도로 급성장한 것이다. 조비가 죽은 후 아들인 조예는 아버지의 뻘짓으로 인해 고생을 해야 했다. 국력을 회복한 촉한이 제갈량의 지휘 아래 계속해서 위를 침공하기 시작했고 위의 침공을 받은 오 역시 빡쳐서 촉한과 연합해 위의 국경을 침입했다. 이 때문에 조예는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오나라와 촉한의 침공을 막는데에 써야했다.
6. 기타
작가가 조비빠 성향인 삼국전투기에서는 224년과 225년의 원정실패가 단 두 컷으로 간단히 묘사되며, 조비의 치명적 실패 역시 그려지지 않는다.
중국 드라마 삼국에서는 조비가 남정을 반대하는 사마의를 윽박질러가며 무리하게 남정을 강행한 이유를 만들어냈다. 사실 조비는 어릴 때부터 지병을 앓고 있었으며, 자신이 살아있을 때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싶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무리라는 걸 알았지만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행동이라고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