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혈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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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혈마 전쟁(영어: War of the Heavenly Horses 또는 Han–Dayuan war, 한자: 汉攻大宛之战) 또는 천리마 전쟁, 한-대원 전쟁은 기원전 104년~102년 동안 한 왕조가 대원(大宛)의 명마였던, 한혈마(또는 천리마)를 무력으로 찾아오기 위해 벌였던 전쟁이었다.
기원전 2세기경의 전한은 유목민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로 북쪽의 거대한 유목 연합 제국이 끊임없이 한나라의 북부 영토를 침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100년 이상, 끊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흉노 연맹은 전한에 계속 공세를 퍼부었는데 심지어 이를 견디지 못하고 한나라가 흉노에 공물을 바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기원전 180년대부터 한나라에 명군들(문제/경제/무제 등)이 뒤이어 등장하면서, 점차 흉노 연맹에 대등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특히 146년에 세종 무제가 즉위하면서 흉노와의 대결은 무척 거세지게 되는데, 이에 한 무제는 "홀로 거대한 흉노를 물리치기는 힘드니, 흉노와 적대인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한 무제는 마땅한 동맹국을 살펴보다 월지(月氏)를 조사하게 된다.
월지국은 예로부터 흉노와 적대적인 국가였는데, 특히 2세기경 흉노의 공세로 인해 땅을 잃고 서쪽으로 밀려난 터라 흉노라는 말만 듣는다면 이를 간다라는 기록을 통해, 한 무제는 큰 회담을 가져 "누가 월지국으로 가서 동맹을 맺어올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곧바로 장건이 월지국의 외교관으로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며 적극적인 의지를 밝힌다.
장건은 간쑤성 부근에 위치해 있다는 정보를 토대로, 서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월지와의 동맹을 맺기 위해 서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건은 월지를 향하기도 전에 흉노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로써 그는 10여 년 간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흉노의 선우는 그가 흉노에 충성을 약속하자, 흉노에 터를 잡고 생활하게 해주었다. 따라서 장건은 포로 생활 동안에 좋은 대접을 받았고, 심지어는 흉노족 여자와 결혼까지 하고,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10여 년의 포로 생활에도 불구하고 장건은 한 황제의 임무를 끝까지 져버리지 않았으며 간쑤성을 지나, 페르가나와 박트리아 지방의 월지를 찾기 위해 서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이내 장건은 월지 본토에 도달했으나 월지의 지도자는 흉노와 전쟁을 원치 않다는 뜻을 확실히 표현했는데, 흉노를 피해 서쪽으로 이주했더니 막상 그곳이 고향 땅보다 살기 더 좋았기 때문에 아예 그곳에 눌러붙어 버렸고, 특히 흉노에 관한 복수심도 이미 옛날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에 장건은 자신의 흉노 내에서 보낸 포로 생활 10년을 포함한 임무에 대한 사명감이 무의미해지는 일이 발생하여 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월지의 주변에 있던, 한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서역의 국가들을 탐방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중에서도 여러 도시국가를 탐방하면서, 특히 '에로진/얼진(영어: Erjin)'이라는 나라를 특별히 기록했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을 '대원' 또는 '대이오니아인(Great Ionians)'이라 불렀다고 했는데, 이는 '대그리스인들(Great Greeks)'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었다.
대원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우선 200년 전의 마케도니아 제국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기원전 320년도의 마케도니아 제국의 대군주,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와 파키스탄의 제후들을 정복하고, 페르시아-그리스인 동화 정책을 실행, 이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동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그의 장군들이 뒤를 이어 여러 왕국을 제국의 영역 안에 세웠는데(디아도코이), 인도 북부에 세워진 대표적인 나라들로 그레코-박트리안 왕국(Greco-BactrianKingdom)과 인도-그리스 왕국(Indo-Greek Kingdom)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박트리아와 페르가나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130년을 기준으로 북방에서 월지족이 침공해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이 소멸해버렸다. 하지만 이때 박트리아와 페르가나에는 그리스인들의 도시들이 여전히 건재했는데[1] , 심지어 월지에게 복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철학, 무역, 법 시스템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그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의 명맥을 이어 갔고, 마침내 한 왕조의 장건이 이 나라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장건이 대원(페르가나)을 방문했을 때, 이곳 사람들의 외모는 눈이 깊이 파여있고, 짙고 두터운 수염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 이들은 석재로 지은 세련된 건물에서 생활하는데, 서로를 배려하고 포도 와인을 생산했으며 도시의 복잡한 생김새와 독특한 무역 및 상업이 이뤄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장건은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Alexandria Eschate)에서 '천상의' 말을 보게 되었는데, 이 말들의 특징은 튼튼한 다리로, 물품 가방을 효율적으로 구비할 수 있을 만큼 타고났다고 말한다. 대원인들 사이에서는 '한혈마(sweat blood)'라고도 불렀는데, 기생충으로 인해 말의 피부에 출혈이 났을 때 보이는 피색과 흡사한 땀을 흘리는 말이라는 뜻으로 한혈마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장건은 1년 가까이 서역에서 머물다가 끝내 단념하고 동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장건은 마침내 기원전 125년, 장안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비록 서역의 나라들과 동맹을 맺지 못했지만 장건은 누구보다 서역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서역에서 겪었던 장건의 경험담을 들은 한 무제는 기원전 104년에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에 특사를 보내게 되는데, 이는 페르가나의 말을 사들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어떤 말이 주고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나라의 사절이 자국으로 조공을 맺을 것을 말했거나 말을 사려들 때, 저렴한 가격을 요구했는지는 몰라도 이를 불쾌히 여긴 그리스인들은 사절을 살해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한편 이 소식을 듣게 된 한 무제는 분노하며 돈을 지불해도 안 받겠다면 힘으로라도 쟁취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한 무제는 외척인 이광리를 시켜 보병 20,000명과 기병 6,000기를 하사하여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기원전 104년, 이광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군사를 이끌고 페르가나로 향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타림 분지에 있는 곳이었는데, 이 지역에서 살고 있던 민족들은 토하라인으로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세우고 있었다. 사막에서의 긴 행군으로 보급품이 떨어지던 찰나에 있던 이광리는 토하라인들에게서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이들은 거절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광리 휘하의 군대는 토하라인들과 여러 가지 분쟁을 겪었는데, 그 와중에 적지 않은 병사를 잃고 말았다. 한군이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에 도착했을 때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아 있었고, 성벽을 깨뜨릴 방도도 없었던 이광리는 하는 수 없이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광리가 사막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무제에게 토로하자 이에 무제는 군을 3배로 늘려주는 데 이어, 60,000명의 보병과 10만 필의 황소, 3만 필의 말, 나귀와 낙타를 각각 1만 필씩 하사하여 기원전 102년, 이광리를 다시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출병시켰다. 2차 원정에서는 토하라인들의 도시들이 협력한 덕분에 보급을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이번 원정에서도 이광리는 사막에서의 긴 행군으로 인해 군사의 절반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광리는 건재한 상태의 3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의 성벽에 도달할 수 있었고 공방전을 준비한다. 그리스인들이 한나라의 초반 공세를 40일간 막아낼 수 있었지만 한군은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성벽이 무너졌을 때, 대원의 고위층들은 한군에 의해 짓밟힐 것을 두려워하여 대원 왕의 목을 베어 이광리에게 바치며 항복해왔다고 전한다. 또한 대원의 그리스인들은 하는 수 없이 자신들의 군마를 한군이 원하는 대로 제공했다. 한편으로 그리스인들의 도시에 한제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이광리는 대원에 친한파 왕을 배치시켰다. 이로서 천리마 전쟁(한혈마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토하라인의 도시 국가들은 대완에서의 한군의 승리에 경악하였고, 한군이 회군하며 들린 도시들마다 한나라에 복종하겠다는 뜻을 알렸다고 한다. 항복한 도시들에는 한군이 배치되었고, 이로 인해 타림 분지 지역이 결국 한제국의 '''서역도호부'''로 통합하게 되었다. 이광리는 한 조정에 승전보를 알리고 페르가나에서 가져온 3,000필의 한혈마를 한 무제에게 바쳤다.
박트리아와 페르가나 지방의 그리스인들은 불교로 개종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철학과 문화를 전파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그리스의 정교한 문화가 불교에 흡수되어 최초의 '불상'이라는 결과물을 생성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나타나기 전의 불교는 보리수를 통해 불교 문화를 상징했었다. 이것이 중국 대승불교에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War_of_the_Heavenly_Horses
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6%94%BB%E5%A4%A7%E5%AE%9B%E4%B9%8B%E6%88%98
한혈마 전쟁(영어: War of the Heavenly Horses 또는 Han–Dayuan war, 한자: 汉攻大宛之战) 또는 천리마 전쟁, 한-대원 전쟁은 기원전 104년~102년 동안 한 왕조가 대원(大宛)의 명마였던, 한혈마(또는 천리마)를 무력으로 찾아오기 위해 벌였던 전쟁이었다.
1. 개요
기원전 2세기경의 전한은 유목민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로 북쪽의 거대한 유목 연합 제국이 끊임없이 한나라의 북부 영토를 침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100년 이상, 끊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흉노 연맹은 전한에 계속 공세를 퍼부었는데 심지어 이를 견디지 못하고 한나라가 흉노에 공물을 바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기원전 180년대부터 한나라에 명군들(문제/경제/무제 등)이 뒤이어 등장하면서, 점차 흉노 연맹에 대등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특히 146년에 세종 무제가 즉위하면서 흉노와의 대결은 무척 거세지게 되는데, 이에 한 무제는 "홀로 거대한 흉노를 물리치기는 힘드니, 흉노와 적대인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한 무제는 마땅한 동맹국을 살펴보다 월지(月氏)를 조사하게 된다.
월지국은 예로부터 흉노와 적대적인 국가였는데, 특히 2세기경 흉노의 공세로 인해 땅을 잃고 서쪽으로 밀려난 터라 흉노라는 말만 듣는다면 이를 간다라는 기록을 통해, 한 무제는 큰 회담을 가져 "누가 월지국으로 가서 동맹을 맺어올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곧바로 장건이 월지국의 외교관으로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며 적극적인 의지를 밝힌다.
1.1. 장건의 모험
장건은 간쑤성 부근에 위치해 있다는 정보를 토대로, 서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월지와의 동맹을 맺기 위해 서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장건은 월지를 향하기도 전에 흉노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로써 그는 10여 년 간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흉노의 선우는 그가 흉노에 충성을 약속하자, 흉노에 터를 잡고 생활하게 해주었다. 따라서 장건은 포로 생활 동안에 좋은 대접을 받았고, 심지어는 흉노족 여자와 결혼까지 하고,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10여 년의 포로 생활에도 불구하고 장건은 한 황제의 임무를 끝까지 져버리지 않았으며 간쑤성을 지나, 페르가나와 박트리아 지방의 월지를 찾기 위해 서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이내 장건은 월지 본토에 도달했으나 월지의 지도자는 흉노와 전쟁을 원치 않다는 뜻을 확실히 표현했는데, 흉노를 피해 서쪽으로 이주했더니 막상 그곳이 고향 땅보다 살기 더 좋았기 때문에 아예 그곳에 눌러붙어 버렸고, 특히 흉노에 관한 복수심도 이미 옛날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에 장건은 자신의 흉노 내에서 보낸 포로 생활 10년을 포함한 임무에 대한 사명감이 무의미해지는 일이 발생하여 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월지의 주변에 있던, 한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서역의 국가들을 탐방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중에서도 여러 도시국가를 탐방하면서, 특히 '에로진/얼진(영어: Erjin)'이라는 나라를 특별히 기록했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을 '대원' 또는 '대이오니아인(Great Ionians)'이라 불렀다고 했는데, 이는 '대그리스인들(Great Greeks)'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었다.
1.2. 대원은 어떤 국가인가?
대원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우선 200년 전의 마케도니아 제국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기원전 320년도의 마케도니아 제국의 대군주,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와 파키스탄의 제후들을 정복하고, 페르시아-그리스인 동화 정책을 실행, 이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동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그의 장군들이 뒤를 이어 여러 왕국을 제국의 영역 안에 세웠는데(디아도코이), 인도 북부에 세워진 대표적인 나라들로 그레코-박트리안 왕국(Greco-BactrianKingdom)과 인도-그리스 왕국(Indo-Greek Kingdom)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박트리아와 페르가나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기원전 130년을 기준으로 북방에서 월지족이 침공해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이 소멸해버렸다. 하지만 이때 박트리아와 페르가나에는 그리스인들의 도시들이 여전히 건재했는데[1] , 심지어 월지에게 복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철학, 무역, 법 시스템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그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의 명맥을 이어 갔고, 마침내 한 왕조의 장건이 이 나라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1.3. 대원에서의 귀환
장건이 대원(페르가나)을 방문했을 때, 이곳 사람들의 외모는 눈이 깊이 파여있고, 짙고 두터운 수염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 이들은 석재로 지은 세련된 건물에서 생활하는데, 서로를 배려하고 포도 와인을 생산했으며 도시의 복잡한 생김새와 독특한 무역 및 상업이 이뤄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장건은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Alexandria Eschate)에서 '천상의' 말을 보게 되었는데, 이 말들의 특징은 튼튼한 다리로, 물품 가방을 효율적으로 구비할 수 있을 만큼 타고났다고 말한다. 대원인들 사이에서는 '한혈마(sweat blood)'라고도 불렀는데, 기생충으로 인해 말의 피부에 출혈이 났을 때 보이는 피색과 흡사한 땀을 흘리는 말이라는 뜻으로 한혈마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장건은 1년 가까이 서역에서 머물다가 끝내 단념하고 동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장건은 마침내 기원전 125년, 장안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비록 서역의 나라들과 동맹을 맺지 못했지만 장건은 누구보다 서역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서역에서 겪었던 장건의 경험담을 들은 한 무제는 기원전 104년에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에 특사를 보내게 되는데, 이는 페르가나의 말을 사들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어떤 말이 주고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나라의 사절이 자국으로 조공을 맺을 것을 말했거나 말을 사려들 때, 저렴한 가격을 요구했는지는 몰라도 이를 불쾌히 여긴 그리스인들은 사절을 살해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2. 제1차 대원 원정
한편 이 소식을 듣게 된 한 무제는 분노하며 돈을 지불해도 안 받겠다면 힘으로라도 쟁취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한 무제는 외척인 이광리를 시켜 보병 20,000명과 기병 6,000기를 하사하여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기원전 104년, 이광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군사를 이끌고 페르가나로 향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타림 분지에 있는 곳이었는데, 이 지역에서 살고 있던 민족들은 토하라인으로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세우고 있었다. 사막에서의 긴 행군으로 보급품이 떨어지던 찰나에 있던 이광리는 토하라인들에게서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이들은 거절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광리 휘하의 군대는 토하라인들과 여러 가지 분쟁을 겪었는데, 그 와중에 적지 않은 병사를 잃고 말았다. 한군이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에 도착했을 때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아 있었고, 성벽을 깨뜨릴 방도도 없었던 이광리는 하는 수 없이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3. 제2차 대원 원정
이광리가 사막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무제에게 토로하자 이에 무제는 군을 3배로 늘려주는 데 이어, 60,000명의 보병과 10만 필의 황소, 3만 필의 말, 나귀와 낙타를 각각 1만 필씩 하사하여 기원전 102년, 이광리를 다시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출병시켰다. 2차 원정에서는 토하라인들의 도시들이 협력한 덕분에 보급을 지원받을 수 있었지만 이번 원정에서도 이광리는 사막에서의 긴 행군으로 인해 군사의 절반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광리는 건재한 상태의 3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의 성벽에 도달할 수 있었고 공방전을 준비한다. 그리스인들이 한나라의 초반 공세를 40일간 막아낼 수 있었지만 한군은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4. 이후
성벽이 무너졌을 때, 대원의 고위층들은 한군에 의해 짓밟힐 것을 두려워하여 대원 왕의 목을 베어 이광리에게 바치며 항복해왔다고 전한다. 또한 대원의 그리스인들은 하는 수 없이 자신들의 군마를 한군이 원하는 대로 제공했다. 한편으로 그리스인들의 도시에 한제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해 이광리는 대원에 친한파 왕을 배치시켰다. 이로서 천리마 전쟁(한혈마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토하라인의 도시 국가들은 대완에서의 한군의 승리에 경악하였고, 한군이 회군하며 들린 도시들마다 한나라에 복종하겠다는 뜻을 알렸다고 한다. 항복한 도시들에는 한군이 배치되었고, 이로 인해 타림 분지 지역이 결국 한제국의 '''서역도호부'''로 통합하게 되었다. 이광리는 한 조정에 승전보를 알리고 페르가나에서 가져온 3,000필의 한혈마를 한 무제에게 바쳤다.
박트리아와 페르가나 지방의 그리스인들은 불교로 개종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철학과 문화를 전파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그리스의 정교한 문화가 불교에 흡수되어 최초의 '불상'이라는 결과물을 생성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나타나기 전의 불교는 보리수를 통해 불교 문화를 상징했었다. 이것이 중국 대승불교에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5. 참고
https://en.wikipedia.org/wiki/War_of_the_Heavenly_Horses
https://zh.wikipedia.org/wiki/%E6%B1%89%E6%94%BB%E5%A4%A7%E5%AE%9B%E4%B9%8B%E6%88%98
[1] 그 중 가장 동쪽에 있던 도시로 오늘날의 페르가나에 해당하는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Alexandria Eschate)가 있었다.